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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용혜원 목사의 시 중에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이란 시가 있습니다.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화려하게 꽃피는 봄날이 아니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가을이 되게 하소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사고나 실수로 나를 찾아오지 않고
허락하신 삶을 다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하늘은 푸르고 맑아
내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한 날이 되게 하소서
늙어감조차 아름다워 추하지 않고
삶을 뒤돌아보아도 후회함이 없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랑을 나누며 살아
쓸데없는 애착이나 미련이 없게 하소서
병으로 인하여 몸이 너무 쇠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기력이 있고 건강한 때가 되게 하소서
나의 삶에 맡겨주신 달란트를 남기게 하시고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며
가족과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살게 하소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주님의 구원하심과 죄 용서하심과 사랑을
몸과 영혼으로 확신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가족들에게 웃음 지으며
믿음으로 잘 살아가라는 말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게 하소서
마지막 숨이 꺼지는 순간 고요히 기도드리며
나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행복한 죽음을 위한 기도라고 느껴지면서, 나도 죽는 순간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해줍니다.
오늘도 사도 바울의 유언과 같은 본문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6-8절)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이제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합니다. 유언과 같은 말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귀합니까?
“나는선한싸움을싸우고나의달려갈길을마치고믿음을지켰다.”
우리도 죽는 순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반면 ‘제대로 할 걸 못하고 믿음도 지키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다 가는구나’ 하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믿음을 지켰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 고백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지막 순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바울처럼 ’아멘’이라고 18절처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대적자와 배신자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를 보여줍니다.
1. 주님께 맡겨라.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4-15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대적자 노릇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디모데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합니다. 알렉산더가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에베소에서 혹은 로마에서 바울의 전도 사업을 훼방하며 많은 해코지를 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대적자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너도 그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좋은 사람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퍼주고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워라’고 했듯이 언제나 깨어 경성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이단 집단인 신천지가 몰래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해치려고 작정하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교회는 속수무책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들어왔는데, 정말 정신을 차리고 조심하지 않으면 교회는 당하는 것입니다. 깨어 경성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도의 입장에서는 이 믿음을 근거해서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대적자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1세기 말엽에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하는 기독교도에게 투르크 사람들이 가중한 통행세를 요구하므로 갈등했습니다. 기독교도들은 영토를 빼앗긴 억울함으로 분노하였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이런 상황에서 면하고자 십자군 전쟁을 독려했습니다.
“내 명령을 따를 것은 주님의 명을 받드는 것이오니 나를 따르면 너희의 모든 벌과 죄를 사면해 주리라”
면벌부와 면죄부라는 말이 이때부터 등장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모욕을 존경으로 갚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십자군은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목적 아래 상스럽고 끔찍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십자군은 이슬람 사람들을 산 채로 태워 죽이고 닫치는 데로 찔러 죽였습니다. 갓 태어난 그들의 아기들을 벽에 던져 죽여 버렸습니다.
한 십자가군은 고향에 보낸 편지를 썼습니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 사람들의 피로 젖었다”
이 끔찍한 살해 전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인간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죄된 인간의 잘못된 나섬입니다.
한국에서는 휴가와 쉼을 말하면서 ‘멍’을 많이 언급합니다. ‘멍 때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생각없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물멍, 불멍, 꽃멍 등등 … 그러면서 아무 것도 안하는데 이상하게도 채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기도 멍, 하나님 앞에서 멍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내가 살아서 내가 뭔가를 해야 나의 존재감이 있고, 내가 살고, 내가 인정받고, 내가 뭔가를 이루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참 바쁘게 살아갑니다. 일에 치여서 삽니다. 이럴수록 아무 것도 안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십시오. 이것이 사치스럽게 여겨집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아무 것도 안하기로 결단해 보십시오.
그렇지만 두 손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바라는 멍,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서 말입니다.
나에게 원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도무지 떠오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지고 입맛이 떨어지는 군상이 있다면 하나님께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겨보세요.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상하게 나의 분노는 점점 가라앉아지고 그 사람을 서서히 용납해지고, 받아들여지는 이상한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편안함을 누리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주인이시요 주권자이십니다. 인정하시면서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나의 대적자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서 맡기는 것입니다.
2. 허물을 돌리지 말라
사도 바울의 말년에는 대적자들의 괴롭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도 있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6절)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이 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은 재판의 정식 절차에 따라서 변호할 사람을 세워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재판을 받게 될 때에는 자기를 변호해 주는 사람이 더러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정식 재판이 이루어질 때에는 처음에 나서던 사람들조차도 바울을 변호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당시가 로마 역사상 가장 기독교를 박해하던 네로황제 치하에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서슬 퍼런 박해 가운데 있었기에 가까이 지내던 동료와 지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도 나서서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변호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음에 대하여 서운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런데 바울은 데마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고 간 사람, 그리고 사역이 바빠 여기저기 흩어진 동역자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지인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원수이든 친구이든 제자이든 상관없이, 그의 결론은 용서였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것도 나쁜 놈이라고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위험한 사람이니 주의하라고 합니다.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런 사람까지도 바울은 용서한 겁니다. 나아가 자신을 섭섭케 한 사람에 대하여서도 그들에게 허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갈 때에 드린 기도를 보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눅 23:34)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에게 못 박은 자들, 침 뱉고, 수염을 뜯고, 조롱하며, 그분의 옷을 나눠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살인자를 대신 놓아달라고 요구했던 어리석고 괘씸하고 더럽고 죄 많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다 쓸어버리겠다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저주를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행 7:60)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스데반의 기도였으며,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최고의 기독교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벤허>입니다. 여러 번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래 1959년에 나왔던 이 영화는 지난 2016년에 리메이크됐습니다. 1959년의 오리지널 영화보다는 못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오히려 원작에는 더 충실하고 기독교적 메시지의 완성도 면에서 볼 때는 상당한 감동을 안겨준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나온 리메이크 작품이 1959년에 나온 오리지널 작품과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옛날 영화에서는 유대 땅에 로마 총독으로 부임한 사령관 행렬을 벤허 가족이 구경하다가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데서 문제가 시작된 데 비해, 새 영화에서는 벤허의 집에 숨어든 열심당원이 화살을 쏜 범행이 문제의 발단이 됩니다. 그때 벤허가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묵살한 벤허의 옛 가족 메살라는 그때부터 식민지배자인 로마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고,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는 유대인으로 그려지며 로마와 유대의 갈등을 아주 첨예하게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에 있습니다. 옛날 영화에서는 간접적으로 벤허에게 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묘사하지만, 새 영화에서는 예수님의 몸 전체가 나오고 십자가 장면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새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바로 용서의 메시지입니다.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이 강조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벤허는 전차 경기가 끝난 후 부상당한 메살라를 찾아가 용서합니다. 벤허에게 용서를 받은 메살라는 그와 화해하며, 두 사람이 나란히 말을 타고 새 날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가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 됩니다. 벤허의 원작도 사실은 용서의 주제를 강조합니다.
인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용서의 선언과 용서의 기도입니다.
혹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계속 미루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후회 없는 결산을 위해, 너무 늦기 전에 용서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평생 주기도문으로 드린 기도가 위선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듯이, 삶으로 드릴 수 있는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