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당시의 용팔이 (사진 2) 조폭 세계를 나와 '집사'로 변신한 김용남.
용팔이 김용남 "칭기즈칸보다 1억배 행복합니다"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감동 받아서 올립니다. 즐감하세요.^^
세상에서는 그를 ‘용팔이’라고 불렀음. 1950년생으로 내년이면 환갑. 현재 직업은 간판 제작.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조직폭력계에 입문. 한때 상대 조폭 11명과 싸워 반죽음을 만들 정도였음. 1987년 권력을 좇는 정치꾼들의 꾐에 빠져 조직원을 이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통일민주당 전당대회를 각목과 주먹으로 쑥대밭으로 만듬. 이로 인해 구속, 2년 여 수감. 2002년 불쑥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더니 2009년 현재 ‘집사’. 처음 교회에 다닐 무렵 세상 눈길은 두 가지 - ‘정말 대단하다’ 혹은 ‘조폭이 쑈하고 자빠졌네.’
▲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 당시의 '용팔이' 김용남. 용팔이 '김용남'씨가 최근 책을 냈다. 제목은 '나는 매일 눈물로 성경을 쓴다'. 단순히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내의 간증집이라면 큰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다. 하지만 김용남이 누구인가. 김두한, 시라소니에서 이정재, 유지광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조폭 계보의 한 줄기였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살아온 인생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내용의 증언을 담고 있기에 책이 주는 감동이 작지 않다.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온 한 사내의 인생이 담긴 책을 그의 육성으로 정리해 싣는다.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후 출소해보니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놓고 감옥에 들어간 지 2년 6개월 만에 출소해 만난 사람이 시라소니 형님이었다. 목사가 된 형님이 말했다. “용팔아, 넌 절대 복수해선 안 된다. 내가 널 진작 만났더라면….” 그로부터 10년 뒤 후배에게 배신당해 누명을 쓰고 다시 감옥에 갔다 왔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돈을 내려는데, 누가 벌써 돈을 냈단다. 알고 보니 내 사무실 옆에 작곡실이 있는 유명한 작곡가 조운파 선생이셨다. 이유를 물으니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독하게 돈에 쪼들리던 나에게 나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짜고짜 100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은 면박을 주시지 않고 “100만원은 어떻게 해볼 터이니, 대신 나하고 교회에 가보지 않겠는가”고 제의했다. 나는 그 100만원을 얻기 위해 2002년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작전이지 않았나 싶다. 그때 조운파 선생을 안 만났으면 십중팔구 조폭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 조폭 세계를 나와 '집사'로 변신한 김용남. 기도했다 "돈 좀 주세요 제발!" 하루 20시간 기도한 날도 많았다. "하나님, 돈 좀 주세요. 하나님이 돈을 주시지 않아서 제가 다시 폭력 세계로 돌아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저 지금이라도 마음 먹으면 하루에 수천만원 융통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시지 말고 제발 오늘 돈 좀 주세요." 그렇게 1년, 2년, 3년. 돈이 생기기는커녕 점점 힘들어졌다. 기도도 중동이 되는지, 아니, 지금까지 기도한 것이 아까워서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목사님을 찾아가니 이렇게 말했다. "의무적으로 매일 성경을 읽으시라. 한번 읽고 오시면 상을 드리겠다." 상이 제법 비싼 것이라고 예단하고 성경을 읽기로 했다. 아니,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목이 쉬면 볼펜으로 글자를 찍으면서 속으로 읽다가 목이 풀리면 다시 큰 소리로 읽었다. 보름 만에 일독했다. 내 생애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상을 받으러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은 당황하면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CD 한 장을 내밀었다. '아주 특별한 선물'. 교회 안내 정보가 실린 CD였다. 나에게는 단돈 1원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조폭 출신이라 무시하는가 보다.' 안 읽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차라리 써서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성경 베끼다가 맞춤법 배웠다 체육특기생으로 전문대까지 다녔지만 맞춤법을 잘 몰랐다. '밝은세상'을 '발근세상', '밭'을 '밧'으로 표기할 수준이었다. 이 악물고 썼더니 진물이 나고 뼈가 부러질 듯 아파왔다. 그렇게 해서 1년4개월 만에 성경을 한 번 다 썼다. 교회에 가서 자랑스럽게 내밀었더니 교회 전시관이 생기면 전시하고 싶다면서 기증할 수 있냐고 물었다. 얼씨구나 하고 교회에 바쳤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 후 다시 셩경을 쓰고 있다. 매일 최소한 4~5시간씩 쓴다. 그 동안에 한글 맞춤법 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이염, 시력, 겁 없는 무모함이 다 나았다. 나는 참 무모했다. 고등학생 시절 나이트클럽 영업부장 할 때 현역 군인인 권투 동양챔피언을 눕혔다가 부대에 끌려가 죽도록 맞기도 했고, 몽둥이 들고 덤비는 깡패 11명과 맞장 떠서 반쯤 죽여놓기도 했다. 가난하고 무식했던 어린시절 내 고향이 전남 순천인데,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잘 하는 줄 아셨다. 구구단도 모르는 내가 중학교 시험을 보러 갈 때 이랬다. "시험 볼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요게 답일까? 물어보고 아니라 하면 다른 것 보고 혹시 니가 답이 아니냐 물어보거라. 그러면 답이 그래, 내가 답이다! 하고 말해줄 거다. 우리 용남이 반드시 큰 인물이 될거다. 이 아비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내가 큰 인물이 된다고 믿는 아버지가 불쌍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기적적으로 시험에 붙자 아버지는 큰 인물 되라고 서울로 나를 보냈다. 영등포에 있는 고등공민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친구들과 고물상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순찰에 걸렸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형사 잠바에서 돈을 훔쳤다는 거다. 세명 중에 공무원 아들은 석방되고 내가 주도자로 몰렸다. 담임선생님이 울면서 누나처럼 말했다. "내 말 잘 듣거라. 네가 돈 훔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단다. 난 용남이가 짓굳기는 해도 믿었단다. 그러나 처벌은 피할 수 없다는구나." 나는 선생님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달려왔다. 퇴학 후 일주일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수은 중독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가마니로 둘둘 말아 배추 트럭을 빌려와 싣고 순천 삼삼산 공동묘지에 모셨다. 역도 선수 되려다가 조폭 세계로 다시 서울로 올라와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려고 체육관에 갔다. 그런데 거기 역도 사범이 역도를 권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면 돈과 명예를 누린다. 미스코리아 같은 여자를 마누라로 얻을 수도 있다." 운동은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전국체전 나가서 3연속 금메달을 땄다. 그런데 체육관 들락거리던 건달들 꾐으로 나이트클럽 기도를 보면서 조폭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니 어느날 신민당 국회의원 서너 명이 찾아왔다. 성공하면 막대한 보수를 줄 것이고 시국이 잠잠해지면 기회를 봐서 국회의원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이미 중앙정보부와 얘기가 돼 있으니 걱정 말라고도 했다. 나는 분수도 모르면서 제2의 김두한이 될 것이라 착각했다. 국회의원 시켜준다더니, 입 싹 닦는 정치인들 그 약속을 철썩같이 믿은 나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형제들을 불러모았다. 1987년 4월 20일 먼저 인천 중남구 지구당사를 공격했다. 모두 우리들 몽둥이 찜질에 줄행랑을 놓았다. 경찰은 그런 행패를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후 이천을 공격했고 구미를 공격했다. 어디에서는 기세 좋게 우리를 나무라던 국회의원이 우리가 바싹 접근하자 "나 살려!"하고 도망쳤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이 등을 보이고 도망가?" 며칠 뒤 슬슬 겁이 나서 정치인에게 연락했더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일절 받지 않았다. 친형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손을 잡았다. "니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안다." 어머니가 준 돈 500만원을 들고 숨어 지내다가 동수원호텔 커피숍에서 친하던 형사와 마주쳤다. "그동안 고생했어!" 그리고 나는 감옥행이었다. 깡패 전도는 깡패가 해야 효율적? 그러다 이러저러하게 교회를 알게 되고 지금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다니는 동안, 함께 깡패 생활을 했던 선후배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목사가 되고 집사가 되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하나님이 우리 같은 쓰레기 인간들을 부르실까. 아니, 얼마나 사회에 실망을 했으면 우리 같은 깡패들에게 일을 맡기려 하는 걸까. 정말 소름 돋도록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지금도 깡패 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들과 연락이 닿으면 설득을 한다. 독사에 물리면 그 독사의 독으로 만든 해독제로 치료하듯, 깡패를 구원하는 데는 전직 깡패를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발을 씻어주며 교회에서 '아내의 발 씻겨주기' 숙제를 냈다. 나는 작고 예쁜 아내의 발을 씻어줬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 여인이 저로 인해 입은 상처와 고통마저 씻어주게 하옵소서.' 아내의 발에는 나로 인해 겪은 고초가 짙게 배여 있었다. 그 작은 발이 나의 가슴을 파 헤집는다. 아내는 이미 나의 약점을 다 파악했다. 하나님 무서워 두 번 다시 자신에게 함부로 못한다는 것을. 잠을 자는데 발로 나를 툭툭 친다. "여보, 다리가 저리는데 안마 좀 해줘." 나는 벌떡 일어나 다리를 주물러주고, 팔도 주물러주고 엎드리라 해놓고 등을 두드려준다. 손쉽게 버는 돈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지 7년쯤 되지만 돈을 달라고 해서 응답 받은 경우는 없다. 돈이 가장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신 가족은 그만큼 소중한 것인데 이제야 나는 그 진리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이런 내 얘기를 들으면 상대방이 멍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깡패가 그런 얘기를 할 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 공부가 하고 싶어 미치겠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돈 한 푼 벌기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서 폭력으로 손쉽게 돈을 버는 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이런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하다.
▲ 주차 정리중인 김용남. "저게 다 쇼야!" 주일에 주차봉사를 하던 시간이었다. 건널목에 차가 서길래, 사람 다니는 길이라고 했더니 마구 욕을 퍼붓는 것이다. 깃발로 주행을 멈추게 했더니 경멸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뭐야?" 내가 누군지나 알고 그렇게 까부는지 모르겠다. 하긴 예수 믿고 험악한 인상이 양의 얼굴로 바뀌었으니, 사실 내가 욕먹는 것도 예수님 책임이다. 지금도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으면 옛 습관대로 대번에 반박한다. 정말로 이 점을 고치고 싶다. 또 언어도 고쳐야 한다. 화가 나면 성질대로 튀어나오는 말을 아직도 잘 컨트롤하지 못한다. "깡패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별짓 다한다. 기독교인 가면을 쓰고 뒤로는 폭력배 노릇을 계속하다가 경찰에 잡혀 들어간 누구누구를 보라고. 저게 다 쇼야. 저 사람 지금 교회를 이용하는 거라고." 나는 이런 비아냥거림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칭기즈칸보다 1억배 행복한 김용남 이 세상을 통치한 히틀러, 스탈린, 칭기즈칸보다 최소한 1억배 이상 축복받은 인간이다. 왜? 가정이 회복됐고 아이들과 대화가 시작됐다. 내 마음이 온건하게 변했다. 45년간 괴롭히던 중이염이 나았고 술 담배를 끊었다. 입에서 욕이 나오지 않는다. 건강하다. 그리고 원수를 용서한다. 나를 유혹했던 정치인, 나를 급습했던 모 조직 깡패들, 내 돈 사기쳐먹고 도망간 녀석들, 나의 불법행위를 검찰에 고발해 잡혀가게 한 녀석…. 전혀 밉지가 않다. 오늘의 나를 만든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렇게 언뜻 생각나는 이유만 28가지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 중의 죄인을 부른 이유는 상황이 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용팔이 김용남의 자서전은 여기에서 끝난다. 지극히 종교적인 내용에 거부감을 가질 사람도 있겠지만, 한 때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뒤흔들었던 검은 인물이 선한 캐릭터로 변하는 과정은 종교와 상관없이 감동적이다. 책 말미에 "무시무시하고 무능력한 남편과 아빠"와 처량하게 살다가 화목한 가정으로 변하기까지의 과정을 김용남의 부인과 아들 딸이 따로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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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침부터 은혜 받고 하루가 오늘은 감사로 넘칠것 같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모든것을 끊기가 쉽지 않았을터인데 말이죠. 앞으로는 행복한 삶의 연속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