익명성
사회 속에서 어떤 행위자의 실명이 드러나지 않는 현상. 익명성이라는 개념은 근대 시민사회 속 개인의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 지역에서 몇 대를 거쳐서 거주하며 마을 안팎의 사람들이 서로를 충분히 알고 사는 전통적 사회에서는 익명성이 존재할 수 없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며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공간이 발생하면서, 이를 보호하기 위해 익명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즉 혈연과 지연으로 맺어진 공동체가 붕괴된 근대 시민사회의 개인화 현상 중 하나이다.
근대사회의 발달과정에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공리주의자였던 영국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공공의 효율을 위해 개인을 은밀히 감시하는 모델인 파놉티콘(panopticon)을 고안해냈다. 원형으로 된 감옥의 가운데 공간에 감시탑을 세우면, 감방에 있는 모든 죄수를 쉽게 감시할 수 있으며, 죄수는 간수가 언제 자신을 볼지 모르기 때문에 감시탑 자체가 무형의 감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는 원리이다. 파놉티콘은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서 모든 시민을 감시하는 빅브라더라는 존재로 상징화되기도 했다.
개인에 대한 이러한 공리적 접근에 대응하여, 프랑스의 정치가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익명성 개념에 주목했다. 근대 시민사회가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개인의 발언에 대한 권력자의 임의적인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익명성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권력자가 언제든 그를 반대하는 사람의 신상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근대 시민사회의 본질적 인권인 사상의 자유가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의 사회학자 구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은 1890년대 후반 프랑스대혁명 때의 군중행동을 관찰하면서 군중심리학을 연구했고, 이를 통해 사회심리학을 발전시켰다. 군중 속 개인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그의 연구는 1950년대 들어 몰개성화 이론으로 발전했다. 몰개성화란, 개인의 특성이 군중 속에 매몰되면서 사회규범에 대한 자의식이 약해진 상태를 말한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갑자기 행동이 무질서해진다는 통념이 그 사례이다. 몰개성화와 익명성이 결합된 경우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이나 가면을 쓰는 사례도 있다. 백인우월주의자인 미국의 KKK단이 백색 복면을 쓰고 집단행동을 하는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사회심리학에 의하면, 집단의 존재 속에서 물리적 익명성이 확보될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감소된다. 이에 따라 책임감이 분산되며 개인의 특성이 사라지는 몰개성화로 이어진다. 이는 결국 정상적 사회규범에 의한 자기통제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는다. 익명성의 이러한 속성은 정보통신사회를 맞아 새로운 현상을 촉발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익명성이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가능성을 확보해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타인의 인격이나 공동체의 이상적 규범에 위해를 끼치는 경우도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통적 윤리와 표현의 자유라는 이 두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익명성은 사이버공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한국에서는 특히 선거의 중립성 확보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실명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2005년 <공직선거법>과 2007년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인터넷실명제가 실시되었다.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명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통신사에 제공된 개인정보가 대량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실명제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증가했고, 결국 이 제도는 2012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공직선거법>에 ‘인터넷 언론사 게시판 대화방 등의 실명 확인’ 조항은 아직 남아 있다. 인터넷 언론사가 선거운동 기간 중 당해 인터넷 홈페이지의 게시판·대화방 등에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반대의 문자·음성·화상 또는 동영상 등의 정보를 게시할 경우에는 관계 법령에 따라 실명을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