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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중국에선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표현한다. 2000년 왕가위 감독은 이 화양연화를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리첸(장만옥)은 라디오에서 흐르는 ‘화양연화’라는 노래를 들으며 차를 마신다. 바로 옆방에 차우(양조위)가 있다. 두 사람은 벽으로 가로막혀있다. 카메라는 연이어 라디오와 리첸을 비추고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지나 차우를 비춘다. 벽은 사랑하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현실의 장애를 상징한다.
카메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 시간 속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잡아낸다. 또 그 시간 속에서 망설이는 그들의 사랑을 애틋한 시선으로 표현해낸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도 이리 지나가고 있음을 영화는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때가 이들의 화양연화다.
얼마 전 벚꽃이 지던 공원을 걸으며 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요즘 나의 삶이 어쩜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물었다. “로또에 당첨될 만큼 좋은 일 있어?” 나는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 ‘아무렴 어떤가. 행복이 별거랴. 별일 없이 소소한 것이 행복이다.’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돌이켜보면 하늘이 보우하사 큰 날벼락은 피했지만, 인생의 매 순간이 갈급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영어 선생 사십 년이 만만치 않았다. ‘수능영어, 수능영어’하면서 얼마나 목이 탔는가. 또 알아주지도 않고 도움도 되지 않는 자식 걱정에 얼마나 가슴을 애태웠는가. 고통과 불면의 점철이었다. 이제 더는 수능영어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애들에게 무엇 하라고 역정 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별일 없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여유 있고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어느 강연에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대가 언제냐는 질문에 나이 60부터 75세까지라고 말했다. 나의 시간대다. 삶이 결코 공정하거나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생각에 따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과거의 상처도 입에서 가볍게 나오면 지난 일에 불과하다.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이제 내 탓으로 조용히 수용할 시간만 남은 것이다.
인생을 살며 겪는 불행을 상처로 인식하면 행복해지기 어렵다. 인생에서 부는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내게!’가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중요한 건 상처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상처의 시간을 잘 다독여 보내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니 양지바른 곳의 꽃은 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늘 속의 꽃은 아직 한창 개화 중이었다. 일찍 피니 일찍 질 뿐, 그저 때가 다를 뿐이다. 악착같이 좋은 점을 발견해내는 그 마음이 ‘화양연화’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마음을 영화 속 주인공, 리첸과 차우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의 순간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고 싶다.
지난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열정 페이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직원 월급 명세서가 SNS에 올라왔다. 야근 수당을 포함해 수습 10만 원, 인턴 30만 원의 급여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수습·인턴 직원에게 턱없이 낮은 임금을 주는 패션계에 관행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고용주는 원하는 일을 하게 해 줬으니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명 ‘열정 페이(熱情 Pay)’라는 옹색한 변명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일 자체가 경험이니 적은 월급 혹은 무급이라도 불만을 품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냉소도 담겨있다.
‘열정 페이’에 대해 알고 나니, 나 자신의 ‘열정 페이’는 없는가 생각이 든다.
직장 생활의 가장 큰 동인은 매월 정해진 날에 지급되는 ‘봉급’이라는 유형의 대가다. 교직에 근무했던 나는 학생을 가르쳐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대가가 큰 힘이 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대가가 없었다면 계속 40년을 달릴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순(耳順)이 되어 오직 하나의 ‘열정 페이’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바로 글쓰기다. 앉으나 서나 잠을 자나 깨나 온통 문장 속으로 달려갔고 나름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가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열정이 타올라 컴퓨터 자판 앞에서 몸서리치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나의 삶과 사유를 담긴 내 글로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글을 써서 카톡방에 올린다. 지인 중 누군가 “공감합니다. 감명받았습니다.”라는 감사의 문구를 보내 줄 때 나의 수고는 전부 보상을 받은 셈이 된다. 열정의 대가는 감동이었고 그 보상은 다시 열정을 불렀다.
어느덧 글쓰기를 시작한 지도 몇 년이 흘렀다. 자주는 아니라도 때론 글을 쓰고 나누는 일들에 감동하였던 초심이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곤 한다.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저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했던 순수의 시절은 가고 눈으로 보이는 실질적인 대가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글쓰기의 무용론이 머리에 하나의 싹이 되어 깐죽거리며 말을 걸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종국적인 목표는 책 출간이다. 나는 이 목표를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이루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목표를 생각하면 마음이 갈급해지고 소인배가 된다. 글쓰기의 수고가 열정 페이로 보상받았다면 책 출간은 열정 페이 플러스 내 호주머니 돈이 투자되기 때문이다. 즉, 쓰는 일은 열정 페이로 감당한다지만 책 출간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자비출판이야 상관없겠지만, 기획 출판으로 출판사가 수용할 거냐는 경계가 나를 경직시켰다. 글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쥐어짜는 글이 되었다. 모든 글은 내 속에서 나온 체화된 것이어야 하다는 말이 멀어지기 시작했고, 다시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한숨만 짓게 했다.
겸손과 과정 그 자체를 즐겼던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공명하는 감동 자체만으로 충만하도록 노력하겠다. 작가 서미현은 ‘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라는 책에서 ‘글을 잘 써서 ‘무엇인가 되어도 좋지만, 꾸준히 써서 ‘더 나은 나’가 되어도 좋다’라고 서술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보수나 대가가 없더라도 열정 하나로 글을 쓰고 책으로 묶겠다.
꾸준함에 대한 매일의 다짐을 열정의 불쏘시개로 지피며, 오늘도 ‘열정 페이’로 글을 쓴다. 그러할 수 있는 이 시간과 상황을 사랑한다. 나에게 푸른 냄새가 여전히 풍기기를 바라며.
어머니의 이야기
수필집을 발간하고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 걸어가는 발자국이 가볍고 어깨가 덩실거렸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이지만 조금은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신문 보시는 것을 낙으로 여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책을 받자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며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셨겠냐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요즘 시력이 떨어져 자신도 글자를 읽을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머니는 여동생이 오면 읽어주라고 하겠다며 다음을 기약하셨다. 나는 수필 중 몇 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꼭 읽으시라 신신당부하고 돌아왔다.
어머니 집을 방문하면 수필집이 소파 위에, 침대 위에 놓여 있다. 처음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들이 직접 쓴 책이라고 자랑하려고 놓여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읽고 있는 흔적이 보였다. 나는 물었다. “어머니! 책 보세요?” 어머니가 자랑하듯 대답했다. “요즘 시력이 조금 돌아와 책을 본다.” 나는 다시 물었다. “이해되세요?” 어머니는 자신을 바보로 아느냐고 대꾸하셨다. “충분히 이해돼야!”
어머니가 나의 독자가 되다니 너무 기뻤다. 이러던 중 우연히 ‘부모님 전기 쓰기’라는 도서관 프로그램을 만났다. 몇 번이나 망설였다. 명색이 수필집을 두 권이나 낸 작가인데 가호가 있지 초보자나 참여하는 글쓰기 프로그램 따위…… 그러다가 무엇인가 머리를 탁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몇 년 안에 돌아가실 어머니의 기록을 조금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오늘도 어머니를 방문한다. 어머니는 매번 아들이 왔다고 물들어 온 김에 배 띄우듯이 이 말 저 말 마구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듣는 척하면서 듣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더불어 질문까지 하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는 일정한 순서 없이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어머니가 긍지로 여기는 학교 시절과 신여성으로서 순천 세무서에 3년 근무하다 아버지를 만난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자랑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지 절대로 약점이 될 만한 이야기는 피하셨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되던 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과정인 4년제 순천여중에 입학한다. 1학년 1학기는 일본어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일본학생과 한국 학생이 섞여 있는데, 한국 학생은 대부분 양조장이나 정미소 등 큰 사업체를 경영하는 부유한 한국인들의 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순천에서 제법 큰 사업체를 경영하셨다.
어머니 위로 오빠가 두 명 있었는데 큰 오빠는 일본 유학을 했고 작은 오빠는 정규 학교 시험에 떨어져 직업훈련소에 해당하는 ‘고토가’라는 곳을 다녔다. 작은 오빠는 여학교에 다니는 어머니를 질투하여 여자들 공부해서 뭐하냐고 짜증을 많이 부렸다.
어머니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가정 형편상 중학교 3년으로 학교를 마쳐야 했다. 외할아버지가 외지에서 트럭으로 물건을 가져오다 전복하는 바람에 크게 다쳐 집안 형편이 엉망이 되었다.
어머니는 여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해방 후 세상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진 이야길 자주 하셨다. 학교도 양분되었다고 한다. 여학교 3학년 때니까 아마 1947년 무렵 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친구들 10명 정도가 월북했다고 한다. 또 일부 선생님도 월북하셨는데 그들 역시도 가장 뛰어난 선생님들이었다고 하셨다.
해방되어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돌아왔는데 큰 오빠가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 모두 걱정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쯤에 오빠가 돌아와 가족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게 돌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구구한 설명을 했지만, 어머니가 추측하건대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 어떤 활동을 하느라고 늦게 도착했다고 하셨고 조금 남다르게 특별했다고 하셨다.
큰오빠는 여순 때 순천지역 철도 사무소 최고 간부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었다. 외할머니는 조석으로 큰 나무 밑에 물을 떠놓고 아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순천에서 서울까지 외할머니는 애태우며 면회를 다녔다.
나중에 6.25가 일어나자 큰 오빠는 군복에 별을 단 높은 지위를 가진 조선 인민군이 되었고 결국 월북했다. 어느 날 함께 월북하던 군 동료가 오빠의 소식을 알렸다. 북으로 피신하다 어느 산 절벽에서 기력이 떨어져 땀을 흘리며 죽었다고.
어머니는 일본 유학길을 떠날 때 망토를 입은 오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미숫가루, 조청 등 각종 먹거리를 가득 챙겨 보따리를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에게 너무 자상했던 큰 오빠를 늘 그리워했다.
소설 같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이 없으나 더 진척은 되지 않고 그 자리를 뱅뱅 맴돌았다. 아쉽지만 구순 넘긴 어머니가 이 정도라도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이야기를 토로하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어머니는 항시 스님이 염주 알 굴리듯 손에 묵주를 가지고 사신다. 그 묵주 매듭 하나하나에 당신의 이야기를 담아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과 대화하신다. 그 대화를 엿듣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나를 포함한 당신 자녀들의 안위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는 굳건한 자긍심을 갖게 되고 훗날, 성공에 필요한 힘을 얻는다는 말이 새삼 수긍이 가고 가슴에 와 닿는다.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다시 또 어머니를 만나면 당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겠다. 올해도 내년도 끝이 없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원할 뿐이다.
하느님의 대본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간지도 벌써 삼 년이 흘렀다. 기일 날 제사상 위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을 우둑하게 한참 바라본다. 그리움은 이러저러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버지를 마주하고 생전에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편지를 마음에 써 본다.
아버지를 이 지상에서 다시 만나 뵐 수 없다는 것이 도저히 수긍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오실 것 같습니다. 방문하면 집 문간방에 앉아서 반가이 맞아 주실 것만 같습니다. 점심 사겠다, 용돈 주신다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뇌리에 쟁쟁합니다.
우리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합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사는 동안에는 서로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아니하고 그리 바쁜 일도 없으면서 사랑도, 슬픔도, 기쁨도, 마음도 듬성듬성 나누는데,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면 이렇게 애가 타고 아쉬운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있음이 눈먼 장님의 세계입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살아있을 때의 기쁨이고 행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푸념해 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연극 무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그 연극의 각본은 누가 씁니까.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한 창조력을 갖고 있어 모래알처럼 많은 이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 각각 그 인생에 합당한 희곡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인생 무대에 태어나는 한 그 누구나 하느님의 배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흙으로 하나의 인간을 만들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영혼을 불어넣는 순간부터……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세계는 하느님의 대본을 따라 연기하며 살아가는 무대입니다. 막이 열리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며 막이 내리면 우리의 연기도 끝이 납니다. 하느님의 대본은 단 하나의 대사도 중복되는 일 없이 독창적입니다. 단, 나오는 주인공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무대에 하나의 새로운 배우가 태어나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변의 고정 배역입니다.
수많은 배우가 하느님이 쓰시는 대본에 항상 나타나서 불변의 배역을 맡으면서 죽어갔습니다. 당신도 이 역을 맡기 위하여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이 무대에 내려오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형제를 키우고 이 세상에서 그 지지리도 드센 고생과 싸우면서 하느님의 대본대로 충실히 연기하셨습니다. 막이 내리면 분장을 지우고 본래의 자신이 되어 돌아가는 무대 뒤의 배우처럼 당신은 아버지 역할의 분장과 육신의 무대 의상을 벗으시고 훌쩍 어디로 가셨습니다.
지상의 배우로 존재하셨던 아버지의 의상은 용수동 천주교 묘지에 묻혔습니다. 하나의 연극이 끝나면 손뼉을 치고 뿔뿔이 제 갈 길로 가버리는 관객들처럼 모두 뿔뿔이 헤어져 갔습니다. 조명은 내리고 객석은 어둠뿐입니다. 아버지의 연극이 끝났으므로 이제 극장은 텅 비고 다시는 막이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는 아버지의 공연 일자를 기념하여 알리는 묘비명 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묘비명에는 당신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 자식들도 아버지처럼 부모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운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다. 절실한 슬픔도 밀려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이별하였다는 생각보다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있고, 언젠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함은 하느님의 대본을 조금이라도 이해했기 때문이랄까요. 아버지 편히 영면하소서!
글쓰기를 생각하며
퇴직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직장 다닐 때는 집이 휴식의 공간이었다. 이제 갈 데 없어 집에 갇힌 기분이다. 집에만 있으니 우울증 걸릴 것 같다고 푸념하던 선배들의 말이 떠오른다.
어느 전직 교수가 운명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퇴직했을 때 이 나이에 뭘 하겠느냐고 미리 포기하지 마라. 퇴직하고 바로 뭐든 시작하면 현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배우느라 재미있고 한 10년 하다 보면 전문가 되어 사회적 지위도 얻는다. 전직(前職)은 아무 소용없다. 현직으로 즐길 직업을 만들어라.”라고 했다.
난 주변에서 “넌 글 쓰니 지루하지 않겠다”라는 부러움의 눈총을 받는다. 그때마다 “날마다 글만 쓰냐?”라고 대꾸한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생각하면 가벼운 미소가 입가에 감돈다. 퇴직하기 전부터 돈 안 생기는 또 하나의 연금으로 생각해 왔다.
글쓰기에 한 오 년 매진하다 보니 반풍수는 되는지 팔자에 없는 작가 소리도 듣는다. 평생 현직이라고 우쭐거리며 즐기면서 열심히 쓰겠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어렵고 힘들다.
오늘도 글을 쓴다. 이런 얘기를 써도 될까, 어느 정도 깊이 쓸까, 고민한다. 사소한 것이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까, 하는 생각. 평가가 두렵다는 생각. 온종일 쓰고 지우기를 되풀이한다.
다른 글쓰기의 방해물은 ‘내 안의 부끄러움’이다. 특히 에세이를 쓸 때 그렇다. 에세이의 매력은 진솔한 나 자신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작가의 진솔한 고백이다. 에세이의 감동은 바로 온갖 가면을 벗고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시작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에세이의 특징은 바로 작가를 직접 눈앞에서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끼게 해야 한다. 사소한 이야기조차 사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글쓰기의 힘이다.
이런 글쓰기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나름 ‘집필 원칙’을 만든다.
첫째,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이해하기 쉽게 쓴다.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나의 삶이 단순하고 어렵지 않아야 한다. 둘째, 자긍(自矜)을 지키고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쓴다. 셋째, 매일 5시간 이상 쓰고 매년 한 권의 결과물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려면 지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하다.
글을 쓴다는 건 하루하루 삶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이다. 어쩌면 운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글을 쓰지 않거나 독서 등 글을 쓰기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면 나를 잃은 것 같아 불안하다일관되게 나를 잡아 주고 글쓰기 동력이 될 수 있는 나만의 의식(ritual)이나 습관도 만들고 싶다.
나의 글쓰기 의식은 시작하기 전 10분 이상 묵상하며 스스로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언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이냐?” “왜 너는 글을 쓰는 것이며, 글을 통한 목표는 무엇이냐?” “60대 중반인데 5년 후 삶의 목표는 무엇이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렇다.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어떻게 글로 잘 증언할 것이냐?”
글쓰기는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다. 하지만 결국 빛을 발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단히 노력하고 준비하고 있을 거다. 그런 사람만이 세상에 좋은 글을 선사할 수 있다. 중요한건 자기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쓰는 것이다. 그리운 작가 최인호의 말이다. “나는 작가입니다. 작가로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원고를 쓰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최고의 절망감은 글을 쓰고 싶을 테 글을 쓸 수 없는 겁니다.”
추사 김정희는 ‘좋은 글을 읽으면 기운이 솟고 문자에 향기가 난다’라고 했다. 로마의 키케로는 ‘책은 청년에게 음식이 되고, 노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부자일 때는 지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안이 된다’라고 갈파했다. 그렇다. 누가 봐주든 안 봐주든 글쟁이는 계속 자기 머릿속에 뱉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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