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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우리는 1장뿐이 되지 않는 빌레몬서 첫 번째 사랑의 진수가 담긴 말씀을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한 장속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사랑을 받아 빚진 자가 되어 누구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향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사랑은 누구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했습니다. 이 사랑을 사도바울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 사랑의 빚진 자로 누구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전도자로 살아갑니다. 전도자 바울은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중에 빌레몬을 만나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은 1장 1절.... 빌레몬를 향해 우리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신이 과거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며 살다가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 예수님사랑을 입은 자이기에 누구보다도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 9절이 두 번째 말씀에 핵심입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리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빌레몬을 부르며 편지를 쓰는데 “사랑으로써 간구한다고 했어요”.. 그만큼 바울은 칭찬할 때도 기도요 사랑 할 때도 기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이 기도 속에 칭찬하고 누구든 사랑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레몬을 향해 기도할 때 누구를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10절입니다...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기 등장한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갇힌 자” 란 오네시모가 감옥에 들어온 거예요 바울을 감옥에서 만 난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중에 어느지역에서 오네시모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난 거예요
그런데요 바울과 오네시모가 감옥에 들어온 죄목은 너무나 차이가 있어요 바울은 예수를 전한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왔지만 오네시모는 세상에서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온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오네시모는 종으로 원래 그의 성전이 빌레몬이었습니다. 상전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억매였던 매임에서 자유하고 싶어 화려한 도시 로마까지 도망 간 것입니다. 그래서 화려한 세상인 로마에서 훔친 돈으로 물 쓰듯 쓰고 탕진합니다. 마치 탕자인 둘째 아들 같은 삶을 살다가 가진 것이 떨어지니까 못된 짓을 하다 감옥에 들어 온 겁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바울로 통해 전도를 받고 죄인인 오네시모가 예수 믿고 새사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는 신묘막측하지요 하나님 하시는 일이 어떻게 빌레몬의 종인 오네시모가 멀리 떨어진 로마에서 죄를 짖고 감옥에 들어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나타납니까? 생각하면 우리의 눈높이로는 정말 측량 할 수 없어요~~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로 통해 복음을 받은 오네시모를 보세요 새사람 되어 바울을 얼마나 극진하게 섬겼는지 바울이 오네시모를 너무나 아끼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짧은 한 장의 편지속에 사랑의 간구로 오네시모를 소개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읽은 빌레몬서 8절 후반부 부터 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향기가 너무 찐하게 나타나 있어요
10절......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과 오네시모는 육적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했어요 이 말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육적으로 낳은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로 통해 복음을 받고 목회자로 인정받은 디모데나 디도를 부를 때 바울은 내아들이라고 불렀어요 오네시모를 디모데나 디도처럼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11절에는 그가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함으로 라고 했어요...
빌레몬은 상전으로 종인 오네시모를 믿고, 집안의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주인의 바램과는 달리, 오네시모는 주인의 많은 돈을 훔쳐 도망갔으니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필요 없는 존재에서 쓸만한 존재가 되었다고 바울은 아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무익한 존재입니까? 아니면 유익한 존재입니까?.......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존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잘못된 삶을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그 순간부터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절... 내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심복이란 우리 신체 중에 심장을 뜻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댄다면 하나는 머리, 뇌요 다른 하나는 심장입니다.
하나님은 뇌를 보호하시기 위해 단단한 두개골로 감싸셨습니다. 또 하나 심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갈빗대 아래에 있습니다.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갈빗대로 막아 외부에서 충격이 와도 다치지 않도록 심장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액션영화를 보면 조폭두목이 옆에 폼 잡고 서 있는 부하를 소개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 심복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내 심장과 같은 동지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내 심장’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나의 심장과 같이, 나의 내장과 같이, 나를 충성스럽게 잘 섬기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너에게도 심복이 되어 충성스럽게 잘 섬길 테니 한 번 믿어보라!”는 것입니다.
13절.....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바울은 아들 같은 오네시모를 빌레몬 대신 바울을 섬긴 자’로 표현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가장 힘들고 연약했을 때 옆에서 떠나지 않고 바울을 도와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일하는 동기가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높은 보수와 인정 때문에 바울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어떤 영리 계산적 사고를 가지고 일하는 단체였다면 서로 이해 관계로 이미 공동체는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오직 주님사랑으로 서로 돕고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오네시모도 사도 바울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아, 네가 해야 할 일을 오네시모가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6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이젠 오네시모는 노예가 아닌 자유자이고, 우리의 형제요, 믿음의 사람인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국 17절...... 그를 빌레몬에게 처음 동역자로 부르며 오네시모 또한 ‘나의 동역자’라고 편지합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운명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노예제도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형제 사랑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느냐?...... 예수님이 맏아들이 아니시더냐?” 그렇게 믿음의 형제애로 그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어두운 골방처럼 느껴지는 감옥안이지만 바울과 오네시모 그 중심에 사랑의 예수님이 계셨기에 참된 변화가 일어난것입니다.
김제시 금산리에 ‘ㄱ자 교회’로 알려진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구한말 레위스 테이드 선교사님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그 고장에서 가장 큰 부자인 조덕삼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됐습니다. 이분이 예수를 믿기로 하고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당시 이 집에는 마부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도 주인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교회가 부흥되어 장로를 세워야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인인 조덕삼과 마부인 이자익이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놀랍게도 주인은 떨어지고 마부인 청년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 됐습니다. 이 때 주인 조덕삼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서 교회에서 자기 집 마부를 장로로 깍듯이 받들었습니다. 물론 집에 오면 이자익은 마부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조덕삼은 주일에 선교사님이 오지 못할 때 이자익 청년으로 하여금 설교하게 했고, 자기는 마루에 꿇어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 조덕삼은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서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2대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자익 청년이 신학공부가 끝나자 다시 교회로 청빙하여 목사로 목회하게 했습니다.조덕삼 장로는 최선을 다해 이자익 목사를 뒷바라지 했습니다. 마침내 이자익 목사님은 조선 기독교를 이끄는 총회장이 됐고, 그것도 세 번이나 다시 총회장으로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조덕삼 장로님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의 사랑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총회장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우선 용서의 부탁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 우리에게 죄를 진 사람 그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사회혁명아 아닌 인간의 내면적 혁명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바뀌고 내면이 변화 합니다.
사랑의 십자가 복음인 예수님 사랑이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곳에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계급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니 양반도, 상놈도, 심지어 가장 천대받던 백정들도 교회 공동체에 나왔습니다. 그 분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그가 자유인으로 세상에서 타락한 생활을 했지만 바울로 통해 예수님을 만나 측량 할 수 없는 예수님 사람을 맛보았습니다..... 사람이 변했습니다. 새사람되었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자유없는 감옥입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바울이 가장 어려웠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오네시모는 바울 곁에서 바울을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장과도 같고, 동역자와 친구, 형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신실했으면 두기고와 함께 그를 골로새교회 기둥인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오세시모를 칭찬한 한 절 말씀이 있습니다.
골4: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초대교회사를 보면, 주후 110년경 에베소의 감독 이름이 ‘오네시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오네시모였을 거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종이었고 도망자였고 배신자였던 그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망쳤을 때의 나이가 20대 전후라고 하면, 110년경에는 7∼80세입니다. 그때가 되었을 때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멋진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모가 누린 최고의 축복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요? 바로 바울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줍니까? 바울이 축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원하며,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바울이 닮기 원했던 예수님을 함께 닮아가기를 원하면서 바울에게 신뢰받는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뢰받을 만한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신뢰해도 돼. 그 사람 정말 바르게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의 친구,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님
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