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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청주] 큰일입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에즈 9, 5 - 9
† 복음 : 루카 9, 1 - 6
★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무렵
율법 학자인 에즈라도 고국에 돌아왔다. 그는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단식하며 주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다. 마을마다 다니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하시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준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의 짧은 복음 말씀에는 ‘떠날 때’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 식량 자루, 빵, 돈, 여벌 옷 등 이 모두가 필요한 물건들인데,
하나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주님께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으로 ‘떠남’의 첫 번째 규범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떠날 때에는 주님께 의지하여라.’
두 번째의 말씀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입니다. 한 집이 아니라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 그만큼 더 많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떠날 때까지 한 집에만
머물면서 민폐를 끼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로써 두 번째 규범이
나옵니다. ‘떠날 때에는 사사로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마라.’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입니다. 이는
상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 번째 규범이 나옵니다. ‘떠날
때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집착을 버려라.’
사실 우리는 날마다 떠납니다. 과거와 떠나고 있고,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은 잘만 하면 성장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잘하지 못하면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신 떠남의 세 가지 규범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서 떠나는 연습을 하도록 합시다.
- 매일 미사 -
◈ [청주] 큰일입니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루카 9,1-6
큰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감곡성모순례지성당은 기도하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오십니다. 오시는
분들을 위해 무엇인가가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하지 못하니
주님 앞에 그 꾸중을 어찌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거듭나야
하는데...새로나야 하는데 마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진정한 믿음만이
2013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어떤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던 중에 자신 역시 믿음이 있으니
놀라운 기적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처럼 자신 역시 한강 위를 충분히 걸을 수 있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물 위로 한발을 내어 디딘 그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강한 그의 믿음으로 베드로가 체험했던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만 물에 곧바로 빠졌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신부님을 찾아가 따지듯 물었습니다.
“신부님,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베드로
역시 이 믿음의 힘으로 물 위를 걷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 역시 굳은
믿음이 있는데 왜 물 위를 걷지 못하고 빠지는 것입니까?”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이 젊은이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셨습니까?”
젊은이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지요. 이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빠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만 있다면 자기 원하는 데로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만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여기에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감히 대입시키고 있습니다. 즉, 믿음만 있으면
내 욕심과 이기심을 다 채울 수 있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물 위를 걸은 베드로가 보여주었듯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아직 능력이 부족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하나 더
챙겨서 줘야 할 정도로 부족한 것투성인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그 말을 듣고서 어떠했을까요? 하지만 제자들은
불평불만을 던지고, 또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이 명령을 듣고
곧바로 떠나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곧바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이를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와는
달리 내가 원하는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은 내 욕심과
이기심으로 만들어진 거짓된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믿음입니까?
거짓된 믿음입니까? 진정한 믿음만이 주님의 기쁜 소식에 세상 끝까지
펼쳐 나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자. 원하는 건
해피엔드가 아니라 잘 단련된 해피 마인드다(크리스티앙 그르니에).
순교자 현양대회가 갑곶성지에서 있었습니다. 사진은 미사 전
도보순례 모습.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세 가지 기적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둘째,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교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셋째,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그렇지 않습니까? 매번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우리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열심히 전교한다면, 그때 주님께 대한
사랑한다는 고백은 진실한 우리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복음선포의 전제조건.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기쁘지 아니한데 기쁜소식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2013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 2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루카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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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마음은 소식의 내용에 따라 발걸음이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다.
또한 소식에 대한 진실성에 대한 확신 여부에 따라 발걸음의 무게도
달라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주라 하신다.
당시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말 그대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전하라 하신 소식이 기쁜 소식 즉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마귀를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주라는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런 제자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돌아와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예수님께 자랑하듯 보고한 이들도
있었고, 도중에 견디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그렇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첫째, 복음을 말 그대로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 이들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별 감흥이 없고 별 기쁨의 소식으로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대충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둘째, 전하고자 하는 소식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전하는 이에게 힘이 생긴다.
거짓 이야기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이야기만으로는 모든 것에 앞서 그 소식을
전하고자 투신할 수는 없다.
내가 사람들에게 들고 가는 이 소식이 진실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파견을 명하신 분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사제가 성품성사(聖品聖事)로 주어진 은사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성사를 집전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에 대한 신뢰 없이, 예수님께서 소개하신 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고, 그에 따른 증거를 어떻게 보일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는 복음 선포라는 사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모자람이나 불완전함이 복음선포를 위한 조건의 결핍사유가
아니라, 복음을 복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불확신, 예수님에 대한 불완전한 신뢰가 결핍사유가 된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복음으로 인해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해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성령께 맡겨드리면 된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
그들의 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2013년 다해 9월25일
명동의 밤거리는 아주 분주합니다. 중국 관광객, 일본 관광객, 서양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명동을
찾고 있습니다. 명동에는 볼거리, 먹을거리, 구경거리가 많습니다.
볼거리는 화장품 가게, 핸드론 액세서리 가게, 가방가게, 신발가게
등이 있습니다. 먹을거리는 각종 길거리 음식이 있습니다. 문어와
오징어, 키다리 감자, 핫바, 소시지, 뽑기, 호떡, 사탕수수 주스,
레몬에이드, 떡볶이 등이 있습니다. 구경거리는 각종 장난감을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은 입체 카드를 팔기도 합니다. 제가 명동을
산책하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모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중국어와 일본어로 손님을
유치합니다. 길거리의 음식을 파는 분들도 외국어를 간단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잠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저렇게 용기를
내서, 저렇게 적극적으로, 저렇게 신명나게 나에게 주어진 직무를
하고 있었나?
사제서품을 받으면 교구장님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임지로 떠나게 됩니다.
저는 다양한 일을 하였습니다. 본당 사목, 사목국, 청소년국, 해외연수,
중견사제 연수 지금은 성소국입니다. 처음 본당에 나가면서 느끼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많은 분들이 사제를 존중해 주시면서 경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아직
젊은 사제에게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께서도 경어를 사용해 주셨습니다.
성사를 집전하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로 사제들이 이것을 착각하고 본인이 잘나서 그러줄 알기도
하기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 자리에 앉으면 상석에 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상석은 연장자가
앉습니다. 때로는 직분이 높은 사람이 앉게 됩니다. 그래서 일반 사회나
공직사회에서 자리를 정하는 것은 격식의 문제이고, 신중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마를 드는 사람은 직분이 높지 않아도 그 가마에 앉은 분의
직분 때문에 맨 앞에 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마꾼의 능력
때문은 아닙니다. 사제들도 예수님을 가마에 모시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셋째, 한 마디를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준비된 말을 하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미처 준비하지 않았던 장소에서도 말을 하게 됩니다. 본당의
단체들은 신부님께서 방문 하시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그런
자리에서 신부님들은 훈화와 강복을 드리게 됩니다. 환영미사나 축일
축하미사는 젊은 사제들에게는 어색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넷째, 신부님들은 그런 일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을 하십니다. 본당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식당에서 설거지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담배꽁초를 줍기도 하고, 아이들이 쓴 칠판의 낙서를 지우기도
합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기도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신자 분들은 신부님께서는 예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면
안 되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의
‘주특기’이셨습니다.
다섯째, 성지순례를 가거나, 여행을 가면 신부님을 위한 자리를 따로
배려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조용히 기도를 해야 하고, 신자들과 함께
지내시면 불편하기 때문에 그러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제들을
위한 배려이지, 사제들의 특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고,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하면서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과가 없다 할지라도 슬퍼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 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서 선포했는지,
아픈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했는지, 또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작은 실패와 실수에 움츠려들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2013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5간 수요일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국위를 선양하는 금메달리스트들과 격하시키는 미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술 실력 품성 등과 성형 옷차림 귀금속 장신구로 꾸민 사람 말입니다.
숨어있는 것으로 가꾼 사람들과 보이는 것으로 치례한 사람들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여 모인 행사장과 상점 오픈하는 세리모니도 그래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람과 세속사회를 위한 사람의 차이도 그렇고요.
보이는 것으로 치레해 알리기보다 숨은 힘으로 알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셨다.‘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은과 금이 없소."
2013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복음 : 루카 9,1-6
< "나는 은과 금이 없소." >
교황 인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본 교황은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그러자 아퀴나스가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으라’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첫 기적을 행한
것을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성전에 예배하러 갈 때 한 병자가 적선을 청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나는 은과 금이 없소. 그러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은 베드로가 교회의 수장이요 대표로서 교회의 본질이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즉 교회는 재물이 없어야, 영적인 기적의
힘이 흘러넘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절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금과 은은 물론이요 여행 보따리도 빵도 여벌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영과 육은 서로 반대기 때문에,
육을 만족시키는 것을 챙기다보면 자동적으로 영적인 힘은 감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금과 은이 있었다면 적선을 하면 했지,
동시에 기적을 행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 도미니코의 생애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도미니코가
살았던 12, 13세기 프랑스 남부에는 많은 이단들이 창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이단들을 물리치기 위해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을
파견하여 그들의 그릇된 교리에 맞섰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의
정통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사제들의 말은 잘 듣지 않고 이단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이들의 삶은 가난했지만, 반면 이단에 반대하여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설교하던 이들은 말을 타고 시종들을 거느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중세 때의 교회의 권위와 부는 하늘을 찔렀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설교의 내용이 정통이든 이단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의 가난한 삶을 공감하는 가난한 이단들이 가르치는 것을 더
잘 흡수했던 것입니다.
그때 성 도미니코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증거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걸어서 돌아다니고 탁발로 생활하며 설교를
시작했고, 그런 정신을 지닌 수도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런 면에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분은 교황으로 당선된 뒤에도 버스를 타시기도 하시고,
광장에 나가 스스럼없이 사람을 만나시며, 소외된 자를 먼저 찾아
발에 입 맞추십니다. 그리고 마피아의 돈세탁장이라는 바티칸 은행을
개혁하시고자 하시며, 당신은 관저가 아닌 바티칸 내의 호텔에
머무신다고 하십니다. 이런 그분의 가난함과 소탈함, 그리고 겸손함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도 큰 호감을 주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아르헨티나는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나라에서 이런 법이 통과한
것은 추기경을 비롯한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추기경님은 현 교황님이셨습니다.
이에 추기경님은 나라의 결정에 한 치도 물러나지 않으며 그런
나라에서 나오는 돈은 받지 않겠다면 모든 지원을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당신 자신은 물론 다른 사제들까지 큰 재정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추기경님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계셨다면 당당히
가톨릭 교리와 어긋나는 법을 통과시킨 나라의 보조금을 거부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에서 나오는 영적인 힘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교황님은 그 가난함 때문에 정의롭지 않음과 타협하지 않으려 하시고,
또 그 가난함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시는 것입니다.
가난은 예수님만 있으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사제가 제물을 쫓는다면 영적인 것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난해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교구사제들이 가난서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부터라도 이 가난이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증거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어제의 그는 어제의 강물에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루카 9,1-6
<어제의 그는 어제의 강물에>
인간이란 존재,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연구하고 또 연구할수록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놀랍게도 인간은 얼마만큼 노력하는가 여하에
따라 하느님 가까이 높이높이 올라갈 수도 있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헤어
나올 수 없는 심연의 수렁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근원적인 한계, 근본적인 결핍을 전제로 하고 이 한 세상 살아갑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제가 자주 후회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토록 너나할 것 없이 한계와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관계 안에서의 상처는
필연적입니다.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며 원만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열이라면 그 가운데 7~8명과는
그럭저럭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명 중에는 나와
사사건건 맞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 두 세 명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 소위
‘웬수’같은 사람도 한명씩 끼어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런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존재하기에 더 큰
괴로움으로 다가오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문제없는 7~8명은 뒷전이고 오로지 그 한
두 명과의 관계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 관계와 맞서느라 삶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온 종일 그와 티격태격하느라 좋은 시절
다 지나갑니다.
이럴 때 정말 필요한 영적 노력이 있습니다. 털고 가는 일입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맞지
않는 인간들로 인해 겪게 될 고통을 예견하시며 정 안되면 털어버릴
것을 당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라.”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정말 원치 않은 장애물, 특히 존재로서의 십자가,
이웃을 통해 다가오는 신비로서의 십자가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고 점점 무거워져만 갑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내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불편한 관계에 집착하고 매달리다보니
활력 있는 기도생활도 충만한 영적 생활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정말 중요한 노력이 털고 가는 노력입니다. 그를 포기하고 기도
대상에서 제외시켜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하느님께 지속적으로
봉헌하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그를 어제란 강물에 떠나보내고, 오늘은
새로운 그로 받아들이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그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아름다운 대상, 소중한 존재, 정말 중요한 가치가
너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우리는 너무나 작은 것에 매여
큰 것을 놓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안타까워하실 일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에게
나는 기쁨 그리고 슬픔 둘 다 겪으면서
인생의 길을 따라 여행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희망으로 넘쳐왔으니
그 까닭은
내 곁에 우리의 주님과 그분의 어머니가 되시는
성모 마리아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주님이 내게 다시 선택하도록 허락하신다면
나는 다른 길이 아닌 바로 이 길을 다시 선택할 것이다.
나는 행복하였고 기쁨으로 충만하였으니
그 까닭은
내가 주님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구엔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추기경이
감옥에서 백성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그분의 활동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2013년 다해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그분의 활동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루카 9,1-6)
첫 본당신부로 사목할 때 일입니다. 지하 교리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령기도회 신자들이 큰 소리로 통성기도와 신령한 언어로
기도하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올라 오셨을 때 개구리우는
소리로 기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998년 성령의 해를 맞아 사제연례피정을 성직자 수도자를 위한
성령묵상회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4박5일간의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저도 신령한 언어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기도회 신자들이
제가 피정하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부터 성경말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에 대하여 배운 것이 학문적인 요소가 많았다면, 성령묵상회를
통해서 체험한 신앙은 주님은 살아계시고 당신이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내 마음을 열어놓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일에 대하여 관대해지기 시작하니까 주님께서 많은
은사들을 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에가 아니라 조금씩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십니다.
사제는 서품을 받을 때 이미 모든 은사들을 다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기도하고 하느님의 그 크신 은총에 대하여 관대한 마음을 갖고
믿고 의탁하며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은사가 더 크게 들어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제 자신이 자신 안에 얼마나 큰 권능이 있는지를 깨닫고, 또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하시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으신지 안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영에 시달려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
합니다. 상담을 하다보면 많은 이들이 우울증이나 육체적 정신적 병에
시달리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오래 다녀도 잘 고쳐지지도
않는 병도 많습니다. 일일이 다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 찬양치유미사를 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치유 미사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찬미드리고,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 미사 강론시간에 나의 인격체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청하고, 또 사람들이 주님께 더 큰 믿음으로 다가가도록 용기를 주고,
주님의 현존을 믿도록 인도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활동하심을 더 많이 믿고, 주님의 위대하신 능력에 더 관대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들 마음 안에 함께하시고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자기 자신을 열어드리고, 그분의 현존을 믿고 느끼며
그분의 활동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축복의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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