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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예수님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그 누구보다 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남편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무조건' 가사처럼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이 아무리 특급 사랑이라고 자랑해도, 태평양을 건너고 대서양도 건너고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달려간다 해도 예수님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건너온 사랑이 아니라 우주를 건너온,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내려온 사랑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1.오늘 주님은 말씀합니다. 9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과 비교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 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아들을 많이 사랑하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쉽게 내어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그를 기뻐하노라"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만물도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였고 아들을 상속자로 세우시고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심판하는 권세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요5:22). 사실상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창조부터 종말까지가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해서 마치 우리를 아들보다 더 사랑하고 아들을 덜 사랑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과 같듯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도 아들은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아들의 가치는 내가 가진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입니다. 혹시 친구들이 아들을 왕따시키고 손가락질하면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야, 이놈들아, 그래도 내한테는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독생자입니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고 해서 그냥 말 안 듣는 아들 손 좀 봐달라고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열 가지 중에 하나를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그 한 가지가 없으면 열 가지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심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아들만큼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기를 세상에 내어주셨다고 해서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아버지를 가볍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게 하도록 기도를 가르쳐주셨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순종의 모습도 보여주셨고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는 존중과 신뢰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분량과 크기는 바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내어주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 위해 목숨도 내어주신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그것도 의인인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 된 친구를 위해서 말입니다. 죄 값을 대신 지불하려고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희생을 통해 사랑을 나타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 사랑의 분량이고 크기입니다. 인간이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가 있지만 아들을 주신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사도요한은 이 은혜를 특별히 일컬어서 은혜위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4,16) 하나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도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이것은 일반은혜입니다. 그러나 품속에 있는 아들을 내어주셔서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위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 은혜를 일컬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엡2:8). 아들을 주신 것은,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아주 특별한 선물,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누가 주신 선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똑같은 선물이라도 누가 주느냐에 따라 가치가 다릅니다. 똑같은 시계라도 군수가 주는 것과 대통령이 주는 것 중 둘 중에 하나를 받으라면 어느 것을 받겠습니까. 같은 것이라도 누가 주느냐에 따라 가치가 다릅니다. 그리고 선물은 거래가 아닙니다. 거래는 서로 필요한 조건을 가지고 이뤄지지만 선물은 아무 조건도, 대가도 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2.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내 사랑 안에 들어와 머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무엇보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므로 기쁜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노라 '라는 시구처럼(유치환 행복)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사랑으로 인하여 기뻐합니다. 사랑은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면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습3:16이하에 하나님도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이처럼 기쁩니다. 부모와 자식도 서로 사랑하기에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면 기쁨이 내 안에 밀려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것은 단언컨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설렘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행복이 있듯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므로 기쁨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퇴근 길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하세요?' '집에 가서 강아지 볼 것 생각하니 너무 기뻐요.' 이런 사람은 집에 불이 나도 늙은 어머니보다 강아지만 데리고 나올지 모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성도님들이 하도 기도하러 안 와서 교회에 예쁜 고양이를 한 마리 사두었답니다. 그러자 성도님들이 지나가면서도 들리고 고양이한테 맛있는 것도 주고 가더랍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교회 하나님 보러 오세요, 야옹이 보러 오세요. 나도 점심 안 먹었는데 고양이 먹을 것만 가지고 오세요?' 예수님을 더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교회 나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도 힘들어 죽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생을 해도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기도시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더 기도하고 싶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면 5분도 힘들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이, 기도생활이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져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서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주님께 나오는 것이 부담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있으면 헤어지기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사랑의 기쁨이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3.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은 주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계명이라고 하니 부담스럽게 들리겠지만 억지나 강압적인 것이 아닙니다. 전선을 꽂으면 전기가 들어와 불을 켜고, 불을 켜면 빛을 내고, 빛이 나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들어와 흘러가게 되어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전달되는, 내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새 계명입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새 계명대로 사랑하는 자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사미인곡’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번 사천시 열린 음악회 때 마지막에 부른 곡이었습니다. 서문탁 가수가 부른 노래인데 그 가사 시작이 이렇습니다. “만백성에게 고하노니 서로 사랑하며 살찌니라 대체 무슨 일을 하관대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니까 대중가요에도 이런 가사를 만들었나 싶었습니다.
우리가 사도요한을 사랑의 사도라 합니다. 그가 쓴 복음서나, 서신에서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글로써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한 진정한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랑을 예수님도 인정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어머니를 누구에게 부탁했습니까?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이제부터는 네 어머니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요일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요일4:11,12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는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듯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가, 입니다.
미국에 세계적인 건축 설계회사인 ‘팀하스’의 회장이 하형록이라는 한국인입니다. 잘 나가던 젊은 시절에 심실 빈맥이라는 병이 찾아왔습니다. 오직 살 길은 심장 이식뿐이었습니다. 5개월을 입원하여 심장 이식해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자신의 교만했던 모습들을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심장 이식해줄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같은 병으로 입원해있던 옆방 환자가 떠올랐습니다. 저 분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의사는 이틀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자신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달 정도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회장님의 마음에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한 사랑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를 살리려면 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회장님은 의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분에게 먼저 수술해주십시오.” 그리고 일주일 뒤 회장님은 혼수상태에 빠진 채 버텼는데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심장이식을 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회사의 사훈을 “우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로 정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받은 사랑을 서로에게 나눠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새계명입니다. 이 계명에 순종함으로 더 큰 사랑의 기쁨과 행복이 넘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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