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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로마서 6: 3-5
제목: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고
일시: 2017. 11. 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먼지가 묻고 오염이 되고 불순물이 묻은 진리와 복음을 다시 정화하여 그 순수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갖자는 것이다. 순수하기 위해서 초대교회가 겪어야 했던 것은 핍박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하면 카타콤이나 로마의 원형경기장이 생각난다. 진리를 부인하지 않고 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초대교회성도들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감수한 순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위협이 있어도 진리를 거래하지 않았다. 생명을 걸고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진리를 수호했다. 진리에 있어서 순결했다.
II. 이러한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다가 AD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의 밀라노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로 공인이 되게 된다. 이제 핍박의 역사는 종결이 되고 정치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제는 카타콤의 토굴에서 나와서 로마 거리를 어깨 피면서 활보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권력에 핍박을 받던 초대교회성도들이 이제는 세상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공인은 약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기독교 진리가 로마의 길을 통해서 흩어진다. 바울 역시 로마시민권자로서 복음을 전할 때 활동 영역이 크지 않았는가! 하지만 결국 기독교공인은 교회의 타락이 시발점이 되었다. 교회가 진리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지기에 진리가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일치가 된다. 기독교제국이라고 하는 Christendom 이라는 제국이 형성이 된다.
예)기독교제국은 종교와 정치가 함께 붙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두 개의 명부에 기록되게 된다. 하나는 한 국가의 백성으로 등록되는 호적이다. 또 하나는 지역교구 교회에 이름이 등록되는 교적부이다. 국민이 되기 위해서 호적에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교적부에 올라가 있어야 하고 명부에 기록되어 있을 때 비로서 소속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 유럽사회에서는 호적기록란에 기독교인이냐 카톨릭이냐 무교냐 등을 적는 종교란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교인이라고 하면 출석교인을 말한다. 실제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한 지체로서 일을 하고 함께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이다. 그러나 기독교제국 안에서는 등록교인이 교인이다.
교적부에 올라가는 이때 중요한 것이 “의식”이다. 그 의식이 유아세례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에 일원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아세례 의식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아세례는 구원의 개념을 왜곡해 놓았다. 카톨릭교회는 바로 sacramentalsim 이 성례전 자체가 구원을 준다고 여긴다. 마치 사제가 떡과 포도주에 축사하게 되면 그것이 진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것처럼 유아세례를 집례하게 되면 그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Sacramentalism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사제들 뿐이었다. 그렇게 되니 사제들의 권한은 아주 막강하게 되었다. 사제가 되어야 의식을 집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영적인 라이센스였다. 면죄부를 팔수가 있고 성찬식을 행할 수 있고 유아세례를 줄 수 있고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라이센스였다. 이것은 교회를 타락과 부패의 길로 걷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센스들은 성경에 나오는 것들이 아니고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다.
cf)지난 주 성가대원들과 다른 지체들 해서 십여명이 비텐베르크에 갔다. 바람이 불기도 하고 춥기도 하여서 성교회에 들어가 한참 설명을 하는데 관계자가 와서 잔뜩 화난 표정으로 불법이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설명을 하고 보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임시 라이센스를 사서 설명해야 하고 다른 이들은 돈을 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준 영어 채탤에는 License 라고 적혀 있었다. 독일과 유럽에서 아주 일반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라이센스가 좀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사제들의 권력이 막강해지니 구원은 사제들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의 피와 몸으로 변한 잔과 떡을 주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들이 유아세례를 베풀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리신앙이 여기서 나온다. 12세기에 활동했던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최고 절정의 교황권을 누렸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고 부르며 세속군주들과 왕들도 교황이 해임하고 임명할 수 있다고 했으며 달이 태양빛을 받아야 비로소 반사하듯이 세속왕들도 교황의 빛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종교개혁가들은 대리신앙을 거부했다. 라이센스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 일대 일로 설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비텐베르크 마리안교회 즉 슈타트키르쉐에 가면 루카스 크라나흐의 그림이 있다. 그 제단을 종교개혁의 제단이라고 하는데 그 그림들 가운데 유아세례를 주는 장면이 있다. 그때 의식을 행하는 자는 멜랑톤이다. 루카스 크라나흐는 의도적으로 그 그림을 그렸다. 멜랑톤은 교수이지 신부가 아니었다. 그 속에 종교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 신앙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cf)유아세례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대신하여 헌아례를 한다. 헌아례는 그것을 통해 아기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부모의 헌신을 말하는 것이다. 헌아례는 부모가 자녀를 두고 헌신하고 결단하는 것이지 자녀의 신앙이 아니다. 아기의 구원을 대리로 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개인적인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디렉트로 만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간접으로 하나 건너서 만나 하나님 할아버지라고 하지 않는다.
III. 구원의 개념에서 가장 기초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구원의 개념을 말씀해 주셨다. 유월절이라는 절기가 이스라엘의 구원의 절기인데 그때 결정적인 것은 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 이스라엘의 역사가 가리키고 있는 실제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진정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그분 안에 있을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 “In Jesus Christ" 즉 ”주 안에서“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러한 구원의 개념을 담을 수 있는 심벌로서 주님이 주신 것이 침례의식이다. 침례의식이 구원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1311년 라벤나종교회의에서 살수례 즉 Sprinkling으로 결정을 했다. 그것은 “In Jesus Christ"의 존재와 소속의 개념보다 Wash 라는 행위의 개념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Baptizo 라고 하는 단어는 “배가 바다에 침수되다. 물건을 물속에 잠그다. 옷감을 물속에 온전히 집어넣고 염색을 한다”라는 의미로 푹 잠그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Immersion 이라고 하는 Baptism 즉 침례가 되는 것이다. 형식보다 그 의미에 있어서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키는 중요한 심벌이다. 침례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죽음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참여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속에 들어감으로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대적 3인방이다. 사망, 그리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 그리고 죄를 죄되게 하는 율법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십자가에서 한방에 달 날리셨다. 원래 우리만 달려야 할 십자가인데 감사하게도 유월절 희생양과 같이 우리를 위해 주님이 죽어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죽고 그의 살아나심과 함께 우리도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11절 말씀과 같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진리는 Die and live이지 진리는 wash and dry 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침례의식을 통해서 그 진리를 고백하는 것이다. 비록 번거롭게 느껴진다 해도 그 고백을 값을 치르면서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전에 우리는 죄와 사망과 율법의 권세하에 있는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Born-again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우리가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하지 못하고 죄와 의가 함께 공존하지 못하며 진리와 비진리가 함께 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고백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침례 Baptism 이다.
모든 것들을 우리는 Baptism 시켜야 한다. 다 물속에 한번씩 잠그어야 한다. 내 성질도, 내 재능도, 내 재물도, 나의 일상생활도. 루터의 경우도 보라. 수도원생활을 함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결혼생활을 통해서도 거룩해 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Baptism 할 때 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은 나의 결혼선물 구절이고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다. 삶 자체가 무엇을 하든지 거룩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Baptism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침례의식을 통해 표현한다.
예)베를린 함승화목사님 사모님이 지난 번 여행을 하면서 구자억목사님을 아느냐고 한다. 구자억목사님의 찬양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었는데, 아따 참말이여 성경에 써있는디... 트로트이다. 그런데 목사님 부부는 아주 거룩해 보이는 스타일 아닌가! 왜 그리 은혜를 받았느냐고 했더니 가사가 아주 복음적이고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보면 은혜받은 이유는 가사가 아니다. 목사님이 이미 그 내용은 얼마나 많이 선포하였는가? 단지 트로트의 세계에 눈이 떠진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께 이야기를 했다. 수준이 낮으시구만... 주병선의 칠갑산 “콩밭매는 아낙네야 배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 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든 산새소리만 어린가슴 속을 태웠소” 이것으로도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칠갑산은 공주부근에 있어서 아내의 나와바리이고 홀어머니는 장모님이 젊어서 혼자되셨고, 막내딸 시집을 내게 왔으니 아내를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경말씀도 있지만 아내를 얼마나 사랑해야 할까하는 생각을 가사 통해 은혜받는다. 무슨 말인가? 모든 것이 다 뱁티즘이 되어야 한다.
V. 우리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에 있다. 그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 십자가의 믿음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침례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고 새피조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권을 가진 백성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가문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예수 그리스도 바로 다음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의식이 바로 침례의식이다. 이 침례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Sacrementalism 성례전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고 결단하는 지체들이 받는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12월 첫주 침례식이 있다. 아름답고 축복된 신앙고백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또한 우리의 삶과 인생 그리고 모든 삶의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Baptism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 거룩한 존재로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