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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한다. 에베소서에는 ‘그 안에서’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년 동안 특별히 가장 오래 머물렀던 교회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그 중에 첫 번째 나오는 교회가 에베소 교회다. 에베소 교회는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다. 그런데 한 가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다. ‘처음 사랑’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의역해서 처음 사랑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첫사랑은 못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번역한 것 같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것이다.
계시록 2장 3-4절에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생명나무 열매와 가장 중요한 것이 서로 관계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으면 생명나무 열매를 못먹는다는 것이다.
처음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다른 데는 다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되어 있는데 에베소서에는 ‘그 안’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 안에서’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다.
모든 말의 핵심은 그 안에서다. 바울 서신의 키워드는 ‘In Christ’다. 그 안에서가 아니면 바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다. 바울이 얼마나 말을 많이 했는가. 신약성경의 3분의 2 이상이 바울의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신화적 존재고 기독교는 사실은 바울의 종교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만큼 바울이 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바울 서신의 키워드가 ‘In Christ’다. ‘In Christ’를 전제로 한 말이니까 ‘In Christ’가 없으면 애매모호한 것이 되거나 변칙이 되어 버린다. 인간의 생각으로, 종교적인 방법으로 변질되고 만다.
내가 한국 안에 있는 것과 미국 안에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 아버지 안에서와 아들 안에서도 또 다르고 남편 안에서와 아내 안에서도 또 입장이 다르다. 의견이 똑같은 부부는 별로 없다. 다 의견이 다르다. 왜냐하면 남편과 여편이 편이 다르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는 똑같은데 결혼하고 나면 위치가 달라지니까 의견이 달라진다.
우리도 위치가 달라지면 의견이 달라진다. 아무리 이성을 가지고 말하려고 해도 위치가 달라지면 말도 달라진다.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 한국에 와서 우리와 똑같은 말을 해도 내용은 다르다. 평화라고 해도 북한에서 말하는 것과 남한에서 말하는 것이 다르다. 통일도 북한에서 생각하는 것과 남한에서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그 위치를 모르면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나가 죽어라.” 한다 해서 진짜로 죽으라는 말이겠는가. 지난 번에 정미자 자매에게 아들 무연이가 결혼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정미자 자매가 “그래, 죽으려면 죽어라. 나도 죽으려고 해 보았는데 그것도 괜찮아.”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연이가 그 말을 ‘아, 엄마가 진실하구나.’라고 알아들었다. 죽으라고 했다고 ‘이런 엄마가 세상이 어디 있는가.’ 하고 나가서 죽어 버렸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우리 엄마가 진실하구나.’라고 알고 거기서 엄마 마음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위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에는 무연이가 항상 “내가 속았네. 내가 속았었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무연이 18번이었는데 울면서 속았다고 하던 무연이가 이제는 엄마 마음을 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위치를 묻는 말이지 행위를 묻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아담의 대답은 “내가 두려워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였다. 이것이 아담의 진실한 대답이다. 그 후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얼굴과 얼굴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아담도 자기 얼굴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최초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내놓은 사람이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과 아벨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나왔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기에 소출의 첫 열매를 드리려고 나왔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왔다. 둘 다 좋은 제물을 가지고 왔다고 볼 수 있다.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을 보신다. 그런데 왜 그냥 오지 못하고 제물을 가지고 왔는가? 자기 얼굴 대신에 제물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 그 사람을 보신 것이지 그들이 갖고 간 제물을 보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물을 보신다고 생각한다. 아벨의 제물은 번제물이고 가인의 제물은 급수가 훨씬 낮은 소제물이라서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하나님께 제물이 중요하겠는가, 사람이 중요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자기 얼굴을 가리려고 제물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이것이 대속 신앙이다.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이 처음인데 모든 민족에게 원시적으로 다 있는 것이 대속 신앙이다. 우리나라에도 에밀레 종의 전설이나 공양미 삼백 석 대신 제물로 드려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것이 대속 신앙이다. 그것 대신에 무엇을 드렸다는 것이다. 사람 대신에 무엇을 드리는 것, 이것이 대속 신앙이다. 아무리 쇳물을 부어도 종이 안되니까 마침내는 사람을 잡아넣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종을 치면 “에밀레 에밀레” 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것도 신앙으로 했겠지 자기 자식을 잡아넣었겠는가.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족속은 산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서 그들의 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기 족속의 안정을 기도했다. 이것이 모두 대속 신앙이다. 대속의 원천이 그러하다. 모세도 그런 분위기, 그런 문화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제물 드리는 것을 말했고, 제물 드리는 법까지 상세하게 정해 놓았다. 그것이 레위기다.
그러나 우리는 나 대신 무엇을 드리려고 하면 절대로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먼저라는 말이다. 대속과 구속은 이렇게 차이가 있다. 대속은 나 대신 누가 어떻게 해 주신 것이고 구속은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서가 아니면 구속은 없는 것이다. 대속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데 구속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이 구속이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 말씀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하였다. 거룩하게 해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거룩함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구속이 되신 것이다. 그러려면 그분과 내가 하나일 때만 가능하다. 하나가 아니면, 하나가 아닌 사람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의 구원의 정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했다. 분명하게 성서적으로 그렇게 말해 놓았다. 그러나 연합할 방법이 없으니까 고심끝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해 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칼빈주의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완전한 화해가 누려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아무나 누리기만 하면 되겠는가. 그리스도와 하나라야 가능하다. 하나가 아닌데 어떻게 남이 화목된 것을 누리겠는가.
왕비가 되면 왕의 것을 누릴 수 있다. 왕비가 안되면 왕의 것을 누릴 수 없다. 오히려 무서운 형벌이 된다. 간택에 나왔던 여자는 다른 데 시집갈 수 없었다. 잔인한 일이다. 간택에 나왔던 여자가 다섯이면 그 중 한 사람만 왕비가 되고 나머지는 평생 혼자 살아야 했다.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지만 구속이 안되면 우리는 평생 살아도 몽달귀신이나 처녀귀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연합이 중요하다.
어디서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가. 예수를 자세히 보자. 어디서에서도 우리가 그와 연합할 데가 없다. 우리는 자격이 없다.
오늘 이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제일 중요한 것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는 그 길이 명백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들이 끝난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어 자식을 낳지 못할 때 이삭을 낳았고, 이삭이 눈이 멀었을 때 그의 뜻과 다르게 야곱을 축복했다. 야곱은 빈손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을 만났고 바로 왕을 두 번이나 축복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죽을 때 자식들을 불러놓고 일일이 예언을 했다. 그것은 영 안이 밝아졌다는 뜻이다.
수양과 종교의 정점이 여기다. 영 안이 밝아지려고 수양을 하고 종교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된다. 인간 최고의 정점은 영 안이 밝아져서 하늘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영 안이 밝아진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안다. 그러니까 자식들의 장래를 다 알고 예언해 놓았고 그대로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끝나는 분이 아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 오려면 영 안이 밝은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다 애굽에 보낼 때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옛날에 이 성경 구절을 여러 번 보고 출애굽기를 강해했는데 왜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 하신 말씀이 기억이 안되었는지 모른다. 뭐가 기억되어 있었는가. “지팡이를 던져보라.” 하셔서 던지니 뱀이 되었고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셔서 잡으니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고 한다. “손을 품에 넣어보라.” 하셔서 넣었더니 문둥병에 걸렸고 “다시 넣어 보라.” 하셔서 넣으니 문둥병이 깨끗해졌다. 이런 이적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적을 보고야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가라.” 하셨다. 모세가 “나는 절대로 못갑니다.”라며 버티니까 “가라. 내가 너로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바로가 모세를 볼 때 신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그 백성을 내주었겠는가. 신으로 보였기 때문에 내준 것이다.
홍해가 갈라졌다고 한다. ‘어떻게 홍해가 어떻게 갈라졌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겠지만 신이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섰는데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은 탈출했다. 광야 40년 길을 한번 생각해 보자. 길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곳이 광야다. 그런데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늘에서 만나를 매일 같이 내려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먹었다.
모세가 반석을 쪼개서 생수가 나왔는데 그 생수를 사십 년동안 마셨다고 한다. 이상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바울은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 했다. 반석이 어떻게 따라다니겠는가. 생수를 먹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신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하겠는가. 그래서 신학자들은 대부분이 “이것은 신화다. 신화가 아니면 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있겠는가. 직접 눈으로 봐도 안되는데 어떻게 믿겠는가.
만나가 내려올 때 사람들은 그릇대로 가지고 나와서 받아놓았다. 하루분만 받아놓아야 하는데 그릇마다 받아놓고 다음 날 보니 다 구더기가 슬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것을 받았고 그 외에는 하루 것밖에 못받았다고 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한 이야기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모세가 신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영 안이 밝게 하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신으로도 쓰실 수 있다. 그렇다고 모세가 신이 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러면 사람은 신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사람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신으로 쓰실 수도 있다. 우리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쓰시면 신처럼 쓰일 수 있다. 전에도 말했는데 재승 형제 큰 누님이 간암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아버님이 나에게 같이 가자고 하셨다. 막막했다. 나는 신유의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서 기도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차를 타고 가면서 계속 고민했다. 어른이 가자고 하시는데 못가겠다고 할 수 없어서 갔지만 가면서도 내내 그 생각밖에 안났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누워계시는데 모든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고민끝에 할 수 없이 “내가 결핵에 걸려서 이러저러해서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나를 살려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미안했다. 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그래. 너는 살아나서 좋겠다. 그러나 나는 죽게 되었다.”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박 원장이 쪽지 한 장을 들고 왔다. 똑똑한 글씨로 “목사님, 엊저녁에 목사님이 다녀간 이후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 상관없는 말을 어쩔 수 없어서 했는데 그런 반응이 왔던 것이다.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나를 그냥 나로 보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게 해서 보내셨던 것이다. 나를 신이 되게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모르고 ‘신기한 일이다. 참으로 신기하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규모는 적지만 모세에게 “가라.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 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준비가 되면 우리를 신으로 쓰실 수도 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막히는 것이 없었다. 다 그럴듯하고 이해할만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났을 때는 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말 성경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이것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처녀’라는 말은 말이 많은 말이다. 처녀냐 여자냐 하고 말이 많다.
이것 때문에 장로교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둘로 갈라졌다. 예수교 장로교와 기독교 장로교로 갈라졌다. 김재준 박사는 미국에서 돌아와서 처녀가 잉태할 수는 없다고 했고, 박형론은 “저런 이단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래서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것이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와서 바르트는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르트의 생각이다. 이성으로 모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다. 내가 모르면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딱 결정이 되고 나면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계시를 주셨다 해도 내 이성에 안맞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면 우리 이성에게 검사를 맡아야 한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인가? 이성이 하나님인 셈이다. 그런데도 “성경이 아무리 맞을지라도 내게 이해되지 않으면 계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하나님 말씀이 된다.”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그러니 안믿는 사람이 들어도 욕할 이유가 없고 믿는 사람이 들어도 괜찮고, 이렇게 되었다. 듣기는 좋다. 그래서 모두 자기 좋은대로 골라먹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좋은대로 골라먹고 말면 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 입에 맞는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에 맞지 않는 것도 주신다. 내 입에 맞지 않는 것, 그것이 계시다. 내 입에 맞는 것만 주신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내 입에 맞지 않는 것을 주시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담이 자기 입에 맞는 것만 있었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자기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먹지 말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었다. 자기 입에 안맞으니까 거역을 한 것이다.
그냥 거역했겠는가.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죽기를 각오하고 먹은 것이다.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이것은 그만큼 심각한 문제다. “죽어도 좋다.” 하고 먹은 것이 선악과다. 알고 보면 선악과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무엇을 버렸는가. 바로 이 중요한 것을 버린 것이다. 하나님 계시의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린 것이다. 중요한 핵심은 여기서 나온다.
다른 것은 있으나마나다. 우리 몸에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생명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병원에 가 보면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 있다. 육신은 멀쩡하게 살아있다. 심장도 뛰고 호흡도 한다. 그런데 의식이 없다. 그래서 식물인간이라고 한다. 그것이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죽은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안락사 방식이라도 있어서 죽는 것이 훨씬 편하다.
순자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그런 지경이 되거든 살리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호흡기를 달면 계속 살 수 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되게 하지 말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내가 숨이 끊어졌을 때 교수가 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이도 많으니 그냥 가시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인공호흡이라도 해서 살려놓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입장에 처했었다. 그때 순자는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유언은 순자가 받았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충격이 될까봐 그런 말을 안했다. 나는 그렇게 당부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이 살려야 한다고 우겨서 억지로 인공호흡을 시켰는데 다행히 내가 살아나게 되었다.
내가 산 것도 기이하게 산 것이다. 만일 시간이 조금 더 초과되었다면 살았어도 식물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숨이 끊어지자마자 화평이가 발견했다. 그때 간호사가 갑자기 올라오더니 “교수님은 30분 후에 오십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30분 후에 왔으면 나는 죽었거나 살아도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기적으로 내가 죽지 않고 살았다.
그때 내가 한 첫 말이 그것이라고 한다. 확실치 않지만 진희에게 “씨는 다 준비되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이 구속의 복음을 내가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마취에서 깨면서 반 무의식상태여서 기억에 없다. 그래서 이 구속의 복음이 시작되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것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를 만나서 ‘모를 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부스러기라도 남겨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먹고 살았다. 모르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모르고 아는 것은 아니까 그렇게 살자고 했다. 모르는 부분이 있게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에 대해 모르는 점이 너무나 많다. 어떻게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지는 모른다. 우리가 그 포도주를 얻어먹을 수는 있어도 어떻게 포도주를 만들겠는가. 사람은 못할 일이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다고 한다. 눈을 떠서 빛이 오니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해석하니 얼마나 좋은가. 해석을 맛있게 하면 맛있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나면서 시력이 없는 사람을 시력이 있게 하셨는지는 우리가 모른다. 우리가 예수를 다 알고 믿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
실체를 만든 그 사람이 중요하지 우리가 거기서 얻어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치 원조물자를 받아먹은 것과 똑같다. 먹을 때는 좋지만 우리는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춘궁기에 미국으로부터 강냉이 가루나 우유 가루를 많이 얻어먹고 살았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강냉이 가루가 없다. 미국이 안주면 그만이다. 우리는 미국에 강냉이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옥수수밭을 보면 끝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봐도 끝이 안보인다. 그렇게 옥수수가 많다.
우리는 그 본체를 모른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 우리는 다 모른다. 그래서 좋은 면들만 해석을 했고, 그래서 우리가 먹기에 좋았다. 나도 좋고 여러분도 좋고 다 좋았다. 그래서 우리 교회 같이 좋은 교회가 없었다. 못알아듣는 말을 듣고 살다가 부작용이 없는 좋은 양식을 먹으니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들으니까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좋다 보니까 우리는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러했고 나에게서 들은 사람도 그러했다. 그때 사람들이 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가기는 어디로 가느냐.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으로 가면 되지.”라고 대답했다.
이영순 자매가 우리 교회에 와서 처음에는 너무나 편하고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모 선교회에서 열심을 다해서 전도하던 사람이니까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 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없어서 좋다고 하는데 일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나에게 왔다. 그때 나는 “잘왔다. 잘왔어. 정말 우리 교회에 오길 잘했다. 교회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말씀만 열심히 들어라.” 하고 보냈다. 할 수 없이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하고 갔지만 내가 준 것이 없으니까 딱 잡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교사들에게 “도대체 최소한 4년, 길게는 8년을 한 교무실에서 같이 근무하는데 어떻게 한 사람도 전도가 안되느냐.”라고 몇번을 말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내가 안되는 사람인데, 나도 그런 사람인데 그들이 되겠는가. 이제야 교사들의 속을 알 수 있다. 왜 교사들이 한마디도 못했을까? 말을 하려니 끝도 없으니까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좋고 저렇게 좋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두 번에 다 하겠는가.
나는 6개월 동안 경대에 나가서 한 학생을 붙잡고 매일 창세기를 공부했다. 그런데 결혼할 때는 딴 데로 가더니 남남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전화하면 반가워한다. 내가 교회생활을 보내 주고 있다. 그래도 안되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안되는 사람이 형제들에게 해보라고 했으니 되겠는가. 왜 이렇게 되었던가. 주신 이를 몰랐던 것이다. 어떤 분이기에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었는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중간에 한번 이런 일이 있었다. 나를 따라온 형제들 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서 목회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목회를 포기했다. 그런데 한참 지나고 보니 ‘목사님이 저렇게 말하는데 우리는 왜 안될까? 왜 우리는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빗나간 것이 왕자의 난 같은 것이다. 그런 일이 춘천에서 있었고 대구에서도 있었고 충주에서도 있었다. 자기들대로 독립해서 무엇을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니 엉성하고 사람이 안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재를 했고 형제들은 금방 알아듣고 돌아섰다. 내 복음의 문제점이 바로 그것이다. 확실한 답이 없었던 것이 문제다.
그런데 마지막에 신화라는 문제가 나와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신화일 수 있구나. 그렇다면 큰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그 좋은 모든 분위기를 깨고 뼈다귀만 남은 예수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원인이 그러하다.
신유길 교수님은 나에게 “시간이 지나면 이 목사님은 대구교회에 신화적인 인물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좋은 목사, 진실한 목사, 성실한 목사로 신화적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무슨 말인가. 시간이 가면 또 변질되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아주 정확하게 본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지나고 나면 ‘대구교회에 이런 목사가 있었다.’라고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화적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를 증거해봤자 소용없다. 신화적이라니까 ‘그 사람은 그럴 수 있어. 나와는 달라.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가끔 있지.’ 이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신화화라는 이 문제에 걸려서 ‘아니다. 그것은 아닐 텐데’ 하고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예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 자리에 가 보니 다 싫어해서 버린 사람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놓고 “하나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하며 아우성쳤지만 예수는 못내려왔다. 내려올 수 있었는데 우리의 죄를 담당하려고 안내려온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후대에 예수에게 좋은 간판을 씌우느라고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그 현장에는 그런 말이 없다. 만일 우리 죄를 대신하고 죽으셨다면 “하나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하지 않고 “네가 우리 죄를 담당하겠느냐. 그러면 담당해 보라.”고 했을 것이다. 그 정도였으면 예수를 죽일 이유도 없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말을 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죽을 길로 가신 것이다. 왜 가셨겠는가. ‘나는 사람인데 하나님 아들이다.’ 이것을 지키려고 가신 것이다. ‘사람이지만 하나님 아들이 된다. 천사같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인데 하나님 아들이 된다.’ 이것을 지켜야 하니까 그 길로 가신 것이다.
그래서 내려가니까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다. 나는 옛날에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했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해석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야, 진짜 사람이네.’라고 알게 되었다.
나는 한번도 예수님을 신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신 같은 사람이 아니라 완전하게 사람이다. 여기서 나는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나도 사람이고 이분도 사람이네.’라고 알았다. 그래서 갑자기 예수가 가까워졌다. 멀었던 예수가 가까워졌다. 그래서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예수,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예수를 만났다고 한 것이다.
거기서 모두 아멘했다면 나는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아멘이 아니라 모두 노멘이었다. 모두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는 거기서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까지도 그 자리를 피해 버렸고 자기 죽음이 더 중요하다며 계속 자기 죽음을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권고해도 안되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더 밑으로 내려가 보니 그 자리는 만민이 다 싫어하는 자리다. 그래도 나는 싫은 줄 몰랐다. 왜냐하면 바닥을 친 예수를 보니까 내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바닥을 친 것과 그분이 바닥을 친 것은 정도가 다르지만 동병상련이라고 ‘나보다 더 깊은 바닥을 친 사람이 있구나.’라고 알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래서 ‘왜 안들어올까. 이 좋은 데를 왜 안들어올까?’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재승 형제가 나오더니 “제일로 싫어하는 곳입니다.”라고 했다. 그때야 ‘아,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이구나.’라고 알았다. 그런 예수를 누가 믿겠는가. 뭔가 해 주시는 분, 도움이 되는 분을 믿었지 완전히 끝장나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사람일 줄 알았겠는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이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나 전부 이 사람이다. 실체를 보면 다 이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었는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죽은 나사로를 살렸는가?’ 했고, ‘아니다. 다른 것이 있으니 그렇지 않았겠는가.’ 했지만 이 자리에 오니까 모든 것이 떨어져 버렸다. 실체를 보고 나니까 예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다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거기가 우리 인생의 진실한 바닥이다. 그 진실함이 우리 인생이다.
거기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짜다. 뭔가 조금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금 있어도 다 있다. 그것을 싸그리 없애버린 것이 이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다 싫어한다. “나는 그런 예수는 싫다.”고 한다. 왜 싫다고 하는가? 내가 그렇게 되기 싫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먹지 말라 하신 것을 먹은 것이다. 그 자리를 보고 나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 아닌가. 그래서 죽기 살기로 먹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위치 이탈을 했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의 자리, 그것이 흙에 심겨지면 열매가 되고 바위에 지어지면 집이 된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심히 좋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심히 좋다하신 사람의 모양이 어떤 모양일까? 인류 역사가 이렇게 오래 되었어도 아무도 이것을 모른다. 그것을 예시해 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이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시를 해 주었는데 실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예시라고 우리에게 보인 것만도 굉장히 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렇게 보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워치만 니의 도움으로 이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길은 분명히 바른 길로 왔는데 예수를 만나면서부터 헷갈렸던 것이다. 내가 헷갈리니 다른 사람도 헷갈렸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가 내가 완전히 껍데기를 벗을 때라고 생각한다. 내 미덕이나 성품이나 좋은 점을 보고 나를 따라왔다면 나에게는 미덕만이 아니라 악덕도 있고 의만 아니라 불의도 있다는 것을 다 까발리고 싶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고 온 사람들은 정신이 바짝 나도록 하고 싶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의 유일한 목표는 예수를 아는 것, 사람을 아는 것이다. 어느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참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다. 누가 아브라함이고 누가 이삭이고 누가 야곱인가? 나는 그 사람을 찾아왔다.
이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는 다 소용없다. 미덕도 소용없고 좋은 것도 소용없다. 다 소용없다. 나의 그런 점들이 오히려 방해꺼리가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이 다 조각나더라도 오직 이 사람, 진실한 이 사람을 사람들이 다 볼 때까지 나를 까발려 없애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 나를 나를 가장 많이 누리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그런 좋은 것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면 그것을 벗겨내고 싶다.
불트만이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신약성서를 전공한 신학자다. 예수가 신화라는 말이 진즉 돌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비신화화를,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다시 파헤치기 시작했다. 각종 비평을 통해서 예수를 파헤쳤다. 파헤치니까 뭐가 나왔는가?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트만이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실존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도대체 실존적이라는 말은 나는 아무리 들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장기희 형제에게 실존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아보라고 숙제를 냈는데 3주가 지났어도 아직 답이 없다. 박종규에게도 알아보라고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바르트에 대해서는 자료가 별로 없다고 변명했다. 로마서 강해한 것이 하나 있고 단편적으로 설교한 것밖에 없다고 하기에 그것이라도 보자고 했다. 그 책을 가지고 오라 했다.
우리 모두가 뜬 소문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실재에, 실체에 눈이 가야 한다.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없다. 좋아도 할 수 없고 나빠도 할 수 없다. 내 아버지가 똥 푸는 사람이라도 할 수 없고 고관대작이라도 할 수 없다.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쩌겠는가. 서울 가니까 “퍼 퍼”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끼리 제일 심한 욕이 그것이었다. “너희 아버지는 퍼지?”라며 욕을 했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그 아들이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기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어진다. 그러나 저러나 아들은 아들이다. 그러니 아들은 아버지의 좋은 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지 내 아버지를 비난하고 내가 존재하겠는가. 아버지가 좋든 나쁘든 아버지 자식이니까 아버지의 좋은 점을 살려내야 한다. 우리는 예수가 좋든지 나쁘든지 내 운명을 짊어졌으니 내가 살려내야 한다.
보니까 운명은 똑같다. 인생의 운명이지 새로 만들어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 누구 한 사람도 거기서 예외인 사람은 없다. 다 똑같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놓으셨지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는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좋으나 나쁘나 할 수 없다.
그런데 다행히 나는 그것이 좋았다. 나도 싫었으면 진즉 감춰놓고 말았을 것 아닌가. 나는 좋았으니까 까발린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이것이 진실이다. “진실, 진실”했는데 이것이 진실이다. 이것 외에 뭔가 있는 것은 각색해 놓은 것이다. 아무리 양심적이고 진실하다 해도 색깔이 들어있다. 그런데 여기는 색깔이 전혀 없다. 무색이다. 무색무취다. 참으로 재미없을뿐만 아니라 절망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의 정해진 길이라면 어쩌겠는가. 거기서 가치를 발견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 보면 ‘이것이 진실이구나. 우리가 생각했던 진실은 진실이 아니구나.’라고 알게 된다.
그리고 반석이다. 여기가 반석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생이 왜 올라갔다 무너졌다 하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기초 때문이다. 인생도 그렇고 교회도 그러하다. 모두 이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조금만 틈이 있어도 허물어져 버린다.
와우아파트 사건이 내가 살던 그 동네에서 일어났다. 공사할 때도 내가 다 보았는데 그곳은 석비레라서 겉은 푸석푸석해도 속에 들어가면 곡괭이도 안들어갔다. 그때는 굴삭기도 없는 때라서 1미터를 파려면 몇날 며칠을 파야했다. 거기다 기초를 해서 5층 아파트를 지었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풍화작용이 일어나서 속이 푸석푸석해졌던 것이다. 그러니 그 건물이 견디겠는가. 그래서 무너졌다. 기초가 반석이라야 하는데 반석이 아니라 석비레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세워놓았던 아파트를 다 허물었다. 그리고 그곳 주민들에게 딱지를 주어서 성남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오늘 성남시가 되었다. 25평씩 땅을 주고 알아서 지어라. 해 놓으니까 성남시가 완전히 슬럼가처럼 형성되었다. 아파트는 8평, 땅은 25평을 주니까 돈 있는 사람들은 딱지를 두개 세개 모아서 50평이 넘는 집을 좋게 지었다. 내가 그때 현장에 가 보았다.
우리도 처음부터 말했듯이 만일 조직이 필요하고 제도가 필요하게 되거든 근원이 잘못되었다고 알고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조직 없이도 잘 해왔다. 조직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와서 제도가 어떻고 조직이 어떻다고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조직이 없고 제도가 없으면 움직여지지 않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근본으로, 우리의 근본으로, 인생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복음 안에 들어오면 조직이 필요없다. 지금 MZ세대를 보자. 그들에게는 조직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자기들끼리 만나면 밤을 새운다. 그러니 무슨 조직이 필요하겠는가. 교회는 이렇게 무조직이다. 그러면서도 살아있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그런 교회라야 된다.
그래서 나는 언제고 ‘아이고, 조직이 있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몇번이나 말했다. 그래도 지금 한쪽에서는 조직을 요구하니까 어찌될지 모른다.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참 교회가 어디서 나타나는지 두고봐야 하겠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조직이 없다고 움직일 수 없는 교회 같으면 나는 여기서 나가겠다. 조직으로 움직여지는 교회라면 나는 거기 있을 필요가 없다. 독재라고 하겠지만 이것은 독재가 아니다. MZ세대를 보기 바란다. 조직이 있는가? 그렇다고 나 혼자 되는 것도 아니다.
세희가 와서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했다. 이혼하느니, 부부간에 관계가 안좋으니 하면서 자기가 궁지에 몰렸다고 했다. 나는 부부간에 그럴 수도 있으니까 일반적 상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 보라고 충고했더니 쌩하고 나가버렸다. 그러더니 자길 형제를 만났다고 한다. 자길 형제는 말을 몇마디 안했다고 한다. 자길 형제는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거기서 세희가 확 돌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나도 말조심을 해야겠다. 함부로 말하면 안되겠다고 절실히 느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이론에 있지도 않다. 조직에 있지도 않다.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나도 처음에는 놀랐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들이 나왔는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우리 은혜가 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생전 집에서도 말을 안해서 재형이가 답답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따금 간증을 시키면 앞으로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는 말만 하지 다른 말을 안한다. 속으로는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 말을 하면 그것이 법이었다. 영광이에게는 엄마가 한번 말한 것이 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딸인가 싶다.
나는 신혼여행이라고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인천 프린스 호텔에 묶게 되었는데 앉자마자 집사람을 앉혀놓고 기도했다. 나는 결혼을 못할 사람이었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나오니까 군의관이 “장가나 가야 할 텐데.”라고 했다. 그리고 딴 데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체중이 45키로밖에 안되었다. 여자 앞에서 옷 벗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사람인데 집사람이 기도하고 왔다니까 부담없이 결혼할 수 있었다. 그때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결혼을 못할 사람인데 결혼했습니다. 자식을 주면 하나님께 선물로 바치겠습니다.”라고. 그런데 언제 은혜가 이렇게 될 줄 꿈이나 꾸었겠는가. 지금 보니까 그때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힘으로 된 것이다. 지금은 내가 아버지인데 아버지 같지 않다고 한다. 신기한 일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뭐가 기적이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면 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겠는가. 내가 병자를 고친다고 기적이겠는가. 하나님은 지금까지 내 기도를 들어 주신 적이 없다. 이제 이것 하나를 들어주신 것 같다. 우리가 기고 날아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그런데 쓰시기만 하면 개떡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쓰실 자리에 있기만 하면 다 쓰신다.
우리가 다 멸시했던 그 사람, 이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지 않았는가! 우리 앞에 신으로 쓰시지 않았는가. 우리 앞에 신으로 보였던 예수, 신 같았던 예수가 바로 이 사람이다. 실체가 바로 이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것 외에는 모두 버리고 싶다. 배설물로 여기고 싶다. 만일 내 좋은 점이 복음을 가린다면 나는 가차없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싶다. 내 생명과 무관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필요해서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지금 내게 대해서 평가하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신유길 교수는 신화적인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주 정확하게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화적인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 형제들 속에서 형제들과 같이 살고 싶다. 같이 살 방법은 유일하게 이곳밖에 없다.
다른 것은 다 깨져 버린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바람이 불고 풍파가 오면 깨져버린다. 우리 같은 교회가 깨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쫙 쪼개지지 않았는가. 쪼개질 것은 쪼개져야 한다. 할 수 없다. 쪼개질 것은 쪼개지고 남을 것은 남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쪼개질 것 같으면 쪼개져도 좋다. 만일 나가야 한다면 내가 나가겠다.”라고 했다. 나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예배당을 짓자는 말을 한번도 안했다. 누가 건축 헌금을 얼마 냈는지 모른다. 한번도 묻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알면 내 머리에 남아서 낼만한 사람이 안냈으면 속으로 미울 것 아닌가. 옹색한 사람이 냈으면 ‘이것은 과부의 엽전 두푼이구나.’ 하겠지만 낼만한 사람이 안냈다면 마음 속에 기억이 된다. 그래서 한번도 장부를 보자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돈이 모였는지 도저히 상상이 안된다. 누가 돈을 내서 100억이 넘는 돈이 나왔는지 모른다. 나는 공짜로 얻은 셈이다. 버려도 내 것이 아니다.
물론 나도 내 전세금이 다 들어가서 아무것도 없고 재승 형제도 자기 전세금과 아버지가 유산으로 준 집도 다 들어갔다. 이 안에 다 들어가서 아무것도 없다. 우리 둘은 전부를 다 드리고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내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에베소 교회에게 “네가 다 있다. 자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요한이 영 안에서 본 것이다. “내가 주의 날에 영 안에 있었더니…….” 하고 일곱 교회를 본 것이다. 영원 안에서 본 것이니까 이것은 미래의 우리 교회일 수도 있고 현재의 교회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잘못하면 다 있는데 생명나무 열매만 못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만일 에베소 교회같이 되어 버린다면 생명나무 열매가 소용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싶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교회당이 필요한가, 생명나무 열매가 필요한가? 대구교회가 필요한가, 생명나무 열매가 필요한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소원은 오직 예수라야 한다. CCC에서 많이 노래불렀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렀던가. 그 실재가 지금 왔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세상 부귀 영화도 주 사랑 하는 맘 뺏지 못해.” 이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의미가 다르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분이 나를 주관해야 한다. 이 기초 위의 기초, 바닥 위의 바닥인 이 사람이 내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그분과 연합해서 새로운 것이 된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된다.
새 생명, 거듭남은 전부 이 안에 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니고네모만 못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우리도 다 못알아들었다. 어떻게 거듭나는지 몰랐다. 진정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거듭났다고 할 사람이 별로 없다. 구원파 사람들 외에는 그 말을 할 사람이 없다. 그들은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주장한다. 죄를 사함받으면 거듭난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나는 몇월 며칠 몇시에 거듭났습니다.”라고 당연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개신교 교인들에게 물으면 니고데모 이상의 대답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제는 확실하게 “나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출생지가 있으니까 내가 태어난 것이지 출생지가 없이 어떻게 태어나겠는가.
잠시 동안 무엇을 버렸다 해도 그것은 내 출생지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버린 것은 내 출생지가 아니다. 세상이 떠나가야 되지 나는 세상을 떠나올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보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좋은 것, 필요한 것을 내보내려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밤새 고민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로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시자 그 말을 듣고 비로소 가죽부대에 물을 넣고 먹을 것을 잔뜩 지워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던 것이다. 내 자식, 내 것은 내보내기 어렵다.
내 것이 아니라야 내놓을 수 있다. 세상이 나를 버려야 세상을 나올 수 있지 세상이 버리지 않는데 세상을 버리기 쉬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세상을 버렸다.”고 하지만 내가 버린 것으로는 안된다. 세상이 나를 버리니까 나는 세상이 저절로 버려졌다. 내가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다. 쓸모없다고 버리니까 내가 버려졌다. 나는 한번도 나 자신을 스스로 버린 적이 없다. 나는 스스로 못버린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저절로 버려진 것이지 별 것 있겠는가. 그러니 그보다 쉬운 것이 없다. 세상 버리는 것이 어려우면 죽기까지 어렵고 쉬우려면 너무나 쉽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알아달라고 해도 안되니까 세상이 나를 버리면 나는 저절로 버려진다.
그래서 미련을 못버린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 “아니, 왜 너를 버린 세상에 가서 사정하고 있느냐. 왜 애걸복걸하고 있느냐.”라고 하는데도 미련을 못버린다. 그래도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애걸한다. 얼마나 처량한 일인가. 차라리 싹 버려주면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 나는 부득이 버려졌지 한번도 스스로 세상을 버려본 적이 없다.
세상이 우리를 버려줄 때 감사해야 한다. 슬퍼하지 말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나를 버려주면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세상이 인정해 주시면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못간다. 쓰시고자 할 때 쓰시지 못한다. 그런데 버려지면 어차피 아무것도 없으니까 오라 하시면 오고 가라 하시면 가게 된다. 그렇게 밖에 안되니 이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다고 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명나무 열매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못할지라도 생명나무 열매는 먹어야 한다. 우리 MZ세대는 다른 것은 다 빵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앞도 뒤도 없다. 그런데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다. 그러니 간단하지 않은가!
서울 아이들은 쌀이 나무에서 열리는지 벼에서 열리는지 모른다. 쌀나무가 있는 줄 안다. 그래도 그런 것은 알건 모르건 밥 먹는 데는 지장없다. 서울 아이들 태반이 쌀나무가 있느냐고,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밥이 더 맛있어지겠는가. 그것을 안다고 밥이 더 좋은 밥이 되겠는가. 아나 모르나 밥 먹기는 매한가지다.
몰라도 밥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벼농사를 다 안다. 그래도 내 밥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벼농사를 다 알아도 내일 아침에 밥을 먹을지 못먹을지 모르니, 쌀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우리는 쌀장사도 했다. 그런데 쌀이 없어서 어머니가 건너집에 가서 쌀 한되박을 사오셨다. 그것을 놓고 한숨을 쉬고 계셨다. 나는 차마 거기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어서 모른체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한숨을 쉬고 계셨겠는가. 쌀독에 가득 채워놓아야 마음이 편한 분인데 쌀이 똑 떨어져서 쌀 한되박을 사오셨다. 나는 말을 못붙이겠어서 모른체하고 나왔다.
쌀 한되박도 없어서 아침 식사가 될지 안될지 모르는 사람에게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쌀 나무를 아는 것이 필요한가, 쌀 자체가 필요한가. 배고프면 쌀이 필요하지 어떻게 쌀이 나오는지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쌀 농사를 다 안다. 어떻게 모를 심고 키워서 가을에 벼를 수확해야 되는지 다 안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도시 아이들은 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쌀밥은 잘먹는다. 배탈도 안나고 잘 먹고 잘산다. 요즘 MZ세대가 그러하다. 어떤 분들은 “아이고, 저것들이 경험도 없는 것들이, 과정도 거치지 않았고 역사도 없는 젊은이들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하겠지만 그 세대는 아무것도 몰라도 쌀밥은 안다.
그래서 오히려 순수하다. 신기한 일이다. 우리 교회에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여러분이 이 신기한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력서를 가지고 있다고, 아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참여 못하면 나만 손해다. 그 사람은 굶어 죽어도 여전히 쌀 나무를 연구할 사람이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장 중요한 것, 이 한가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다 가지려고 하면 안된다. 나도 다른 것이 있으면, 또 다른 가능성이 있으면 딴 생각을 할 텐데 아무 가능성도 없다. 그러니 너무 편하고 좋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내 껍데기를 벗더라도 여러분이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자기들을 협박한다고 생각하나 협박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복음을 복음되게 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예수를 예수 되게 하고 싶다.
예수 없으면 내 일생이 뭐가 되겠는가. 성경 교사가 되고 말 것 아닌가. 성경을 잘 가르치고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 아닌가. 나는 성경을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잘 가르쳐도 소용없다. 교사밖에 안된다. 증인이 안된다.
콩은 지금 있는 콩이 만년 전의 콩의 증인이다. 우리 모두 근원으로 돌아가자. 근본으로 돌아가자.
에베소서 1장 4절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 우리가 모를 때 벌써 택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운명 지워진 사람들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 사람으로 지으려고 작정하고 지으신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서 뭔가 다른 것을 찾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없다. 찾아도 없다. 이것이 우리의 고향이고 본향이고, 나고 우리 자신들이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사람이 다 이리 돌아온다. 안돌아올 수 없게 되어 있다. 기다리면 다 돌아온다. 잠시 혼란이지만 다 돌아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다른 데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딴 데 갈 데가 없다. 아무리 해봤자 이것밖에는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이 없다.
나무는 언제나 땅에 심겨야 되지 돌아다니면 안된다. 식물은 땅에 심겨야 하고 사람은 사람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철칙이다. 사람이라 해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겠는가.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정상이다. 되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안되는 것이 정상이다. 내 마음대로 안되니까 피조물이지 내 마음대로 되면 피조물이겠는가.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피조물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이미 이렇게 정해진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되도록 만들어졌다. 이 자리가 우리 자리다. 바꿀 수 없다. 우리 마음대로 바꿔지지 않는다. 개가 어떻게 소가 되겠는가. 개는 소가 될 수 없고 소는 개가 될 수 없다. 소는 아무리 울어봐야 “음메” 소리밖에 못낸다. 아무리 개처럼 짖고 싶어도 안된다. 개도 마찬가지다. 소처럼 점잖게 짖고 싶어도 안된다. 목이 갈라지도록 짖어 봐야 그렇게 생겼는데 어쩌겠는가.
우리도 우리가 태어난 자리를 알고 그것을 살려내야 한다. 거기 있는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거기 가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가치하게 만들어놓으셨겠는가. 하나님께 필요하게 만들어 놓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해서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을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가 필요해서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확실하고 든든한가. 하나님이 자기 필요를 위해 만들어놓으셨으니 이보다 확실한 것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 필요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놓았으면 어찌 되겠는가. 늘 하나님을 바꾸지 않겠는가. 우리 마음대로 이런 하나님을 만들고 저런 하나님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꿀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을 바꿀 수 없는 인생이다. 그래서 내가 기도해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옳게 기도한다고 했어도 안된다. 하지만 나는 잘된 것보다 안되는 것이 너무 좋다. 은혜 얘기를 했지만 나는 그날 기도했던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없어도 하나님이 필요한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