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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험곡(險谷)을 넘어 여기까지..
(누구든지 저희 올올이 맺힌 한을 풀어주시려거든 끝까지 정독해 주셨으면...)
*해방 직후 어렵고 힘든 초근목피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해 돌아오는 길에는 배는 꼬르르 소리치니 먹을건 없고 들로 쏘다니며 개울가 고기도 잡고 산으로 둘러서 산 열매를 따먹고 책보에는 쑥이나 산나물을 뜯어서 돌아온다. 한끼 때를 때우기 힘든 시절이라 나물로 반찬을 하고 쑥으로 쑥밥을 해서 끼니에 도움을 안겨주었다.
인생길 돌아보니 어릴때부터 그 체험한 게 시공부였다. 지금까지 건장한 것도 산나물도 먹고 개울가에 물고기 잡아 구워먹고 보약을 먹어놓은 덕택에 수술한 적도 없고 겨울철에 감기도 모르게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기까지 건강하게 인도해주셨다.
제가 신앙생활 하게 된 것은?
저희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군 개쳔면 봉치리 315번지 깊은산골 촌놈출신이다. 그래도 고향 찾아가면 개천면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났다 그런다.
저희 동네에서 학교까지 족히 5Km 길을 걸어서 다닐 때다. 하루는 하학하여 중간동네 예배당에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데 무슨 일인가 가보았다. 구제품 우유가루를 교인들이 나누려고 하는데 둘러서 한 움큼씩 집어먹는다 덩달아서 끼어들어 집어나오는데 어떤 집사님이 “우유가루 먹을라모 다음주일 교회오너라” 이말에 하나님께서 코를 끼어 붙들어 멍에를 메워주신 것이다.
주일학교 반사를 하면서 배우며 가르쳤다, 붓글에 솜씨가 있었는지 찬송 궤도?(앞에 찬송가를 내걸은 도면) 새로운 곡을 추가하면 반드시 필자가 쓰다보니 찬송내용을 암송할 수있는 기회였다. 그때 받은 은혜로 험난한 세상을 헤치고 살수가 있었다.
부산에 와서 처음 자성대교회에 다녔다. 예배하고 나오는데 청년회장에게 붙들려 청년회실에 갔는데 그날이 월례회 날이었다. 무슨 이런 법이 있던가? 신입회원을 당장 부회장직을 임명을 하길래 항변을 했더니 “부회장은 양복 소매 끝에 단추처럼 하는 일이 없다” 면저 짜고치는 고스톱이었다. 거죽이 멀쩡하니 나를 붙들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대로 넘어갔다.
주교교사 15년 근속상(상패) 받은 건 우리 두 아들 주일학교 교육을 위해 데리고 다녀야 했으니 같이 열심히 교사직을 봉사했다. 자랑하는 얘기 같지만 안수집사로 원로장로가 되기까지 언제든지 무슨 일이든 남보다 앞장서 섬겼다고 자부하고 싶다. 워낙 일할 사람이 없으니...
*제가 청년시절 제대하고 부산에 와서 뼈를 깎는 모름을쓰고 전자기술을 습득하여 전자대리점(도시바 동래센터) 기사로 취직을 했다. 틈틈이 전축(오디오)부품을 사서 일이 재미가 붙여 밤에 잠을 안 자고 조립을 했다. 피곤도 모르고 밤을 꼬박새우기가 일쑤다. 1대 완성을 하려면 동이 튼다. 성공해 소리가 나면 다행이지만 소리가 안 나면 다시 회로를 찾아서 수정해야만 했다. 왱왱 소리가나면 그 기분을 누가 알랴! 아침밥도 먹는둥 마는둥 주경야독을 하며 직장에 출근 한다
시간을 쪼개어 그 만든 전축을 지인들에게 팔아야 했다. 한 여덟대를 만들어 팔았다. 대당 가격이 그당시 3만 원이었다. 영도에 어떤 선장댁에 부탁을 받고 제작해 갔다. 선장님이 수고했다고 저녁식사를 대접하더니 난데 없이 “기사 양반 이 가죽점퍼 한번 입어봐요” 해서 얼떨결에 입었다. “거울 앞에 나서봐요 아~딱 맞다” 왜 이러는지 그때까지도 난 몰랐다. “전축값이 얼마죠” 선장님이 물었다. -예 3만원입니다.
“실은 내가 돌아올 때 일본에서 사가지고 온건데 시중에 팔면 5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만 전축 값으로 계산하면 어떻소?” -그러셔도 됩니다. 일을 마치고 잠바를 입고 돌아오는 그 기분! 생전 처음으로 입어본 보들보들한 ‘쪼크렛 강가루가죽점퍼!’ 졸부가 한순간 백만장자 아들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사귀던 강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었다.
*결혼스토리? 저는 산골 출신이요 가방끈도 짧고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게 없다. 반면 처녀댁은 잘 살았다. 아버지는 한일합섬그룹 김한수 회장님 덕분에 그 회사 중역으로 계시고, 어머님은 김해 녹산에서 (비료,소금 쌀, 잡화상점)을 하면서 잘 살았다. 생각해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가 언바런스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시지 않았으면 도저히 성혼(成婚)이 될 수가 없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집사님들에게 인정을 받아 돌아가신 이승화 권사님이 중매할 의도로 저를 불러 결혼관계를 물었다. -아직 결혼할 입장이 못됩니다. “그러모 김선생님 혹시 사귀는 처녀가 있어요?” -네, “이디 처녀요?” -김해 처녑니다. “그 가정이 예수 믿어요?” -아닙니다. 대답 했더니 “김선생님 불신 결혼은 안 됩니다.
불신결혼 하지 말라고 성경에도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헤어졌다
아무리 권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저는 그 가정을 구원 시키면 돼지! 확신을 가졌다. 이런 잡음에 위축된 내가 아니다. ‘두툼한 배짱에 똥고집이 대단하다’고 말을 듣기도 했다. 흔히 불신가정에 결혼 했다가 교회도 안 다니는 그런 사람을 보았다.
1~ 결혼을하려니 점잔은 할머님께서 예수쟁이하고 결혼한다고 “결혼식장에 안
가겠다”고 하시니 어머님이 마음이 편할리가 없지요. 어머님의 꾸지람을 듣고는 양산 통도사는 여승들만 있는 사찰인데 여승이 되겠다고 찾았다가 눈물을 머금도 돌아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이마에 인(印)친 자기 백성인데 손놓고 계실 분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론을 어찌 알겠는가?
2~ 강선생님의 입장으로선 예수 믿는 건 좋지만 집안에서 반대하니까 아마도 어머님 꾸중을 듣고 여승(女僧)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생각한다. 결혼을 앞두고 소식이 없어 알아봤더니 나와 절교하려고 ‘직장따라 울산으로 갔다’고 날 속였다. 그후에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는지? 끈덕진 인연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 후 처녀 아버지를 부산에서 만나고 결혼 승낙이 되었고 예식일자, 장소, 신혼여행까지 결혼 진행 과정을 모두 저에게 위임해 주시더라고요. 그래도 불신가문의 아버지 직장관계 지인들의 눈높이 체면도 있고 한데 믿는식으로 하려니 좀 죄송스럽고 신경이 쓰였지요.
우리교회는 소잡해서 결혼식장을 조방앞 신축 개업한 영남예식장을 하겠다고 통고하고 (1981년 11월23일)예식을 올렸다.
목사님 주례하에 예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은 그 당시에는 해운대 극동호텔이 고작이다. 손에 돈 한푼도 없으면서 제주도로 간다고 했더니 처가에서 항공티켓 두장을 끊어주더라고요. 처가가 잘 살았으니 염체도 없이 누울자리 보고 다리를 뻗은 것이다.
3~ 결혼을 해서 아기를 가졌는데 입텃이 너무 심했다. 밥 한술 먹었다 싶으면 곧장 화장실로 가서 토해버린다. 사람이 먹어야 사는데, 잘 먹고 잠 자는 게 보배다. 아내는 불면증에 시달려 약방에 ‘뇌신’ 두통약을 밥먹듯이 하니 악몽을 꾸게되고 머리가 너무 아프다 해서 초량뇌병원을 찾기도 했다. 지금 말이라고 하지, 어찌 필설로 이루 헤아리랴! 한창 깨가 쏟아져야 하는 신혼생활을 우리는 그런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나요? 사람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죽지못해 살았다.
*시집을 보내놓고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어머님이 오라고 해서 처가를 매주마다 간다. 결혼 전에는 통통한 그 이쁜 얼굴형용이 아니었다, 몸도 동태처럼 바싹 말랐으니 친정에 가면 이웃 사람들이 “애선아 니 얼굴이 와 이렇노?” 그 소릴 듣고서 다음 부턴 누가 볼까봐 죄인같이 밤에 몰래 갔다 온다.
4~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 연년생으로 작은애 임신을 했다. 예전 단칸방에 무더운 여름 날 부엌바닥이 시원하니까 좀 더위를 피하려고 부엌 바닥에 장판을 깔아놓았다. 때마침 시골 숙모님이 오셨다. 아직 출산일이 못되었는데 아내가 방에서 내려오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숙모님이 그 장면을 보시고 “아이구 우짜겠노 홀몸도 아닌데..” 그날밤 통증이 와서 ‘일신병원’에서 조산을 했다.
워낙 산모가 못 먹은데다가 아기가 조산을 했으니 2k도 안 되어 규정대로라면 인큐베이터 들어가야 되는데 생각 외로 아기가 똑똑해서 안 넣어도 되겠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며칠 후 퇴원하기 위해 규정에 따라 보호자 시말서를 쓰고 퇴원을 했다. 집에 와도 걱정이다. 산모가 많이 먹어야 아기를 키울건데 착 깔아져 기운을 못 차리고 누워있으니. 할수 없이 이웃 병원에 주사놓아 달라고 의사를 불렀다.
석이는 뱃속에서 주사로 자랐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주일 지나 다시 의사를 불렀다. 출장비용도 있고 해서 어깨너머 보고서 그 다음부터서는 본인이 약방에 ‘아미노푸신’ 600단위 주사액을 직접 사서 주사놓았다.
그러면 몇 시간 후 일어나 아기 기저귀도 빨고 부엌에 들어가 식사 준비도 한다.
주사 기운으로 일주일을 버틴다.
5~ 처가도 남을 의식하고 체면을 볼 수밖에 없다, 제게 남은 건 눈치만 남았다. 가정생활이 갈수록 태산이다. 기도로 현실을 이겨야 하는데 영적 메마른 심령인데 어찌 기도가 나오겠는가? 아내가 시들머들 아프고 몸이 말라가니 답답한 처부모님이 무당 점쟁이에게 알아 봤대요. 들려오는 말이 “집안에서 아들 낳으려고 공들여서 낳은, 어떤 아이인데 예수 믿는 그집 귀신 만들어!”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꽉 붙들고 있으니 몸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전에 우리교회 권사님이 “김선생님 불신결혼 하지 마라고 성경에도 있잖아요” 지난 그 말이 생각나 내 머리를 맴돈다. 아~ 괴롭다.
이게 현실이구나!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이간질하는 악한 사탄의 시험인 줄 알면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다.
그때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생각났다. 그가 면죄부 등 부정적인 교리 95개항을 작성해 교회 정문에 내걸려고 마지막으로 초안 교정할 때 “똑똑한 수사들이 많은데 니가 뭔데 교황과 맞서 싸우겠다고? 낄낄 웃는 환청이 들렸다, 그때 글 쓰던 잉크병을 벽에 던지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치며 잉크병을 벽에다 던졌는데 지금도 역사관에 그 흔적 자국이 선명하다고 했다. ”그래, 더러운 사탄아 물러가라, 누가 이기는가 어디 해보자!” 오기가 생겼다.
6~ 아내를 보면 불쌍해 혼자 눈물을 삼킨다, 자라온 환경이 틀리고 성격이 틀리고 선과 악의 영적전쟁인 걸 알면서도 이러다간 사람 놓치겠다 싶은 생각이 스친다 아내는 우울증인지? 조울증도 모르는 상태에 살아갈 용기를 잃었다. 그저 지치고 분한 생고집만 가지고 하루하루 버티면서 내가봐도 일상과 신앙은 별개로 위선적이다. 그때 안수집사로 청년회 회장으로 주일이면 교회는 억지라도 가야 했다.
그런 와중에 아내는 아이를 둘 데리고 시내 외출이 잦았다. 돌아와서 애들한테 엄마 몰래 오늘 뭐했노? 물으면 순진한 아이들은 그대로 대답을 한다. 종합적 얘기를 듣고 나름대로 판단을 해보았다. 전에 처녀 때 어느 미친놈이 사주를 봐준다면서 단명(短命)이라고 말했든 그 말조차 귀에 거슬렸다. 이 약방 저 약방에 들러서 수면제 사오는 걸 알고는 혹시 자살?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 청년회 헌신예배를 보게 되었는데 외래강사를 초빙하는 것도 회장이 선임해서 성경본문, 설교제목, 찬송을 확인해 본교회 담임목사님께 허락을 득한 후 주보에 올려야 한다. 강사는 한상동 목사의 동생 한명동 남교회 목사님이셨다.
주일 전날 전화를 걸어서 ”목사님 죄송하지만 여차여차 말씀드리고 설교 본문에 벗어난 말씀이지만, 자살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한마디 언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설교 말미에 ‘자살은 순간적이지만 지옥가는 행위라’고 몇마디 말씀해 주셨다. 그후 아내 거동을 보면서 잘했다고 생각이들었다.
7~ 이제는 본인에게 시험이 찾아왔다. 날마다 돈을 벌여 줘야 겟돈도 넣어서 점포의 분양가를 지불하려니 경제적으로도 버거운 일이다. 게다가 분양금 완불할 무렵에 회사가 의도적으로 부도를 내어 등기도 못한 채 쫓겨날 형편이었다. 회사를 사흘거리 찾아가 선순위 가등기 푸는 조건으로 2백만원 손해를 봐가면서 우선 건물이라도 등기를 하게 되었다. 그간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당했다. 사건이 실타래같이 얽혀 엄두가 나질 않는다.
나도 모르게 자연적 부부싸움이 일어나고 아내는 심신이 허약한 최악의 조건 속에 서 설상가상으로 이런 저런 일이 겹치니 이혼하자고 맞장구쳤다. 더 이상 나도 지쳤다. 다음날 사촌 형님에게 찾아 이혼(離婚)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형님들은 “누구나 살다보면 부부싸움도 하고 이혼도 하지만 우리 제수씨같은 사람도 없다” 라고 만류를 하셨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함도 주님은 우리 형편을 아실 것이다.
8~ 그러던 중에 금성사 대리점 개설하려고 금성영업부 직원 두사람이 찾아왔다. 광안리 지역에 대리점을 개설 계획이 잡혀서 탐색을 하는 중에 판매장을 하는 우리집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첫째 광안리 동네에서 전자서비스 오래 했으니 그 기술을 믿고 찾아온 것이다. 대담후에 약속 받았다. ‘금성남구대리점’ 개설이 되어 간판을 걸고 담보물이 없이 영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금성대리점을 하려면 돈을 싸들고 부탁을 해도 코드 따기가 하늘 별따기나 하듯 힘든 시대인데 자청해서 굴러온 떡이라 감사한 일이지만 이제 돈없이 영업은 시작해놓고 집 담모불이 없이 물픔대금을 막으려니 힘들었다.
처가에 담보물 집을 잡혀주면 좋으련만 이미 큰 동서가 사업상 도움을 받은걸로 알고는 우리조차 처부모님께 누가 될까봐 입을 뗄수가 없었다. 본래 계획은 ‘협성점포’를 분양 받았으니 그 물건을 담보하려고 했는데 부도(不渡) 만나서 차질이 생긴 것이다. 영업부에서 리베이트를 못 받으니 불리한 조건으로 진퇴양난의 영업이다.
9~ 광안리점포 소유권 재판이 진행되었다. 게다가 남모른 사고를 저질러 이 법정 저 법정 다녀야 했으니 물질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두군데 재판을 감수하려니 나도 모르게 아파서 광안리 한서병원에서 병명을 몰라 고신대병원에서 ‘체장염’ 병명이 나왔는데 무슨 술도 먹지 않은 사람이 담당의사도 놀란다. 체장염이 너무 심해 게이지 끝까지 초과해 그 숫치가 내려오기까지 사경을 헤맸다. 만취해서 입원한 다른 사람들은 3일만에 퇴원하는데 본인은 열흘, 스무날, 서른 날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다.
매일 주사기만 주렁주렁 달고 아내에게 어찌나 미안한지? 대리점 혼자 38일을 문닫고 고신병원을 찾아왔으니 비실비실한 사람이 어디서 그런 힘이? 최악을 다하면 하나님이 배후에서 도와주신 능력인가 보다. 안쓰럽고 정말 미안했다. 그런데 아무도 면회온 형제들이 있었든가?
유일하게 무석이가 군에서 휴가나와 면회를 하고 돌아갔다. 돌아가고 난후에 눈물만 흘렸다. 38일만에 게이지 수치(리파제, 아밀라제)가 정상 가깝게 내려와 퇴원을 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 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무렵에 땅 地主 박원철로부터 자기 땅이라고 입주자들에게 땅 사용료 지불하라고 30년 전(1981년)부터 소송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유일한 분양자로서 지분등기를 못한 채 너무 억울해 평생을 가슴에 엉어리진 한맺힌 재판이었다.
이제는 법정 재판이 40전에 어렵게 땅 지주와 약속한 대화를 녹음시킨 녹취록 하나 붙들고 살아왔는데 이조차 너무 오래된 사건이라 모두 기각이다. 재판이란 그때당시에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아내는 “나중에 지분 넘겨주겠다” 는 지주의 그 약속을 철떡같이 믿고 있었다. “괜히 돈도 없는데 재판을 안 해도 나중에 그 사람은 땅 넘겨줄 사람이라” 라고 우기는 바람에 아내와 부부싸움이 잦았다. 세상물정도 몰라 그 사기꾼을 믿는 어리석음을 보고는 “당신은 박원철이 하고 그 집에 살아라” 눈앞에 펼쳐진 환경이 그렇게 싸우게 만들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생각조차 하기 싫다.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하게 살아온 아내가 지금은 그 지주에게 사기를 당하고 나니 후회막심 하면서 지금까지 버티어 나온 게 하나님의 은혜다. 40년 된 자료를 사실대로 제출해도 불신하고 속시원하게 판결을 내리지 않고 기각해 법정 재판이 원망스럽다. 우리만이 흘린 눈물 그 고통을 처가(妻家)가족들은 속속들이 다 모른다.
지난해 2022년 7월 24일부로 진절머리나는 재판이 모두 기각함으로 법정이 종료되었다.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쳐 재판을 5번이나 하는동안 눈만 뜨면 법정서류와 씨름을 했으니 어찌 옳은 신앙생활이 되었겠는가?
지난 40년 인생의 절정기를 허송세월 하였으니 장로직분 체면 때문에 교회는 열심히 봉사했으나 영적 신앙은 거죽만 멀쩡하게 병들고 알맹이 없는 껍데기 신앙이되었다. 재판 끝나고 녹취록 녹음한 걸 들고 협성208호를 찾아가 지죽고 나죽고 해야 하는데 장로라는 체면 때문에 억울하게 당해야 하는지...
인생의 시련을 통하여 심신도야 하려고 붓을잡게 되었고 주경야독하며 문학(文學)의 장을 열어 詩부문 3군데 등단을 했다. 시마을에 쌓아놓은 수많은 글들을 아깝게 수장할 수 없어 세상에 퍼올리고자 ‘Silver news 사회문화부’ 기자로 활동한지 10년이 넘었다.
10~ 어느새 팔순(傘壽)을 맞아 돌아보면 감사함 뿐이다. 진양강씨 가문에 불나방으로 뛰어들어 불어닥친 시험(Temptation)으로 인해 만일에 내가 패배자가 되어 이혼을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고풍이 엄격한 그 가문은 치명타가 되었을 것이요, 처 부모님들의 그 당대 입장은 ‘예수예字’도 들먹이지 마라, 머리 흔들며 한이 맺혔을 것이다. 어느 누가 두 번 다시 그런 수모와 전철을 밟겠는가?
이제는 떳떳하게 말한다. 양부모님도 주님을 영접하셨다. 아버지는 후두암으로 고신병원 입원하시게 되었다. 대구의 큰 병원도 많은데 부산 고신병원을 찾은 것도 주님의 뜻이다. 본인이 금성대리점 경영할 때 영업 종료시간이 밤 10시인데 피곤하고 거리가 멀어도 아버지를 이 기회에 믿도록 해야지? 결심을 하고 매일 밤마다 병실에 가서 예배하기로 작정을했다. 나흘째 되는 날 조금 시간이 늦었더니 “왜 김서방이 오늘 저녁은 안 오나” 라고 아버지가 기다리신다고 가는 도중에 전화를 받고는 아버지 닫힌 마음문을 열었구나! 생각하니 감사했다.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 그 찬송으로 시작해 예배를 드렸다.
보름동안 그같이 예배를 하고 나서 ‘병원원목’ 목사님께 부탁드려 영접기도를 받고 대구로 퇴원하여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추운 겨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발인날에 제물 앞에 놓고 제사를 드리고는 묘지를 출발할 때 본인은 많이 서운하고 식상했다. 누구 하나 예배하자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처남에게 설득하여 묘지에 가서는 하관예배를 본인의 인도로 가족과 함께 둘러서 예배하고 마지막 아버지의 영혼이 천국가심을 확신했다.
어머님께서는 녹산집에서 병중에 계실 때 평생에 교회 출석은 못하셨지만 믿는다고 선언하셨기에 어쩌면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외우게 할까? 크게 복사하여 머리맡 벽에 붙여놓고 “어머님 이걸 외우셔야합니다” 저의 성의를 보시고 “오냐!” 대답하시고 한구절 한구절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형제들 모두가 어느새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아 목사, 박사, 장로, 권사, 집사로 지교회를 섬기고 축복을 받았으니, 가베랑리조트에서 (가족사진)을 보듯이 믿음의 가정에 아이들까지 줄줄이사탕 46명 구원받은 축복이다.
눈물겨운 풀무불에서 ‘불시험’을 정금같이 통과하여 이제는 ‘덤으로 사는 인생’의 ‘포토에세이’ 책을 마지막으로 발간한 것도 자손들에게 과거 할아버지의 지난 역사를 남기고 싶었다. 어떠한 불시험이 와도 이겨낼 고집성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그 가정에 붙여주신 것이다.
90년도 인터넷 초창기에 ‘미니사이월드’ 개설해 김복음을 필명으로 등록해 그후 ‘주님을 사랑하는시마을’ 카페를 오픈하게 되었고 어딜 가도 대내외적으로 김경근은 몰라도 김복음을 많이 부른다. 그 명찰을 달았으니
복음에 열정을 가지게 되었고 대접을 받으러는 장로회 연합회일은 사양을 하고 복음을 위해 지금까지 ‘전국남전도 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내게 붙여진 한영혼을 위해 섬기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나의 명찰을 반납하리라.
말미에 덧붙여, 내 자랑하려는 교만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형제들이 이런저런 말
1마디도 없으니 모두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서운한 마음이 든다.
따라서 성경 로마서(10:14~) “전하지 않으면 누가 들으리요,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면 어찌 전파하리오” 아무리 만세전부터 택정함을 입었다할지라도 전도자를 통하여 누가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진양강씨 고집보다 김해김씨 똥고집이 승리를 하도록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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