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참뜻 / 정각스님
- 불교적 신앙관 -
I. 신앙(信仰)이란 무엇인가?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 '믿고[信] 숭앙[仰]하는 것'
내지 '숭앙하는 바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앙의 대상은 무엇인가?
곧 무엇을 믿고 숭앙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말이다.
시간 및 공간에 예속된 인간(人間)이,
즉 죽음이란 사건 속에 한계 지어진 유한자(有限者)로서의
인간이 무한(無限)한 절대자에 귀의하고
그의 은총(恩寵)을 갈구하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 대상은 하늘 저편의 무지개 건너
존재하는 신(神)에게서 찾아져야 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무한성의 틈새를 엿본 인간은 유한한 현실 가운데
'죽음에 이르는 병' 내지 '실존적 절망'을 느껴야 한다는 것인가?
II.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
물론 과거의 일반론적 관념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체념을 거듭해 왔다.
실존적 '부조리(不條理)' 속에서나마 무한에 도전하는 유한적 인간,
시지프스(Sisyphos)에게 연민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순간 속에서나마 깨닫지 못하였다.
신(神)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구원 - 구원이란 말보다는 '자유롭게 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지만 -의 열쇠는 이미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임을‥‥
'내 손안에 구원[자유]의 열쇠가 쥐어져 있다'는 말은
흡사 중세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靈知主義)의 부활을
예견하는 듯, 한 발상일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리를 우리는 중세 수도원의
이념적 반란 속에서가 아닌, 현실적 종교 유형의 하나인
불교사상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즉 "진리(眞理)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참된 의미를 우리는 자유의 사상인 불교(佛敎)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III. 불교는 신(神)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적으로 말한다면 불교는
절대자, 즉 신(神)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를 '유신론(有神論)에 대한
무신론(無神論)'이라 말할 수 있는데,
좀 더 엄밀하게 표현한다면 '불교는 인간론(人間論) 내지
생명론(生命論), 즉 불성론(佛性論)'이라 이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신앙은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 인도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간 고타마 싯타르타(Gautama Siddhartha)에 대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붇다(Buddha)라 불리우기도 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말하는가?
아니다. 불교의 신앙 대상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회고 가운데 머물지 않으며,
차라리 그에 대한 회상 자체를 위험시 여기게 된다.
우리는 그 인물의 그림자를 쫓지 않아야 하며
그 인물이 가리킨 손가락의 끝, 저편에 놓인 진리의 세계에
눈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IV. 우주적 진리, 즉 불교의 신앙 대상
불교의 신앙 대상, 즉 불교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믿고
우러러야 할 것은 무형(無形)의 실체로서,
일체 세계 가운데 이미 내재해 있는 '우주적 진리'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인물 고타마 싯타르타께서는 열반에 이르를 즈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계시는 것이다.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는 것이다"라고.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진리(眞理)에 대한 참다운 인식.
그러므로 신앙(信仰)이란 맹목적 추종만이 아닌
그에 대한 앎이 따라야 할 것이며,
자신의 믿음 및 믿음 항목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이해는
신앙 자체의 성숙 및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정립해 가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불교에서는 신앙의 기본자세를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증득함[得]'이라 하여
[믿음[信]]에 바탕을 둔 [앎[解]]과, 자신이 알게 된 바에 대한
[실천[行]]을 통해 [진리의 참다운 깨달음을 얻어 가지게 됨[證得]]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V.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디딤돌
이제 이미 믿음에 바탕을 둔 우리 불제자(佛弟子)들은
신앙 자체에 대한, 그리고 각각 신앙 항목에 대한
이해[解]를 마련해 가져야 할 것인 바,
그럼에도 조차 그것이 허망한 이론으로서 남는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에로 나아가는 데 디딤돌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진리의 세계에로 나아가는 디딤돌.
이미 그곳 세계에 발을 딛었던 이들의 안내에 따라
우리가 길을 간다면 우리는 막막한 대지에 길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선현(先賢)들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 속에
우리는 진리의 궁극에 이르렀던 고타마 싯타르타 및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과 언어를 만나볼 수 있어
그것을 경전(經典)이라 부른다.
간혹 경전의 부분들 가운데 유신론적(有神論的) 필치의
몇몇 항목이 쓰여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가운데서나마 불교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비록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할지라도
내면의 자유 추구라는
불교의 기본정신은 퇴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 이 글은 1994년 8월 [법주회보]에 실린 글이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