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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사회적 화두, 밥상
2020년 설날,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떡국을 먹고 꿈과 희망을 나누며 서로를 축복해 주어야 하는 그때, 우리는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앞에서 공포와 혼돈, 무력감과 좌절을 경험했다. 떡국에서 뽀얗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듯 웃음꽃이 피어올라야 할 밥상이었지만, 서로를 향해 애써 지어보이는 미소 뒤로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인간의 이동경로가 곧 바이러스의 전파경로가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통행에 제약이 따랐고, 이것이 불러온 경제적 타격은 실업으로 이어졌다.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보육시설과 교육시설은 사실상 문을 닫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전에는 하루에 한두 끼는 일터나 학교, 또는 그 근처에서 해결했지만 이제는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어야 한다. 지인들과 SNS로 대화하다 보면, 다들 오늘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가 큰 고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가정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요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들로 넘쳐난다. 외식이 어쩌다 한 번 있는 행사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 특히 도시인의 삶에서 밥상이 이렇게 큰 화두가 된 적이 있었던가? 이 화두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한 사회의 시민이자 지구별의 일원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얼마나 깊게 사유하고 있는가?
‘아침에는 빵과 우유, 바나나 정도 먹자. 점심에는 밥과 된장국, 생선이랑 밑반찬 몇 가지 놓지. 그래도 저녁엔 삼겹살이라도 구워야겠지? 아니면 매일 집밥 먹기도 지겨운데, 프라이드치킨이나 족발 시켜 먹자.’ 이것은 도시에 사는 중산층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밥상 풍경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을 생각해 웰빙 식단을 짤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음식이 몸에 어떻게 좋은지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와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배송되어 밥상에 오르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밥상 앞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근대 산업문명으로 가는 길목을 거치며 농민에서 도시노동자로,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전락’해, 흙과 유리된 채 땅을 일구고 실을 잣는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의 무지를 마냥 탓할 수는 없다. 땅과 산, 바다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직접 먹거리를 생산했던 인간에게 당연했던 지식이 오늘날 마트에서 상품으로서의 식품을 구매하는 도시인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그러나 먹는 행위를 통해 생명을 지탱하는 한, 우리는 그 근원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밥상의 추악한 진실
오늘 우리가 먹는 쌀은 우리나라 농민들의 눈물이다. 현재 한국의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더미에 오르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농민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희생되었다. 독재정권에서나 민주정권에서나, 보수정권에서나 진보정권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산업화 초기에 도시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농산물 저가 정책을 실행했다. 산업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에도 농업은 우루과이라운드와 한미FTA 같은 국제무역협정에서 다른 산업 분야의 발전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외국 농산물의 범람은 한국 농업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오늘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아프리카 농민들의 눈물이다. 그들은 커피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는 식량을 구할 수 없다. 커피 농장이 농토를 거의 다 차지해버려서 기초식량을 재배할 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치킨은 배달원들의 눈물이다. 코로나19 이후, 택배기사를 비롯한 많은 배달원이 빠른 배송을 강요당하며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오늘 우리의 밥상은 닭과 돼지, 소의 끔찍한 고통이다. 오늘 우리는 풀밭에서 뛰노는 대신 철창에 갇혀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은 소의 젖을 마시고, 풀 대신 닭과 돼지를 갈아 만든 사료를 먹고 자란 소를 먹는다. 인간에게 더 많은 단백질을 빠르게 제공하기 위해 다닥다닥 붙은 철창에 갇혀 호르몬 주사를 맞은 닭이 낳은 알을 먹고,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돼지를 먹는다. 사람들은 고기의 맛을 부위별로 세세히 구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남획되는 물고기의 절반 이상이 가축 사료로 사용되고, 농경지 중 3분의 2 이상이 육류 생산에 쓰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늘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땅이 흘린 피이다. 거대 다국적기업들은 바나나를 대량생산하기 위해 종자를 단일화하고, 숲을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화학비료를 뿌린다. 이러한 플랜테이션 농업은 땅을 황폐화한다. 땅이 망가지면 이 기업들은 땅을 복원하는 대신에 다른 숲을 또 베어버린다. 그 결과 세계 곳곳의 울창한 숲이 사라지고 있으며, 바나나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마주한 밥상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자연에게 자행한 극단적 착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창세기 1장은 말한다.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 1:21,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 존재들을 축복하사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2). 손수 만드신 만물의 존재를 긍정하고, 다양성을 축복하며, 이 세계를 창조한 섭리를 깨달아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생물을 잘 보살피는 영광과 책임을 인간에게 주셨다(창 1:26-28).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알량한 ‘입맛’ 때문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존재들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코로나19, 하늘과 땅의 절규
2020년, 우리는 땅과 하늘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큰 태풍이 한국과 중국, 일본을 잇달아 덮쳤고, 대형 산불이 호주와 미국, 브라질에서 발생해 넓은 땅을 초토화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했다.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강력한 태풍과 산불, 신종 바이러스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에 따르면 이 모든 자연재해는 단 하나, 즉 기후위기를 가리킨다. 코로나19는 앞으로 기후위기가 야기할 전례 없는 생태계 파괴의 예고편에 불과하고, 그 주범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에 갇힌 인간이다. 이 세계의 주요 경제체제, 산업문명에 기초한 자본주의체제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4년 에볼라, 2015년 메르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는 모두 야생동물이 인간에게 옮긴 것으로 분석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는 인간이 야생동물 영역을 침범한 결과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3세기 동안 세계에서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울창한 숲을 밀어버렸다. 삶의 터전을 잃은 동물들이 도시 곳곳에 출몰했다. 희귀성이 곧 가치가 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깊은 숲속에 살던 야생동물들은 반려동물이 아닌 애완동물, 인간의 장난감이 되었다. 그뿐인가? 먹거리도 이윤 창출의 도구가 되는 세상에서 육식에 중독된 인간은 공장식 축산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가축을 사육해왔다. 야생동물과 접촉하는 기회가 이렇게 늘어났는데, 무슨 수로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을까? 소아과 전문의 강병철은 데이비드 콰먼의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를 번역하고 나서 옮긴이의 말에 이렇게 썼다. “인간이 나무를 자르고 토종 동물을 도살할 때면 마치 건물을 철거할 때 먼지가 날리는 것처럼, 병원체가 주변으로 확산된다. 밀려나고 쫓겨난 미생물은 새로운 숙주를 찾든지 멸종해야 한다. 그 앞에 놓인 수십억 인체는 기막힌 유혹이다.”
결국, 기후위기를 일으키는 메커니즘과 바이러스 질병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바로 산림 파괴이다. 지난 6년간 축구경기장 4만 500개에 달하는 넓이의 아마존 숲이 사라졌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지난 100년간 지구 온도를 1℃ 상승시켰다. 1만 년 동안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기온 상승 속도보다 25배 빠르게 온도를 높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뜻을 거스르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사이 땅에서 숲이 사라지더니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바다에서 빙하가 녹았다. 하늘에서는 전례 없는 추위와 더위, 태풍과 가뭄을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땅과 하늘의 고통이 절규로 터져 나온 것이다.
신음하시는 하나님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충직한 제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세계는, 자연은, 생태계는 왜 이렇게 황폐해져만 가는 걸까? 혹시 우리가 초월자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사이 이 세계에 하나님의 숨이 깃들었음을, 이 세계가 곧 하나님의 몸임을 잊은 것은 아닐까? 하나님을 가리키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하고 밥상에 오르는 쌀 한 톨에 담긴 창조의 섭리를 잊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여성을 억압해온 원리와 자연을 유린해온 원리 사이에서 동속성을 발견한 여성신학자들이 생태신학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등과 열등, 정신과 물질을 나누고 전자에 남성을, 후자에 여성을 배치하여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한 원리가 자연에도 적용되어 왔다는 말이다. 과학이 대두되면서 하나님은 세계를 정밀하게 설계한 ‘시계공’으로 환원되었고, 창조 이후 세계 저편에 물러나 계시다가 이따금 인간사에 관여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것에도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않고 절대적 사랑과 정의를 능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왜곡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하나님은 거대한 역사의 장이나 정치의 장에서 만나는 분이 아니라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서 만나는 분이 되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불의한 정치·경제구조가 양산하는 사회악은 보지 못한 채 개인의 내면에서 악을 발견했으며, 개인의 악을 사회악과 연결짓지 못했다.
생태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초월자이며 우주의 몸으로서 내재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나님께서 엄격한 아버지일 뿐 아니라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 ‘루아흐’(ruah)는 태초에 “물 위를 거닐던”(창 1:2) ‘바람’이자 만물을 살리는 ‘숨’이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은 이 숨결에 기대어 살아간다. 성서는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행 17:28)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지만, 우주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하나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 에너지, 곧 하나님의 ‘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세상에 내재하시면서 동시에 세상을 초월하신다. 나아가 샐리 맥페이그와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 Ruether)는 빅뱅이나 진화론과 같은 과학 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해석한다. 우주가 단 하나의 핵이 폭발하는 것으로 생성되고 만물의 유전자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은 이 은하계가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몸’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생태여성신학자들에 따르면 성육신 그리스도론, 로고스 그리스도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요한복음 서막(1:1-18)을 보면 태초에 로고스(logos), 즉 말씀이 계셨는데, 말씀은 하나님의 동역자이자 하나님 자신으로서 세상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이는 요한이 창조를 그리스도와 연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은 대담하게 선포한다. 바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여기서 육신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사르크스(sarx)는 소마(soma, 몸)가 아니라 살덩어리를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면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몸일 뿐 아니라 우주의 몸, 지구의 몸임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우주와 지구가 하나님의 몸임을 망각한 채 오랫동안 이를 유린해왔다. 최근 산불, 태풍, 바이러스로 터져 나온 하늘과 땅의 비명은 인간에 의해 고통받고 피 흘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음이다. 동시에 경고이다. 내재자이자 세계의 몸으로서 하나님은 고통에 울부짖고 계신다. 이 절규는 다른 인간을 포함하여 생태계 전체를 향해 불의를 저질러 온 인간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하늘에서 모두가 들리도록 외치고 계신다. 죄 있는 자, 화 있을진저!
밥상에 깃든 그리스도의 몸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밥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밥상에 올라온 음식들을 보며 하나님의 몸을 떠올리고 그분이 창조한 세계의 신비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 고대인들은 사냥을 하면 짐승을 먹기 전에 반드시 제의를 지냈다고 한다. 살아있는 생명, 인간과 똑같은 신의 영, 즉 숨을 지닌 존재를 죽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트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뎅겅뎅겅 잘려 부위별로 팔리는 각종 고기는 인간에게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빼앗았다. 인간의 죄의식을 없애버렸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 우리를 살리는 뭇 생명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몸임을 자각한다면 다시는 예전의 밥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며 빵을 들어 축복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막 14:22)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이다.”(막 14:24) 가톨릭에서는 성찬식을 거행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했고,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은 단지 예수의 죽음과 뜻을 기리는 기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자각 앞에서 두 주장은 모두 과녁을 빗나간다.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 나누는 빵과 포도주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밥상에 그리스도의 몸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성찬식은 매끼 대하는 밥상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적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비난했다.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 11:19) 그들의 고발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언제나 밥상에서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약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새 시대를 향한 희망과 기쁨을 나누셨음을 증언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 밥상에 인간의 탐욕으로 스러져가는 이 세계의 모든 작고 여린 생명들을 불러들이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밥상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생명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연대하는 자리이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준다. 밥상에서 우리는 가난한 농민과 보금자리를 잃어가는 동식물, 고된 노동에 지친 배달원을 마주한다. 이제는 밥상이 그들의 눈물이 아닌 웃음을 만나는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신성함과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밥을 짓고 먹는 일상적 행위에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여 대량소비와 대량생산으로 지탱되는 자본주의적 산업문명에 균열을 내야 하지 않을까?
한 톨의 쌀에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담겨있듯, 밥상의 전환은 우리 문명의 거대한 전환의 시발점이다. 그 밥심으로 하나님의 몸을 파괴하는 일체의 경제·정치·문화 체제를 바꾸는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 신음하며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만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롬 8:18-23).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 홍순관, 〈쌀 한 톨의 무게〉
■참고문헌
낸시 라이트·도날드 킬, 《생태학적 치유: 기독교적 전망》(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3)
로즈마리 류터, 《가이아와 하느님: 지구 치유를 위한 생태여성신학》(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샐리 맥페이그, 《풍성한 생명: 지구의 위기 앞에서 다시 생각하는 신학과 경제》(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한국교회환경연구소(편),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대한기독교서회, 2006)
황윤, ‘이 별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일보〉(2020년 10월 10일)
장양미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신약신학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으로 〈바울의 자유 개념에 대한 정치신학적 고찰: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를 썼으며, 샐리 맥페이그, 《풍성한 생명》, 《여성들을 위한 성서 주석 상·하》 등을 옮겼다.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다.
첫댓글 하나님을 가리키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하고
밥상에 오르는 쌀 한 톨에 담긴 창조의 섭리를 잊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