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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교수의 大르포 현장을 찾아서…] 중국 조선족의 절규
“중국에는 누가 가고 싶어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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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14일 조선족 5,640명이 국적회복을 위해 헌법소원을 낸 후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TV·신문·인터넷 사이트가 소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갑자기 조선족교회를 방문했다. 그러고는 위와 같은 글을 남겼다. 물론 이 글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체류 조선족들이 발행하는 ‘동북아신문’(東北亞新聞, 보다시피 간체자로 쓰여 있다. 자기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기호다) 인터넷 사이트 맨 앞에 열려 있다. ‘대통령의 친필이 여기 있다’는 자랑일 것이다. 무엇인가 일이 풀려 갈 것이라는 암시일 것이다. |
그러나 필자는 이 필적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일은 더 꼬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가슴 한켠을 스쳐 지나갔다.
필자는 전공이 갑골학이다. 갑골학이란 거북의 등 껍질이나 소 다리뼈에 칼로 새겨 놓은 상형문을 해독하고 그 내면세계와 사회상을 유추해 내는 학문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배웠다. 측자법이라고 해서 글씨의 필획을 보고 그 사람의 인성, 지성 따위를 찾아내는 기술도 조금 알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손으로 쓴 팩스를 컴퓨터로 확대해 가면서 글씨 주인의 성품이 어떠한지, 출신이 중국의 북방인지 남방인지까지 알아낼 수 있다. 물론 필획뿐 아니라 어휘와, 글자 배열 따위를 면밀하게 대조하면서 찾아내는 것이다.
설명이 장황하지만 독자들은 무슨 말이 이어지려는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글씨를 쪼개 보려는구먼!’
그렇다.
우선 첫번째 단어. ‘중국동포 여러분’을 보자. 이 말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그는 노무현이 아니라 중국의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다. 후진타오가 남의 나라에 가서 화교들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앞에 앉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 셈이다.
“여러분은 중국인들입니다.”
중국인이기를 포기하겠다고 굳게 결심한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여러분들은 중국인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것도 대통령이. 이 정도면 이야기가 끝난 것 아닌가. 대통령에게 국적 변경 허가 능력이 없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만일 이상의 분석이 모두 틀렸다면 대통령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나타난 꼴이 된다.
이번에는 두번째 표현. ‘국경과 법제도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 써늘해짐을 느꼈다. 현재의 한·중간 국경, 그리고 법제도가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이 말은 참으로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도대체 어느 나라 법제도가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뜻인가. 중국의 그것이 문제라면 외교적 도전장이고, 한국의 그것이 문제라면 그는 우리나라 법규에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글씨에 서린 ‘망설임’의 흔적
이번에는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해 보자. 이 글을 읽어가면서 독자들은 틀림없이 필자의 문장과 대통령의 친필을 함께 견주어 보게 될 텐데, 천천히 원문 사진 전체를 보기 바란다.
서예에서는 이렇게 전체를 조망하는 방법을 ‘장법’(章法)을 살핀다고 한다. 또는 글자의 ‘포치’(布置)를 살핀다고도 한다. 어떤 특징이 드러나는가.
글의 모든 왼쪽 끝이 가지런하고, 그 글자들의 처음 부분이 강하고 굵다.
‘음, 정말 그렇군.’
그러나 오른쪽으로 갈수록 모두 끝이 허약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감성의 의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주는 필체다. ‘가자!’, 그리고 한참 가다 ‘어디로…?’ 이런 류의 질문에 익숙한 성품이다.
마지막으로 점을 보자. 점(占)이 아니라 점(點)이다. 글이 끝나면 점을 찍어야 하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받아쓰기’에서부터 요구되는 한국어 문법의 기초다. 그런데 대통령은 있어야 할 두 곳의 점을 빼 먹었다. ‘건강 잘 돌보십시오’와 ‘2003. 11.29’ 다음 부분이다. 끝마무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걱정스럽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곳에 점이 하나 붙어 있다. 없어도 되는 곳에….
바로 ‘대통령 노무현’ 뒤에 점이 찍혀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 이름 뒤에 점을 찍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점 하나를 반듯이 찍어 두었다. 어색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대통령이야’ 이런 뜻으로 도장 찍듯 꽝 찍은 것일까.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삶의 거취를 결정하지 못해 밥을 굶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일 따위는 거추장스러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난처함이다. ‘대통령 노무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가장 잘 알겠기에 느꼈을 난처함을 어쩌지 못해, 그대로 훌쩍 떠나지 못한 망설임이 뭉친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절대 해프닝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일인데 대통령의 글씨에서는 그다지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다. 느낌이 별로다.
이제 느낌은 이 정도로 하고 본격적인 해결책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족의 문제. 우선 이름부터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매스컴을 보면 명칭이 다양하다. 조선족, 조선족 동포, 중국동포, 중국교포, 중국 조선족…. 어느 것이 옳을까. 답은 여기에 없다. 정답은 조선족과 재중교포여야 한다. 이 명칭의 회복이 조선족에게 정체성을 돌려주는 해결책의 출발점이고, 그들의 한국에서의 인권을 회복시켜 주는 첫발자국이다.
“우리 조선족은요….”
모든 조선족들은 스스로를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것이 그들의 정확한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불러 주어야 한다. 재중교포다. 재미교포·재일교포와 다름없는 사람들이다. 1948년 이전에 중국의 동북3성(헤이룽장·지린·랴오닝)으로 흘러 들어간 재중교포들과 달리 최근에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국인들이 많다. 30여 만 명에 달한다.
그들을 ‘재중교포’라고 불러야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아예 중국에서 살고 싶어한다. 이민 아닌 이민을 가는 셈이다. 이들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부를 것인가. 재중교포라고 불러야 한다. 그럴 때, 동북 3성에 있는 교포들을 조선족으로 구별해 부른다면 심각한 인종차별, 아니 지역차별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인들의 단합을 막는 문화적 바리케이드가 될 것이다.
인간이 지닌 못된 성품 중 가장 치사한 것이 바로 이 인종차별이다. 재중교포들 가슴에 피멍이 든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너와 내가 쏘아낸 인종차별의 눈빛 때문이었다. 말의 폭력, 뭇매, 임금 떼먹기는 그 눈빛의 또 다른 구체적 증거들이다.
불공평. 재중교포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은 바로 불공평이다. 필자는 이 불공평의 뿌리를 캐기 위해 모든 채널을 다 동원하기로 했다. 주변의 정보원(?)·연구원, 그리고 조교….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점퍼를 걸치고 종로 5가로, 경기도 광주로, 충청도 천안농공단지 등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도 했고, 대화도 나누고 자료도 정리했다.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글의 시작을 앞에서 보았듯 노무현 대통령에서부터 풀기로 했다. 이 문제의 해결에는 감상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독자들에게 전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공평의 문제는 구로동의 조선족교회도 아니고 명동의 시위 현장도 아닌 워싱턴에서부터 풀기로 했다.
‘조선족 문제에 웬 워싱턴?’
그렇지만 삶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해답은 때로 엉뚱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지난해 12월11일 밤 10시 반에 전화를 했다. 워싱턴 근교에 살고 있는 전종준(45) 변호사에게다. 이민 관련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그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비자관련 불법 관행 수정을 위해 파월 미 국무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던 당찬 남자다. 목소리가 경쾌하다. 그곳은 아침 8시 반.
―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뭐 좀 여쭈어 보려고요.
“…재외동포법은 불평등 그 자체예요. 그 법에 대한 공청회가 워싱턴에서 열렸었는데, 당시 나는 그 법을 반대했습니다. 명백하게 위헌적 요소가 있었거든요. 미국교포들에게만 유리한 법이지요. 그리고 지금 밝힐 수는 없지만 그 법은 당시 정권 실세였던 어떤 사람이 사심을 가지고 만든 법이에요.”
사심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기서 말할 수는 없다. 아니 말할 필요도 별로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법은 전변호사가 직감했듯 이미 위헌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법의 개정을 위해 2003년 12월31일까지 개정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벌써 12월12일, 이 글이 독자들에게 읽힐 12월말, 1월까지 새로운 법안이 마련되어 있을까. ‘파리바게트’ 빵집이 아닌 국회에서 마련되어야 하는데…. 119도 안 챙겨주는 재중교포들을 국회의원들께서 챙겨 주실까. 그러나 이 일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재외동포법이 불평등 요소를 안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재외동포이고, 그 이전에 외국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재외동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법이 아니고 ‘전두환 고스톱’이다.
“나는 동포, 너는 안 동포.”
누구 마음대로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그 만든 사람을 당장 찾아낼 수는 없지만, 그 법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은 미국교포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2년짜리 ‘거소증명서’를 받아 마음대로 한국을 드나들면서 경제활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교포들쪽에서 보면 부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정작 미국교포들도 이 법안이 탐탁스럽지 않기는 매양 마찬가지다.
“그냥 건드리지 마세요, 교포들. 그냥 놔두세요. 왜 동포니, 아니니 법을 만들고 그래요? …아, 욕 나오네…. 세계 어디 가서 살면 어때요? 그냥 놔두라니까요. 사람들을…. 현행 출입국관리법으로도 얼마든지 관리가 가능한데, 왜 재미동포만을 위해 그런 법을 만들어요?”
“국적포기운동은 경솔했다”
이번에는 전화를 미국 서쪽 끝의 시애틀로 돌렸다. 한국어판 ‘크리스천 뉴스’와 유선 TV를 운영하는 김종호(58) 회장에게 말이다. 그의 사뭇 흥분된 어조가 이어진다. 전화기가 ‘쩡쩡’ 울린다. 휴대전화를 들고 방향을 바꾸느라 열심이다.
음, 미국에 있으니까, 먼 나라 이야기니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비판은 국내에서도 이어진다. ‘외국인이주노동자협의회’의 한국대표인 고귀복(36) 목사는 현재 중국교포들이 벌이고 있는(벌이고 있는 것일까. 벌어진 판에 끌려들어간 것일까.) 국적포기운동에 ‘자아비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단어마다 힘을 주며 조목조목 국적포기운동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여론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한 행동이에요. 경솔한 행동이고요. 결과를 호도할 수 있고요. 더구나 대통령이 방문한 것도 잘못 되었어요. 기대치만 높였지 현실성이 없잖아요?”
대통령과 코드가 맞을 텐데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 국적포기운동이 잘못 되었다면, 그렇다면 대안으로 주장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일단 모두 사면해 주고, 자유 왕래를 보장하는 것이지요.”
― 현실성이 있다고 보세요?
“허허, 물론 완벽한 해결은 힘들지요.”
휴, 때로는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군. 대화가 사뭇 부드러워졌다.
“일단 모두 사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왕래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 대신 일단 법이 완성되면 아주 엄격한 룰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국내 고용시장 교란의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는 ‘엄격한 룰’을 말하면서 단어에 엄청난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일단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이들을 보호하자는 뜻이었다.
보호. 이 부분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03년 11월11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을 찾았다. 지난주에 이어 두번째 방문이다. 15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매끄러운 대리석 복도가 보여야 하는데 온통 사람들이다.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다시 깔았다.
그 위에 우리 어머니, 이모님, 고모님, 이웃에서 늘 만나는 할머니 같은 얼굴들이 이러 저리 누워 있었다. 퉁퉁한 몸매들. 몸매들도 닮았다. 어디에다 눈을 두어야 하나? 방학이 끝나고 첫 강의 때마다 들던, 아이들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워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하던 그 느낌이 확 살아났다.
삶을 너무 처참하게 만드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 어디서 오셨어요?
“아, 예….”
잠시 헤매는 사이, 눈앞에 전개된 이상한 상황에 잠시 더 헤맸다. 빈소였다. 사방 1m 정도의 책상 위에 영정이 하나 있다. 눈매가 선량하게 생긴 남자다. 12월9일, 그러니까 이틀 전 새벽 거리에서 성냥팔이 소녀처럼 고향을 찾아 떠나간 그 남자였다.
두만 강변 허룽(和龍)의 룽징(龍井)중학교에서 보았던 윤동주의 사진이 떠올랐다. 윤동주 사진도 흑백이었지, 아마? 그 시인도 해방되던 그 시기에 죽지 않았다면, 좀 더 늦게 태어나 잘 사는 남조선이랍시고 찾아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치한 감상으로 가득 찬 시어라고 핀잔이나 먹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남겠지. 우리 사회는 줄곧 출신으로 삶에 점수를 매기니까.
그러고 보니 윤동주가 창덕궁 돌담 밑에서 잠든 이 사내를 위해 미리 지어둔 시가 한 수 있었다. ‘별 헤는 밤’이다.
별 헤는 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이 영정 속의 사나이 역시 윤동주가 지어 둔 이 시를 외우며 별을 하나씩 부르며 지금쯤은 얼음이 꽝꽝 얼었을 두만 강변 고향으로 떠났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혹시 지난주에 왔을 때 내가 보았던 인물일 수도 있다. 112·119에 전화를 10여 차례 했다지, 아마? 후…. 영정 앞에는 조그만 나무 십자가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영정 뒤로는 손으로 만든 듯한 흰 종이 국화들이 까만 판 위에 붙여져 있다. 책상 밑에는 라면 박스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갑자기 누군가 부스럭대며 사탕을 건넨다. 어렸을 때 먹던 하얀 ‘누가 사탕’이다. 고개를 드니 모든 아주머니, 할머니, 아저씨들이 사탕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잠시 웃음과 짧은 농담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가만히 보니 지난주보다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많이 지친 모습들이다. 온돌에서 지져야 하는 몸이 조선사람 몸인데 돌바닥에서 잠을 자니….
지난주 그러니까 지난해 12월4일에 올 때는 분위기가 팽팽했었다. 낯선 방문자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인터뷰하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을 찾던 중 만난 사람은 중국동포의 집 서울센터에서 봉사하는 이선희 목사였다. 어렵사리 나이를 물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마흔여덟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체구가 가냘픈 여성이었지만 대단한 집중력을 갖고 있었다. 그 전날, 그러니까 12월3일 미리 전화를 했다. 그리고 4일 오후 3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선희 목사는 없었다. 대신 긴장감으로 가득 찬 여자들이 경계에 찬 눈초리로 필자를 스크린하고 있었다.
‘음, 가만히 있자.’
중국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터득한 감각이 나에게는 있었다. 피곤할 때 광저우(廣州) 바이윈(白雲)공항 맨바닥에서 신문지도 깔고 자는 뒹굴림도 나에게는 있다. 고급 관리에서부터 길거리 걸인까지 인터뷰할 수 있는 노하우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동작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옌볜(延邊)을 드나들면서 가진 하나의 원칙 비슷한 것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다가가자. 그리고 존중하자.
“인간의 존엄성 깨닫는 계기로 삼겠다”
나는 가만히 라면박스 위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곁의 한 여자가 무엇인가를 내민다. 빵이다. 바게트 빵을 죽 찢어 건넨다. 나는 웃으며 거절했다. 우선 배가 고프지 않았고, 억지로 받아 들고 있으면 모양이 더 어색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다고 했다. 그것이 더 나았다. 그러자 그가 팔을 거둔다. 그 사이 잠깐 미소가 비친다.
‘됐다!’
대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그를 보니 붉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등에 여러 가지 구호가 적힌, 말하자면 유니폼이었다. 그런데 혼자만 입고 있었다. 등에는 ‘필유로’(必有路)라고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삐요우루’라고 읽었다. 중국어였다. 반드시 길이 있다는 뜻이었다.
― 저는 상명대 중문과에 있습니다. 이번에 중국교포 관련 글을 쓰려는데, 어제 이선희 목사님과 약속은 했는데….
“아, 이선희 목사님요. 아, 지금 명동에 가셨어요. 데모하러. 동포들하고….”
그러더니 라면박스 자리를 좀 더 비워 준다. 그래서 조금 다리를 펴고 앉았다. 그러자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아, 목사님, 여기 어떤 ‘겨수’ 분이 오셨는데….아, 예, 잠깐 바꾸어 드릴게요.”
교수를 ‘겨수’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 채팅 속의 단어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그게 옌볜 발음이다. ‘오’를 ‘어’ 비슷하게 내는 발음.
“아, 이선희 목사님, 김경일입니다. 어제 약속했던….”
“아, 죄송합니다. 지금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오실 동안 제가 여기 분들과 인터뷰 좀 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그럼, 이 분에게 직접 인터뷰해도 좋다고 이야기 좀 해주시겠습니까.”
전화기를 건네주자 빨간 조끼의 여자는 다시 “예, 예” 하면서 한동안 통화를 했다. 그러고는 전화기를 접고 나를 바라본다.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무엇이든지 물어보라는 미소였다. 그러더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협조하라고 부추겼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가 성만 여쭙겠습니다. 이름은 대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긴장감으로 가득 찬 얼굴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대답이 없다.
그러자 빨간 조끼를 입은 그가 말을 시작했다.
“제 성은 박이에요.”
그는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되었다고 했다.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려주면서 적극적이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비교적 순탄한 한국생활을 한 셈이었다.
“저는 이번 일(정부의 불법체류자 강제출국)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또 우리에게는 아주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 동안 돈만 버느라고 정신 없었지,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 깨닫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조리 있고 자신의 의사에 확신이 스며 있었다.
“저는 돌아갈 거예요. 가서 동포들에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을 깨우칠 거예요.”
신선한 이야기였다. 옌볜 옌지(延吉)시 산등성에 자리하고 있는 옌볜과기대에서 보았던 젊은이들의 강한 눈빛이 떠올랐다. 자존심과 긍지로 가득 찬 그 낯빛이 그의 얼굴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저는 지금 신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랬구나.’
그의 얼굴 뒤로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경계심이 여전하다. 넌지시 성을 묻자 얼굴을 돌려 외면해 버린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의 한 할머니가 다가선다.
“목적은 그렇습네다.”
자신의 나이가 예순아홉이며 성은 김,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스 시에서 왔으며, 본적은 충북 진천군 덕산면이라는 등 일사천리로 자기소개를 한 뒤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쏟아붓는다.
“부친은 학생시대 3·1 운동을 하다 나라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갔소. 력사는 북한에 있는데 중국 요하 근거지에서 독립운동을 했소. 내 열한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태극기를 그려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불렀는데, 그러고는 아무 때고 한국과 통할 때 고향을 찾아가라 그리하십디다. 그래 왔소.”
“나는 한국사람 되고 싶은 마음 없소”
김할머니는 2003년 4월28일에 입국했다. 법무부가 2003년 3월31일 이후 불법체류된 자는 합법 신분을 얻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비자 기간이 지난 김할머니는 자동적으로 불법이 되어 있었다.
“나는 한국사람 되고 싶은 마음 없소. 어려서 살아야 정이 있지. 정은 없소. 단지 돈은 벌고 싶소.”
그러자 멀리서 우리의 광경을 지켜만 보던 한 노인이 다가온다. 성을 김이라고 밝힌 이 할아버지의 나이는 68세. 발음이 비교적 또박또박하다. 하기는 요즘은 옌볜 TV 아나운서들도 이전의 평양말 대신 서울말을 자꾸 쓰는 분위기인지라 그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 있다.
“나는 고향이 경북 선산군 주하리요. 아홉 살 때 어머니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지요. 중국은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키워 주었어요. 양부모와 같지요. 그래서 도의적으로 중국을 버릴 수 없어요.”
― 어떻게 도와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 좀 해 보세요.
“1965년 대약진운동 때 무척 어려웠어요(마오쩌둥이 중국이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며 생산 배가 운동을 하면서 비료를 과다하게 쓰거나, 밀식 재배를 해 오히려 생산이 줄어들었던 시기). 중국 한족에게는 입쌀(백미)을 한 달에 1근씩 줄 때 우리 조선족에게는 5근을 주었어요. 우리 조선족이 밀가루를 잘 못 먹으니 입쌀을 그리 준 거지요. 그 은혜를 잊지 못해요.”
김할아버지의 도의적 책임론이 제기되자 너도 나도 중국 국적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성토가 쏟아진다. 그런데 잠시 여기서 한 여고 3학년 담임이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해야겠다. 그 학교에서 토론 시간에 ‘조선족 문제’를 주제로 토론이 벌어졌는데 한 여학생이 이렇게 발언했다고 한다.
“우리도 생활이 어려운데 그들만 외국인이라고 특별히 매스컴에서 다루어 주는 것 아닌가요?”
그 여고 담임은 자신의 학교가 비교적 가난한 지역으로, 많은 부모들이 일용직과 파출부일로 힘겹게 살아가는 형편이라고 했다. 경우만 놓고 본다면 중국교포 중에는 한국의 극빈자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간병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 사람이 서울에도 있다. 라면박스를 옷장 삼고, 달걀과 김만으로 버티며 알뜰살뜰 돈을 모은 사람이 천안에도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중국교포들의 강제추방에 냉담해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관련 뉴스에 달리는 리플에는 차가운 내용의 글들도 많다. 그렇지만 좀 더 침착해지자. 재중교포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인터뷰 과정에서 옌지에서 왔다는 허씨 할머니(73)를 만났다. 그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밝혀도 좋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역시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 할머니의 첫 마디는 이랬다.
“내 중국 가고 싶어 갔어요?”
갑작스러운 질문 겸 넋두리에 잠시 대답을 못하자 그 할머니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발음이 어눌했지만 느낌이 진솔했다.
1,050만원 임금 떼인 할머니의 비애
“자기 목숨을 유지하지 못해 갔는데, 이제 중국사람에게도 ‘없이 받아서’(업신여김을 받아서) 살기 바빠요. 지금 여기 사람들이 제 사정으로 돈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돌아가서 중국사람들에게 ‘없이 받는’ 것이 더 큰 문제지. 사실, 아이, 처음에 한국 때문에 우쭐해 살았다 이 말이오. 이제 값이 없어 어떻게 살겠소.”
1960, 70년대부터 유행한 단발머리 스타일을 유지한 흰 머리의 허할머니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내일이라도 돌아가고 싶소. 그렇지만 내 돈 천공오십만원!”
“예? 천공오십?”
“천오십만 원! 이 늙은 사람 돈까지 떼어 먹어 한국사람 얼마나 더 잘 살겠소? 내 김대중 대통령께 편지 열한 번 했소. 친구 150명이 서명 편지 만들어 줬소.”
임금체불로 억울함을 못 참아 뇌출혈을 당해 쓰러졌던 것이다. 몸은 반만 겨우 움직이고 말은 어눌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조금 찌그러진 눈꺼풀 안의 눈이 고왔다. 젊었을 때는 꽤 고운 모습일 듯했다.
“늙은이지만 속은 살아 있소. 한국 놈 하나라도 죽이야지 내 속이 풀리지. 내 못 받은 돈, 그 돈 다 주고라도 깡패를 사서 사장 죽이고야 가지, 그냥은 못 가지.”
이 말을 듣던 나는 그 할머니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한국사람 대표는 아니지만 죄송하네요.”
그러자 그 할머니는 나를 올려다보며 작게 미소를 짓는다. 입에서는 단내가 확확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내 팔을 툭툭 두드린다. 천성은 맺힌 것이 없는 사람이다. 거친 말을 하는데도 느낌은 순박했다.
사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불쌍한 분들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입장을 달리하는 시민운동가들도 똑같이 걱정하는 부분이다. 필자도 다른 어떤 문제보다 이 문제는 반드시 정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추방을 집행하기 전에 임금체불당한 사람, 또 차월겸(59) 할머니같이 독특한 상황에 처한 (독립유공자 최도선의 손녀. 2000년 8월11일 정부 초청으로 입국, 국적 회복을 요청했지만 체류 기간이 지나도록 국적을 못 바꿈)이들은 분리한 후 집중관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줄 필요가 있다. 또 브로커들 때문에 남의 이름으로 들어와 여권과 사람이 맞지 않는 할머니도 있었다. 듣다 보니 어이가 없었지만 이런 사람들도 특별히 보호해 줄 필요가 있다.
농성장과 데모 현장을 다니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곳에는 보호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위에 예를 든 정말 불쌍한 사람들의 경우를 부풀리면서 자신들도 그 덕을 보려고 한다. 또 시민운동 역시 이러한 경우를 이용해 법에 무리한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말 불쌍한 분들의 경우를 먼저 해결해 원성을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군은 시신 찾는 일에도 막대한 돈 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바로 불합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합법적인 법 집행이라고 할지라도 두고두고 원성을 듣겠기 때문이다.
임금체불당한 사람이 분명히 있고, 상대도 있으니만큼 집중적 관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당장 체불 임금을 내지 못할 경우 정부가 책임지고 송금해 주는 방식으로라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의만 있다면….
중국교포의 국적회복운동을 통해 촉발된 이 문제에는 사실 간과할 수 없는 난제가 숨겨져 있다. 우선 이런 질문부터 해 보자. 만일 정부의 강제추방령이 없었더라도 중국교포들이 국적회복운동을 시작했을까.
나의 대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이 운동을 맨 먼저 시작한 서경석 목사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조선족교회의 부목사 윤완선(54) 목사와 통화했다.
“서경석 목사님은 스웨덴에 계십니다. 경실련 관계로 스웨덴 국회에서 주는 상을 받는다고….”
휴대전화 번호를 받아 스웨덴으로 전화를 했다. 국가번호는 46. 그러나 불통이다. 또 했다. 역시 불통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또 했다. 그러나…. 확인을 하고 몇 가지를 꼭 묻고 싶었는데 그 분은 13일에나 돌아오신단다. 원고가 끝나는 시점이다. 그래서 먼저 윤목사에게 대신 좀 물었다.
― 정부의 입장은 강제출국 문제에 관해 조선족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태도인데요.
“그 말이 정말 타당하지 않군요. 마치 외국인이 하는 말 같군요. 미국은 6·25 때 전사한 미군 시신을 찾기 위해 막대한 돈도 씁니다.”
날카로운 답이 돌아왔다.
― 중국정부와 외교적 마찰이 일 수 있는 사안인데요. 대책이 있으신가요?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사회에 충격, 또는 탄압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포들 대부분이 모두 좋다고 합니다. 물론 당원, 고위직에 있는 사람은 싫어하겠지만….”
― 아, 예.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실 것인가요?
“헌법소원을 냈는데 판결까지는 빨라야 2년 걸립니다. 그 때까지 신변 문제가 걱정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벌써 터져 버렸다. 12월12일, 조선족교회 인터넷 사이트에는 서목사에게 보내는 두 개의 편지가 있었고 서목사가 스톡홀롬에서 보낸 친절한 답변이 있었다. 지면관계상 하나만 보기로 하자.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조선족 교포들을 위해, 우리 민족의 통합과 단결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그런데 단식이 끝나자마자 그렇게도 높던 그 사기가 서리 맞은 풀잎처럼 일거에 주저앉게 될 줄이야…. 우리의 소원에 대한 정부의 원만한 답변도 없이 투쟁 중도에 희생양이 된 것 같은 우리 마음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이 편지에 대한 서목사의 답변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농성 이후, 정부 발표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진행이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하나씩하나씩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십시오….”
“잠자는 사자, 중국을 건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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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외국인이주노동자협의회 한국대표인 고귀복 목사가 우려했던 성급한 기대치가 터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서목사가 겪을 마음의 고통을 십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실수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미리 예측해 재중교포들의 중국국적 포기와 한국국적 회복운동에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시하던 한 교포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전화했다.
“거기 가 있는 조선족들은 소박한 사람들입니다. 중국국적 포기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 한 사람들이에요. 대부분 농민 출신들인데 정치를 어떻게 알겠어요? 운동을 이끄는 사람과 운동에 참여한 조선족들은 사실 서로 이용하고 있어요.”
헤이룽장 출신, 전국인민대표대회 제9기 대표(현재는 10기)를 지낸 이동춘(49)의 이야기다. 흔히 말하는 전인대 대표인데 우리로 보면 국회의원이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운동은 괜히 중국이라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거예요.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있어요.”
그의 긴 설명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특히 이 사안은 사실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제다. 국적으로만 보고, 법으로만 보면 불법 중국인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한국 국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당사자인 중국 정부는 아무런 말이 없다. 또 논리적으로는 먼저 그들이 중국대사관에 가서 국적포기서를 내고, 다시 한국정부에 국적회복 신청을 해야 한다. 중국동포의 집 서울센터를 이끌고 있는 김해성 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 강하게 우려하고 있다.
“국적포기를 하면 한·중 관계에 마찰이 생깁니다. 대부분 중국동포들도 불이익을 받아요. 동포들의 90%는 반대하고 있어요. 가족들 전화 속에서 벌써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정말 그럴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적어도 필자가 이해하는 중국인, 중국 정부라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러나 함부로 나서지는 않겠지. 이른바 ‘띠띠야오 추리’(低度處理, 가만히 상태를 두어 유야무야로 가는 일처리 수법)를 사용하겠지.
정말 그랬다. 대사관에 전화도 해 보고 여기저기 탐문해 보았지만 좀처럼 상황이 잡히지 않는다. 재중교포와 시민운동가들이 서로 사례를 들려주지만 미덥지 않다. 좀더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텐데…. 그러나 그들은 그 이야기만 나와도 대화를 중단해 버리고 만다.
마침내 전화가 한 통 연결되었다. 상대는 동북3성 중 한 곳에서 공부하고 현재 대학교수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중국 정부의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말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전화 자체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조선족 관련 질문’이라고 하자 아예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래서 절대 이름과 신분이 드러날 상황은 쓰지 않기로 했다.
“이 문제는 중국 정부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중 관계에 문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아주 골치아픈 문제이지요. 앞으로 중국 조선족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모순이 크게 생기면 아주 곤란해지지요.”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사용했다. 아주 긴 시간의 통화 끝에 겨우 속마음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감을 잡았다. 심각하군!
사실 중국 정부는 한국의 재외동포법이 개정되어 재중교포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조선족들이 동포 지위를 받는 것에 대해서조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01년 12월6일 ‘한중포럼’에서 리빈(李濱) 주한 중국대사는 “재중 조선족은 핏줄로는 한국 국민의 동포이지만, 중국 국적을 갖고 있는, 56개 민족 대가정의 일원”이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이 말이 아니더라도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는 대만 독립 문제와 함께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최근 대만의 천수이볜(陣水扁) 총통의 독립선언 움직임에 대해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못 하면 못 했지. 대만의 독립은 용납할 수 없다’는 공개 협박장을 내민 중국 정부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민족이든 균열이 생기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런 와중에 ‘조선족 빼내기’라니…. 아마 중국 정부는 극비리에 ‘조선족’을 대상으로 사상 점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민족 균열 극도로 경계
이번에는 한족 중국인 교수에게 이 문제에 대해 인터뷰했다. 왕씨 성의 50이 넘은 여자 공산당원이다. 필자의 친구다.
“중국공산당의 기본 입장은 간단하다. 모든 민족이 사상적으로만 통일되어 있다면 문화적 차이는 용납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상이 분열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목사는 인터넷에 이런 글을 남겨 두었다.
“중국국적 포기운동을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홍보 차원의 아이디어였을 뿐 우리는 그 운동을 실행한 바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만의 언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멋진 전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수다. 뉴스가 순식간에 세계를 휘감아 도는 시대다. 중국 후난(湖南)성 사범대학 출신으로,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시에징(21·여)은 재중교포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필자와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실 조선족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우리 중국인의 체면을 깎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칫하면 재중동포와 한족 간의 골이 생길 수 있는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제대로 불거지지 않았지만 고구려 문제로 옮겨붙을 수 있다. 고구려 문제. 그 심각성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간단히 말하면 중국인들의 뇌리 속에 고구려는 없다.
지금 중국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둥베이 공팅(東北工程, 동북공정)’ 그러니까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수·당(隨唐)대 역사 속에 파묻어 버리려는 시도에 대해 우리가 발끈하고 있지만 이미 때를 놓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중국 소학교 6학년 ‘중국역사’ 교과서 제1쪽에는 화려했던 수·당대 역사를 설명하면서 함께 소개한 중국 역사지도가 한 장 보인다. 그리고 그 지도가 중국인들의 고구려, 아니 동북3성에 대한 모든 생각을 웅변한다. 그 지도의 한반도 자리에는 ‘고려(高麗)’라는 두 글자가 있다. 고구려라는 이름조차 없다. 물론 우리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국경선은 희미한 점선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주제를 너무 벗어나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한다).
이런 마당에 동북3성 문제를 건드려 놓았다.
“한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 몇 명 살리려다 중국의 200만 동포 다 죽인다.”
김해성 목사의 이런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나아가 고구려를 잃고 북한 핵 문제에도 불씨가 옮겨 붙을 수 있는 ‘민감도 100’의 사안이다.
이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던 중 박용이라는 목사님을 만났다. 성이 박씨이기는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 그는 독일인이다. 마흔세 살, 동독출신으로, 한국에는 7년째 머무르면서 경기도 광주의 ‘중국인의 집’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한국어도 잘 하고 한글도 쓸 줄 알았다. 만날 장소를 직접 한글로 써 줄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인들은 안목이 짧다”
나는 그를 광주에서 한 번, 서울에서 한 번 만났다. 중국 속담의 ‘곁에 있는 사람이 더 훤하게 꿰는 법’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화였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안목이 짧아요. 지금 출입국 규정 조금 바꾸었는데, 6개월 지나면 또 바꿀 거예요. 똑같은 문제를 계속 고치면서 가는 이상한 민족성이 있어요. 때문에 다른 시간에 중요한 문제를 해결 못 해요. 경제에서 이렇게 하면 bankruptcy, 파산당해요.”
정곡 ‘콱’이다!
“과거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많은 동독 사람들이 서독 왔지만 적응하지 못했어요. 저 사람들(밖에서 농성중인 재중교포들) 똑같아요. 저 사람들, 여행 원해요. 돈 버는 것 원해요. 사는 것 원하지 않아요. 나는 동독에서 태어났는데 내 머리의 절반은 동독이에요. 그래서 서독 생활 만나면 가슴 아파요. 맞지 않아요.”
― 저도 이 문제를 오래 생각했는데 중요한 것은 여기 실정을 중국에 있는 재중교포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해요. 조선족들이 한국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해요. 한국 가면 부자 된다 알고 있지만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 많고, 경쟁도 치열해요. 그들이 이거 알아야 해요. 또 여기 있는 조선족들 중에도 나쁜 사람도 있어요. 저도 알아요.”
그는 나쁜 사람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모두를 돌봐야 한다고 했다.
― 그럼 지금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의 해법이 있으신가요?
“한국 정부도 책임 있어요. 따라서 3개월 시한을 주고 모두에게 비자 주는 거예요. 그리고 노동허가 주는 거예요. 그 후에 법을 아주 엄격하게 집행하는 거예요. 그 때는 강제추방해도 저도 찬성해요.”
그의 말을 들으니 다시 워싱턴의 전변호사가 제시한 대안이 생각났다.
“해외동포법을 폐지해야 합니다. 고칠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비자로 해결하면 돼요. 공항심사 강화하고 여과 장치를 잘 하면 비자만 가지고도 동포 문제 해결할 수 있어요. 구비서류 확보되면 취업비자 주고, 아니면 안 되고….”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비자 발급 절차와 공항심사의 필터링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견해도 보였다.
“이제는 고향에 와서 뼈 묻는다, 어쩐다 그런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세계화가 안 된다고요. 한국은 많이 내보내고, 나가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생각을 바꾸어야 해요.”
재중동포의 문제는 현재의 숙제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에서 촉발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현재를 기준으로 함부로 풀어서는 곤란하다. 처음 꼬인 부분으로 되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차근히 문제를 풀어야 한다.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무조건 붙들고 사람들을 울려 버리는 대통령의 해법은 해법이 아니다. 또 법의 논리대로만 엄격하게 이들을 다루어서도 곤란하다. 우리도 가끔 세금 고지서 때문에 헷갈리는데 출입국관리법·재외동포법이 수시로 변하는 온갖 규정을 명확하게 숙지하고 그것을 처리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다.
한민족 역사의 바닥에는 슬픔의 강이 흐른다. 누구나 옷 한 자락씩은 그 슬픔의 강물에 적셔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또 우리는 모두 똑같은 역사의 자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물론 이제 갈 길은 서로 다르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에게 한번 더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그것이 함께 역사를 만들어 왔던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외부기고자 김경일 교수
[2004년 월간중앙 01월호] 2003.12.18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