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火)
채마밭에 물 주러 가는 길이다. 날이 따듯한 탓인지 몸이 나른하고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 덮는다.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한적한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창가에 자리 잡았다. 책을 펴 놓고 몇 자 읽다가 시물시물 졸던 중이다. 카페 여자는 커피를 들고 와서 탁자에 올려놓더니 눈을 흘기고 간다.
커피 맛이 이상하다. 주문한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아니다. 멀찌감치 잔을 밀어놓고 책을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오락가락한다. 머리 위에서‘지직. 찌지직~’하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타는 듯한 냄새가 폐부를 찌른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바로 위 천장에서 작은 불꽃이 번뜩인다. 그 불꽃은 마치 숨을 참고 있다가 터져 나온 것처럼 지지직거리며 번져나간다. 카페 안은 삽시간에 매캐한 냄새와 뿌연 연기로 가득하다. 손님들은 쏜살같이 빠져나가고 나도 가방을 들고 나가려던 참이다.
그런데 천장에서 불꽃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불, 불이다. 불….
“소화기 어디 있어요,”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녀는 문을 새치롬 열고 우두망찰 바라본다. 다급한 마음에 119에 신고하라고 냅다 소리쳤다. 뿌연 연기 속을 뒤지다가 문간 쪽에 소화기가 눈에 띄었다. 치타처럼 달려가서 손잡이를 꽉 잡고 핀을 뽑아 불꽃이 튀는 천장을 향해 쏴댔다. 빨갛게 달아오르던 불꽃이 내뿜은 하얀 분말 가루를 뒤집어쓴 채, 조금 전 기세가 꺾이더니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참이다. 그녀는 전화를 받다가 불쑥 네게 건넨다. 소방관의 목소리다. 불난 위치가 어디냐고 묻는다. 불길을 잡아놓아서 찾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에게 길가에 나가서 소방차가 오면 손짓하라고 일렀다. 그녀는 급한 게 없이 꾸물거린다. 거울을 꺼내 얼굴을 보며 밖으로 나간다.
그사이 소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현장 통제관이 내리자마자 발화지점을 묻는다. 그녀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내가 나서서 불꽃이 처음 튀었던 곳을 알려주자 바로 방호복으로 무장한 소방관들이 들어가서 화재 위험은 없는지 살핀다. 이어 다른 소방관이 사다리를 타고 천장에 올라가서 발화지점을 꼼꼼히 살피고, 여성 소방관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그들의 활동을 빠짐없이 사진에 담는다. 천장을 살피던 이가 통제관에게 손짓이다. 그는 올라가서 확인하고 내려오더니 안도의 한숨이다. 전선이 낡아서 누전으로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초동 진화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내부가 전소될 뻔했다고 덧붙인다.
한바탕 소동이 끝났다. 그들은 다시 한번 화재 주변을 살피더니 한자리에 모인다. 통제관은 잠시 그들과 대화를 나누더니 내게 카페 주인 이냐고 물어 온다.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진화에 도움을 준 이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조그만 소화기를 내민다. 순간 머쓱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화재 신고가 들어 왔는지 애 앵 애 앵~ 사이렌 소리를 내며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뒷자리는 폭격을 맞은 듯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의자 탁자는 물론, 미술관처럼 잘 꾸며 놓았던 실내 모습이 난장판이다.
“대충 정리해 볼까요.”
하지만 그녀는 마뜩잖은 표정이다. 무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만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매 만지며 딴전 피운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선친께서 이마 귀뺨을 후려치며 호통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무슨 일을 시키면 못마땅해하던 내 꼴을 보고,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누군가의 말을 빌려와서 나무랐다.
살다 보면 가끔 혼자의 시공이 필요하다. 사실 수처작주라는 말을 잘 모르고 지냈다. 원전을 찾아보니 이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승인 임제선사가 제자들에게 법문하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수처작주 입처계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즉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에 주인이되 라고 했다. 삶의 진리는 멀리 있지 않고 특별한 조건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이든 가정생활이든 객이 아닌 주인으로 살라는 의미가 아닐지….
그 말을 다시 새겨 본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매사 주인으로 산다는 게 쉬운 일 아니다. 타자를 의식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보다 명함 속에 묻혀 지냈다. 한낱 기계 부품처럼 지낸듯하다. 가정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의 남편으로, 아빠로, 그리고 아들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역할 속에 나를 맞추어 왔다. 정작 ‘나 자신’으로 살아온 시간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그때는 그 호통 속에 담긴 그 말에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러하지만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맞는지 그녀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노을이 유난히 붉다. 채소에 물을 주려고 막 떠나려던 참이다. 그 순간 진짜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차 뒤꽁무니를 붙잡으며 명함이라도 한 장 달라고…. 불현듯 그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이야기 나눌 사이 없이 차 깜빡이만 깜빡거리며 미끄러지듯 카페에서 빠져나왔다.
첫댓글 유 수필가님이 올려주신 작품
<첫 경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