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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주일) 하박국 2:2~11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본문 하박국 2:2~11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사는 삶의 중요성을 여러 구절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신념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힘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능하게 함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이끕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삶의 변화와 성장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은 믿음을 통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행동을 변화시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소망과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은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승리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살 것을 우리에게 강력히 권면하며, 믿음을 통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약속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두 번째로 “하나님은 왜 유다보다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다를 멸망시키려 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서 답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대답은 속히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이 실행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의 ‘왜’라는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라고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으로 믿음의 삶인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험난한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성도는 믿음으로 살수 있을까요?
1. 매일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2~3절).
믿음으로 살려면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묵시를 기록하여 누구든지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시면서, 그 묵시는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2,3절).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묵시’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묵시(ןוזח하쫀)’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내려주시는 ‘환상’을 뜻합니다. 말씀을 통해 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이기는 방법은 말씀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바벨론의 공격이라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을 이기는 길은 오직 말씀뿐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을 통해 현실을 보는 것을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3).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묵시를 ‘판에 선명하게 기록해서 달려가면서 읽어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환상의 내용은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내용인데, 바벨론을 향한 선포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정한 때가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바로 심판이 응답이 되지 않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 환상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거짓된 것이 결코 아닌데, 다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을 데려와 유다를 심판하시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라야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혼란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믿음으로 살아내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우리의 삶에 죄의 모습과 실수의 연약함이 있고 그것을 감춘다 하더라도 주의 말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항상 말씀을 읽고 기록하여 마음에 새기고, 언제, 어디서나 되뇌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연약함과 죄 가운데서 속히 주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큐티로 시작하는 것이 그 날의 삶을 말씀으로 인도받는 비결입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143:8)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란 말은 말씀의 빛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인생의 발걸음을 옮긴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순간 순간 말씀에 비추어 삶을 살았고, 말씀에 비추어 결정하고 끊임없이 적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김양재 목사(우리들교회 담임, 큐티선교회 이사장)가 최근 우리들교회 주일예배에서 한 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하루 살아 내는 것이 가장 좋은 훈련인데, 이 중 최고의 반복훈련은 큐티라고 생각합니다.” 김 목사는 “우리들교회는 Quiet Time을 Question Time으로 바꿔 부릅니다. 반복되는 고난에서 질문 훈련을 통해 삶이 해석되니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며 큐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큐티하는 방법] 1. 기도로 주님을 만나고 싶음을 주님께 의뢰하십시오. 2. 큐티 분량은 많이 안하셔도 됩니다. 1구절 혹은 2구줄만 하셔도 되고, 5구절 정도면 무난하고 핵심을 그 구절 속에 담겨진 주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캐치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순간들을 돌이켜보십시오(사업시 힘들었을 때에 막혔던 길을 열어주셨던 경우 등) * 현재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영역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가령, 건강) 이처럼 다양하게 창의적으로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좋은 분임을 깨달으면 됩니다. 너무 무겁고 어렵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3. 하나님께 대해 깨달은 바에 대해 감사하고 기도로 마치면 됩니다. *큐티 시간을 3분도 괜찮습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훨씬 긴 시간동안 더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기도제목은 온 성도들이 큐티하고 양육훈련받고 교회에 건강한 소그룹이 생겨나고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큐티가 생활화 될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고, 실천하시고 내년 큐티인 교재를 모두 구독신청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갖고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이 혼란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성도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임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적용) 나는 매일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읽고 기록하여 마음에 새기고 적용하며 살고 있습니까?
2. 교만함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4~8절).
믿음으로 살려면 우리는 내 삶의 교만함과 마음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4절에 마음이 교만하고 거짓과 욕심이 가득하여 남을 노략하고 괴롭히는 악한 바벨론은 자기 행위대로 되갚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들의 마음은 교만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냐?’, ‘하나님이 없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마음이요, 가치관입니다. ‘교만’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아팔’이라고 합니다. 그 원래 뜻은 “부풀어 오른다”, “감히 행동하다”입니다. 속은 비어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부풀어 올라 자신을 과장해서 보이는 것이 ‘교만’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판을 논하는 중에 믿음이 있는 자가 의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만한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일반적으로 교만은 육신의 지위나 재물의 정도와 같은 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과, 또 가진 것 이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을 수없이 하셨기 때문에 교만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16:5)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의인이라 여기거나 교만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하고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교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2장 5절 이하를 보면, 불의한 자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며 교만합니다. 그들은 끊임 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한하게 넓혀가는 자들입니다. 돈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권력에 대해서도, 인기에 대해서도, 땅에 대해서도, 뭐든 한없이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을 그의 삶과 마음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들은 마치 죽음처럼 무엇이든지 끝없이 삼킵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는 남의 피를 흘리게 되어 있고, 남들로 하여금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는 하는 악한 일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을 어기는 일들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패역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남에게 술을 먹인 후에 정신 없게 만든 후 모든 것을 빼앗아 오는 일도 합니다. 따라서 불의한 자의 삶은 많은 원수들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삶 자체에 끊임없는 죄악이 점철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사 그들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만드시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수치에 떨어뜨려 멸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반면에 의인은 전쟁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믿음’으로 생명을 보전받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에무나’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고백하는 ‘아멘’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믿을만 하고 변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잘 될 때도 자신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잘 안될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즉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오직 삶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믿음으로 인내하는 의인은 천성에 도달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의인만이 험한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의의 시작이 ‘교만’이며, 의로운 삶의 시작과 과정은 ‘믿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하박국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공의하심과 사랑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믿음을 지닌 자들은 불의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교만이나 불의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적용) 바벨론처럼 교만하게 욕심부르며 불의하지는 않습니까?
[큐티인 묵상간증] [그런거 묻지 마, 이성수]
기난한 시골집에서 자란 저는 성실과 끈기로 맡은 일은 곧잘 해결하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두려움이 앞서 주저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군의관 생활을 마친 후 진로를 정할 때, 병원을 개업하거나 큰 병원에 취직해 기술과 경영을 배울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하는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낯선 환경을 피하고 개업의 위험도 없는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후 전공의와 군의관 시절에 받아보지 못한 월급을 받게 되니, 가난에 눌려 있던 자아가 조금씩 살아났습니다. 매일 비싼 술을 마시고, 아내에게 이런저런 거짓말을 하면서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처럼 여기저기에 돈을 뿌리고 다녔습니다(5절). 물질적인 여유가 생기니 당연한 권리인 양 바람을 피우다가 급기야는 두 집 살림을 차렸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지자 저는 결국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했습니다. 통장의 거래한도가 차갈수록 점점 예민해져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소한 일에도 혈기를 부렸습니다. 하루는 카드와 통장 내역을 보자는 아내의 말에 화가 나 식탁 위의 음식을 팔로 쓸어버리는 강포를 행하기도 했습니다(8절).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내연녀와 함께 있는 현장이 아내에게 발각되어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 무리가 다 속단으로 그[바벨론]을 평론하여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6절). 이후 저는 이혼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예배와 부부 소그룹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곳에서 구속사의 말씀을 들으면서, 완악한 저를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살게 하고자 수치의 사건을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집이 세고 교만하여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저는 믿음의 공동체에 정착할 수 있도록 수고해준 지체들에게 감사합니다. 이제는 소그룹 리더로 날마다 말씀으로 내 죄를 먼저 보고 손과 발이 가는 수고로 지체들을 섬기겠습니다. 적용) 교회에서 그동안 저와 함께 했던 소그룹 지체들을 만나면 커피를 대접하겠습니다. 모든 수입을 아내에게 맡기고 비자금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3. 하나님께 나의 안전을 맡겨야 합니다(9~11절).
믿음으로 살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안전을 맡겨야 합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제국의 영광과 안전을 위해 높고 견고한 성과 화려한 왕궁과 신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용을 그가 정복한 땅에서 부당하게 얻은 이익으로 충당했고, 반란의 싹을 자르고자 제국에 위협이 되는 민족들을 강제 이송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처럼 부당하게 취한 이익과 남의 피눈물로 쌓은 성 은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바벨론에게 심판으로 돌아옵니다. 11절은 바벨론 왕조의 몰락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세상은 부당한 일의 연속입니다. 부정직하고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정직한 자들은 손해를 보는 일이 흔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믿음이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성도는 나의 안전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국어 사전에 보면 "안전지대"란 용서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도로를 횡단하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횡단보도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그 안전지대 안에서 가장 빈번하게 가장 큰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세상의 모순입니다. 이 모순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지대를 오늘도 찾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는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 18:2)
이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 다윗을 보호하시기 위해 놀라운 힘으로 도와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하나님이 안전기지’(secure base)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안전한 곳이며 적의 공격과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기에서 구원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전기지’(secure base)라는 용어는 존 볼비(Edward John Mostyn Bowlby)의 ‘애착이론’에서 나온 말인데, 아기가 생애 초기 양육자와 갖는 애착(attachment)이 인간 본성의 기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빌딩을 지을 때 기초공사로 땅을 깊이 파서 철심 박고, 콘크리트의 양을 충분히 부어 넣어야만 높이 올려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건물이 될 수 있듯이 애착 형성은 엄마가 아이의 마음에 기초공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심리적 안전기지’가 꼭 ‘엄마의 품’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응원해주는 존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 언제나 보호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 어떤 경우에도 사랑해 주는 존재,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편이 되어 주는 존재, 어떤 하소연과 억울함을 호소할지라도 들어 주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안전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소그룹이 성도들에게 이러한 안전기지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더라도 어릴 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부모도, 부모와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지 못해 부모 대신에 의지하고 집착했던 친구나 교우들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완벽하게 안전하지 못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사랑해 주고 보호해 줄 것으로 믿는 대상을 사랑으로 포장해 상대방에게 그렇게 해 주길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을 사람 사이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애착(attachment)의 결핍 상태에서 ‘안전기지’(secure base)를 찾기 위해 오늘도 헤매야 할까요?
다윗은 단순하게 애착 대상을 상실하여 대안적 애착 대상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평생 여호와를 안전기지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6절을 통하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나온 것이 하나님과 평생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자신의 ‘안전기지’의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적용) 내 안전과 성공을 보장받고자 하나님 없이 내 꾀를 가지고 음모를 꾸미려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나의 안전기지는 어디입니까?
결 론
말씀을 마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박국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복음과 함께 사용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며,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라고 전합니다. 복음은 구약에서 그림자처럼 가리켜왔던 그 모든 것의 실체로서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시고, 그분으로 하여금 십자가 상에서 구속을 이루신 후에 부활 승천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셔서 택한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온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그런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며 하박국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와 관련합니다. 의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새 언약으로 인한 믿음과 새 언약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여 우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시니 우리 안에는 의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의로운 새 생명으로 성령의 강건하게 하시는 도우심과 함께 넉넉히 죄를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서의 말씀과 로마서의 복음은 일치하게 됩니다. 이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바울은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에서도 하박국서의 이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부패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 의, 곧 완전한 의를 이루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요 교만의 극치입니다. 그들이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그들은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은 이미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연합하게 함으로 주의 의로움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는 그러한 은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 연합하는 것이 바로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한 중생을 통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로서, 주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으로 살아갈 때에 의로운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말하는데, 그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아 행할 때 죄로부터, 율법의 정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세상의 정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사는 비결을 말합니다. 그 비결은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심기운 의로운 새 생명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남으로써 온전한 의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19-21).
그러므로 하박국서에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삶으로서 불의와 죄악과 더러움과 저주로부터 구별되어 하늘의 신령하고 복된 거룩한 참된 자유의 삶을 사는 것으로 승화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인용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5-39).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고 사는 의인된 삶은 계속적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반드시 약속하신 것을 받아낸다고 말합니다. 이때 믿음은 인내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의 새언약을 저버리거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과 생각이 항상 새로운 생명 및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한 믿음은 영혼 구원함에 있어서 거짓 믿음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으로써 반드시 구원함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하박국서와 성경에서 말하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대로 살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사시고 믿음으로 교만과 거짓과 불의를 물리치며, 하나님안에서 나의 안전함을 발견하고 누리셔서 이 혼란한 세상에서 매일 매일 승리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