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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상해전역의 완패에다 12월 13일 수도 남경마저 함락됨으로서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군부내에서 가장 반일적이고 강경하다는 풍옥상조차도 "길어야 반년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말할 정도였죠.
남경 함락직전인 12월 2일 장개석은 트라우만 주중독일대사를 통해 일본과의 강화를 수락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승리에 도취된 일본은 이를 묵살했고 12월 22일에야 훨씬 가혹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 내용은 만주국의 승인과 화북, 양자강 유역에 대한 비무장지대 및 특별행정구역의 설정, 전쟁 배상금 지불 등이었습니다. 만주국의 인정이나 특별행정구역의 설정은 사실상 일본에 영토를 할양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막대한 전비 배상까지 하라는 것은 중국보고 백기들고 항복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것을 넘겨받은 디르크센 재일독일대사조차도 이런 일본측 조건에 대해 이건 "너무 가혹한 것"이며 중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고 말합니다. 일본은 이조차도 너무 관대하다면서 중국이 거절할테면 거절해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특히 이번기회에 전쟁특수로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군산복합 재벌들과 군부는 전쟁을 계속 할 것을 정부에 강력하게 압력을 가합니다.
이런 일본의 강화조건은 12월 27일 임시 수도인 한구에서 트라우만은 공상희에게 전달합니다. 남경 실함과 와병을 이유로 행정원장직을 사임한 장개석을 대신해 행정원장이 된 공상희는 처음에는 남경에서의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면서 "이런 조건은 절대 승락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대답했으나, 화중과 화북의 전황이 점점 악화됨에 따라 1월 13일 왕총혜 외교부장은 "일본의 조건이 너무 막연하여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라며 다소 절충의 여지를 남긴채 회답합니다.
일본 참모본부에서는 국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쯤에서 적당히 중국과 매듭을 짓고 대소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무력 해결만을 외치는 육군 강경파들에게 밀려 1월 16일 일본은 공식적으로 "장개석정권은 일본에 대해 성의가 없는 이상 앞으로 장개석정권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주중 일본대사인 가와고시를 소환합니다.
여기에 대응해 장개석 역시 "굴복하여 멸망하느니 싸워서 멸망당하는 쪽을 택하겠다"라며 강경 자세를 취하며 국제정세가 유리해질때까지 철저항전할 것을 선언하고 주일대사 허세영을 소환합니다. 이로서 양국은 정식으로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뿐 사실상 국교는 완전히 단절됩니다. 더이상 "국지적인 분쟁"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완전히 굴복할때까지 사생결단으로 싸울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대본영과 참모본부에서는 병참의 한계를 고려해 점령지를 더이상 확대하지 않겠다는 "전선불확대방침"을 2월 16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재가까지 받았음에도 이는 육군에 의해 철저하게 묵살되었습니다.
게다가 중국이 일본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중국 전토를 장악한후 새로운 친일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이들과 대화하면 된다라는 소위 "지나사변 처리 근본 방침"이 결정합니다. 그리하여 점령지 곳곳에 괴뢰정권이 수립되고 38년 12월 국민당 부총재인 왕정위가 "일본과의 화평"을 주장하며 배신을 때리고 일본으로 망명하자 일본은 그를 중심으로 "남경국민정부"를 수립하여 기존의 괴뢰정권들을 하나로 통합시키게 됩니다.
37년 12월 14일 관동군의 주도로 북평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일본은 이어서 남경을 점령한후 친일 괴뢰분자를 모아서 38년 3월 28일 소위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수립합니다. 관할지역은 상해와 남경을 비롯해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양자강 하류의 3개 성의 일본군 점령지역이었으며 정부 수반은 양홍지가 맡습니다. 국기도 청천백일기 대신 북양시절의 오색기를 기초로 하였죠. 전쟁을 이용해 중국의 분열을 책동했으나 점령지에서 저지른 온갖 만행으로 민중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 통치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40년 3월 30일 왕정위의 "남경정부"에 흡수됩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이 괴뢰정권에 협조했던 자들은 죄다 체포되어 "매국노"로서 사형에 처해지거나 종신형을 받습니다.
이 대머리씨가 중화민국 유신정부 수반이었던 양홍지. 원래 북양군벌내 안휘파 정치가로서 격동의 시대에 분수에 넘치는 야심을 품었다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남은 인생도 종치고 말았죠. 친일괴뢰정권에 참가한 이들은 왕정위, 주불해처럼 국민당내 친일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청말, 북양시절의 고색창연한 인물들로서 일본에 빌붙어 과거의 영화를 다시 누리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한편, 상해를 중심으로 화동전선에서 쌍방이 3개월간의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또 하나의 전선인 화북에서도 일본의 침략이 파죽지세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그 이남에 있는 찰합이성과 수원성,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 화북 5개성을 일본은 소위 "북지"라 불렀습니다. 총면적은 109만 평방km에 달하여 한반도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며 인구는 8,800만명정도였습니다.
노구교사변이후 8월말까지 북평-천진 전역이 함락되고 남구에서 탕은백군마저 패배하자 일본군은 "찰합이성 공략작전"을 발동하여 도죠 히데키중장의 "찰합이성 병단"을 주축으로 중국군을 추격하여 찰합이성과 수원성을 차례로 침략합니다. 중앙군인 탕은백군이 패퇴하자 부작의를 비롯한 여타 지방군벌군들은 전의를 상실한채 무단으로 후퇴하였고 덕분에 일본군은 무인지경으로 달려 8월 27일 찰합이성의 성도인 장가구를 점령한후 9월 12일 대동을 거쳐 수원성에 진입한후 10월 14일에는 성도인 수원을, 17일에는 포두까지 점령합니다. 이로서 평수철도 전역을 확보하고 찰합이성과 수원성 2개성을 손쉽게 장악하죠.
중국군은 상해전역에 주력을 집중하면서 동시에 화북에서 일본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하북성 중부지역에서 평한선(북평-한구를 연결하는 철도)과 진포선(천진-양자강 하류의 포구까지 연결하는 철도)를 중심으로 약 45만명의 병력을 전개합니다. 8월 20일 열린 장개석 주도의 군사위원회에서는 북평의 함락에 따라 화북방어계획을 다음과 같이 수립합니다.
주요 방어선은 총 3개로 나누어 제1선을 보정-창현을, 제2선을 안양-제남을, 제3선을 낙양-정주-개봉-서주-회음을 연결하는 선으로 구축하여 축차적인 종심방어전략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선에는 약 10개군 29개사단이 배치되었고 송철원의 제1집단군(제29군, 제53군)이 진포선을, 유치의 제2집단군(제3군, 제26군, 제52군)이 평한선을 방어하며 특히 전략적 요충지인 보정에 대규모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여기에 위립황의 제14집단군이 전략예비대로서 산서성과 하북성에서 우군의 방어전을 지원토록 합니다. 또한 전구를 재편하면서 이들의 총지휘를 위해 진포선을 중심으로 새로이 제6전구(관할구역 : 하북성 동쪽과 산동성)를 창설하고 전구사령관에 서북군벌의 수장인 풍옥상을 임명합니다.
중국군은 1차대전식의 고전적인 대규모 진지전을 고수했으나 이 지역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없었고 특히 기갑부대와 항공공격에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광대한 공간을 적극 활용해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치며 적의 소모를 강요하는 전술을 택하는데 작전의 승패는 전적으로 피아간의 기동력의 격차를 고려해 포위되지 않도록 병력의 진퇴에서 신속하고 융통성 있는 지휘관의 판단력에 달려 있었습니다.
37년 9월의 화북전선의 상황입니다. 붉은 선 이북이 일본군에게 장악된 지역입니다. 도시를 연결하는 선이 주요철도선이며, 쌍방은 주로 철도와 대도시를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는데 왜냐하면 병력과 물자 수송에서 이들 철도가 생명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며 철도를 확보하는 쪽이 전략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총 8개 사단에 1개 혼성여단, 임시항공병단 등 37만명까지 증강됩니다. 이렇게 확대된 병력의 지휘를 위해 "북지나방면군"이 창설되었고 사령관은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이 임명됩니다.
< 북지나방면군 전투서열(37년 9월) >
○ 북지나방면군(사령관 : 데라우치 히사이치대장, 참모장 : 오카베 나오자부로 소장, 사령부 : 천진)
- 군 직할 : 제5사단, 제109사단, 지나주둔혼성여단
- 제 1군(카츠키 키요시중장) : 제6사단, 제14사단, 제20사단, 야전중포병 제1여단
- 제 2군(니시오 도시죠중장) : 제10사단, 제16사단, 제108사단
○ 총병력 : 37만명
※ 이중 상해전역이 확대됨에 따라 제6사단과 제16사단은 화동전선으로 차출되어 중지나파견군에 속하게 됩니다.
찰합이성과 수원성을 장악하여 측면으로부터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한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중국의 중심부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9월 4일 북지나방면군은 "보정작전"을 예하부대에 하달합니다. 제1군이 작전의 주공으로 평한선을 따라 남하하여 보정에 주둔한 중국군의 방어선을 공격하고 제2군은 진포선을 따라 남하하여 창현을 점령한후 보정의 측면을 우회하여 중국군을 포위 섬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북성 중부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인 보정은 중국 3대 육군사관학교중 하나인 "보정군관학교"가 있었습니다. 오패부, 손전방 등 북양군벌들은 물론, 중국군 주요 지휘관의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었으며 장개석도 이곳에 입학하려다 일본 유학을 택합니다. 많은 우리 독립군 간부들도 이곳에서 근대전술을 배워 일본군과 싸우죠. ※ 사진출처 : http://kihan.ciao.jp
중국군은 여기에 대항해 견고한 토치카를 활용한 치열한 방어전을 펼치며 일시적으로 적을 저지하기도 했으나 9월 23일 보정은 포위됩니다. 보정을 수비하는 중국군은 30개사단 40만명에 달했으나 대부분 무장과 훈련이 빈약한 지방잡군의 혼성부대였기에 압도적인 기갑전력과 장갑열차, 공군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맹공으로 하루만에 전략 요충지인 보정은 함락되었고 같은날 창현도 돌파됨으로서 중국군의 제1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도 2만5천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지만 일본군 역시 그들이 인정한 것만도 전사 1,488명, 부상 4천여명에 달하였습니다. 특히 중국군의 전의는 대단하여 그야말로 최후의 일인이 전사할때까지 사격을 퍼부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포로가 되기를 거부한채 슈류탄을 터뜨려 자결하기도 하였습니다.
9월 24일 보정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의 기갑부대.
※ 사진출처 : http://japanese.china.org.cn/jp/archive/kangzhan/txt/2005-04/27/content_2170915.htm
어쨌든 중국군은 포위되기전에 주력부대를 퇴각시키는데 성공함으로서 일본군은 본래 목적이었던 포위 섬멸에는 실패합니다. 보정-창현 전투의 승리는 단지 전술적인 것일뿐 중국군이 원하는 소모전의 수렁에 점차 빠져들어가는 것이죠.
보정-창현선을 돌파한 일본군은 다음 목표를 석가장으로 정합니다. 석가장은 인구 5만명의 도시로 태원과 연결하는 정태선과 평한선의 교차점이자 교통의 요지이며 다수의 근대공장과 물자가 집중되어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번 포위 섬멸을 꾀하지만 큰 비가 내려서 석가장과 창현사이의 강이 홍수로 범람하면서 교통이 차단되었고 제2군은 1,300척의 바지선을 동원해 석가장 서쪽으로 진출하지만 중국군 주력부대는 그전에 남쪽으로 후퇴함으로서 포위 섬멸에 실패합니다. 석가장은 10월 11일 오후 2시 30분 일본군 선견대가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진입함으로서 함락됩니다.
항공기의 맹폭에다 전차부대를 앞세운 일본군 앞에 대부분 장비와 훈련이 매우 빈약한 지방군벌 혼성부대로 구성된 중국군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송철원과 한복구는 적극적인 저항보다 자기 병력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여 사령관인 풍옥상의 명령에도 불복하였습니다. 손연중의 제26군 역시 저항없이 후퇴했고 관린정의 제52군도 상급부대에 보고도 하지 않은채 적전퇴각하는등 지휘계통에 있어서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서북군 출신으로 과거 풍옥상의 부하들이었음에도 보스의 명령을 가차없이 묵살해 버린 것이죠. 특히 한복구는 장개석의 명령도 여러차례 묵살하였고 이후 산동작전에서도 무단으로 철수함으로서 중국군 전체의 작전에 치명타를 가함으로서 결국 명령불복으로 총살당합니다.
제2사단을 비롯한 장개석 직계의 중앙군만 전의를 가지고 있었을뿐 그 나머지 지방군들은 제멋대로 퇴각하여 찰합이성, 수원성과 함께 하북성에서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채 방어선이 와해됩니다. 물론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번다"는 것이 장개석의 기본 전략이기는 했으나 그것도 공간을 내주는 만큼 적에게도 그정도의 손실을 입힐때의 얘기인데 군벌들의 비협조와 이기주의로 장개석이 예상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이로서 황하 이북 전역이 일본군의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도 산서성 태원 공략 과정에서는 이타다키 세이치로이 이끄는 제5사단이 우세한 중국군의 포위망에 걸려 예상외의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산서성은 염석산의 제2전구에 속했는데 그 휘하에는 주덕이 지휘하는 제18집단군(이른바 "팔로군")도 있었습니다.
앞서 찰합이성과 수원성을 손쉽게 점령했던 일본군 제5사단은 그 여세를 몰아 대본영의 지시도 없이 독단적으로 산서 북부로 침입해 들어옵니다.(만주사변의 장본인인 이다타키에게 어차피 그런 것따위는 장식일뿐) 수비하는 중국군은 중앙군과 산서군, 팔로군, 수원군 등 합하여 약 20개사단 25만명에 달하였습니다. 염석산은 태원 북쪽 400km 떨어진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이자 요충지인 평형관에서 적의 산서 침입을 막고 성도 태원을 방어하기로 합니다. 이를 위해 병력을 둘로 나누어 좌익은 부작의가 지휘하는 제19, 제34, 제35, 제61군 등 4개군으로, 우익은 양애원이 지휘하는 제15, 제17, 제33군 등 3개군을 평형관을 중심으로 만리장성 일대에 배치합니다. 중국군은 험준한 산지를 이용해 매우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고 주덕의 제18집단군 산하 제115사단과 제120사단은 예비대로서 유격임무를 맡습니다. 당초 염석산은 주덕에게 다른 부대들과 함께 평형관의 수비를 맡아주기를 요청했으나 주덕은 "정면 전투는 능력 밖이며 단지 보조전력으로서 유격전만을 수행할 수 있다"라며 거절합니다.
9월 21일 일본군 제5사단 제21여단이 평형관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양측은 산악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입니다. 중국군 주력부대가 평형관에서 제5사단 주력을 상대하는 동안 임표의 제115사단이 우회한후 제21여단의 보급부대를 습격하여 국지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것이 공산당이 선전하는 이른바 "평형관 대첩"이죠. 제21여단 3천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실제보다 몇배나 과장된 전과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일본군 제5사단은 치열한 고전끝에 혼성 2여단과 제15여단의 증원을 받아 9월 30일 평형관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염석산은 잔존병력을 흔구진에 집결시켜 제2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좌익은 주덕을 사령관으로 임표의 제115사단을 비롯해 4개사단을 배치하고, 우익은 양애원을 사령관으로 하룡의 제120사단을 비롯해 4개사단을 각각 배치합니다. 또한 중앙군을 주축으로 10개사단을 태원 북쪽에 배치하고 위립황이 그 지휘를 맡습니다. 그 외에도 부작의 지휘하에 9개 사단을 예비대로 배치합니다.
당초 일본 대본영은 산서성보다 보정 공략에 집중할 계획이었으나 이타다키의 독단적인 행동을 문책하기는 커녕 사후 승인하고 제20사단과 제109사단을 추가로 증원시켜 석가장에서 서쪽으로 진격토록 합니다. 중국군이 흔구진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남하를 막는 동안 제20사단이 산서성 동쪽의 요충지인 낭자관을 10월 26일 점령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측면을 위협받게 됩니다. 장개석은 한복구에게 산서성 수비를 위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시켜 일본군의 산서성으로의 증원을 저지하라고 명령했음에도 한복구는 이를 가차없이 묵살하여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합니다.
중국군은 근 2주동안 잘 방어하고 있었지만 측면이 돌파되자 염석산은 11월 2일 흔구진에서 전면 퇴각을 명령했고 태원은 북쪽과 서쪽에서 포위당하게 됩니다. 결국 11월 8일 태원은 전차부대와 항공기의 공격앞에 함락됩니다. 염석산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잔존부대를 이끌고 산서 남쪽의 임분이라는 동네까지 후퇴합니다. 이곳은 매우 험준한 산악지대라 일본군도 병참의 문제로 더이상 추격하지 못한채 전쟁 끝날때까지 사실상 교착상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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