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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구덩 원문보기 글쓴이: punuri
재 체험을 통한 죽음에의 이해
-다리굿의 구조와 그 기능
황루시
안개가 자욱한 막막한 강 저편에, 아마도 죽음의 세계가 있으리라는 상상은 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그 강은 깊고 넓으며,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가는 배만 있을 뿐 돌아오는 배는 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구분은 준엄하여 강의 어두운 깊이만큼 절망적이고, 끝이 안 보이는 넓이만큼이나 아득한 것이다. 강은 삶과 죽음을 분리하여 서로를 완전한 타자(他者)로 만든다. 결코 둘은 공존할 수 없고 간섭할 수 없으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강을 건널 방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지극한 인간의 정성으로 신(神)들의 힘을 빌어 강위에 다리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의 다리는 바로 신과 인간이 만나는 굿판에 놓여진다. 너무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 버린 망자(亡者)를 만나기 위해 살아 있는 식구들은 마음을 모아 굿판을 마련한다. 무당을 통해 그 지극함이 저승에 닿아 단 한번만이라도 망인(亡人)이 깊은 강을 건너와 서로 만나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하기 위해 행하는 굿을 평안도 지역에서는 ‘다리굿’ 이라고 부른다.
같은 목적을 지닌 ‘수왕굿’이 작은 규모로 하루 정도면 마치는 데 비해, 다리굿은 적어도 이틀 아니면 사흘 이상 걸리는 큰 규모의 굿이다. 국토가 남북으로 갈린 후 이북지역의 굿은 월남한 몇몇 무당에게 의지하여 존속되어 왔으나, 평안도굿의 경우 무당의 수효가 적고 서울굿과의 습합이 심해서 오늘날 그 원래의 모습을 보기란 어렵게 되었다. 평안도굿이 고향을 떠나 이남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고향사람 당골(당골ㅡ여기서는 방언에 따라 ‘당골’ 로 표기한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아무래도 그 수효는 한정되어 있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유능한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의 굿을 배워서 그곳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고, 이로 인하여 굿은 심히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무가(巫歌), 음악, 춤, 의례의 연출방법 등에서 가능한 고유의 것을 조사하고 지역적 차이를 넓혀가는 것은 무속학(巫俗學)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작업에 속한다. 고유의 형식을 손상하지 않은 정통적인 평안도굿을 보기 위하여 큰만신들을 찾다가, 평양 출신인 이선호(李禪好)가 고향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유능한 신딸들도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침내 다리굿을 조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리굿은 평안도 지역의 무속을 대표하는 가장 큰 규모의 굿이다. 북방민족의 씩씩한 기상이 넘치면서 한면 너그럽고 흥겨운 분위기로 연출되는 이 다리굿은, 나름대로 지역성을 보여주지만, 그보다 죽음을 이해하는 민족의 심성이 소박하게 표현된 종교의례이다. 삶과 죽음을 잇는 다리는 삶과 죽음이 평소에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다른 세계임을 확인시키는 표징이기도 하다. 다리굿을 통해 질적으로 다른 두 존재의 만남을 추구한 우리민족의 심성은 어떤 것일까. 그 의미와 기능은 무엇일까. 굿의 실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을 통하여 그 문제에접근해보기로 한다.
1. 무 당
평안도 무당들은 모두 강신무(降神巫)이다. 다시 말하면, 신분이나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신의 선택을 받아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무당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운명을 기꺼이 받는 사람은 드물다. 무당의 사회적 신분이 극히 천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신의 세계를 드나들어야 한다는 것 역시 정상적인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운명을 거역하면 곧 죽을 병이 들거나 집안이 망하는 등 신의 벌이 내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당노릇을 하는 사람이 많다. 스스로 무당이라고 불리기보다는 만신이나 보살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좋아 하는 것은 이러한 열등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여 성공하는 무당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다리굿의 주무(主巫)인 이선호(호적명이다. 흔히 이춘옥으로 알려져 있다)가 바로 그런 경우로 볼 수 있겠다. 15세에 강신하여 평양에서 무의(巫儀)를 익히면서 불려다니다가 서울로 이사온 이선호는 곧 장안의 평안도 부자들을 당골로 갖게 되었고, 그후 오늘까지 평안도굿을 하는 무당들 사이에 카리스마적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통솔력이 강하면서 마음이 너그러워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는 능력이 있고, 가정적으로도 자식들이 성공한 편이어서 무당이라는 직업이 주는 열등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동료 무당들에게 이선호는 권위와 애정으로 대하여, 불과 5,6년 아래인 신딸들이 그를 어머니로 극진하게 모시고 있었다.
평안도굿 장단을 제대로 구사하는 유능한 악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고향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한편 서울식 타령이나 노랫가락을 배워 어디서나 흥겨운 굿판을 만들어 나갔다. 80년도에는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평안도 대표로 참가하여, ‘서낭대제’로 3등을 차지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무속예술가로서의 실력과 긍지를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이번 다리굿에 참여한 모든 무당들의 약력을 살펴봄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특징을 파악하기로 한다.
이선호(1912년생) : 평안남도 평양 경저리 출신으로, 15세에 신이 내려 당시 50여세였던 임문용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곧 무업을 시작했는데, 결혼 후 27세 되던 해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었다. 오자마자 평안도 출신의 대상인들로부터 ‘서울을 발칵 뒤집을 만큼’ 인기를 끌었고, 지금까지도 큰만신으로 불리고 있다.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외국에 거주하고, 동생과 함께 비원 뒤 널찍한 한옥집에 살고 있다. 신딸들과 당골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어 외로울 틈이 없다.
정대복(鄭大福, 1918년생) : 평양 경저리 출신으로 19세에 혼인하고 해방후 서울로 왔다. 6.25전쟁으로 남편과 헤어진 후 신이 내렸으나 무당이 안 되려고 계속 피하다가, 39세 되던해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10여년 가까이 혼자서 불리다가 이선호를 만나 내림굿하고 신딸로 들어왔다. 남매를 두었으나 둘다 무당인 어머니를 보지 않아 헤어져 혼자 살고있다. 단단한 체구에 목청과 힘이 좋고 이선호의 후계자로 꼽히고 있다.
임금옥(林金玉, 1918년생) : 평양 상수리 출신인데, 결혼 후 25세부터 충청도 단양에서 살았다. 과부가 되고 나서 서울로 왔는데, 42세에 강신되어 이선호에게 내림굿을 받고 무의(巫儀)를 익혔다. 대감을 잘 논다.
김연화(金蓮花, 1916년생) : 평양 죽전리 사정골 출신으로 스물댓부터 할머니들에게서 굿 장고를 배웠다. 평안도굿은 장고가 중심이 되고 무녀가 직접 치는 꽹과리. 바라 외에 다른 악기가 별로 따르지 않는다. 장고잽이를 ‘술맞이 할머니’라고 부른다고 하며, 강신현상과 관계없이 순수한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술맞이 할머니는 후렴도 받고 무녀의 흥을 돋우는 등 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어야 한다는데, 김연화의 추임새 능력은 매우 탁월했다.
이춘홍(李春紅, 1922년생) : 이선호의 친동생이다. 해방 후 서울에 와서 김연화에게 장고를 배워, 언니가 굿할 때 쳐주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칠성굿을 한 박복덕(1922년생, 일명 박인재)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아 조사하지 못했다. 그 외 피리를 이윤성(1917년생), 해금을 김동기가 연주하고, 대금도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서울지역의 민속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다리굿의 무당은 큰만신과 그 실딸들로 구성되어 있다. 강신되었다해도 제대로 무의를 익히지 않으면 한낱 점바치로 떨어질 뿐 굿하는 무당은 될 수 없다. 따라서 큰무당 밑으로 들어가 조무(助巫)로 일하면서 의례 전반, 춤, 노래, 사설, 음식, 무복, 심지어 사람들의 심리를 읽어내고 대응하는 법까지도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딸들도 평소에는 집에서 점도 치고 간단한 푸닥거리도 하다가 신어머니가 굿을 맡으면 도울 겸 또 배울겸하여 따라간다. 또한 자기 당골 중에 큰 굿을 해야 할 집이 있으면 신어머니를 모셔와서 부탁하기도 한다. 이러한 협력관계는 서로의 이해가 상반되어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 한 지속적이고, 그 중 선택된 한 사람이 신어머니의 사후(死後)에 명두와 방울 등 무구(巫具)를 물려 받게 된다.
2. 다리굿의 실제
일시 : 1981년 9월 19일~20일
장소 : 서울시 도봉구 우이동 농장
참가자 : 이선호 정대복 임금옥 박복덕(이상 무당), 김연화 이춘홍(이상 장고),이윤성(피리),
김동기(해금), 황씨(대금)
다리굿을 받은 망자는 굿판이 벌어진XX농장의 전 주인으로, 81년 정월 93세로 사망하였다. 우이동 입구에 위치한 농장은 일종의 유원지로 소풍객에게 터를 빌려 주면서 채소를 기르기도 하는데, 이(李)노인이 직접 가꿔 세우고 오늘과 같은 큰 규모를 이루어 놓았다고 한다. 평소 굿을 좋아하였으며, 집안에 대감을 모시고 있었다. (붉은색 비단천을 깊숙이 모셔두었는데, 이는 대감신을 의미하며 재수를 준다고 믿는다) 노인이 딸들이 다리굿에 참여했으나, 굿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다리굿과 함께, 이선호의 당골 중 한 사람이 이북에 두고온 부모를 위해 갖는 수왕굿을 겸했다. 생사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지금쯤은 나이로 보아 사망했을 것으로 짐작, 굿을 크게 벌이는 기회에 함께 수왕굿을 하게 된 것이다.
굿판에는 무속을 연구하는 ‘굿학회’ 회원 십여명이 참가하여 조사했다. 유족들 외에도 이선호의 신딸들 여럿이 왔는데, 신어머니가 큰 결심을 하여 학자들에게 공개하는 큰굿을 하는데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 것 같았다. 그 외 잠시 외국에서 다니러왔던 이선호의 딸이 이틀 동안 계속 굿에 깊이 참여했고, 당골들도 찾아와 춤도 추고 절도 했다.
굿당은 50여평이 넘는 널찍한 마당에 마련되었다. 무신도와 명두로 뒤를 막고 조상상, 대잔상(안주상), 망자상, 향을 피우는 놋상, 이중으로 쌀을 괴어 놓은 가믕상(옛날에는 노적을 쌓았다고 한다)이 화려하고 푸짐하게 차려졌다. 마당을 질러 35자의 다릿발이 하늘 높이 넉 줄로 매어져 있고, 구석에는 종이를 오려 등모양으로 만든 돈전, 환전, 서낭님이 좌정하실 꽃수레 등이 있었다. 이제 이틀 동안 아침 10시경에 시작하여 저녁 늦도록 진행되었던 다리굿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1. 다리굿의 절차
1. 당울림 2. 주당푸념
3. 앉은청배 4. 칠성굿
5. 녕정 6. 가믕, 서낭
7. 대감 8. 기밀굿
9. 사자굿 10. 다릿발 들고 세경돌기
11. 수왕세텬 12. 망인의 몸다리가 들어섬
13. 넘불로 망인 모시고 마지막 기밀드림 14.뒷전
2. 거리별 내용
1. 당울림
굿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장고와 제금 등을 쳐서 굿을 한다는 사실을 제신께 알리는 것이다. 귀신은 쇳소리를 듣고 몰려오기 때문에, 갑자기 굿을 하면 달려든 귀신과 인간들이 부딪쳐 다칠 수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당울림을 할 때에는 만신들만 참가하고 가족은 물론 악사(樂士)들까지 당 밖으로 피한다. 강신무가 주재하는 굿은 거의가 당울림(또는 신청울림이라고 한다)으로 시작한다.
2. 주당푸념(주무 : 정대복)
굿당 안의 부정을 물리는(풀어내는) 굿이다. 주당은 인간에게 해를 주는 살(煞)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무녀는 평복에 신칼을 들고 장고 앞에 서서 단조로운 푸념장단에 맞춰 장한다. 굿하는 날과 장소, 목적 등을 알리고 성주, 장군, 지석 등 모든 신에게 빗긴 주당을 다 걷어낸다. 마지막에 신칼을 마당에 던져 점을 치는데, 칼끝이 밖을 향하면 모든 부정을 물리고 굿당이 깨끗해진 것으로 믿는다. 가족과 만신들은 굿당에 정성스럽게 절한다.
3. 앉은청배(주무 : 이선호)
무녀는 이중으로 쌀을 수북히 담아 올린 가믕상 앞에 화려한 홍색 관디복을 입고 호수갓을 쓰고 앉아서 여러 신이 굿당에 오시기를 청한다. “공심은 데일에 강남이요 전라는 나주 금성이 본이옵구요 사바세계 남섬부주 행동데일은 대한국이요 오늘 XX별장에 일백제자 모이어 다릿발 대다리를 매놓구 이 정성 드립니다. 신령님들 다 오십사 오늘 다 높으신 신령님 등넘고 재넘어 다니는 서낭님 오십소사 청배를 하옵니다......” 사설을 마친 무녀는 춤을 추어 모든 신들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굿상에 죄정시킨다. 장군복, 제장복 등 여러 신령의 옷을 바꾸어 입고 온 마당을 돌아다니며 신을 불러 굿상에 손과 부채로 올라 앉으시게 하는 것이다.
청배가 끝난 후 신장기를 들고 당골들의 몸을 쓸어준다. 신칼 들고 춤추다가 마당에 던진다.
한개의 칼끝이 안쪽을 향하자 그 칼로 구경꾼 중 한 사람을 불러 몸을 쓸어주며 허튼 귀신을 걷어낸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 농장에 살면서 망자(亡者)의 수발을 들어주던 여자인데, 최근 네 살짜리 아들아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 엎드리게 하여 그 위에 오방신장기를 놓고 술과 소금등을 세게 뿌린다. 다시 신칼점을 쳐서 잘 나오자 소지를 올려 다시 또 액이 범접하지 못하게 막아준다.
이어서 무녀는 투구 쓰고 장군복을 위엄있게 떨쳐 입고 삼지창과 칼을 든 모습으로 춤춘 후 굿을 잘 받겠다는 공수를 준다. 원삼 족두리 차림으로 각 명산의 애기씨를 노는데, 홍콩에서 사왔다는 수가 예쁘게 놓인 부채를 들고 코믹하게 춤춘다. 대감이 들어오자 심술을 부리면서 육찬이 없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청배거리에서는 수많은 신을 노는데 각 신마다 옷을 갈아입고 춤추고 공수를 주는 것을 반복했다.
4. 칠성굿(주무 : 박복덕)
무녀는 장삼에 가사를 메고 고깔을 쓰고는 굿상에 큰 절을 한다. 꽹과리(갱지미라고 부른다)를 작게 치면서 선 채 비나수 장단에 맞추어 신을 청한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긴 넘불(염불)과 잦은 넘불로 불사, 칠성, 지석 등을 청하고는 공수를 준다. “에 여봐라 산지조종은 골룡산이요 수지조종은 황하수라 내가 칠성님이 아니시리...... 우리 불쌍하신 망제 극락천도 시키구 우리 백성들 평안하구 남북통일시킬 때에 우리 칠성님 원 없이 한거리 놀구 가자.” 무녀는 법고춤을 추고 천수바라, 염불바라춤 등을 조금 빠른 속도로 춘 후에 당골들 사이를 다니면서 복바라 명바라를 판다. 무녀가 염불을 부르며 앞에 서서 바라를 펴놓으면 그 위에 돈을 놓고는 절하는 것이다. 이어서 덕담이라면서 흐늘흐늘 춤을 추며 중타령을 부른다.
전국적으로 제석굿 뒤에는 굿놀이가 있는데, 제석을 함께 모시는 칠성굿에서는 ‘약(藥)팔이’ 놀이가 간략하게 놀아진다. 박복덕이 거간을 부르자 이선호는 동그란 도레미떡을 창호지로 싸서 꽹과리에 받쳐들고 불사약 파는 소리를 메긴다. “에헤 마나님 있거든 삼신산 불사약 세텬세역국 아린존자의 약이요 백병은 소멸하구 재수있고 왕생극락하는 약, 약값 안 받으면 효과없는 약이요.” 주위에서는 가난뱅이 돈벼락 맞는 약에 자식 없는 사람 아들 쌍둥이 보는 약이라면ㅅ서 농담을 한다. 박복덕이 약을 받아들고 “사려면 사고 말라면 마소”하니까 이선호는 여기는 세상이고 장사는 장사니까 꼭 사시라고 해야 한다며 재담을 한다. 약을 산 사람에게는 손바닥에 쌀낱을 집어주어 홀짝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 산(算)을 준다. 짝수면 운이 좋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삼지창에 미녕을 끼워 태우는데, 이를 “대(大)수레 올리는 것”이라고 부른다. 소지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하며, 재를 담아 섞은 물을 망자의 가족들에게 먹인다.
5. 녕정(주무 : 정대복)
가믕상 위에 돈을 넣은 바가지를 엎어놓고 미녕과 베를 덮었다. 무녀는 녕정(영정)칼 두개를 들고 상 앞에 앉아서 좌우로 놀리면서 푸념 장단에 맞추어 녕정을 물린다. 녕정은 흔히 객귀를 일컬으며, 바가지에 음식을 조금 담아서 풀어 먹인다. 그러나 무속에서는 지체가 낮다고 생각되는 떠돌이 잡귀 수비 영산이라 해도 소홀히 하면 굿덕을 못 본다고 하여 오히려 중요하게 여긴다. 신칼 들고 잠시 춤추고 열두 달의 액을 막아주는 홍수맥이를 타령조로 부른다. “정월 한달에 드는 액은 이월달 한달에 막어내구, 이월 한달에 드는 액은 삼월 삼질루 막어내구, 사월 한달에 드는 액은 사월두 팔일루 막어내구......” 타령이 끝나면 가족에게 쌀산 주고 공수를 주어 끝낸다.
이어서 이선호의 당골들과 망자의 가족, 친척 등이 무복을 입고 돈 놓고 절한 후 춤추었다. 이것을 무건 또는 무감이라고 하는데, 직접 굿당에서 춤을 춤으로써 자신의 신을 풀어내는 것이다. 무건을 서야 병없고 재수있다고 하여 춤을 못 추는 사람이라도 억지로 추게 하며, 특히 노인들은 잠시 옷이라도 걸치도록 권한다. 무건은 처음에 느리게 시작하여 미친 듯이 빠르게 도무(跳舞)하다가 쓰러지듯 주저앉아 절하는 것으로 끝난다. “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 싫어서 굿 안 한다”는 속언이 있듯이, 빠른 속도로 춤추는 가운데 일상적인 삶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정신적 위안을 주는 장치인 것 같다.
6. 가믕. 서낭(주무: 정대복)
붉은 관디에 호수빗갓을 쓴 차림으로 정대복이 가믕상 앞에 서낭시루를 놓고 앉는다. 서낭시루에서부터 마당을 가로질러 저 끝에 있는 서낭님 꽃수레까지 베와 미녕을 깔아 다리를 놓는다. 베는 석베 또는 서낭다리라고 부르고, 미녕은 가믕천이라고 하는데, 이 다리를 밟고 오십소사 하는 의미이다. 단조로운 비나수 장단에 맞추어 먼저 만 가믕신을 청하고 이어서 서낭을 모셔들인다. 가믕은 감응(感應)의 와음으로, 추상적인 명사가 신격화되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아직까지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신이다. “나라 가믕에 어전 가믕 시에 만가믕 여두 도가믕...” 으로 시작하여 온 나라와 국가적 인물을 모신 신으로 공수를 내린다. 서낭은 동네입구를 지키는 지역수호신이다.
비나수가 끝난 뒤 가믕과 서낭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 신인가를 나타내는 공수를 준다. 염불을 하면서 가믕님이 내리시는 명잔. 복잔을 기주에게 돌린다. 이어서 서낭넋두리를 하는데, 산염불가락으로 서낭님이 이곳에 오실 때까지의 과정과 호사를 노래하는 것이다. “저 강에 저 뻐꾸리 쌍쌍이 핀 꽃에 속닢을 다 젖혀놓고 새로 새 속닢 나라 만드네야 뽀꾹뽀꾹이 우니노라 에에에 에에에야 에에에 지화자 좋다”등의 민요가사도 들어있다. 기주(祈主)들의 정성을 이쁘게 받겠다는 공수를 준다.
서낭굿에도 굿놀이가 있다. 두 명의 무녀가 한 사람은 나라의 간신요귀인 자리곰방놈으로 분하여 서낭다리에 꿇어앉고, 나머지 사람은 집장사령이 되어 서낭님 앞에 선다. “이놈이 나라에 들어와서 요기조기 다니면서 간신요귀를 부르니 곤장을 때리거라.” 집장사령은 잠시 매를 때리다가 이 나라를 나가기 전에 자리곰방놈이 소원이 있다고 전한다. 자리곰방놈에게 집장사령이 묻는다. “너 인생이 중하냐 재전(財錢)이 중하냐. 아유 인생이 중하답니다. 옳지, 사람나구 돈났지. 너 그런데 떡 달란 ? 고기 ? 사탕 ? 싫어 ? 그럼 쇠주랴 ? 아이구 얘가 지남석이구만. 쇠달래. 네놈이 쇠먹고 싶걸랑 방방곡곡이 다니면서 찾아봐라 여기 선생님들도 많이 왔는데 그 집의 나쁜 것 네가 좀 달래야지.”주위에서는 자리곰방놈을 때려쫓으라고도 하고, 조사온 교수들을 물고 늘어지라고도 하며, 온통 웃음판이 벌어진다. 자리곰방은 당골 중의 하나를 잡아 끌고와서 돈을 내게 한다. “아, 여봐라. 우리 여기에 못된 짓하던 간신요괴놈들, 똥뙤놈들은 모두 이북으로 보내거라. 여봐라 서낭님 들어오시는 길에 오곡을 열어놓고 천하태평님으로 오실 적에 어전풍악 있거들랑 우리 서낭님 한거리 놀아보자.”
서낭은 지역수호신인데 자리곰방은 어디에선가 떠돌다 들어온 이방인으로 설정되고, 다시 돈을 주어 내어쫓는 내용이 극화되어 있는 놀이이다. 자리곰방을 노는 무녀가 놀이의 내용을 잘 몰라서 재미있게 연출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큰 굿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 같다. 놀이가 끝나자, 정대복은 한바탕 춤추고는 서낭님 꽃수레가 있는 곳으로 간다. 석베. 가믕천 위를 늦은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걸어오는데, 한 걸음마다 징검돌처럼 돈을 놓게 한다. 돈이 조금 간격을 멀리하여 있으면 발을 내밀어 딛을 듯하다가 더 가까이 놓게 하며서 굿상 앞까지 온다. 간단히 공수 주고는 제장, 중국사신, 허공놀이(작두를 놀리는 것), 대감, 애기씨 등의 옷을 갈아입으면서 춤추고 공수 주는 것을 되풀이 하며 논다. 중국사신을 놀 때에는 담배도 피우고 젊은 여자를 손짓해 부르기도 하며 혀 짧은 소리로 관중을 웃기는데, 이처럼 중국신을 모시는 것은 황해도에서도 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탓인 듯하며, 사신을 대하는 일반서민의 심경을 반영하는 부분으로 생각되었다. 대감을 놀 때는 ‘구능문다’면서 떡시루를 입술에 붙여문다. 또한 허공놀이에서는 작두날을 목에 대고 칼에 매어달린다. 통돼지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떡시루도, 작두날도 신이 노하여 잘 떨어지지 않아 무녀는 화를 낸다. 서낭굿은 배치요. 극락으로 연화대로 모셔가소.
사자: 내가 말 들은 것하구 다른데. 좋은 사람인가봐.
정대복: 그럼요.
당골 중의 하나: 사자님, 돈 많이 벌었는데 나하고 동업합시다.
사자: 이놈들, 다 너희 나한테 잡혀가.
정대복: 사자님 이 상이 좋소 ? 저 상이 좋소 ? 저거는(큰 굿상) 개똥내가 나구, 이거는(초라한 사자상) 만수향내가 난다구. 좀 맡아보라요.
사자: 이게 좋은데.
무녀는 정신없이 입으로 음식을 처넣으며 한편 뱉으며 상 위의 것을 모두 먹는다. 실컷 먹고 조니까 가족들은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가시라고 보낸다. 무녀는 한바탕 춤춘 다음 칼로 방바닥을 쓸어낸 후 전립, 신칼, 사과, 호박 등을 한쪽 마당에 버려둔다.(망자를 이미 잡아갔음을 의미한다.)방울만 들고 가족에게 와서 울면서 넋두리 하는데, 이때 무녀는 사자가 아니라 망자가 되어 그 한을 푸는 것이다. 즉 망자가 사자에게 끌려가면서 하는 마지막 기밀이다.
“황천이 먼 줄 알았더니 대문 밖에 황천이더라. 어이구 설어...”딸이며 조카들을 모두 일일이 찾아보고 한참을 운 후 인정을 받고 떠나간다.
10. 다릿발 들고 세경돌기(주무 : 이선호)
이선호는 장삼에 가사를 메고 호수빗갓을 쓴 차림이고, 모든 악사와 무녀들 그리고 유족이 굿상 앞에 늘어서서 절을 한다. 이어 주무 이선호가 다시 사방에 정성스런 큰절을 올려 다리굿 한다는 것을 신들께 고한다. 악사(대금. 해금. 피리), 무녀들(꽹과리. 바라. 장고), 주무, 꽃과 망인의 사진, 향, 지방을 모셔든 유족들의 순으로 긴 염불을 부르면서 온 마당을 둥글게 도는데, 이것을 ‘다릿발세경’이라고 한다.
“아헤헤 에헤에야 에헤 나무나무아미타불.” 장고가 후렴과 추임새를 계속하면서 느리게 굿당 주위를 도는데, 가운데에는 청수와 빈그릇을 놓아 누구든 돌은 넣을 수 있게 했다. 잦은 염불로 넘어갈 때 가족들은 물러가고 주무(主巫)의 선창에 맞추어 장고와 무녀들은 뒷소리를 받으며 계속 세경을 돈다.
11. 수왕세텬(十王西天)(주무 : 이선호)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열시왕을 모시는 거리이다. 단조로운 비나수로 신을 청해들이고 바라춤을 춘다. 유족에게 공수를 주는데, 망인을 곱게 극락으로 모셔가겠다고 약속한다. 모든 사람이 죽으면 열시왕에 아니 매일 수 없다면서 구경꾼들에게도 인정을 쓰게 한다.
12. 망인의 몸다리가 들어섬
이선호는 마당 가운데로 가서 허공을 질러 걸어놓은 다릿발을 쥐고 흔들며 춤을 춘다. 유족을 불러 연꽃과 함께 다릿발을 들고 서 있게 한다. 이선호는 제금을 잦게 치면서 신(망인의 몸다리)이 내리기를 빈다. 유족이 문득 꽃을 떨면 망인의 넋이 다릿발에 올라와 앉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선호는 방울을 울리면서 가족들에게 기밀을 드린다. 굿을 받게 해준 유족에게 감사하고 가정이 화목하기를 당부한다.
*수왕포 가르기(주무: 정대복)
이 부분은 ‘다리굿’에는 없고 함께 ‘수왕굿’을 하는 김씨부부네의 망자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미녕과 베의 수왕포를 겹치게 앞뒤에서 놓고 각각 두 명씩 잡은 후 돈을 놓는다. 정대복은 꽹과리를 치면서 제금, 장고, 음식을 든 가족순으로 수왕포 주위를 염불을 외면서 세경돈다. 수왕포 앞에 서서 무녀는 이북땅에서 쓸쓸히 죽은 사정을 고하고 가족들을 잡고 울면서 온갖 넋두리를 한 후 다리를 갈라나간다. 몸으로 가운데를 잡고 죽 찢는데 두겹이라서 잘 나가지 않는다. 막힐 때마다 다시 가족들을 잡고 운다. 다 찢으면 걷어쥐고 나무아미타불과 지장모살을 외면서 가족들에게 등뒤로 넘겨준다.
13. 넘불로 망인 모시고 마지막 기밀 드림(주무 : 이선호)
주무인 이선호는 다릿발 사이에 들어가서 시왕다리. 사자다리. 몸다리. 조상다리 네 개를 번갈아 잡으며 염불한다. 아미타불이 극락국토에 바라는 48원(願)을 주로 외다가 잦은 염불로 넘겨 푸념장담에서는 망자의 슬픔을 노래한다. 굿당에 장식된 돈전 환전으로 가서 좋아하며 춤추다가 다시 가족들을 잡고 죽은 사람의 애끓는 한을 토로한다. “이승에도 돈이요 저승에도 돈이요 인정쓰시오.” 다릿발에 인정(돈)을 놓게 한다. 가족들은 네 개의 다리 위로 돈을 죽 건다. 가족들을 붙들고 마지막 기밀을 드린다.
“내 영혼이 3년은 여기 있으니, 3년 지난 후 팔거나 흩여라.” 친지도 찾고 생전에 수발을 들어준 복남엄마도 부른다. 또 농장을 깨끗이 거두라고 당부도 하고 병이 난 딸을 거둬주겠다고 약속한다. “고맙수다. 이제 가야지.” 이선호는 이어서 망자가 극락에 타고 갈 배를 젓기 위해 배치기를 부르면서 다릿발을 풀게 한다. 다릿발을 다 풀면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다시 기밀 드린다. 다릿발은 한 줄로 묶어서 놓고 수왕굿 때 가른 수왕포와 망인의 옷, 연꽃 등을 마당 밖에 내놓고는 가족과 무녀들은 모두 절한다. 빠른 속도로 ‘지장보살 지장보살’을 외면서 수왕포와 옷 들을 태운다. 정대복이 푸념장단으로 뜬귀들을 풀어먹이고 신칼점을 던진 후 마친다.
14. 뒷전(주무: 임금옥)
굿에 따라든 객귀들과 험하게 죽어 이승과 저승을 헤매는 영산을 풀어먹이는 거리고, 마당에 따로 상을 보아 음식을 바닥으로 던져주고는 모두 끝낸다. 역시 마지막에 신칼점을 친다.
이틀 동안에 걸친 다리굿은 주위가 캄캄해진 8시경에야 끝났다.
3. 다리굿의 구조와 기능
이상 살펴본 내용에서 알 수 있는바 다리굿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명과 복을 비는 부분과 망인의 극락천도를 위한 거리들로 확연히 구분된다. 즉 당울림과 주당을 물리는 데서 시작된 굿의 앞부분은 대감거리에 이르도록 일반 재수굿과 차이가 없다. 단지 각 신에게 굿하는 목적을 알릴 때에 망인의 천도를 비는 다리굿임을 밝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사실상 망인을 위한 굿은 넋을 청하여 굿당에 좌정시키고 기밀굿을 할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무녀는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가는 사자(使者)를 놀고 열시왕을 모시며 다릿발에 망자를 올라앉게 하여 염불로써 극락으로 모시는 과정까지 순수하게 망인을 위한 굿을 연행(連行)하는 것이다. 굿의 맨 마지막 거리는 ‘뒷전’인데, 이것은 모든 종류위 굿에서 동일한 현상이다. 이렇게 볼 때 다리굿은 산 사람의 복락을 기원하는 굿에 특별히 죽은이를 위한 거리들이 첨가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개별의 신격들을 모시는 과정과 굿 전체의 구조가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고 망인천도(亡人薦渡)의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기본골격의 이해
다리굿은 가믕, 영정, 서낭, 대감 등 많은 신격에 대한 개별적인 사신(事神)의례를 갖고 있는데, 이들은 해당 신격이 변하는 것뿐, 그 구조에 있어서는 동일성을 보여준다. 처음 굿을 하려는 무당은 먼저 해당신의 무복(巫服)을 입는다. 세습무들이 흰 치마 저고리를 정갈하게 입거나 쾌자를 걸치는 것으로 만족하는 데 비해, 강신무들은 수많은 무복을 가지고 있고 굿에서 거리마다 갈아입는데, 이는 신이 옷에 따라온다는 신앙심이 있기 때문이다. ‘만신’이라는 용어가 ‘온갖 신(萬神)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각각의 신은 모두 자기의 옷이 있고 따라서 많은 무복을 갖고 있을수록 큰무당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간절한 원이 있는 당골들은 특별히 수놓은 아름다운 무복을 만들어 무당에게 바치기도 한다. 무복을 입은 무녀는 장고 앞에서 푸념 또는 비나수의 단조로운 가락에 맞추어 굿에서 모식 제신들을 부른다.
무속의 신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구체적인 존재인 경우가 드물다. 예를 들어 ‘서낭’을 모신다고 하면 나라서낭 어전서낭 도서낭 본당서낭, 각 명산에는 산천서낭, 사해는 용신서낭...등 이라 불려진다. 서낭이 지역수호신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서낭굿에서 불려진 많은 서낭신의 성격을 종합해 본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따라서 무녀는 먼저 굿하는 장소, 시간, 목적, 사람 등을 아뢴 후 각 신격들을 말로써 호명하여 오시리를 청한다. 말에 의한 청배가 끝나면 춤을 추는데,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했다가 차츰 빨라지고, 상하 높은 도무로까지 발전한다. 무복과 함께 신이 실린다고 믿는 방울. 부채. 칼. 삼지창 등 무구를 이용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무녀는 춤을 통하여 자신의 몸에 신을 받게 된다. 한바탕 춤을 춘 후, 기주 앞에 멈추어 서서 바야흐로 입을 여는 무당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그 순간 그는 바로 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적어도 관습적으로 그렇게 믿어지고 있다.)
신격화한 무당이 인간에게 내리는 말씀인 ‘공수’는 강신무 굿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이 공수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평안도굿에는 굿 중간에 반복적으로 주는 흘림공수와 마지막에 주는 긴 공수가 있다. 첫 번째 흘림공수는 신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그동안 정성이 부족했던 인간을 나무하는 내용이 보편적이다. 이때 기주(祈主)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다. 무속의 신들은 항상 대접받고 싶어할 뿐 아니라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뽐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몇 십년을 굿을 팽개쳤던 집이라 해도 웬만큼 빌면 곧 맺힌 맘을 푸는 것이 무속의 신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잠시 춤을 춘 후 주는 두 번째 흘림공수는 그간의 행동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이번에 이 정성을 갸륵히 받아서 도와주겠다는 약속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이 과정이 하나의 굿 안에서도 여러번 반복될 수 있다. 특히 앉은 청배나 가믕거리에서는 많은 신격들을 한꺼번에 모시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고 춤추고 공수내리는 것이 되풀이 된다.
오랜만에 굿을 받은 신은 즐겁기 짝이 없다. 하나같이 춤추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무속의 신들인지라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만 즐거운 것이 아니다. 신에게서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도 기쁘기 짝이 없다. 신과 인간이 만나서 갈등 끝에 서로 화해하고 그 기쁨을 한판의 질탕한 놀이로써 나누는 장면은 일상적인 삶에서 맺힌 한과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푸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간혹 연극적인 굿놀이가 들어가는 수도 있다. 대감굿의 ‘술빚는 놀이’, 칠성굿의 ‘약팔이’ ‘서낭놀이’ 등은 일종의 모의연극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도움을 확신시키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굿놀이는 그러한 주술적인 목적을 떠나서 순수하게 놀이로서의 즐거움을 준다. 굿놀이의 현장에서 칠성은 권위 있는 신이 아니라 거간꾼의 손에 놀아나면서 야단이나 맞는 존재가 되고 대감은 술 한잔에 어쩔 줄 모르는 미속한 속성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군림하던 신과 그 앞에서 쩔쩔 매던 인간은 놀이 안에서 간격을 없애고 일체감 속에 녹아들게 되는 것이다. 무속의 신들은 인간들이 왜 굿을 하는지, 그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각 굿의 마지막에 하는 긴공수에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재수있게 해줘요” “복 불어주세요”하며 매달리고, 신은“염려 말아라. 이번에 내가 소원 이뤄 주마”하고 최종적으로 확신을 심어 준다. 무녀는 춤을 추면서 옷을 벗어들고 절하는 것으로 굿을 끝낸다. 이렇게 굿 한거리는 청신(請神)-(공수)-오신(娛神)-송신(送神)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에서 본 굿 한거리의 구조는 다시 커다란 하나의 굿 안에서도 같은 양상을 띤다. 즉 큰 굿은 부정을 물리고 제신(諸神)을 청해들이는 거리로 시작하여, 신을 모셔 공수를 듣고, 만남과 놀이를 통해 총체적인 복리를 도모하는 개별적 거리들이 이어지고,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뒷전으로 끝난다. 이를 종합하면 하나의 큰 굿은 청신-오신-송신의 구조를 지니면서, 또한 굿을 이루는 각 거리 역시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굿의 구조는 무속의 종교적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굿은 인간 쪽에서 신을 청하여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이미 예정된 해답을 들은 후 놀이로써 그것을 확신하고 다시 돌려보내는 의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속은 극히 인간 중심적인 종교이다. 겉으로는 호령하는 신의 뜻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속의 신들은 인간에 의해 조종되고 있고, 인간의 소원, 현실적 욕구를 달성시키시 위한 적극적인 협력자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다리굿의 기능과 의미
다리굿에서 망인천도를 위한 후반 역시 전술한 굿의 기본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망인의 넋을 청하여 굿당에 모신 후 그 한을 풀어주고 잘 달래서 저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각 거리간에 서로 아무런 연결관계를 갖지 않는 일반 재수굿과는 달리, 나름대로 통일성을 갖추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총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다리굿은 굿을 받는 대상이 이미 죽었다는 당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가 죽지 않은 상태를 가정하여 연극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사자굿이 바로 그것이다. 망자는 이미 사자(使者)에게 잡혀 저승으로 간 존재인데, 굿에서는 사자가 다시 한번 망자를 잡으러 오고 또 잡아가는 과정을 장시간에 걸쳐 매우 충실히 모의한다. 분명한 차이점은 이번에는 살아 있는 사람 들이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여 보고 듣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가능한 사자에게 망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잘못 찾아왔다는둥 거짓말까지 해보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운명임을 통감하고 내주고 만다. 단지 사자에게 망자를 곱게 모셔달라고 당부할 따름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산 사람은 차근차근 죽음이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즉 굿을 통하여 죽음을 재체험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다리굿에서 가장 중요하고 여러번 반복되는 것은, 망자가 무녀의 입을 빌어 생전에 못다한 한(恨)을 푸는 ‘기밀’이다. 일반 굿의 최대의 목적이 공수를 통해 신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을 얻는 데 있다면, 기밀 역시 이에 대응할 만하다. 즉 사람들은 기밀을 통해 망자와의 통로를 열고 망인의 한을 들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 역시 토로할 기회를 얻어 궁극적으로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죽고 나면 살아 있는 사람과의 통로가 단절된다. 한순간에 완전한 타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산 자가 죽은 자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전달할 대상을 잃고 개인의 무의식으로 빠져들어가 감정적 콤플렉스를 형성하게 된다. 신과 인간, 삶과 죽음의 중간에 서서 기밀을 드리는 무녀는 일견 망자의 한을 넋두리하는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은 또한 굿을 하는 가족의 마음속에 있는 망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무당넋두리의 기능에 대해 정신의학자 이부영 박사는 “죽은 자뿐 아니라 산 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감정적 콤플렉스를 그의 의식 세계로 환기시키고 재체험하는 과정”이라고 분석심리학적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즉 넋두리는 그것이 감정에 호소하여 잊혀졌던 회한을 자극하여 재체험시키는 점에서 분석시림학적 정신요법에서 무의식 속에 숨은 콤플렉스를 의식면으로 울려 그것을 소화하게 하는, 이른바 의식화 작용과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기밀을 통해 통로의 두절로 마음속 깉이 숨어 있던 고통의 원인을 끄집어내게 되고,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어 분열된 마음을 통일로 이끌게 되는 것 이다. 무당을 통해 기밀을 드리는 망자가 굿판에 현존한다고 믿는 심성속에는 이러한 자기치유의 소망이 내재해 있고, 이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산 자는 죽음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리굿은 유난히 불교적 색채가 강한 굿이다. 특히 염불을 노래하면서 굿당을 도는 다릿발세경은 ‘도령’이라고 하여 무당이 나비춤. 한삼춤 등을 추면서 망자상(亡者床)을 도는데, 그 춤이 불교의식무와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 무조신(巫祖神)인 바리공주인 데 비해, 다리굿에서는 지장보살을 외는 것으로 대신하니 더욱 불교적인 성격을 띤다고 하겠다.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열시왕(十王)은 모든 사령(死靈)굿에서 가장 중요한 신격으로 모셔지게 마련이다.
가족으로 하여금 다릿발을 들고 서서 직접 넋내림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모든 한을 푼 망인이 이제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극락으로 가게 됨을 신뢰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장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망자는 생전에 못다한 일, 끈끈한 미련들을 모두 떨쳐 버리고 홀가분하게 이승을 떠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 다릿발에 올라선 넋은 굿을 하기 전 원 많고 한 많아 이승과 저승을 떠돌며 갈 길을 못 찾던 외로운 혼백이 아닌다. 자손의 정성으로 굿을 받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저승에 머물, 무속의 신격(神格)인 조상이 되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잇고 또한 단절시킬 수 있는 ‘다리’로 상정하여 그것을 의례화시킨 것은 우리나라 사람 고유의 심성이다. 처음 망자가 굿당에 올 때에도 이 다리를 타고 왔고 지금 저승에 갈 때에도 다리를 건너게 된다. 지노귀굿이나 수왕굿에서는 마지막에 다리의 중간을 무당의 몸으로 갈라나간다. 포(布)는 수많은 올과 올로 얽혀져 있어 마치 복잡한 삶의 관계와도 같다. 이를 갈라나가는 것은 곧 삶에서부터 망자를 자유롭게 해주는 상징을 포함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를 절연함으로써 다시는 망자가 이승으로 오지 못하게 하려는 산 자의 염원을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리굿에서는 다릿발을 가르거나 태우지 않고 잘 닦아만 주는데, 이는 전라도 씻김굿과 같으며, 그 의미도 동일하다고 보겠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다리굿은 연극적인 의례로 연행되며, 그 기능은 죽음을 재체험시킴으로써 그 사건을 이해시키려는 데 있다. 즉 무당을 통해 사령(死靈)을 존재하게 하고 직접대화하고 사자에게 잡혀 가는 과정까지도 극화하는 것 등을 통하여 죽음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한 후, 다시 구체적인 모의의례를 통하여 망자를 떠나보냄으로써 더 이상 망자가 이승에 머물지 않고 저승에 안정하여, 삶의 세계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망자의 극락천도를 목적으로 하는 다리굿은, 일반 재수굿과 마찬가지로 ‘청신-오신-송신’ 의 구조를 가질 뿐 아니라, 산 사람 편에서 삶을 보호하려는 소망과 의지를 관찰시키는 의례로서의 기능이 오히려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굿과 신명
김열규
1. 지금 굿을 생각하는 것은
“야단 굿 났다”는 말이 있다. 시끌벅적한 큰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지만, 문제는 굿에 ‘야단’이라는 관형어가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말이 하나로 엉겨서 매양 “야단 굿 났다”라는 형태로 쓰이고 있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굿이 야단스러운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란 말도 흔하게 쓰이고 있다. 이 경우 “굿이나 본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그게 내게 무슨 상관이냐, 구경만 하면 그만이지”하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즐기지”하는 뜻이다. 둘을 합치면 직접 상관없는 일이어서 보고 즐기거나 하면 그만인, 재미있고 떠들썩한 구경거리 정도가 굿이란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무슨 굿 났다고 내가 거길 가”라는 말도 흔하게 쓰이고 있다. 이 경우 굿은 큰 일, 별다른 일 등을 뜻하고 있을 것 같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 게 가지 보기는 굿이란 말을 아주 속되게 쓰고 있다. 하나같이 비유적인 뜻으로 바뀌어서 굿이란 말이 쓰이고 있는 보기들이다. 하지만, 속되게 혹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관습적인 언어이기는 해도 굿이 워낙 지니고 있었던 뜻이나 속성을 오히려 실감나게 더욱 절실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세 가지 보기를 통틀면, 굿이란 결국 요란스럽고 야단스러운 것, 구경거리가 될 만큼 재미있는 것, 놀이감이 될 수 있는 것, 그리고 큰일이라 해도 좋을 만큼 별날 것 등을 뜻하게 된다. 이 뜻들은 굿의 원래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굿이 별난 일이란 것은 분명하다. 예사로운 일, 일상적인 일은 절대로 아니다. 굿, 그것도 별신굿이나 서낭굿 등, 이른바 마을굿은 그것이 치러지는 시간이 유별나고, 공간 또한 유별나다. 세속적인 시간이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굿판은 정결한 공간으로서 주위와 엄격히 가름된다. 금줄이 둘레 쳐져서 경계선이 그어지고 주황빛 흙이 그 경계 안에 뿌려져서 그곳이 거룩한 지경임을 명백히 한다. 그런 시공(時空)속에서 인간들은 신령과 맞닥뜨리고 신주를 섬기고 신을 몸에 싣게 된다. 시공은 한순간에 신령의 시공이 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신비로운 체험들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굿의 ‘비범성’내지 ‘비일상성’이다. 비일상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비일상적 사건이 곧 굿이다.
굿은 분명히 야단스럽고 요란스럽다. 잽이들이 울리는 풍물이 우선 시끄럽고 무당의 사설과 노래, 그리고 춤사위 또한 요란한 게 굿판이다. 그러나 이 시끌벅적한 것은 그냥 단순한 소란이 아니다. 그 야단스러움은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짐짓 그렇게 하고자 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 야단스러움이 바로 신령과 사람이 하나로 어울리는 신명이나 신바람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것은 신명을 유도해 일으키고 또 일단 일어난 신명을 지속시킨다. 굿판의 야단스러움은 신바람의 야단스러움이다.
끝으로 굿은 명백한 구경거리고 놀이감이다. 노래가 있고 풍악이 있고, 그리고 춤이 있어서만 구경거리이고 놀이감인 것은 아니다. 무당과 신령이 짝지거 벌이는 연극이 있고, 무당 혼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있어서 굿은 정말 구경거리가 된다.
개인 굿판이면 죽은 조상의 넋과 살아 있는 후손이 만남으로써 산 사람이 죽은이의 넋두리(푸념)와 어울려서 주고받는 대화며 사설이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고, 배뱅이굿이 보여주듯이, 무당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지식을 용케도 알아맞히어 나가는 것이 구경꾼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것이다. “굿을 논다”는 말이나 “잘 노는 무당”이란 말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굿은 신성스런 연극이면서, 아울러 신령스런 놀이인 것이다.
긍극적으로는 야단스럽고도 별난 성스러운 놀이라고 종합될 이 같은 굿의 속성, 그것도 복합적 속성이 비록 일상적인 말의 쓰임새에서 이끌어내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한국인들의 실제 생활감정의 표출이란 점에서 매우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생활 현장의 한국인 최대다수가 실감으로 포착하고 있는 굿의 속성이 바로 거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굿판은 멀어져 가고 있다. 그냥 멀어져 가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멀리 밀쳐내기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상거(相距)는 이제 영영 회복하기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겨우겨우 명백만 보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무속신앙과 굿이 단순한 종교로서 다른 문화며 생활일반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생활과 어울려서 총체적인 복합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구태여 정리하자면, 무속신앙이며 굿은 ‘생활 복합’이고 ‘문화 복합’이다. 종교로서 따로 믿은 것이 아니고 생활하면서 생활 가운데서 믿었던 것이 무속신앙이다. 그것은 무속신앙이나 굿이 그만큼 깊게 또 넓게 생활 속에 끼여들면서, 그 생활과 더불어 이룩되었을 한국인의 감정이며 의식속에 파고 들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굿이 사라져 갔거나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서, 굿이 관여해서 이룩된 한국인의 의식의 심층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긍정적으로이건 혹은 부정적으로이건, 우리들 속 깊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순기능을 다하건 아니면 역기능을 다하건간에 그것은 우리들 저 깊은 속에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도가 성당을 찾아와 신부에게 “재수 미사를 올려 달라”고 했다는 말은 특수한 사람이 저지른 한때의 실언으로만 넘겨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경우, 불교와 무속신앙의 오랜 접합이 형성하였을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복합성을 전혀 외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들이 굿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지나간 것에 부치는 회고가 아니다. 정신적인 귀향도 아니고 정서적인 복고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내부에 깊이 가라앉는 일이다.
깊은 내성(內省)의 실마리를 잡는 일이다. 굿이 오늘날 이후 살아남을지 어떨지 자신있게 말할 형편이 못된다. 더욱 굿이 구태여 살아남아야 한다고 확연하게 우길 우 있는 사람은 그다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굿이 오늘날에 있어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할 사람도 좀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말도 굿을 두고는 쓰일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구경거리로도 썩 마음내키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굿을 구경거리로 삼을 때가 아니다. 그것을 정리할 때다. 정리하면서 그 속에 우리들의 심층에 대한 탐색을 시작해야 할 때다.
2. 마을굿의 내력
굿판은 한국인이 신령을 만나는 현장이다. 단순히 만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합일 하는 현장이다. 신령과의 합일을 ‘영실’이라거나 ‘신지핌’, ‘신들림’이라 불러 왔고, 더러는 ‘신내림’이라고도 일컬어 왔다. 어느 말을 사용하건, 신령을 인간 자신 속에 싣는다거나 혹은 신령이 인간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지칭하게 된다. 신령이 인간 안에 존재하는 상태가 곧 영실, 신지핌, 신들림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신령과 인간과의 합일을 보다 더 보편적인 용어로는 ‘접신(接神)’이라고 하거니와, 그것을 무속신앙적인 신비체험이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굿판은 한국인들이 신비체험을 갖는 현장이다.
한국인의 굿판이 크게 ‘마을굿판’과 ‘개인굿판’으로 갈라진다면, 그 굿판의 갈래에 따라 신비체험의 내용에도 가름이 있게 된다.
마을굿판에는 별신굿이나 도당굿을 비롯해서 당산굿, 동신굿, 서낭굿 등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별신굿과 도당굿은 3년 또는 5년을 주기로 하는 규모가 큰 마을굿이고, 그 밖의 것은 한 해에 한 번씩 치러지는 작은 규모의 마을굿이다.
마을굿은 한 공동체가 치르는 계절적인 통과의례다. 계절의 번가름에 틈타서 마을도 어떤 번가름을 치르고 새로운 전환을 마련하는 계기가 마을굿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번가름이란 마을의 ‘재활성화’를 뜻한다. 시든 기운과 묵은 부정을 떨치고 새로운 생명력으로 차 있는 마을로 거듭나는 번가름이 마을굿에 의해 결정된다. 마을굿은 마을 자체의 재생산작업이다.
마을굿의 내력은 사뭇 아득하게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땅 역사로는 태고적인 부여(扶餘)에 이미 ‘영고(迎鼓)’라는 큰 굿이 있었고, 그 이웃 고구려에 ‘동맹(東盟)’,다시 또 그 이웃 예(濊)에 ‘무천(舞天)’이라 이름 붙여진 큰 굿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마을굿이라기보다 나라굿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온나라 안 사람들이 한 때, 한 자리, 한 판에 어울려 굿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굿들은 안쓰럽게도 그 온전한 모습을 알 수가 없다. 그저 신령을 모시고는 남녀 노소 가림없이 밤낮도 모르고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며 질탕하게 어울렸다고만 전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안 스럼운 중에서도 요행히 고구려의 ‘수신굿’만은 제법 그 자세한 모양새가 기록에 남아서 전해오고 있다. 고구려 백성들이 온 나라를 통튼 큰 모임을 갖고서는 수신을 굴에서 모셔내다가는 동으로 흐르는 물깃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옛 문헌들은 일러 주고 있다. 이것은 신맞이를 어떻게 해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그 신에게 굿을 올렸는가를 모자라게나마 그런 대로 익히 일러 주고 있는 것이다.
옛문헌이나 기록으로는 헤아리기가 이런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한 무덤속의 벽그림이 옛적 까마득한 날의 마을굿 아니면 나라굿의 온전한 모습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 옛무덤은 다름 아닌 고구려의 옛땅, 그러니까 압록강 맞은쪽 벌판의 만주땅 장천(長川)에서 최근, 중공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
이제 그 그림의 자세한 모양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벽에 그려진 그림의 한복판에서 약간 바른쪽 위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한 그루 큰 나무가 솟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짙은 그림자를 벽면 가득히 던질 만한 나무다. 그런 우람한 인상을 주는 나무다. 그 곁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모양의 사람을 보는 순간, 누구나 그 나무가 어쩌면 서낭나무 아니면 당나무일 법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니 단군신화의 신단수란 바로 그런 나무가 아닌가 하고 여겨질 만도 할 것이다.
그 나무를 에워서 여러 갈래,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풍악을 울리고 있는 패, 씨름하는 패, 그런 곁에서 재인(才人). 광대들이 할 만한 재주를 피우고 있는 무리들이 보이고 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만약에 그림의 나무가 당나무나 서낭나무라면 이들 사람의 갖가지 짓거리며 발림들은 당나무(서낭나무)둘레에서 굿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헤아려 봄 직할 것이다.
서낭나무(당나무)면 마을신이 내리는 나무이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신 그 자체이기도 한 나무다. 그 같은 나무 둘레에서 절하고 풍악 울리고 씨름하고 놀이하고 하면서 사람들이 어울리는 것은 마을 굿판이 아니고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도 예사 굿판이 아니고, 굿판 중의 난장판이다.
이래서 우리들은 이천여년 기나긴 세월 동안 땅 속 깊이 죽음의 세계에 묻혀 있다가 가까스로 햇빛을 보았으되, 억울하게도 남의 나라 사람들 손을 기다려 비로소 햇빛을 본 장천(長川)의 고분벽화 내용이 고구려의 나라굿 아니면 마을굿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옛날 한반도의 북쪽에 자리 잡았던 나라들에서 나라굿의 모양은 이렇다 치고 남쪽에서는 어떠하였을까.
마한(馬韓)에 있었다는 ‘소도(蘇塗)’는 마을굿이나 나라굿이 치러진 성역, 곧 서낭터라고 생각해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소도는 기다란 짐대라고 했다. 그 대 끝에 방울이 달렸었다니까 오늘날의 서낭대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발음이 오늘날의 솟대와 아주 비슷하고 그 모양새 또한 솟대하고도 비슷하다. 솟대는 경기도 강원도, 아니면 충청도 일부지역의 서낭대라 생각하면 틀림없다.
서낭대나 솟대가 있었던 바에야 굿이 있었으리라고, 그것도 나라굿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마한을 포함한 삼한(三韓)의 경우에도 옛기록들은 큰 규모의 굿을 적어놓고는 있으되, 이 북쪽 몇나라의 그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간략하게 적어놓고 있을 뿐이다.
그런 중에도 유독 가락(駕洛)만은 그 나라굿의 모양이 자상하게 또 생생하게 적혀져 있어 여간 큰 기쁨이 아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옮겨 적힌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가락의 나라신령이자 그 첫 임금이 하늘에서 내려오던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불어 가락의 나라굿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라의 신령은 하늘에서 가락의 구지봉(龜旨峰)이란 묏봉우리에 내려와, 거기 미리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공수부터 먼저 주었다. 신령이 스스로 땅의 세계에 내리겠노라고 신탁을 준 것이다.
가락의 백성들은 그 공수가 시킨 대로 노래하고 춤추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신령의 가르침을 따라 노래하고 춤추었더니 정말 신령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 신령이 뒤에 가락의 첫 임금인 수로(首露)가 되어TEk고 가락국기는 나라굿 부분을 마무리짓고 있다.
“공수를 따라 노래하며 춤추면서 신내림을 받는 것”, 가락국기의 나라굿에 관한 기록 가운데서도 바로 이 대복에 조심해야 한다. 이 대목이 바로 신지핌이고 신내림이다. 마을굿에서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같이 신내림을 받으며 춤추고 노래한다.
여기서 장천 고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의 나라굿과 가락국기에 기록된 가락의 나라굿을 더불어서 한 줄기 생각을 엮어 보기로 하자.
먼저 나라굿에서는 신령 자신의 공수를 받들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내림을 받는 과정이 있게 된다. 신내림을 받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신지핀 상태에 빠진다. 신령을 실었으니 신령인 듯 마음이 드높아지고 흥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이 누린 신비체험인 ‘신명’의 가장 순수한 상태, 그것도 나라굿이나 마을굿에서 누린 가장 순수한 상태다. 여기까지에서는 신명이 비교적 종교의 테두리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의 신명이 다음 단계로 사회적인 확산을 겪는다. 이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장천 고분벽화는 보여주고 있다. 재인(才人). 광대가 놀이에 끼여들면서 신명은 종교적인 체험 아닌 다른 체험까지를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서 신명은 난장판 속의 신명이 된다. 장천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 난장을 구체적으로 보여누고 있는 이 땅 굿판의 첫 현장이다.
3. 마을굿과 신명
오늘날의 마을굿인 별신굿이나 도당굿은 이 까마득한 옛날 옛적의 나라굿이 오늘날에 전해진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상고대(上古代)의 신화들 - 예컨대, 단군신화, 가락신화 등을 오늘날의 사람들의 육신을 통해 거듭 나타내 보이는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의 마을굿도 옛날 나라굿이 그랬듯이, 먼저 신내림을 받는다. 무당이 중매꾼이 되어서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가 마을에 내리면 그 신내림은 마을사람 가운데서 뽑힌 제주(당주)를 거쳐 마을사람 전체에게로 번져 간다. 이것이 신지핌의 확산작용이다. 무당의 춤과 노래로 신령이 신대를 잡은 제주(당주)에게 내리면 제주는 신떨림을 온몸으로 나타낸다. 그 뒤 신대를 잡은 제주와 그를 시위하듯 따라나서는 무당을 앞세우고 마을사람들은 서낭당이나 당집을 떠나서 풍악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온다. 이것이 신맞이 절차다.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사오일씩 그때부터 마을 안은 온통 굿판이 된다. 줄잡아도 열두 거리의 굿거리가 무당에 의해 진행되는 동안, 신명은 차츰 마을 안에 고루 번져 가게 된다. ‘접신상태의 집단적 감염’ 현상이라 부른다. 무당의 굿청도 물론 흥청거리지만, 그 둘레에 차려진 각종 장사꾼들의 난전은 질탕한 놀이판이 된다. 굿판이 곧 놀이판이 되는 것이다. 이 지경에서 난장판이 벌어지면 신명은 사회적인 요소들 이외에 더 많은 요소들을 품고서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 되고 만다.
크게는 한국인의 종교체험, 좁게는 신비체험인 신명을 얘기할 때, 굿판의 일단인 난장판에서 피워지는 신명에 관한 얘기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난장판이라 워낙 난잡스럽거나 소란한 장판이란 뜻이다. 각종 장사꾼, 놀이꾼, 재인, 광대가 벌인 장이며 전 혹은 판들에서 사람들이 흥건이 농탕치고 흥청거리고 엉망으로 질탕한 분위기를 빚어 가는 것이 곧 난장판이다. 그것은 요컨대, 신령에 지핀 사람들이 마음껏 신명을 피우는 현장이다. 사람이 제 마음으로 그렇게 농탕치는 것이 아니다. 신령이 시켜서 신령과 더불어 흥청대는 것이다. 신령이 시킨 대로라면 아무리 분탕질을 해도 쭈뼛거릴 게 없을 것이다.
난장판에서 피워지는 신명이 무엇보다도, 그리고 일차적으로 흥겹고 마음 들뜨는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뜨겁고 가벼운 앙분(昻奮)의 상태, 폭발적인 도취의 상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긴 보통 ‘신난다’ 는니 ‘신바람 난다’ 느니 아니면 ‘신명난다’ 혹은 ‘신명떠리’ 하느니 할 때, 그 말들이 어느 경우에나 ‘기분좋다’, ‘유쾌하다’, ‘흔쾌하다’는 뜻을 가진 것은 어김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신’의 제 뜻이 살아나질 못한다. 신명, 신바람, 신은 어느 경우에나 ‘신령과 더불어’ 혹은 ‘신령과 함께’ 라는 뜻을 더불어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신령과 더불어 겪는 유쾌한 앙분상태라는 표현만으로 한국인의 신명이 두루 다 밝혀 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래 가지고는 신명의 정체가 이제 겨우 밝혀지기 비롯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신명은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신에 지펴서 겪는 폭발적인 앙분의 상태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은 최소한의 정의에 불과한 것이다.
마을굿의 신명은 무엇보다 먼저 신(神)과의 합일(合一)이다. 신명을 제 몸에 직접 실었거나, 아니면 직접 몸에 실은 사람과 같은 마음의 상태에 젖음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도취와 흥분상태가 신명의 가장 기본적인 경험 내용이다. 신명의 나머지 속성은 모두 여기서 비롯한다. 마을굿의 신명으로는 다음에 이른바 ‘계절타기’를 들어야 한다. 계절이 번가르는 시기에 계절의 기운을 제 몸에 흠뻑 간직하게 되는 경험을 계절타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계절타기, 혹은 계절 기운타기는 마을굿이 통과의례다운 속성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마을굿은 한 공동체가 집단으로 올리는 계절적인 통과의례다. 계절의 한 고비가 다하고 이제 바야흐로 새 계절의 새로운 고비를 맞이하기 위해서 올리는 종교적인 행사를 계절적 통과의례라고 부른다.
마을굿이 지닌 계절적인 통과의례다운 뜻있는 시점에 계절의 기운을 제대로 탄 정신적 상황이다. 새 계절에 새로이 내리는 신령을 맞아 계절 기운을 타서 갖게 되는 앙분상태, 그것이 우리들의 신명이다. 이것은 신명의 자연론적인 혹은 우주론적인 체험이다. 계절타기란 말의 뜻은 봄기운타기란 말에서 그 뜻을 헤아리면 좋을 것이다. 이 자연론적인 신명은 계절의 번가름에서 경험되는 만큼 쇄신(刷新)의 신명이라는 면은 아울러 갖추게 된다.
다음으로 신명에는 인간론적인 국면이 끼여든다. 극히 인간적인 억눌린 욕구가 터뜨려지는 찰나가 다름 아닌 마을굿판, 그것도 난장판의 신명이기 때문이다. 성(性)의 본능으로 대표되는 야성적인 욕구, 평소에는 사회적 규범에 눌려서 웅크리고 있던 욕구들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아주 뜨거운 현장이 난장판이다. 이것은 프로이트 심리학식으로 표현한다면, 사회적 검열 기관을 대표하는 예고의 기능이 풀어지고 개인의 잠재적인 충동적 리비도가 뿜어져 올라오는 한때가 난장판의 신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난장판에서는 사회적 검열기관 및 그것을 대표하는 인간의식이 뒤로 처지는 만큼, 각종 사회적 규범이나 질서도 허물어진다. 전통 조선조사회 같으면 양반과 상민(常民)사이의 계층질서가 붕괴된다. 상민은 인간론적으로 억압된 그의 야성적 본능을 분출하였듯이, 억압된 사회적인 의식 또한 터뜨리는 것이다. 양반에게 내놓고 대거리하고 양반을 패대기치고 욕하고하는, 자유분방하다기 보다 반란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난장판이 지닌 ‘갈등의 의례’ 혹은 ‘반란에 의례’다운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상민들은 인간론적인 맺힘과 사회적인 맺힘을 동시에 푼다. 난장판의 신명을 말할 때, 이 인간론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테두리에 미친 신바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세속적으로는 이 대목이 가장 신바람나는 굿판의 신명인 것이다.
끝으로 난장에는 각종 놀이가 따른다기보다 놀이의 커다란 덩치가 바로 난장이다. 재인. 광대의 놀이, 씨름판, 투전판 등 갖가지 놀이판이 난장을 이룬다. 탈춤판도 물론 벌어진다. 이들 놀이는 신명을 한껏 돋우고 부추긴다. 거기에는 상당한 정도의 심미적(審美的) 흥겨움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계산에 넣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요약해 보자. 신령에 지핀 신명이라는 종교적 체험인 신명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론. 인간론적인 신명과 사회적인 신명이 어울려 피워지면 놀이의 신명이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것이다. 구태여 그림을 그려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런 세 겹의 동그라미를 통해 한국인의 신명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굿판, 그것도 난장판의 신명은 한국인의 맺힘을 위한 풀림의 커다란 장치다. 계절의 정체(停滯)라는 자연론적인 맺힘, 인간적 욕구의 맺힘, 사회적 갈등이 빚는 맺힘 - 이런 세 겹의 맺힘을 신령에 지핀 흥청대는 놀이로써 풀어나간 과정에서 겪는 복합적인 체험, 그것이 마을굿판의 신명이다.
이 풀림의 제도이자 기관(器官)이었던 마을굿판의 신명은 오래도록 우리들 전통사회의 생활의 리듬을 형성해 왔다. 살다 보면 맺히고 맺히면 풀고 하듯이 우리들은 마을굿을 올리며 살아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전통사회의 공통체가 지녔던 기본적 생활의 리듬이라는 이해를 앞세워 이제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들의 굿을 다시금 살펴보고 싶다. 마치 우리들 각자에 대한 속깊은 내성(內省)이듯이.
평안도 굿의 음악
이보형
평안도 굿을 보노라면 거리마다 무당이 색색의 갖가지 옷을 갈아입고 기(旗)와 창, 부채, 칼 따위 여러 기구를 차례로 갈아 쥐고, 짧은 노래 여러 가지를 부르는 사이사이마다 빨리 몰아 뛰는 모둠춤을 자주추고, 호령조나 호소하는 조로 공수를 자주 주며, 칼이나 창을 세우고 시루나 작두를 타는 등 곡예를 자주 벌이는데, 이는 황해도 굿이나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북부의 굿과 흡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평안도와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지방의 굿들은 서로 약간 다른 면도 있지만, 그 인접지역 즉 함경도나 강원도 동부, 경기도 남부지역의 굿과 견주어 보면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북부의 굿은 유사한 점이 많아. 이 지역 굿의 음악도 비슷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한 음악문화권으로 꼽는다.
평안도 굿에서 소리도 하고 춤도 추고 공수도 주고 하는 주무(主巫)를 무당만신이라 이르는 데 견주어, 장고를 앞에 놓고 앉아서 무당의 소리와 춤에 장단을 치고 소리와 공수를 받아 주는 조무(助巫)를 ‘술맞이’ 라 한다. 조무를 술맞이라 함은 무당의 ‘술’ 즉 ‘소리를 맞아주는 이’ 라는 뜻이겠는데, 황해도의 경우와 같이 무당은 신이 내린 뒤 신어머니에게서 굿학습을 마치고 굿을 하지만, 술맞이는 굿의 의식절차나 소리. 춤 따위를 훤히 꿰고 장고에 능한 여자인데, 경상도 . 전라도. 충청도에서 보이는 남자 술맞이는 볼 수 없다.
악 기
평안도 굿에서는 장고. 징 바라 등의 악기가 주로 쓰이며, 때로는 굉정을 쓰기도 한다. 경기도나 전라도에서 보이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선율악기는 쓰지 않는다. 큰 굿을 할 경우 삼현육각을 동원하기도 하나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며, 지금 평안도 굿에서 어쩌다가 동원되는 삼현잽이들은 평안도 잽이들이 아니라 서울굿에서 삼현 치는 잽이들이다.
장구는 서울굿에서 쓰는 것과 같다. 술맞이는 장구를 앞에 놓고 앉아서, 오른손에 가는 대나무로 만든 열채를 들고, 왼손에는 막대기에 헝겊을 싸서 만든 장구방망이를 들고 친다.
징은 본디 농악에서 쓰는 태징보다 얇은 것을 쓰는 것이나, 지금은 농악에서 쓰는 태징으로 대신하고 있다.
장 단
평안도 굿에는 장단이란 말을 장구라는 말로 쓴다. 염불장단을 염불장구, 덕담장단을 닥담장구라 부른다. 장단이란 말이 한자(漢子)로 된 것이고 또 조선 후기에 생긴 것으로 보아, 장구란 말이 장단이란 말보다 먼저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 굿에 쓰이는 장단에는 푸넘장구(푸념장단), 청배장구(청배장단), 앉은청배장구(앉은청배장단), 당올림장구, 염불장구, 잦은염불장구, 감응장구, 방애장구, 돈실러가는장구, 덕담장구, 비나수장구, 절장구 등이 있다.
푸넘장구는 푸념무가, 즉 청배로 만수받이를 “오늘날이야”하고 부를 때 치는 장단으로, 평안도 사투리로 푸념을 푸넘이라 이르는 데서 푸넘장구라는 호칭이 나온 것이다. 푸넘장구는 3분박(三分拍) 좀 느린 4 박자(8분의 12박자)이며, 서울지방 느린 굿거리장단에 맞는다. 장구는 “덩기딱, 딱기다, 덩기닥, 딱기닥”하고 친다.
덕담장구는 굿거리 장단과 비슷하다. 서울지방의 제석타령, 창부타령과 같은 타령무가와 같은 축원덕담무가를 평안도 굿에서는 덕담이라 한다. 덕담장구는 3분박, 보통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 로 굿거리장단에 맞으며, “덩ㅡ따, 딱궁닥, 덩ㅡ따, 딱궁닥”하고 친다. 덕담장구는 푸넘장구보다 좀 빠르다.
염불장구는 “에헤 에헤야”하고 염불무가를 부를 때 치는 장단이지, ‘염불장단’이라 하겠다. 평안도 굿의 염불장구는 2분박 좀 느린 12박자(4분의 12박자)로 중몰이장단에 맞는다.
비나수 장구는 평안도 굿에서 무당이 굿상 앞에서 축원하는 비나수무가에 치는 장단으로, 3분박 빠른 4박자 (8분의 12박자)로 볶는 타령 장단에 맞는다. 장구는 “덩ㅡ따, 딱ㅡ따, 덩ㅡ따, 딱ㅡ따”하고 친다.
돈실거나는 장구는 서도굿에서 돈실러가는 무가를 부를 때 치는 장단이다. 돈실러가는장구는 3분박 느린 12박자 (8분의 12박자)이며, 느린 중중몰이장단에 맞는다. 장구는 “덩궁딱, 딱궁딱, 덩궁딱, 딱궁딱” 하고 친다.
춤장단은 굿거리형과 허튼타령형과 당악형이 있다. 굿거리형은 굿거리장구하 하며 서울 굿거리와 같이 3분박 좀 느린 4박자(8분의 12박자)이며, 장구는 “덩ㅡ덩, 궁더더궁, 덩ㅡ덩, 궁더더궁”하고 친다. 허튼타령형은 춤장단은 3분박 보통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이며, ‘덩덕궁’ 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구는 “덩ㅡ따, 궁따궁, 궁ㅡ따, 궁딱ㅡ”하고 친다.
당악형 춤장단은 막장단이라 이르는데, 서울굿의 당악장단의 경우와 같이 3분박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이며, 장구는 “덩ㅡ ㅡ, 궁ㅡ따, 궁ㅡ따, 궁ㅡ ㅡ”하고 친다.
선 율
평안도 굿에서 무당이 부르는 무가의 선율은 수심가 긴아리와 같은, 평안도 민요나 산염불 난봉가와 같은 황해도 민요에서 흔히 보이는 수심가토리 즉 서도민요조로 된 것도 있고, 창부타령. 방아타령과 같은 경기민요에서 흔히 보이는 경토리 즉 경기민요로 된 것도 있는바, 흔히 수심가토리에 경토리의 특징이 좀 섞인 경우가 많다.
수심가토리란 선율의 구성음이 ‘레 미 솔 라 도’로 되어 있고, ‘레’나 ‘라’로 마치며, ‘라’에서 떠는 목을 많이 쓰고 ‘도’에서 ‘라’로 흘러내는 목을 많이 쓰는 민요토리를 가리키는바, 평안도 무가에서는 염불소리에서 짙은 수심가토리를 볼 수 있다.
경토리란 선율의 구성음이 ‘솔 라 도 레 미’ 로 되어 있고, ‘솔’이나 ‘도’로 마치며, ‘미’에서 약간 꺾고 ‘레’에서 약간 떠는 목을 쓰는 민요토리를 가리키는바, 평안도 무가에서는 덕담무가에서 경토리에 가까운 선율을 볼 수 있다.
의식에서의 음악의 구성
평안도 굿에는 여러 가지 굿이 있으나 여기에 소개된 것은 다리굿 즉 지노귀새남이다. 이 굿은 당울림. 주당풀이. 청배 . 칠성. 영정. 감응. 서낭 텃대감. 도당 다릿발. 수왕세텬. 시왕가르기. 뒷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안도 다릿굿의 각 거리는 음악적 구성이 서로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으나, 맨처음 푸넘장단으로 만수받이를 하든가 비나수 청배장단으로 청배무가를 부르고 공수와 춤을 반복하고 덕담무가. 돈실러가는 무가. 염불무가 따위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정에서는 만신이 굿상 앞에 앉아서 굿거리형 푸넘장단에 수심가토리로 푸넘무가를 청배로 부른다. 만신이 “오늘날이야” 하고 한 장단을 메기면 술맞이가 “오늘날이야”하고 만수받이로 한 장단을 받는다.
푸넘무가를 마치고 일어서서 볶는타령형 장단으로 춤을 추며 무가를 부른다. 무당은 공수를 주고 타령춤 추고 하기를 여러번 반복하고 빠른 당악춤을 몰아 춘 다음 잦은 굿거리형장단에 경토리에 가까운 소리조로 덕담무가를 부르고 공수와 당악춤을 반복하고 마친다.
감응에서는 여러 만신이 돌며 염불무가를 부르는데, 주무는 꽹쇠 치고 조무는 장삼 입고 고깔을 쓰고 느린 중중몰이형 돈실러가는 장구에 수심가톨리로 염불가를 합창한다. 만신은 염불무가를 마치고 잦은타령형장단에 춤을 추고 당악형 춤으로 몰아간다. 그런 다음 겉옷을 차례로 벗어가며 다시 타령형 춤을 추고, 당악형 춤으로 몰아간 다음 가족들의 무감에 들어간다.
서낭굿에서는 좀 빠른 타령형장단을 치며 길베를 늘이우고 만신이 굿상에 놓인 시루 앞에 앉아서 백지를 비비면서 비나수장단에 수심가토리로 무가를 부른다. 무당은 일어서서 공수를 주고 중몰이형 염불장구에 수심가토리로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무가를 부른다. 그리고 나서 공수를 주고 죄인을 잡아다 집장사령으로 하여금 곤장치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공수 주고 허튼타령형장단에 춤을 추고 길베 위에 깔린 돈을 차례로 밟으며 길베를 건너간다.
당악형장단에 빠른 춤을 추며, 무당은 베를 걷어 쥐고 춤추고, 다른 이에게 넘겨 주고 시루 앞에서 신칼 들고 춤추고, 삼지창 들고 춤추고, 갑옷 입고 공수 주고, 양손에 큰 칼과 창을 들고 춤추다가 작두 들고 춤추고, 시루를 들고 춤추고, 이렇게 갖가지 의식을 연행한 다음 덕담장구에 경토리 비슷하게 돈실러가는 타령을 부른다. 겉옷을 벗어 평복 차림에 붉은 치마를 머리에 이고 공수를 주고, 창을 들고 굿거리형 푸넘장단에 수심가토리에 경토리를 곁들여 “오늘날이야”하고 푸넘무가를 부르고 공수 주고 칼을 던지고 마친다.
망자 맞는 거리에서는 절장단에 유족들이 제상에 헌작하고 재배한다. 무당은 “아아 에에”하고 구음으로 소리를 뽑는다.
텃대감에서는 무당이 굿상 앞에 앉아 손을 비비면서 비나수장단에 수심가토리로 축원하고, 술맞이는 비나수장단을 “궁ㅡ ㅡ, 땅ㅡ따” 하고 친다. 만신은 타령형장단에 춤을 추다가 당악형장단으로 몰아 춤을 추고 나서 공수 주고, 다시 당악형장단에 춤추고 굿거리형 덕담장구에 경토리로 덕담무가를 부르고 나서 돈실러가는장구에 수심가토리로 ‘돈실러가는무가’를 부른다. 끝에는 푸넘무가를 부르고 당악춤을 추고 마친다.
도당대감에서는 무당이 앉아서 비나수장단 비슷하게 앉은청배무가를 부르고 서서 공수 주고 당악형장단에 춤추고 허튼타령형장단에 춤추고 돈실러가는장구에 수심가토리로 돈실러가는무가를 부르고, 공수와 당악춤을 반복하고 비나수장단에 비나수무가를 부르며 공수와 당악 춤을 반복하고 마친다.
다릿발에서는 굿상 앞에 꽹쇠 들고 비나수장단에 앉은청배로 죽은 사람 넋두리하고 일어서서 꽹쇠 치며 긴염불과 잦은염불을 차례로 부르며 굿청을 돌고 앉아서 비나수장단에 꽹쇠 치며 무가를 부르고 당악장단에 꽃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나와서 공수 주고 굿거리형장단에 덕담무가를 부르고 공수와 당악춤을 반복하고 마친다.
사재거리에서는 무당이 남쾌자에 삼베를 걸치고 전립을 쓰고 양손에 칼을 들고 푸넘장단으로 “오늘날이야” 하고 소리하고 볶는 타령장단으로 춤을 추다가 마당에 나가 칼을 휘저으며 춤추고 맴돌다 칼을 들고 망자를 잡아들이는 시늉을 하고 막장단에 춤을 몰아주고 전립을 벗고 칼을 던지고 공수를 준다.
세경돌기에서 무당이 장삼 입고 가사 띠고 빗갓 쓰고 돌고 절하면 잽이. 술맞이. 가족이 주무를 향해 한 줄로 늘어서서 굿상에 절한 다음 중몰이형 염불장단에 수심가톨리로 염불무가를 부르며 오른편으로 둥글게 돈다. 중중몰이형 잦은염불장단에 염불무가를 부르며 돌고, 막장단에 오른편으로 빨리 돈다. 마당 한편으로 비껴서면 마당 가운데 횃대를 사방에 세운다. 굿패는 막장단에 굿당에 절하고 한줄로 늘어서고 무당은 꽹쇠로 비나수장단을 치며 무가를 부른다.
당에 절하고 굿패가 물러서면 무당은 공수 주고 황철릭에 고깔을 쓰고 바라춤을 춘다.
수왕세텬이라 하여 시왕서천에서 무당이 공수 주고 염불무가를 부르며 회중으로부터 시왕돈을 걷는다. 막장단에 춤추고 공중에 베를 걸고 연꽃을 걸고 신을 내리고 유족들을 엎드리게 하고 막장단에 칼로 잡귀를 쫓아 주고 칼을 던지고 공수를 주고 덕담무가를 부른다.
시왕포가르기에서는 마당에 베를 늘이우고 무당과 잽이들이 염불을 부르며 세경돌고 잦은염불로 넘기고 전진후퇴한 다음 베 앞에서 푸넘무가를 부르고 나서 막장단에 축원한다.
시왕가르기에서는 시왕베를 늘이우고 무당이 푸넘무가를 부르고 공수 주고 베를 가른 다음 무당이 베 사이에서 바라를 들고 볶는타령형 장단에 춤추고 막장단(당악장단)으로 춤을 몰아간 다음 베를 감아 들고 굿당 앞에서 절하고 넘겨준다.
염불에 들어가면 무당이 하늘에 걸린 넋베를 양손에 들고 왔다갔다 하며 긴 염불무가를 부르고 다리베 여러개를 여기저기 건너다닌다. 길베를 놓고 베 밑으로 왔다갔다 하며 잦은염불을 부르고 푸넘무가를 부르고 공수 주고 돈실러가는무가를 부르고 공수 주고 긴염불을 부르고 길베를 걷는다.
뒷전에서는 무당이 서서 칼을 들고 푸넘무가를 부르고 온갖 혼신을 부르고 칼로 가시고 푸넘무가를 불러 수비상에서 수비치고 막장단에 음식을 뿌리고 굶주린 혼신이 먹는 시늉하고 말로 축원하고 푸넘무가를 부르고 말로 축원한다.
첫댓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허락없이 모셔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