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뱀의해 정월초하루 해가 바뀌어 나이가 한 살 더 먹지만, 덕분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추억을 만들고 건강과 축복이 깃드는 한해가 되길 소망하며, 복 많이 받아 소원 성취하시기 바라나이다.
2025-1-29 “철도운전” 기고문 정몽주선생묘역 탐방기
자유인은 설날이라 아들 며느리 손녀딸과 점심을 같이하고, 오후에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한참에 책장을 살펴보다가 오래전에 발간된 회보한권이 손에 잡히여 내방 아랬목에 누워 찬찬히 읽어 보았는디 내가 기고하였던 기행문이 실려 있었다.
유적지를 종종 찾는 습관으로 2011년 정몽주선생묘역을 탐방하였는데 “정몽주선생묘역탐방기”를 2012년12월에 발간된“철도운전”잡지에 9page가량의 기고문을 한국철도운전기술협회로 송부한바, 기고문이 채택되여 당시 10만원의 원고료를 받아 동료들과 식사한적이 생각나는구먼.
2012년 철도운전 제11호 목차를 보니 김칠환 전 익산소장님도 “열차운전안내장치”에 대하여 기고하였다.
김칠환소장님은 2005.1.1.-2006.6.30.(1년6개월간) 익기소장으로 재임하시었으며 장항선 청소역 근방이 본가이고 국립철도고등학교 2회를 졸업한 수재이시다.
내가 생각나는 것은 2005.3.15. 운장산 익기승소 산악회 등산(시산제)한 것이 생각이 난다.
경칩이 지나면 개구리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날 눈보라가 많이 쳐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아 몇 번을 넘어졌는지 물팎이 다 까지고 말았다.
날씨도 많이 추워, 시산제후 점심을 먹는디 손이 꽁꽁 얼어버렸다.
어느시인의 말처럼 추억이란 잊어버리려 해도 잊을 수 없어 평생토록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마음속의 일기장이며, 추억은 지나간 그리움의 시간들이기에 그래서 추억하게 되어 감개무량하군요.
사람사는 것이 다 그런것이지.
오후 다섯시가 되어 천연보약을 먹으러 모현공원으로 향하였다.
천연보약이 별것이여.
몸을 움직이고 운동하면 천연보약이여.
모현공원 걷기 1만보, 역기내리기40회, 훌라후프 5000회 하였다.
누죽걸산이란 말이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뜻의 줄임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노후의 건강은 집 이서 누워서 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몸을 귀찮게 움직여 땀 흘리는 것이 최고의 건강비법입니다.
조동화의 벗님들!
2025년 설날 세모의 시간인디 조동화인생과 내란수괴 윤석열과 비교해보았다.
조동화는 홍안의 시절에 철도에 입문하여 평범한 가정의 아내와 살면서 아들도 셋을 낳아 키우고 장성하여 황혼의 세월을 즐기며 세상을 여행하며 인생의 백전노장이 되어 삶의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고 있소이다.
반국가 내란수괴 윤석열은 쿠테타에 실패하여 감옥에 있는디, 검찰에 근무하며 수많은 사건을 처리하며 죄없는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었다. 검찰이 뭐여 국가가 허가낸 도둑놈이라고 표현하면 틀린말은 아닐꺼여.
서울대 법학과를 나온 윤석열은 사실 조동화보다 못한 인생을 산거여.
반국가사범 내란수괴 윤석열은 말이다 결혼도 정상적인 여자와 못하였지.
윤석열은 아내로 맞이한 김건희는 어떤사람이여. 신문이나 방송에 여러남자 거친 접대부출신이라고 그러지 않는가.
그러고 자식도 없으니 모성애가 있겠어.
왜 자식이 없어. 질문한번 해볼까.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세끼 낳는 것이 상식인디 말이여 여러남자 맛을보면 세끼를 만들수가 없지.
세상살라면 자식도 낳아봐야 세상사는 재미가 있는거여.
항간에는 내란수괴 윤석열이 쿠테타를 일으킨 원인이 김건희때문이라는 말이 떠도는디,
김건희는 남자관계가 복잡하기도 하지만, 윤석열을 등에 업고 김영선국회의원 공천에 개입하는하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사건(23억수익), 명품백 받은사건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검찰이 뭉개었지 않은가.
명태균사건이 창원지검에서 수사하여 언론에 수면위로 올라오고 있는디 어마어마한 사건이여.
명태균사건은 가짜 여론조작으로 윤석열부터 오세훈 홍준표 권성동 박완수경남도지사 창원의창 김영선국회의원이 관련되여 있다혀.
국민의힘 대통령부터 서울시장 강원도지사 경남도지사등이 가짜여론조작으로 당선되었다면 큰일 아닌가.
뿐만 아니여. 국회의원도 상당수가 있지.
김영선은 세비의 절반을 명태균한테 생활비로 주었다는 것은 세인이 다 알다시피 사실로 확인 되었다.
김건희는 윤석열을 이용하여 각종이권과 국정의 모든분야에 개입하여 시도지사 국회의원의 공천까지도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여.
심지여 경호처에도 김건희라인이 존재한다고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구나.
반국가사범 내란수괴 우두머리가 된 윤석열한테 한마디허겋다.
야 미친놈아!
각시 잘못이 있으면 각시를 감옥에 보내야지 쿠테타에 실패하여 대통령 반납허고 평생을 감옥에 살게 된 윤석열 참말 미친놈이여.
도야지보다 못한 놈, 머리가 바가가 되얐냐.
너 이놈 내란수괴 윤석열 감옥에 넣은놈이 누군지 알어.
네가 심복으로 앉혀놓은 장차관 검찰총장 네 부하들이여 이놈아.
감옥에서 죄값달게 받어 미친놈아
조동화만의 삶!
2025년의 희망찬 세상과 함께 세월을 낚으며 세상사람들과 즐거움과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 가자.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시다.
<2012.12월에 발간된 “철도운전” 회보 목차와 조동화가 퇴직 후 한국운전기술협회 계약직으로 근무할 당시에 기고한 정몽주선생묘역탐방기 서문을 스캔하여 보았다.
한국철도운전기술협회는 사단법인으로서 2011.1.1-2014.1.30까지 조동화가 계약직으로 근무하였던 일터였다.
목차를 보니 김칠환소장님도 “철도운전안내장치”를 기고하시었네요.
세월을 살다보니 추억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는 계절이 되어 옛날을 회상해 보았수다.
추억이란 언제나 그리운거여.>
<2005.3.15 익산기관차사무소 산악회에서 운장산 등산을 하였다. 무사고기원을 위하여 돼지머리와 음식을 준비하여 시산제도 지내었다.
30여 회원과 더불어 김칠환소장님과 조동화도 참석했는데, 춘삼월이 엄동설한으로 변하여 몹시도 추웠었다.
20년이 흐른 사진속 얼굴들 모습을 보니 현업에 남아 있는이는 두어명 빼 놓고는 거의 다 철도를 은퇴하여 야인으로 생활하겠지>
<2005.3.15 운장산 익기소 산악회 시산제 다녀온 소감을 김칠환소장님 자서전 “익산통신”에 남겨 놓았네요.
그날 춘삼월이라 따뜻할줄 알았는데 춥긴 많이 추었네요.
추워서 많이들 벌벌 떨면서 등산한 기억이 새롭내요.
김칠환소장님 무궁한 행운을 기원합니다.>
<1/29 설날 오후 늦은시간 17:00 모현공원으로 걷기운동 1만보와 운동기구 있는곳에서 훌라후프 5000개 역기내리기 40개 하였으면 천연보약 잘 먹은거다.
모현공원의 시계탑은 17:14분을 지나고 있다.
저녁은 LA갈비로 맛있게 먹었수다.
설명절날 눈이 내려 모현공원은 온통 눈천지였다.>
◐정몽주선생 묘역 탐방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문수산에는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선생(연일정씨) 묘역이 있으며 바로 오른쪽 50m부근에 정몽주선생의 증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의 묘가 있읍니다. 2011-10-27 용인 문수산 정몽주선생묘역과 정몽주선생의 증손녀사위 이석형묘를 답사하고, 600여년전의 정몽주선생의 순절사를 찾아 보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왕조를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포은 선생은 조선이 개국된후 이방원은 관작을 복구시키고 충신으로 추앙, 개성의 묘소를 고향에 옮기도록 허락하니 용인의 문수산에 묘소를 쓰고, 연일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니 충신의 명당자리를 신이 점지한 것일까?
조선에서 정몽주선생을 충신으로 추앙한후 문수산일대 240만평의 사패지를 정몽주선생 후손들에서 하사하여 묘소를 관리케 하였다.
문수산 자락 포은 선생의 묘소와 비슷한 모습으로 오른쪽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이석형의 묘가 있다. 연일 정씨 묘역 문수산 한 쪽을 이석형과 부인 정씨가 합장하여 크게 차지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종손에 의해서 잘 돌보아 지고 있으며 해마다 서너 차례의 시제를 지내는데 그 중에서 가을에 모셔지는 시제는 그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방속국에서 헬기를 동원하여 촬영해 갈 정도라고 한다. 또한 포은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모현면 능원리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어쨌든 이 고장의 지명도 원래는 쇄포면이었으나, 포은 선생의 묘소가 능원리 문수산에 모셔진 후로 충현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1411년부터 모현(慕賢)면이라 부르게 되었다니 두고두고 포은 선생을 모시고 기리며 살아야 할 땅이다.
용인이 개발되면서 문수산의 토지의 일부가 도로로 들어가고, 일부토지를 팔아 연일정씨 문중은 토지보상금을 재정삼아 정몽주선생묘역을 단장하고, 포은학술대회, 포은문화재 개최등 포은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종친들의 장학사업등 종친회활동이 활발하다 합니다.
정몽주선생 묘역을 답사를 위해 정몽주선생의 본관을 찾아보니 연일정씨로 작고하신 나의 어머니의 본관과 똑 같음을 이제사 확인하여 나의 어머님도 충신의 후예라는것을 알게 되었네요.
익산의 배산부근 옥구동이라는 마을이 나의 외가 마을로 연일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 배산도 연일정씨 사패지로 연일정씨 묘들이 많다.
정몽주선생은 1392년 음력4월4일 이방원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암살 당했으나 정몽주선생의 순절정신이 왜곡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게 된것은 절의를 지키고 비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에도 영원히 이름이 남게 되었음을 상기하며 당당하게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고려충신 정몽주선생 묘역앞에 서다.
묘역 앞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고 좌우로는 새로 조성한 문인석이 그 옆에는 옛 문인석이 좌우로 서 있다. 충절을 지킨 정몽주선생은 개성에서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 도중 상여행렬의 명정이 회호리 바람에 날라가 따라가보니 보기드문 명당이라는 지관의 말에 지금의 자리가 정몽주선생의 묘역이 되었답니다.>
<고려충신 정몽주선생의 묘에 올라와 충절을 생각해보며 절을 올리다.>
<묘비에는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수백년 세월에도 글씨가 비교적 선명하다. 1517년(중종12년)에 태학생들이 포은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왕에게 청원하여 세워졌다.>
<정몽주선생 묘의 봉분 뒤로 올라가서 내려다본 전경 모습이다.>
<정몽주선생의 굳은 충절의 시 단심가 비석에 서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이것이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이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신도비이다. 정몽주선생이 순절한후 송시열이 글을 짓고 280여년만(숙종25년 1699년)에 신도비를 세우다.>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역 비석이다.이석형선생은 연일정씨 부인과 합장되었음이 비석을 통해 알수 있다.>
<이석형선생과 정씨부인의 합장 묘역이다. 정몽주선생의 묘역에서 약 50m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석형선생의 후손 연안이씨들이 여기에 설치된 비석을 통해 융성을 알수 있다. 어느 문중 비석보다도 웅장하고 많아보인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달성 서씨와 함께 조선의 삼대 명문중의 하나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며 이석형의 후손들이다. 이석형선생의 묘자리가 명당은 명당인가 보다.>
◐정몽주선생 순절 619년의 이야기◑
===충신 포은 정몽주선생 요약===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3번지 -문화재지정 : 경기도 기념물 제1호 -1337년 경북 영천군 동쪽에 있는 우항리 출생 -1392년 (56세)4월 4일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아우 3명도 살해됨 -아들 정종성(鄭宗誠), 정종본(鄭宗本)을 살려 두었음 -1517년(중종 12년) 왕명에 의하여 묘역 일대 임야 전담 등 2백40여만평을 사패지 (賜牌地 : 나라에서 내려 준 땅)로 지정 묘소를 관리 -정몽주 후손은 조선조의 역대 왕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세금이 면제되거나 땅을 하사 받거나 혹은 벼슬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하늘이 점지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조선의 역대 왕릉보다 더 좋아 문수산의 쌍유혈(雙穴)로 이루워진 천하명당, 진실로아름다운곳이다. -조선(朝鮮)이 개국되고 고려의 역사와 인물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어도 태종 (太宗)은 권 근(權 近)의 상소를 받아들여 몽주의 묘(墓)를 고향인 영천(永川) 으로 이장할 것을 허락하였고, 몽주의 관작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하고 회유책으로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 주었다. 최영장군,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삼걸(高麗三傑)로 불려지기도 하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더불어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 받기도 한다. -아버지 일성 부원군이 졸하였을 때 그는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하였으며, 어머니 변한국부인이 졸하였을 때도 하루도 모자람이 없는 3년 시묘를 하였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원나라와 수백년간 교유한 관계로 당시 사회에서는 부모 탈상을 일년 혹은 100일에 하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태산같은 심지로 부모의 묘를 도합 6년이나 지켰던 것이다. -용인(龍仁)이 세거지(世居地)가 된 시원(始源)은 몽주(夢周)가 태종 3년 충신 (忠臣)으로 추존되고 용인(龍仁)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받은 데에 연유한다. 그리하여 수백년 동안 자손들이 그곳에 정착, 번연(繁衍)하게 되었다. -가을에 모셔지는 시제는 그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방송국에서 헬기를 동원하여 촬영 취재 |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지주사공파 습명(襲明)의 11세손으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이며 반만년 한국사를 대표하는 충신(忠臣)으로 일컬어지고 있다.조선시대의 주자학자들인 기대승, 김장생, 송시열, 등은 한국 유학의 원류을 밝히면서 한결같이 그를 비조로 꼽았다. 그러나 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외교적인 면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이다. 고려 말에는 중국의 명조와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가 더욱 복잡다단해졌다. 고려의 조정에서는 그를 여러 차례 외교사절로 파견하여 이들 나라와 교섭을 벌였던 바, 그는 명과 일본 두 나라를 드나들며 이들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외교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수완이 워낙 뛰어나 국내외의 정계에서 그를 우러러볼 정도 였으며, 고려 말기 국지의 정치활동가로서 자타가 공인할 정도가 되었다.포은 몽주(夢周)는 1337년(충숙왕 복위 6년)에 경북 영천에서 일성부원군 정운관(鄭云瓘)과 후일 선생에게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유명한 시조로 아들을 훈계했던 현철한 어머니 영천이씨 사이에서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아름다운 난초화분을 안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화분을 깨뜨리는 꿈을 꾸고 사흘 후에 낳았다고 하여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몽란이 아홉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대낮에 물레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깜빡 잠이들어 꿈을 꾸었는데, 금빛나는 한 마리의 용이 뜰의 배나무 위에서 배를 따 먹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깨어나 나무를 쳐다보니 몽란이 배나무 위에서 용처럼 웃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의 어머니는 몽(夢)자에다 용(龍)자를 붙여 몽룡(夢龍)이라고 고쳐 불렀다.몽룡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벽 그의 아버지 운관(云瓘)의 꿈에 중국 고대에 자기 형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던 주공(周公)이 나타나 "몽룡은 후세에까지 가문과 명성을 길이 빛내게 할 것이니 소중히 키워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주공(周公)의 주(周)자를 따서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 몽주는 자라면서 충(忠)과 효(孝)와 의(義)가 남달리 뛰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3일 동안이나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였으며 당시의 풍습이 부모의 상복을 겨우 백일밖에 입지 않았는데도 묘소 옆에다 여막을 짓고 산중에서 혼자 3년 동안이나 상식을 올리며 효(孝)를 다하자 세상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했고 공민왕도 그의 집에 정표(旌表)를 세워 표창했다고 한다.1360년 24세에 연달아 삼장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몽주는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순충윤도동덕좌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익양군 충의백에 이르렀고, 일찍이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고려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진충갈력(盡忠竭力)하면서 보수주의자들과 결별하여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친함)의 노선을 따름으로써 이성계(李成桂) 등과 손을 잡고 국제 정세에 순응하여 고려의 나아갈 길을 열고자 했다. 선생은 배원친명책(排元親明策)을 취하면서도 이성계 등의 급진정책을 견제하면서 중용을 택했다. 그리하여 공민왕21년(1372)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높은 식견과 고결한 인품으로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을 감동시켜 여명(麗明)관계의 우호적인 길을 트고 돌아왔다. 이 때의 교통로는 북쪽의 원나라를 의식하여 뱃길로 다녔는데 돌라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고려사람 11명이 모두 죽고 선생만 겨우 13일만에 구조되었고, 사경을 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국교문서만은 온전히 보존하여 돌라왔다고 한다.그 후로 명나라에 여러 차레 드나들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를 적절히 해결했으면서도 친원파에 몰리어 언양에서 1년 여의 유배생활을 했다. 일본과의 왜구문제가 실 타래처럼 꼬이자 이를 풀기 위하여 선생은 풀려났고, 돌아온 선생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미개하여 표독하기만 하던 왜인들을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원숙한 외교수완으로 설복시켜 기왕에 그들이 납치해 갔던 고려인 포로 700여명을 그들이 제공하는 열 척의 배에 싣고 돌아 옴으로써 조정은 물론, 그 가족들로부터 어버이처럼 우러름을 받기도 했다.선생과 이성계와의 인연은 일찍이 공민왕12년(1363)에 이성계가 여진족을 토벌할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하여 여러 계책으로 그를 도와 승리케 한데서 비롯 되었고, 그 후 우왕 3년(1377)에도 지리산 왜구 소탕전에 함께 참가하여 지략을 제공함으로써 큰 공을 세우게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자기보다 두 살 위인 백전백승의 젊은 장수 이성계와 정의가 두터웠고, 고려의 중흥을 위해서는 쓰러져가는 원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를 가까이 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우왕 14년(1388)에 조정이 정명군(征明軍)을 출진시키려하자 그 동안 애써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온 선생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최영장군을 제거하려 할 때도 극구 만류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드디어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면서 이성계가 문하시중(門下侍中: 수상)이 되고 선생은 그들의 요청에 못 이겨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부수상)이 되었으나 그들의 속셈을 간파한 선생은 자기의 소신을 펼 수 있는 기회를 포착코자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성계가 해주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촌가에서 치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이 기회에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을 탄핵하여 귀양 보내고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 이 기미를 알아챈 이성계의 아들 방원이 급히 자기 아버지를 개성으로 오게 하여 선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때부터 방원은 정뭉주를 제거하려 했으나 워낙 조야에 신망이 두터운 선생을 제거할 구실이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조준(趙浚) 등을 중심으로 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혁명 모의(革命謀議)가 한창 무르익던 어느 날 밤 몽주는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문병을 구실로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방원(李芳遠 : 이성계의 아들, 후에 태종이 됨)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몽주의 심중을 떠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首)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如此赤何如 如彼赤何如)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城隍堂後垣 頹 赤何如)우리도 이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我輩苦此爲 不死赤何如)
이 시조가 널이 알려진 하여가(何如歌)이다. 몽주는 이 시(詩)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술잔을 보내며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이것이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이다.
몽주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안 방원(芳遠)은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심복 부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군기고(軍器庫)에서 쇠뭉치를 꺼내어 선지교(選地橋) 밑에 숨어 있다가 몽주가 지나갈 때 치라고 하였다. 몽주는 이 모의 사실을 변중량(卞中良)을 통하여 미리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각오한지 오래된 죽음을 조용히 기다렸다.살해되던 날 아침 조상들의 신위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충효를 숭상하는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한사코 말려도 뒤를 따르는 녹사(錄事) 김경조(金慶祚)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친구 성여완(成汝完)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다시 말을 타면서 수행하는 녹사 김경조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고 하자, 녹사는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하였다.몽주는 말을 거꾸로 타고 김경조에게 말을 끌라 하면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하며 선지교로 향하였다.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조영규를 비롯한 4∼5명의 괴한이 나타나 쇠뭉치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앞에서 가던 김경조가 먼저 쓰러지고 이어 몽주가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이때 몽주의 나이는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선지교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고 하여 선지교를〈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되었다. 몽주의 시체는 죄과(罪過)로 몰았기 때문에 내버려두었으나 송악산(松嶽山) 중들이 염습(殮襲)하여 풍덕(豊德) 땅에 묻었다. 선생을 제거한 이성계 일파는 거리낌 없이 자기들의 계획을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그 해 7월에 자기들이 세운 공양왕마저 제거하고 이성계가 등극하기에 이르렀다.통일 신라(統一新羅)에 이어 34대왕(大王)을 거치면서 475년간 지속되었던 고려 왕조(高麗王朝)는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지만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와 새 왕조 창업을 꿈꾸던 이성계의 신흥 세력이 불붙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의(義)를 살렸던 몽주의 충정과 일편단심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역사의 터전에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조선(朝鮮)이 개국되고 고려의 역사와 인물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어도 태종(太宗)은 권 근(權 近)의 상소를 받아들여 몽주의 묘(墓)를 고향인 영천(永川)으로 이장할 것을 허락하였고, 몽주의 관작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회유책으로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 주었다. 최영장군,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삼걸(高麗三傑)로 불려지기도 하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더불어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 받기도 한다. 몽주의 묘(墓)를 이장할 때 면례(緬禮) 행렬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水枝面)에 이르자 앞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 지금의 묘자리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다 안장하였다고 한다.매년 포은의 출생지인 경북 영천과 묘소가 있는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서 학술대회 및 백일장, 민속공연, 추모제례 등 포은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포은의 넋이 점지한 능원리의 명당
널리 알다시피 포은은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회생시키려다 개성 선죽교에 희생되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순절한지 9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충절과 학문이 인정되었다. 조선 태종 즉위년(1401)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의 작훈을 내렸다. 태종 6년(1406) 3월에는 개성의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본래는 포은의 면례지가 능원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살피건대, 생전에 용인지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포은의 장례를 지금의 위치에 모실 까닭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포은이 선죽교에서 피살된 직후에는 개성의 풍덕에 처음 장례를 지냈었다. 그후 신원되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장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면례 행렬이 지금의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신기한 일이 생겼다. 앞에 내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라가버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면례꾼들이 따라가보니 그 명정은 지금의 묘역에 떨어졌다. 지관을 불러 확인해보니 보기드문 명당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숙의한 끝에 포은선생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장례를 모시기로 하였다. 이야말로 포은선생의 넋이 점지한 명당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로인하여 용인지역과는 직접적인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포은선생의 묘소를 용인에 모시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후손들이 묘막을 짓고 살기 시작한 이래로 오늘날 능원리는 연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포은선생의 묘소와 관련된 지명으로,수지면에 풍덕내가 있다.이는 본래 [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는 뜻에서 비롯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신다]의 뜻인 [來]가 후대에 [내(川)]로 변이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 유래도 모르고 그저 풍덕천이라고 부른다.포은선생의 묘소는 1972년에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여러차례에 걸쳐 1980년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 재실 등 대대적으로 정화사업을 실시하였다. 묘소의 곡담은 본래 벽돌로 쌓았던 것인데, 수백년간 보수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것은 거의 소실되고, 곡담 양끝에 몇개만 남아 있다.포은의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전한다. 묘표는 조선 중종 12년(1517)에 태학생들이 포은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이다. 포은의 묘역에 남아 있는 벽돌이나 묘표 등을 고려 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이다. 조선조에 비석을 세웠음에도 전면에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겼다. 굳이 벼슬을 고려때 것으로 쓰고, 조선조에 추증된 문충공(文忠公)이라 쓰지 않았다. 그 뜻은 포은이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본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포은선생 신도비는 조선 숙종 25년(1699)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이 썼고,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 전액은 김수항이 썼다. 처음에 이 비석을 세울 때 조선조에서 추증한 문형(文衡)의 직함을 새겨 비를 세웠더니, 벼락이 떨어져 파괴되었다고한다. 그래서 고려조의 직함을 다시 새겨 세웠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아무런 변고없이 전하고 있다.
☞용인시 모현면에 전하는 포은의 유적들
용인지역에서 포은선생의 얼을 기리게 된 것은 묘소를 모신 이후부터이다. 그의 후손들이 모현면 능원리에 묘막을 짓고 거주한 이래로, 지금은 집성촌을 이루었다. 동리명칭도 그 이전에는 쇄포천이었다. 포은선생의 묘소를 모신 뒤에 바로 모현촌으로 지명도 바뀌었다. 묘소 부근의 묘막은 지금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로 바뀌었다.모현 능원리 내곡에는 포은선생 종가가 있으며, 여기에는 가묘(家廟)인 포은영당(圃隱影堂)이 있다. 포은영당은 숙종 5년(1679)에 민정중의 청원으로 임금이 직접 필요한 건축자재를 하사하여 짓게한 건물이다.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영당안에는 영정잠실 위패 영정 3점이 있다. 그리고 포은이 생전에 왕래한 서간과 친필이 수록된 {古簡集}과 숙종의 어제어필로 된 추모시첩도 보관되어 있다. 아울러 숙종의 추모시는 3장의 목판에 판각하여 현판으로 걸어놓았다. 이들 자료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포은의 종가 가까이에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충렬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선조9년(1576)에 건립하고, 4년 뒤에 사액되었다. 지금도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내외삼문을 비롯하여 강당, 사우 등 서원의 필수적인 시설을 모두 갖추었다. 한 때 이 서원에서 포은과 정암 조광조의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수지면 상현리에 심곡서원을 건립하면서 정암의 위패는 올겨갔다. 그후 포은의 손자인 설곡 정보(鄭保)와 죽창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된 바 있으나, 그 부당함이 인정되어 곧바로 복원되었다. 충렬서원은 포은을 주벽으로 두 사람의 향사를 모시는 한편으로 교육기관으로서도 충분히 일익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용인의 대학자 도암 이재선생이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다. 모현면 능원리에 포은의 묘소가 모셔진 이래로 그의 후손들은 물론, 용인지방의 유림들은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었다. 현재까지도 용인군민은 능원리에 전하는 포은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그의 충절은 바로 용인군민의 얼이다.그런데, 웬일인가. 지금은 포은의 묘역 가까이에까지 대중음식점이 뻐젓이 연기를 내뿜고 있다. 포은선생이 순절하신지 어언 600년 지난 지금,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포은은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므로 누구보다 부모에 효도하였다. 아버지 일성 부원군이 졸하였을 때 그는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하였으며, 어머니 변한국부인이 졸하였을 때도 하루도 모자람이 없는 3년 시묘를 하였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원나라와 수백년간 교유한 관계로 당시 사회에서는 부모 탈상을 일년 혹은 100일에 하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태산같은 심지로 부모의 묘를 도합 6년이나 지켰던 것이다. 사람들은 포은의 효도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신하로서 포은의 충절과 역량, 학자로서의 해박한 예지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폭은 고려조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포은이 쇠망치에 얻어맞고 격살되었으니 그 충격은 어떻했겠는가. 사실 포은을 복권시킨 사람도 그를 죽인 이방원이었다. 그를 따르는 조선국의 선비와 일반 백생들을 도저히 저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앞다투어 포은을 서원과 사당에 자신들의 조상들과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포은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모시는 전국의 사당과 서원은 서른 개를 넘을 지경이다.조선의 성리학의 대학자들에게 포은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흉내 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위대한 거봉이었다. 포은이 이런 거봉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후손들은 사실 그 그늘에 가리어 오히려 왜소한 감을 준다. 조선 500년 사에 영상에 오른 영일정씨는 영조 조의 정호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정철, 정유성, 정우량, 정휘량 등이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정몽주선생묘 관리
묘소는 영모당 뒷산인 문수산(文秀山) 안자락 해발 145m의 나지막한 양지바른 언덕 위에 있고, 묘비에는 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의 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여 있다. 선생을 죽인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에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였는지 모르지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추증했으나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은 이를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선생과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이곳에 선생의 묘를 쓰게 된 것은 처음 순절하신 후 버려진 시신을 송악산 중들이 염습하여 풍덕(豊德)땅에 묻었던 것을 후일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장례 행렬이 이 인근인 용인군 수지면 경계에 이르자 명정(銘旌)이 세찬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져 지관에게 물어보니 명당중의 명당이라 이곳으로 하였다고 한다.1517년(중종 12년) 왕명에 의하여 포은 정몽주 할아버지 문묘에 매향하는 한편 묘소를 환봉 청산하고 묘역 일대 임야 전담 등 2백40여만평을 사패지(賜牌地 : 나라에서 내려 준 땅)로 지정하여 경계를 표시하고 산직을 두어 초목을 금하게 하는 등 묘소를 관리토록 하였다.그 뒤 약 600년 동안 포은 정몽주 할아버지는 종손 집안을 중심으로 문중들이 묘소를 잘 관리해 왔으며 1982년에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약원이 정식으로 설립되어 종약원에서 묘소와 묘역일체를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1972년 12월에 상석 2개를 교체하였고 1974년 12월에는 곡담 35m를 보수하였으며 문중에서는 봉분 병풍석, 난간석, 장명등, 망부석 등을 설치하였다. 1980년에는 묘지 경내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묘지 입구에 신도비각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영모재(永募霽)를 해체 복원하고 주차장도 마련하였다.아이러니칼 하게도 이방원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으로 즉위한 다음 지금까지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에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 加資)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正一品職)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正二品職) 감예문춘추관사(監藝文春秋館事: 正一品職)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一品職에 오른 功臣의 封號)으로 추증(追贈: 죽은 후에 직위, 봉작, 시호 등을 내리는 것)되고, 시호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그 후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고려의 충신으로 조선창업에 반대하여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가 조선조 초기 그것도 그를 심복에게 죽이도록 사주한 태종에 의하여 복권되어 외관상으로는 명예가 회복되고 융숭하게 대접을 받은 것이다. 정몽주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면서 왕능(王陵)의 격식을 갖추어 둘레석과, 문무관석 등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 마을은 능원리(陵院里)라는 이름까지 얻었고, 이 마을에는 정몽주의 묘 뿐만 아니라 정몽주사당과 하마비(下馬碑: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경고의 비석)까지 세워졌다.정몽주의 묘가 있는 문수산은 남쪽으로 4개의 능선을 뻐치고 있데 양쪽 2개는 길게 뻗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가운데 2개 능선은 약 40m 간격으로 나란히 짧게 끝난다. 문수산을 바라보면서 왼쪽 날등에 포은의 묘(능)가 있고, 오른쪽 날등에는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태종15년 1415-성종8년 1477)선생의 묘가 있다. 모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몽주선생의 묘와 풍수지리
역사상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나 권문세가들은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에 무덤을 섰다. 따라서 답산을 많이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이들 명당들에게 공통적인 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무덤 뒤에 있는 산(主山)의 모양, 주산에서 무덤이 쓰여진 곳까지의 산줄기(來龍)의 모습, 무덤이 쓰여진 곳(穴, 당판 혹은 혈장이라 부름)의 모습, 좌우 주변 국세(청룡, 백호, 안산 등)의 모습, 무덤 앞에 흐르는 물의 방향이나 흐름세 등등에서 공통적인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 정도의 단계에 이를 때 한글로 출판된 풍수지리 이론서 읽기를 권한다.시중에 나도는 책 가운데에 '아무개에 명당을 잡아 주었더니 대통령이 되었더라' 등과 같은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써 놓은 책들이나 풍수(명당)소설들은 권장할 것이 못된다. 풍수지리에 대한 접근을 그만큼 어렵게만 할 뿐이다.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들을 많이 답산한 후에 풍수 이론서를 읽게 되면 책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아하!, 책에 쓰여진 그 구절은 내가 보았던 아무개 명당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구나!" 등과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소문난 명당들을 답산 하고 동시에 풍수 이론서를 몇 권 선정하여 반복하여 읽다 보면 자연스레 명당(眞穴)의 眞僞 여부를 구별하게 된다. 또한 많은 명당들을 보고 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보와 왔던 그 수많은 명당들이 몇 가지 유형에 모두 귀속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또한 많은 풍수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되 자신이 답사한 산과 읽은 서적을 참고하여 취사선택하면 된다.그러한 연유로 많은 풍수지리서들이 명당의 모범이 될 만한 옛 무덤들을 많이 볼 것을 권장하였다("不可不觀古格") 이번호에서는 풍수의 문외한이라도 "정말 특이하구나!", "명당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인정할 만 한 포은 정몽주의 묘를 예로 들면서 明堂(진혈)의 유형을 설명한다.천하의 그 어떤 大明堂이라도, 또는 어떠한 기혈(奇穴)이나 괴혈(怪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로 명당(진혈)이라면 고전적 풍수지리서가 분류하는 명당의 네 가지 종류(四象, 四像, 穴形四大格 등으로 표현함)중에 하나에 귀속되어야 한다. 또한 풍수(지관)들은 어떤 자리를 놓고 명당(진혈)이라고 감정을 한다면 그것이 명당(진혈)의 네 가지 종류 중에서 어떤 것에 귀속되며 왜 그렇게 분류하였는지를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혈(명당)에는 와(窩), 겸(鉗), 유(乳), 돌(突)혈 네 가지 종류가 있다.정몽주 무덤의 경우 상기 네 가지 종류 가운데 하나에 귀속시키자면 유혈에 속한다. 단지 하나의 혈만 그곳에 잇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옆에 또 하나의 유혈이 나란히 있어 마치 처녀의 두 개의 젖가슴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것을 일러 '두 개의 늘어진 유방 명당("雙垂乳")이라 부른다.이 두 개의 유혈 명당 중에 우측(산에서 바라보아)에 포은이 안장되어 있고 좌측에는 손녀 사위인 이석형의 무덤이 있다.(중략)세간에서 현재의 정몽주 무덤 자리 선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가족들은 처형된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하여 개성에서 고향인 경상도 영일 땅으로 운구를 한다.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그때 喪主의 두건이 바람에 '휘익-' 날려 저만치 떨어졌다. 두건을 주우려고 가보니 그곳이 명당이었다. 고향까지의 운구를 중단하고 그곳에 모셔 오늘까지 이르렀다.그러나 이것은 史實과 다르다. 포은의 시신은 처음에 해풍군에 안장되었다. 10여 년 뒤인 1406년(태종 6년)에 현재의 자리인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文秀山아래로 옮긴다.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이 명당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이곳으로 이장된 지 200년 뒤인 서기 1600년(선조 33년)의 일이다. 선조 대왕의 부인 의인 왕후(懿仁王后)가 죽었으나 오랫동안 능을 정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지관들로 하여금 좋은 자리를 찾아서 보고케 하였다. 이때 포은의 무덤 자리도 명당으로 보고가 되어 자칫하면 왕실에게 빼앗길 뻔하였다. 그때 선조 대왕이 "정몽주의 묘가 쓰기에 합당하다 할지라도, 어찌 忠賢의 후골(朽骨)을 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파내게 하겠는가? 특별히 보지 말라."하여 파묘를 면하였다. 당시 지관들 사이에서도 이곳을 훌륭한 명당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대목이다.그보다 훨씬 전인 1456년(세조 대왕 2년)때의 일이다. 포은을 奉祀하던 손자 정保가 死六臣 사건에 연루된다. 세조가 정保를 환열형( 裂刑: 양다리를 각각 수레에 묶은 뒤 수레를 양편으로 밀어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에 명하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좌우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이 '정몽주의 손자이다'라고 하자 사형을 중지시키고 귀양을 보냈다. 이뿐만 아니라 정몽주 후손은 조선조의 역대 왕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세금이 면제되거나 땅을 하사 받거나 혹은 벼슬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볼 점은 현재의 정몽주 무덤과 그 옆에 있는 손녀 사위 이석형의 무덤이 대표적인 유혈(乳穴)이라는 점, 그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雙垂乳穴에 속한다는 점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600년전의 풍수지리 흐름을 파악하는데 좋은 참고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흔히 요즈음 알듯모를듯한 현란한 술수로 범벅 칠을 한 풍수들은 무덤의 좌향(방향)을 辰戌丑未(24방위 중 남동, 북서, 북동, 남서에 가까운 방향을 가리킴)로 향한 산들은 胞胎法상(易術에서 상용되는 이론 중의 하나) 나쁜 방향(墓宮, 혹은 庫藏宮으로 표현)으로 보아 무덤을 써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몽주 무덤의 좌향은 진좌임을 보면 그 당시에는 이렇게 현란한 술수가 없었음을 엿보게 한다. 명당의 구비 요건인 龍(산), 穴(혈장, 당판), 砂(청룡, 백호, 안산, 조산), 水가 모두 격에 부합된다. 따라서 명당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답산을 권해 보고 싶은 곳이 이곳이다.
◐포은 정몽주선생 묘표 및 신도비 원문 및 해설
⇒묘표는 1517년(중종 12)에 태학들이 정몽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에 세웠는데 앞면에‘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龍仁 鄭夢周墓表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 (表 面)正德十二年丁丑太學生等」上言文忠公鄭夢周有忠孝大節理學爲東方之」祖有功於斯文甚大請配享文廟」上允可其年九月十七日配享于文廟西廡文昌」侯崔致遠之後又令修墳墓立表石以禁樵牧」其書官繫以高麗不書文忠公者盖明公不事」二姓之本意也公平生事跡具在高麗列傳云」
⇒묘표한글 해석
고려 守門下侍中 鄭夢周의 묘(표면)正德 12年 丁丑(1517년)에 태학생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문충공 정몽주는 충효하고 大節하며 성리학으로는 동방(조선)의 시조가 되어 이 학문에 공이 매우 크니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上이 윤허하였다. 그해 9월 17일 문묘 서쪽 채 文昌侯 崔致遠의 뒤에 배향하고 또 무덤을 정비하고 표석을 세워 땔나무를 베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고려에만 관계되는 벼슬명을 쓰고 文忠公이라 쓰지 않은 것은 대개 공이 두 姓을 섬기지 않은 본 뜻을 밝힌 것이다. 공의 평생의 사적은 모두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다.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비문을 썼고,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신도비에는 “황명고려수문하시중익양군충의백포은정선생신도비명병서(皇明高麗守門下侍中益陽郡忠義伯圃隱鄭先生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다.
☞圃隱鄭先生神道碑銘 幷序
圃隱先生旣沒二百八十有餘年。後學恩津宋時烈爲之說曰。道之在天下者未嘗亡。而惟其託於人者有絶續。故其行於世者。不能無明晦。此正朱夫子所謂是皆天命之所爲。非人智力之能及者也。嗚呼。若先生者豈非其人歟。先生挺豪傑之才。負特立之資。當麗運之將訖。其盡瘁所事。臣道畢備者。固已垂諸冊書。與古人幷駕。麗氏之有先生。豈不幸歟。雖然。先 生天爲我東生之也。我東僻處夷服中。至周武王時。殷太師來爲君長。八敎是施。是必宗其祖舜司徒之敬敷者。然繼作者。無有聞焉。歷二千餘年。迹熄言堙。將隨世而益下矣。當胡元之世。天下腥羶。至於東土。則又彝倫益斁。誠亂極思治之日也。先生以妥歡帖睦爾之五年丁丑十二月戊子生焉。歿於洪武壬申四月初四日。葬於龍仁慕賢村文秀山辰坐戌向之原。諱夢周。字達可。自未生時。已有嘉徵。稍長。卽慕聖賢之學。父母喪。皆廬墓終制。雖其非禮之正。然食稻衣錦。供佛飯僧之俗。漸變其舊矣。衣冠文物。遵用 華制。以革鞮屨卉裳之陋。則用夏變夷之漸。已見於此矣。講書談理。主於朱子。而橫說豎說。無不脗合。則不但古註之支離紛挐者。不能以誤人。而如江西永嘉之似是而非者。亦無所售焉。則有如百川歸海。衆星拱極矣。用家禮立祠堂。而祭祀之禮正。拒北虜歸義主。而春秋之法明。蓋其宏綱大用。皆可以質鬼神而無疑。俟百世而不惑矣。是故本朝諸儒。得有以推本演繹。其道學淵源典章文物。沿泝乎洛建而浸淫乎殷周者。皆祖於先生。則其制治保邦盡忠成仁者。寔先生之餘事也。本朝自國初。漸加褒尙。至我中 廟朝。靜庵諸賢出而益加闡明。遂以從祀文廟。則崇報之典。至矣盡矣。然若與薛,崔,安諸賢。爲同條共貫。則尙論者或不厭也。惟禑,昌之際。史多闕文。故先生進退之義。後人或有疑焉者。然先生義精仁熟。以道周旋。君子之所爲。豈衆人之所知哉。昔有以問於退溪李先生者。先生曰。當於有過中求無過。不當於無過中求有過。斯至論也。嗚呼。先生盡心危邦。卒以身殉。則其忠盛矣。喪祭之禮。能變舊俗。則其孝大矣。然自古篤於忠孝者。世不乏人。則先生之忠與孝。猶有其倫矣。其斥胡元歸皇朝。用華制變胡俗。使我東 土爲中國之屬國。而蔚然爲禮義之邦者。是非先生之大功乎。然考之春秋。則弦黃諸國。遠隔荊楚。慕向中國。以至滅亡而不悔者有之。則先生之功。亦不能以專美矣。唯其以儒者之學爲己任。而其爲學也。必以朱子爲宗。使後之學者。皆知主敬以立其本。窮理以致其知。反躬以踐其實。此三者爲聖學之體要。則其功孰與之侔竝哉。且夫自朱子以後。中朝之道學。分裂岐貳。陽明,白沙之徒。以荒唐隱僻之說。思有以易天下。而洙泗洛閩之宗脈。晦塞而不傳。此其害甚於洪水猛獸之禍矣。獨我東土。擇之也精。守之也專。 訖無支分派別之惑。此雖後先生而賢者之功。而至若尋源泝本。則捨先生其誰哉。故前後尙論之士。莫不曰先生東方理學之宗。斯乃士林之公言也。昔文中子曰。通於夫子受罔極之恩。東土之士。於先生亦當如此云。嗚呼。此實天爲我東。篤生哲人。以啓道學之淵源。使絶者續晦者明。嗚呼。此豈人智力之所及也哉。先生延日人。上祖襲明。麗朝以名儒。官止樞密院知奏事。曾祖仁壽。祖裕。考云瓘。俱贈顯官。妣李氏。署丞約之女也。先生二子宗誠,宗本。光廟朝。有名保者。與六臣友善。逮其獄起。保常慷慨。往省其庶妹 爲韓明澮之妾者曰。公安往。曰詣闕鞫獄也。曰公當爲萬世罪人。明澮聞之。卽詣闕告上親鞫之。保曰。常以成三問,朴彭年爲正人君子。故實有是言。上命轘之。左右曰。是鄭某之孫也。上遽命減死曰。忠臣之後。只竄迎日。亦可謂尙其類也。世愈遠益不振。識者疑焉。自近世以來。漸至蕃昌。其最顯者。右議政維城,判中樞應聖,寅平尉齊賢,統制使榏,統制使傅賢,同知倜。其奉先生祀者。朝廷例加錄用。今尙瑞直長纘光。於先生爲十一代孫也。古人有言曰。開千眼者必有後。於此亦可以見先生也。銘曰。堪輿磅礴。一理充塞。風氣周旋。開有後先。昔者全閩。一蠻夷區。洎紫陽生。爲魯爲鄒。惟此東方。寔惟九夷。父師之後。八敎漸微。勝國謠俗。猶是椎髻。惟我先生。崛起其季。豪傑之才。純粹之體。不由師承。默與道契。修之於己。行滿鄕里。行之於國。風動遐邇。庠序旣設。俎豆莘莘。士誦詩書。民趨作新。當時天下。陸沈胡虜。維茲用夏。周禮在魯。義主攘夷。背陰向明。春秋大義。炳如日星。未盡底蘊。天柱忽傾。其身旣沒。其道益壽。若山有岱。如北有斗。蓋先生道。乃紫陽學。祖述憲章。躬行心得。其在丈席。攘斥百家。橫說豎說。一此無他。 第所論說。聽者疑惑。及得胡通。無不符合。地遠世後。若航斷港。因言得意。痕血摑捧。爾後諸賢。承繼張皇。歷選前後。其功莫當。若宋濂翁。始建圖書。以授關洛。以傳閩甌。此殆天啓。統會宗元。凡我後學。永泝其源。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해설
포은 선생이 가신 지 280여 년 만에 후학 은진(恩津) 송시열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대저 도(道)란 천하를 상대로는 없어진 적이 없으나, 사람을 상대로는 끊이고 이어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도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데는 밝고 어두운 시대가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이는 다 천명에 좌우되는 것이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는 것이다. 아, 선생 같은 이야 어찌 여기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호걸스런 재주와 우뚝 선 자질로 고려의 말기에 나서 그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원만한 신하의 도리가 이미 사책(史冊)에 전해져 고인들과 맞설 수 있으니, 고려에 선생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선생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낸 분이다. 우리나라가 본시 외딴 지역에 위치해 있다가 주 무왕(周武王) 시대에 은(殷) 나라 태사(太師)가 와서 군장(君長)이 되어 팔조(八條)의 교화(敎化)를 폈으니, 이는 반드시 그 시조인 순 임금 때 사도(司徒 설(契))의 오교(五敎)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태사의 업적을 계승한 이가 없어 2천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그 유택(遺澤)이 식어가고 그 말씀이 인멸되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오륜(五倫)의 가르침이 저하되어갈 형편이었다. 더욱이 호원(胡元) 시대가 되어서는 온 천하에 성전(腥羶)이 충만하였고 우리나라도 강상(綱常)이 더욱 퇴패되었으니, 이는 진정 난(亂)이 극도에 이르면 다시 치(治)로 돌아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선생은 타환첩목이(妥歡帖睦爾 원 순제(元順帝)) 3년(1337, 충숙왕 복위6) 12월 22일에 나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 25년(1392) 4월 4일에 별세했고, 용인(龍仁) 모현촌(慕賢村) 문수산(文秀山) 진좌술향(辰坐戌向)의 묘에 안장되었다.선생의 휘(諱)는 몽주(夢周), 자(字)는 달가(達可)이다. 출생하기도 전에 이미 아름다운 조짐이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바로 성현의 학문을 사모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초막(草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으니, 이것이 아무리 정례(正禮)는 아니나, 상중(喪中)에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부처에게 물건을 바치고 중에게 음식을 먹이던 풍습을 점차 달라지게 하였다. 의관 문물(衣冠文物)에는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여 제구(鞮屨)ㆍ훼상(卉裳 풀로 짠 호인의 의상)의 누속(陋俗)을 고쳤으니, 중화(中華)로써 이적(夷狄)을 변화시키는 조짐이 이미 여기에 나타났다. 글을 강론하고 이치를 말하는 데는 주자(朱子)를 조종으로 하여 횡설수설(橫說竪說)해 놓은 것이 모두 호씨(胡氏)의 설(說)과 부합되었으니, 지리멸렬(支離滅裂)한 고주(古注)가 배우는 이를 그르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이비(似而非)한 강서(江西)ㆍ영가(永嘉)의 무리도 쓸모가 없게 되어, 마치 온 내[川]가 바다로 돌아가고 여러 별[星]이 북극(北極)으로 향하듯 하였다. 그리고 《가례(家禮)》를 따르고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하는 예(禮)가 시정되었고, 북로(北虜)를 거절하고 의주(義主)에게 돌아가 《춘추(春秋)》의 법이 밝았으니, 그 굉대(宏大)한 체(體)와 용(用)이 다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고 후세에 유전해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그러므로 본조의 모든 선비가 근본을 추구하고 의의를 풀이하여, 그 도학 연원(道學淵源)과 전장 문물(典章文物)에 대해, 낙민(洛閩)에 소급하고 은주(殷周)에 젖어드는 이가 다 선생을 조종으로 삼았으니, 그 치도(治道)를 제재하고 나라를 보존하고 충(忠)을 다하고 인(仁)을 이룬 것은 사실 선생의 여사(餘事)이다. 본조 초기부터 점차 선생을 포상(褒尙)하여 오다가 중종조(中宗朝)에 와서는 정암(靜菴) 등 제현(諸賢)이 배출되어 선생의 도학을 더욱 천명하는가 하면, 드디어 문묘(文廟)에까지 배향시켰으니 그 보답에 대한 전례가 지극하다. 그러나 만약 선생을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유(安裕) 등 제현(諸賢)과 동과(同科)로 친다면, 상론(尙論 고인(古人)의 언행ㆍ인격 등을 논하는 것)하는 이들이 혹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신우(辛禑)ㆍ신창(辛昌) 때 사관(史官)의 기사가 많이 빠졌기 때문에 선생의 나아가고 물러선 의(義)에 대해 후세에 혹 의심하는 이가 있지만 선생은 의(義)가 정밀하고 인(仁)이 성숙하여 정당한 도(道)로써 주선(周旋)하였으니, 군자의 처사를 어찌 뭇사람이 알 바이겠는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 선생에 대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마땅히 허물이 있는 중에서 허물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허물이 없는 중에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지론이다.아, 선생은 위급한 나라에 마음을 다하다가 마침내 몸으로써 순절(殉節)하였으니 그 충(忠)이 훌륭하고, 상제(喪祭)의 예(禮)를 실천하여 옛 풍습을 고쳤으니 그 효(孝)가 크다. 그러나 예로부터 충ㆍ효에 독실한 이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니, 선생의 충ㆍ효는 오히려 그 상대가 있는 셈이요, 호원(胡元)을 배척하고 황명(皇明)에 귀의, 중화의 제도로써 호속(胡俗)을 개혁시켜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어엿한 예의의 나라를 이룩하였으니, 이 어찌 선생의 큰 공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춘추(春秋)》를 상고해 보면, 현(弦)ㆍ황(黃) 두 나라가 멀리 형초(荊楚) 밖에 위치하여 중국만을 사모하고 초(楚)에 의부하지 않다가 끝내 초에게 멸망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은 예가 있었으니, 선생의 공로 또한 혼자만 훌륭할 수는 없는 셈이다. 오직 유자(儒者)의 학(學)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그 학을 하는 데 반드시 주자를 조종으로 하여, 후세의 배우는 이로 하여금 모두 경(敬)을 주장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배양하고 자신에 돌이켜 실제를 실천할 줄 알도록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성학의 요체이다. 그 공로를 어느 누가 맞설 수 있겠는가.또 주자 이후로 중국의 도학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ㆍ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의 무리가 황당ㆍ괴벽한 설(說)을 내세워 온 천하를 전도시킴으로써 수사(洙泗 공자(孔子)의 연원(淵源))ㆍ낙민(洛閩)의 종맥(宗脈)이 어두워져 전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해독은 옛날 홍수(洪水)와 맹수(猛獸)보다 더 심하였다. 우리나라만은 그 선택이 정밀하고 수지(守持)가 전일하여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의혹이 없었으니, 이는 아무리 선생 이후 현자(賢者)들의 공로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을 추심한다면 선생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전후 상론(尙論)하는 선비가 누구나 선생을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조종으로 추존하고 있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공론이다. 옛날에 문중자(文中子 수(隋) 나라 왕통(王通)의 사시(私諡))가 말하기를,
“부자(夫子 공자)를 통하여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선비들도 마땅히 선생에게 이와 같이 고마워해야 한다. 아, 이는 사실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이 같은 철인(哲人)을 내어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계발, 끊긴 것이 이어지고 어두운 것이 밝아지게 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좌우될 바이겠는가.선생은 연일인(延日人)이다. 시조 습명(襲明)은 고려 때 명유(名儒)로서 벼슬이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였고, 증조 인수(仁壽)와 조부 유(裕)와 아버지 운관(云瓘)은 다 높은 관작(官爵)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서승(署丞) 약(約)의 딸이다.선생의 두 아들은 종성(宗誠)ㆍ종본(宗本)이고, 광묘(光廟 조선 세조(世祖)) 때에는 이름을 보(保)라 하는 이가 육신(六臣)과 친하였는데,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평소에 늘 강개해하던 그는 한명회(韓明澮)의 첩(妾)으로 있는 서매(庶妹)를 찾아가서 묻기를,
“공(公 한명회를 이름)은 어디에 갔느냐?”
하니, 그 서매가, 옥사(獄事)를 처리하러 입궐했다고 하므로 그는,
“공은 반드시 만세(萬世)의 죄인이 되고야 말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한명회가 이 말을 듣고 즉시 입궐하여 상께 아뢰고, 그를 친국(親鞫)하도록 하였다. 그는 평소에 늘 성삼문ㆍ박팽년(朴彭年)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여겨 왔으므로 진정 이 같은 말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상이 그를 환열(轘裂)시키도록 하므로 좌우에서 아뢰기를,
“그는 정모(鄭某)의 손자입니다.”
하자, 상이 갑자기 감사(減死)를 명하면서,
“충신(忠臣)의 후예이다. 다만 영일(迎日)로 귀양 보내라.”
하였으니, 그 기절(氣節)을 존숭해 주었다 하겠다.그 뒤에 세대가 더욱 멀수록 후예가 더욱 부진하므로 아는 이들이 의아해하다가 근세 이래로 점차 번창해졌다. 그중에도 가장 두드러진 이로는, 우의정 유성(維城)과 판중추(判中樞) 응성(應聖)과 인평위(寅平尉) 제현(齊賢)과 통제사(統制使) 부현(傅賢)과 동지(同知) 척(倜)이고,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이는 으레 음직(蔭職)으로 채용되어 왔는데 지금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 찬광(纘光)은 선생의 11대손이다. 고인(古人)의 말에,
“1천 명의 안목(眼目)을 틔워 준 이는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한다.”
하였으니, 여기서도 선생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천지가 융화되어 / 堪輿磅礴한 이치 충만한데 / 一理充塞풍기가 돌고 돌아 / 風氣周旋선후로 개척되므로 / 開有後先옛날에 온 민중(閩中)이 / 昔者全閩만이의 풍속이었다가 / 一蠻夷區주자가 나면서부터 / 洎紫陽生공맹의 풍속 되었네 / 爲魯爲鄒우리 동방도 / 惟此東方본시 구이의 하나로 / 寔惟九夷기자(箕子) 이후로는 / 父師之後팔교가 점차 침체되어 / 八敎漸微고려의 풍속 또한 / 勝國謠俗퇴계를 숭상하였는데 / 猶是椎髻우리 선생이 / 惟我先生그 말엽에 우뚝 나서 / 崛起其季호걸스런 재주와 / 豪傑之才순수한 기품으로 / 純粹之體스승의 전수 없이 / 不由師承자연 도와 부합되어 / 默與道契일신에 수양하니 / 修之於己그 행의 향리에 충만하고 / 行滿鄕里나라에 활용하니 / 行之於國그 풍교 원근에 미쳤으며 / 風動遐邇학궁(學宮)이 설치되고 / 庠序旣設의례(儀禮)가 완비되니 / 俎豆莘莘선비는 시서를 외고 / 士誦詩書백성은 날로 진작되었네 / 民趨作新당시에 온 천하가 / 當時天下호원에게 망했는데 / 陸沈胡虜다만 고려가 중화의 도 지켰으니 / 維茲用夏주의 예가 노에만 보존된 셈일세 / 周禮在魯명을 높이고 원을 배격하여 / 義主攘夷어둔 데를 버리고 밝은 데로 향하니 / 背陰向明춘추의 대의가 / 春秋大義해와 별처럼 밝았다가 / 炳如日星그 포부 다하지 못한 채 / 未盡底蘊천주가 갑자기 무너지고 / 天柱忽傾몸은 이미 가셨으나 / 其身旣沒그 도 더욱 영원하여 / 其道益壽마치 태산과 같고 / 若山有岱또 북두와 같았네 / 如北有斗대저 선생의 도는 / 蓋先生道곧 주자의 연원으로 / 乃紫陽學그 헌장 이어 서술하여 / 祖述憲章실천에 옮기고 마음에 체득하였으며 / 躬行心得사석(師席)에 있어서는 / 其在丈席백가의 설 제쳐 놓고 / 攘斥百家횡설수설하여 / 橫說竪說다른 변동 없으므로 / 一此無他선생의 그런 논설 / 第所論說듣는 이 의아하다가 / 聽者疑惑호씨의 사서통 보고 나니 / 及得胡通모두가 다 부합되었는데 / 無不符合거리와 세대 멀어 / 地遠世後마치 배가 항로 끊긴 것 같으나 / 若航斷港선생의 득의 말한다면 / 因言得意엉긴 피 지금도 남아 있네 / 痕血摑捧그 뒤 제현들의 / 爾後諸賢계승이 신장되었으니 / 承繼張皇역대를 꼽아 보면 / 歷選前後그 공로 맞설 이 없어 / 其功莫當마치 송의 주염계가 / 若宋濂翁처음 태극도설 창안하여 / 始建圖書장자 정자를 거쳐 / 以授關洛주자에게 전수하듯 하였네 / 以傳閩甌이는 전혀 하늘의 계시로 / 此殆天啓도의 근원 통할하였으니 / 統會宗元모든 우리 후학은 / 凡我後學그 근원 길이 추구하소 / 永泝其源
[주D-001]팔조(八條)의 교화(敎化) : 우리나라 고대 법률. 살인자(殺人者)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자(傷害者)는 곡물(穀物)로써 보상하며, 도둑질한 자는 주인의 노예가 되거나 속전(贖錢) 50만 전을 내놓게 하는 등 8조 중 3조만 전한다.[주D-002]성전(腥羶) : 비린내와 노린내로, 호족(胡族)의 만풍(蠻風)을 말한다.[주D-003]제구(鞮屨) :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호인(胡人)의 신이다.[주D-004]횡설수설(橫說竪說)해 …… 부합 : 정몽주(鄭夢周) 당시에 유행되던 경서(經書) 주해(註解)는 주희(朱熹)의 《집주(集註)》뿐이었는데, 정몽주의 강설(講說)이 사람들의 생각 밖에 뛰어나므로 듣는 이들이 매우 의아해하다가 뒤늦게 들어온 원(元) 나라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에 보이는 말이 정몽주의 것과 낱낱이 부합되자 이색(李穡)이 “정모(鄭某)의 강설이 횡설수설한 것 같으면서도 모두가 이치에 부합된다.”고 칭찬했다.[주D-005]강서(江西) : 강서는 돈오(頓悟)를 주장한 육구연(陸九淵)의 학파를 말한다.[주D-006]영가(永嘉) : 영가는 공리(功利)를 주장한 진부량(陳傅良) 등의 학파를 말한다.[주D-007]북로(北虜)를 …… 돌아가 : 명 태조(明太祖) 8년(1375)에 북원(北元)의 사신(使臣)이 고려에 오자, 우왕(禑王)이 대신(大臣)을 보내 영접하려 하므로 정몽주(鄭夢周)가, 사리에 불가함을 들어 상언(上言)하고 그 사신을 잡아 명 나라로 압송하자고 주청한 일을 말한다.[주D-008]낙민(洛閩) :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말한다.[주D-009]환열(轘裂) : 두 수레가 양쪽에서 끌어당겨서 인체(人體)를 찢어 죽이던 형벌이다.[주D-010]퇴계(椎髻) : 머리를 방망이 모양으로 트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만이(蠻夷)의 풍속을 뜻한다.
☞정몽주의 묘와 사위 이석형의 묘의 관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에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와 손서(손녀사위)인 연안 이씨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이곳이 명당이라 해 풍수 학인들이 많이 참관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진짜 명당은 정몽주 묘소가 아니라 연안 이씨 묘소이다. 저헌(樗軒) 이석형과 부인 연일 정씨를 합장한 묘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묘소는 본래 개성의 풍덕에 있었다. 그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피살(1392년)된 뒤, 태종 6년(1406년) 3월에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현재의 위치인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한 것이다.
피살된 선생의 시신을 어느 스님이 가매장해 두었는데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한 후, 포은 선생을 다시없는 충신이라 하여 사면복권을 단행하였다. 그래서 유족들은 태종의 허락을 받고 선생의 유해를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옮기려고 했다.
천묘 일행이 지금의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앞에 세운 명정(銘旌)이 날아가 버렸는데, 당황한 일행이 명정을 쫓아갔으나 명정은 잡힐 듯 하면서 계속 날아가더니 어느 한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다시 명정을 찾은 일행이 길을 떠나려 하자 이번에는 상여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상하게 여겨 지관으로 하여금 명정이 떨어진 곳을 감정케 하니 천하에 없는 명당이었다. 유족들은 회의 끝에 고향까지 갈 것이 아니라 선생의 영혼의 뜻인 듯 하니 이 자리에 산소를 쓰자는 합의를 보았으나 이미 날이 저물어 작업을 할 수 없어 다음날 아침에 일을 하기로 하고 인부들만 산소 자리를 지키게 한 후 주변에 숙소를 정했다.
이때 유족 대표로 나선 사람 중에 선생의 손녀가 끼어 있었다. 그날 밤, 그 터를 욕심낸 손녀가 인부들에게 독한 술을 먹여 잠을 재운 후, 밤새 산소자리 아래의 연못(명당수)에서 물을 퍼 날라 그 터에 물을 퍼부었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올라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어제 분명히 천하의 명당이라고 생각했는데 땅이 물에 젖어 축축하지 않는가. 결국 회의 끝에 그 옆자리의 두 번째로 좋다고 꼽힌 곳에 산소를 쓰고 말았다.
그런데 훗날 손녀가 자신의 남편이 죽은 후 그 터에 산소를 썼고 그 이후로 연안 이씨의 후손들이 대발복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영일 정씨와 연안 이씨는 사돈 간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사이가 되었으며, 손녀에겐 ‘출가외인’이란 불명예스런 딱지가 붙었다고 한다.
포은의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전하는데 묘표는 조선 중종 때에 태학생들이 포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이라 하는데, 조선조에 비석을 세웠음에도 전면에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처음 세울 때 조선의 직함이었던 영의정을 추증하여 무덤 옆에 세웠더니 곧 벼락이 쳐서 비석을 부숴버리는지라 고려의 문하시중으로 고쳤더니 지금까지 무사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충신의 고고한 절의가 사후에도 청청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신도비는 조선 숙종 때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썼고 글은 송시열(宋詩烈)이 지었다 한다.
지금도 선생의 묘소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종손에 의해서 잘 돌보아 지고 있으며 해마다 서너 차례의 시제를 지내는데 그 중에서 가을에 모셔지는 시제는 그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방송국에서 헬기를 동원하여 촬영해 갈 정도라고 한다. 또한 포은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모현면 능원리는 연일정씨 포은공파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어쨌든 이 고장의 지명도 원래는 쇄포면이었으나, 포은 선생의 묘소가 능원리 문수산에 모셔진 후로 충현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1411년부터 모현(慕賢)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정몽주의 묘를 처음에는 豊德郡(풍덕군)에 썼으나 후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遷墓(천묘)할 때 緬禮行列(면례행렬)이 용인군 수지면의 경계에 이르자 앞세웠던 銘旌(명정 : 죽은 사람의 관직 성명을 적은 旗)이 바람에 날아가 現墓所(현묘소)의 자리에 떨어져 이곳에 安葬(안장)하였다 한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는 을좌 신향에 술파,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는 진좌 술향에 술파. 여기는 쌍유혈로 이석형의 묘소가 이 龍脈(용맥)의 主穴(주혈)이며 포은 정몽주의 묘소는 次穴(차혈)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너무도 유명하여 설명은 생략하고 이석형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연안 이씨의 시조 茂(무)는 당나라의 장군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한 다음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황해도 연안 지방에 자리잡고 가문을 일으켰다.
樗軒(저헌)이란 호를 가진 이석형은 그는 세종 때 진사 생원 문과 등 三場(삼장)을 장원했고, 文臣重試(문신중시)에서도 장원을 했다 한다.
연안 이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相臣(상신)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 문과급제자 250여명을 배출한 名門이다.
특히 이석형선생의 玄孫(孫子의 孫子)인 月沙 이정구는 조선시대에 손꼽히는 한문학의 대가로서 인조 때 좌의정과 정승셋과도 안 바꾼다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중국 사행길
포은 선생은 연보에 의하면 생애 7번의 사행(使行:明에 6회, 倭에 1회)을 다녀왔다. 그 가운데 첫 회의 사행이 1372년 3월에서 다음해 7월까지 서장관(書狀官)으로 지밀직사사 홍사범(洪師範)을 수행하여 명나라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사행의 주된 목적은 명(明)나라가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명나라의 국학에 자제의 입학을 청하고, 아악(雅樂)에 쓸 종경(鐘磬)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당시 포은 일행은 육로 통행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해로로 출발하여 1개월 만에 경사에 도착하였고, 예부의 자문을 받아 돌아오다가 허산(許山)에서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여 홍사범을 비롯하여 대부분 익사하였고, 포은선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명 황제의 도움으로 다시 경사로 돌아갔다가 4-5개월 더 걸려 육로로 귀국하였다. <포은집>의 권1 첫 머리에 ‘3월 19일에 바다를 건너 등주공관에서 잦는데 곽통사(郭通事)와 김압마(金押馬)의 배가 풍랑에 막혀서 아직 오지 못하므로 머물러 기다렸다…(三月十九日過海宿登州公館)’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로보아 1372년 3월 19일에 등주(登州)에 도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행이란 약소국의 입장에서 대외관계가 혼란할수록 국가의 흥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원제국의 오랜 압제와 간섭에 길들여진 세력과 신흥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세력이 대립하면서 외교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1372년 서장관으로 洪師範을 따라 南京에 가 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돌아올 때 풍랑을 만나 홍사범 등 12명이 죽고, 13일간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명나라가 건국되자, 그가 힘써 요청하여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 공민왕이 피살되고 金義가 明의 사신을 죽인 일로 국내가 뒤숭숭하여 명에 사신가는 것을 꺼리자, 사신을 보내 실정을 고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얼마 후 北元의 사신이 오고 李仁任 · 池奫 등이 맞으려 하자, 명과의 관계를 고려해 반대했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명은 고려에 出兵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고,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聖節을 축하해야 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렸고, 시일도 촉박했으나, 포은은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대동하여 긴장상태에 있던 양국의 관계를 회복하고 억류되었던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명이나 일본으로의 사행 길은 목숨까지 담보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였다
명에 갔던 사신들이 구류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대부분은 사신의 임무를 꺼렸다
1382년(우왕 8) 포은과 함께 가기로 되어있던 지문하사 안경이 염홍방에게 뇌물을 주어 홍상재로 대신하게 하였다는 사실과, 1384년 정도전과 함께 다녀왔던 사행은 밀직부사 진평중을 대신해서 간 것이다. 진평중이 임견미에게 뇌물로 노비 수십여 명을 주고 사퇴하여 임견미가 포은선생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함으로써 이루어진 사행이었다.
일본과 명의 사행은 권신들이 포은선생으로 하여금 곤경에 처하게 하려는 목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친원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신으로서의 임무는 포은선생에게는 나름대로의 돌파구였다<말이 명백하고 정대하여 막히는 기운이 없었다거나>, <학문은 고금을 통하고 기질이 순후하면서도 방정하며 언어가 따뜻하고 능변이 있다>고 말한 정도전과 이숭인의 평가는 포은선생이 지닌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을 가늠하게 한다.
사행 길에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당하면서도 호방하고 원대한 그의 모습은 사행시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어쩌면 <바다를 건너 등주의 공관에서 자며(渡海宿登州公館)>란 이 시도발해(渤海)를 건너고 봉래각(蓬萊閣)에 올라 넓은 요동벌과 용솟음치는 바다 물결을 보고서 억제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혀 지으셨을 것이다
登州望遼野 등주에서 요동 들판 바라보니
邈矣天一涯 아득하여라 하늘 저편 가일세
溟渤限其間 바다가 그 사이를 경계 지어서
地分夷與華 땅이 동이와 중화로 나뉘었구나
我來因舟楫 내가 배를 저어 지나왔다니
利涉還可誇 건너서 돌아온 것이 자랑스럽네
昨日海北雪 어제 바다 북쪽에서 눈을 봤는데
今朝海南花 오늘 아침 남쪽엔 꽃이 피었네
夫何氣候異 어찌하여 날씨가 이리 다를까
可驗道路賖 길이 먼 것을 증험할 만하네
客懷易悽楚 나그네 회포 슬퍼지기 쉬운데
世事喜蹉跎 세상일은 빗나가길 잘하는구나
偕行二三子 더불어 길을 오던 두세 사람이
相失迷風波 헤어져서 풍파에 갈피 잃으니
終夜苦憶念 밤새도록 그 생각에 괴로워하고
耿耿聞鼓撾 뒤척이다가 때 알리는 북소리 듣네
晨登蓬萊閣 새벽녘에 봉래각 올라가 보니
浪湧山嵯峨 물결이 높고 험한 산처럼 솟는데
歸來就孤館 돌아와서 외로운 객관에 들어
欹枕空吟哦 베개에 기대 부질없이 읊조리노라
산동반도 북안에 위치한 등주는 삼국시대로부터 중국에 들어가는 사신들의 상륙지였다
삼봉 정도전의 <포은선생봉사고서(圃隱先生奉使藁序)>를 보면... 선생이 세 번 경사(京師)에 사신 가셨는데, 대개 소견이 넓고 조예가 깊어서 언사가 더욱 고원(高遠)하여졌으므로 발해(渤海)를 건너고 봉래각(蓬萊閣)에 올라 넓은 요동벌을 바라보고 용솟음치는 바다 물결을 보고서 감회를 일으켜 글을 짓게 되는 것을 스스로 막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 등주의 공관에서 자며(渡海宿登州公館)>라는 시와 <봉래역에서 한서장에게 보인다(蓬萊驛示韓書狀)>는 시가 있다...
포은선생이 등주에 머물 동안 등주과해(登州過海)와 등주선동<登州仙祠>이란 시를 남겼는데
之罘城下片帆張 지부성 아래에서 외쪽 돛을 폈는데
便覺須臾入杳茫 어느덧 잠간새에 바다 멀리 들어왔네
雲接蓬萊仙闕遠 봉래선궐 멀리 구름이 잇달았고
月明遼海客衣凉 달 밝은 요해의 길손은 처량하여라
百年天地身如粟 백년 천지 사이에 좁쌀 같은 이 몸은
兩字功名鬢欲霜 공명 두 자 때문에 귀밑털이 희어가네
何日長歌賦歸去 어느 때나 길게 읊어 돌아가는 글 지을까
蓬窓終夜寸心傷 봉창가에 밤새도록 마음만 상하도다 <登州過海>
何處登臨慰我思 어느 곳에 올라가면 내 마음을 달래볼까
之罘城下古仙祠 지부성 아래에 옛 신선 사당이 있네
只嫌汲汲南歸疾 서둘러 급히 남쪽으로 빨리 돌아가느라
未和坡翁海市詩 파옹의 해시시에 화답을 못하네 <登州仙祠>
시에 등장하는 지부성은(之罘城)은 오늘날 연태 지부도(芝罘島)가 아니고, 봉래 단애산 일대에 세워진 성채를 지칭한다. 1042년에 등주군수 곽지고가 단애산 아래 속칭 도어채(刀魚寨)라는 성채를 쌓았고, 1376년에 등주부는 기존 도어채에다 토성을 쌓아 備倭城을 건설했다. 고선사(古仙祠)는 바로 지부성 봉래각 경내 사당을 지칭한다. 1384년에 정도전은 정몽주를 모시고 사신으로 가다가 등주 봉래각을 들렀다. 이때 그는 <蓬萊閣>을 읊으면서 팔선사가 지부성 아래에 있다고 했다. 봉래각은 1061년에 단애산 정상 위에 처음 세워진 누각이다. 훗날 수 차례 훼손되었다가 중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현 봉래각은 바닷가 가파른 절벽 위에 복층 목조로 세워졌다.
열자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 수억만 리 저쪽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 리,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樓閣)이 늘어서 있고, 주옥(珠玉)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고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仙人)들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간다. 오신산은 본래 큰 거북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뒤에 두 산은 흘러가 버리고 삼신산만 남았다고 한다.
사기에 의하면, BC 3세기의 전국시대 말, 발해 연안의 제왕 가운데 삼신산을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가장 신선설(神仙說)에 열을 올려 자주 삼신산을 탐험시켰다. 한번은 방사(方士:仙術을 행하는 사람) 서불(徐市)이 소년과 소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배에 올랐는데, 결국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건은 특히 유명하다.
한무제(漢武帝) 또한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찾으려고 수 차례 산동반도를 탐방하였는데, 발해(渤海) 중에 돌출된 단애산(丹崖山)에 올라서서 “이곳이야말로 선경(仙境)이다.”고 하였다. 이후로는 단애산을 봉래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단애산(丹崖山)위에 있는 봉래각(蓬萊閣)은 황학루(黄鹤楼), 악양루(岳阳楼), 등왕각(滕王阁)과 더불어 중국4대 명루(中国四大名楼)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봉래각(蓬莱阁), 천후궁(天后宫), 용왕궁(龍王宫), 여조전(吕祖殿), 삼청전(三清殿), 미타사(弥陀寺) 등 6개 건물과 부속 건축물이 있다. 불사(佛寺), 도전(道殿), 신묘(神廟)를 함께 있는 특별한 유적이다. 진시황(秦始皇)이 불로초를 구하려 했던 고사와 팔선(八仙)이 바다를 건넜다는 팔선과해(八仙過海)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몽주의 선생의 손자이며 이석형선생의 장인인 정보선생의 묘이다. 정몽주선생묘의 좌측 아래쪽 약50m에 위치에 있다. 사헌부감찰을 했다고 비문에 세겨있다. 후손들이 근래에 세운 비석인것 같다.>
<정보선생의 비석이다. 세겨진지 수백년 되었는지 비석의 퇴석되었다.부인 밀양박씨와 합장되어 있다.정몽주선생의 손자로 영일로 유배가서 죽었다고 전해오고 있음.>
☞정보(鄭保)-(정몽주선생의 손자이며 이석형의 장인)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묘갈의 비문은 판돈령(判敦寧) 이민보(李敏輔)가 짓고 13세손 정환조(鄭煥祖)가 썼다.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설곡(雪谷). 할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이며, 아버지는 이조참의 정종성(鄭宗誠)이다.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제학(提學) 박중용(朴仲容)의 딸이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병마사(兵馬使) 박등(朴登)의 딸이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이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조선 문신으로 학문이 뛰어나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다.
아들은 정윤정(鄭允貞)·정윤화(鄭允和)·정윤관(鄭允寬)이고, 사위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문강공(文康公)이석형(李石亨)이다.
[활동사항]
• 정보(鄭保)는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다가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에 감찰(監察)로 있던 정보는 성삼문(成三問) 등이 죄가 없다고 한말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당시 정보는 한명회(韓明澮)의 첩이었던 이복누이의 집을 방문했다가 한명회가 성삼문을 추국하는 일 때문에 대궐로 갔다는 말을 듣고서는 “성삼문·박팽년(朴彭年)은 바로 정인군자(正人君子)인데, 이들을 살해하면 후세에 반드시 악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라고 큰소리로 꾸짖었다고 한다. 한명회가 이 말을 듣고 왕께 아뢰니 왕이 친히 국문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 신은 항상 성삼문, 박팽년을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왕이 노하여 수레에 깔려 죽이는 형벌을 명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저 자가 누구냐?” 라고 물었을 때 “정몽주의 손자입니다.” 라고 대답하니 왕이 급히 명령을 내려 형을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충신의 후예를 차마 죽일 수 없구나.” 고 말하고 마침내 영일로 유배하였다.후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丹城)으로 옮겼는데, 이때에 단종이 승하(昇遐)하시니 복상(服喪) 3년하고 단성 적소(謫所)에서 일생을 마쳤다. 699년(숙종 25)에 복위되었으며,1703년(숙종 29)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1701년(숙종 27)에 정몽주를 모신 용인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배향되었다. 1732년(영조 8)에 영월 사람들이 8현사(八賢祠)를 짓고 배향하였다.
≪인생은 둥굴게 둥굴게≫
삶이란 참으로 복잡하고 아슬아슬합니다.
걱정이 없는 날이 없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결정하거나 결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고 늘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힘든 이야기입니다
말로는 쉽게
"행복하다", "기쁘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만큼 행복하고
어느 정도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막막합니다.
이러면서 나이가 들고 건강을 잃으면
"아! 이게 아닌데..."하는
후회의 한숨을 쉬겠지요.
그런데도 왜 이렇게 열심히 살까요.
어디를 향해 이렇게 바쁘게 갈까요.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요.
결국, 나는 나,
우리 속의 특별한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 고통,갈등 ,불안, 허전함은
모두 나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들입니다.
참 나를 알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를 알기 위해서,
나만의 특별함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렇게 바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치고
아무 목적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
고유의 의미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찾으면
그날부터 그의 삶은
고통에서 기쁨으로,
좌절에서 열정으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바뀝니다.
이것이야말로 각자의 인생에서 만나는
가장 극적이 순간이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여 오래 입지 못하듯이
아무리 좋은 일도 때에 맞지 않으면 불안하듯이,
아무리 멋진 풍경도 마음이 다른데 있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내가 아닌 남의 삶을 살고 있으면,
늘 불안하고 흔들립니다.
하지만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찾으면,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아주 멋진 환희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게 되고
행복과 기쁨도 이때 찾아 옵니다.
-좋은 글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