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무경칠서 武經七書.
사로국의 연락단원들이 우문청아와 함께 초원에 도착하자, 묵황야차 소왕의 군사 君師 박지형은 바쁘다.
연락단원들을 먼저 원화단 源花團에 편입시킨 후, 별도로 궁술에 뛰어난 자, 창술에 능통한 자,
도검을 잘 다루는 자들을 선별하여 친위대 親衛隊를 조직하였다.
궁수, 창수, 도검수를 각 열 명씩 배분하여 삼십 명을 한 조로 엮었다.
친위대는 일조 一組 즉, 삼십 명씩, 하루 삼 교대 交代로 소왕 이중부 곁을 상시 常時 에워싸고 있다.
전시나 비상시에는 친위대 병사를 배로 늘렸다.
북 흉노를 이끌고 있는 핵심 인물에 대한 당연한 대우다.
사로국 출신의 원화단 병사의 인원이 이제는 이 백여 명에 달하였다.
사로국에서 초원으로 온 연락병은 이보다 훨씬 많았지만, 일부는 사로국으로 되돌아가
군 軍에서 요직 要職을 맡고 있었다.
나이가 젊은 병사라도 초원에 연락책으로 한 번이라도 다녀오면, 십장 什長의 직책을 부여하였다.
장거리를 이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고생한 노고 勞苦를 높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초원에서 수년을 복무한 젊은이들은 먼저 승마술과 궁술 실력이 월등하였으며, 초원에서 잦은 전투로
전쟁 경험이 풍부하여, 국경선을 지키는 일선 一線 장수들이 선호 選好하고 우대해 주었다.
그러니 초원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군부 軍部에서 출세를 보장받는 지름길이다.
책임자로서 두 번 왕래하게 되면, 곧바로 백부장으로 승진될 수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해외 유학 留學을 다녀온 것처럼, 힘세고 몸이 날렵한 젊은 장정들의 용기와 그 다양한 경험을
인정받으니, 사로국에서도 초원으로 가는 연락병을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다.
드넓은 초원에서 생활하는 흉노인들의 의식이 반영된 제도라 볼 수 있다.
초원의 원시 原始 속에서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생활하고, 자연 自然과 합일화 合一化시키는,
이러한 전통이 후일 원화제 原花制와 풍월주 風月主를 배출 輩出시키는 등 인재 발굴 人才 發掘의
용광로 鎔鑛爐인 화랑도 花郞徒의 효시 嚆矢가 되었다.
그렇게 원거리를 이동하며 낯선 다른 지역으로 자주 다니며, 곳곳의 지리 地理에 익숙하게 되었고,
지형 地形 활용도를 함께 연구하고 전투 발생 시에는 그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는
그 과정을 그들 스스로 즐기게 되었다.
친위대는 묵황야차 소왕 이중부 기병 騎兵의 노른자위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군사 軍師 탁발규는 그동안 심혈 心血을 기울어 작성한 죽간 竹簡을 묵황야차 이중부 소왕에게 보고하였다.
죽간의 제목이 ‘墨荒兵書 묵황병서’였다.
죽간을 받은 이중부가 묻는다.
“이것이 무었이오?”
“병서입니다”
“그런데, 왜 제목이 ‘묵황병서’로 되어있소?”
“그동안 소왕야께서 후한군과 남 흉노군과 전투하고, 승리한 내용을 간략히 기록한 자료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승전보 勝戰譜’라 하는 것이 옳지 않소?”
“전투 기록이기도 하지만, 병가 兵家 입장에서 전략, 전술에 요점을 두고 작성한 것입니다”
“아하. 그럼, 후대 後代에 전달하기 위해, 작성한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흉노인들은 글을 모르니, 무용지물 無用之物 아니겠소?”
“그럴수록 기록이 더 중요하지요”
“그게 무슨 뜻이요?”
“구전 口傳은 한계 限界가 있으니, 기록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말은 맞지만, 기록이 있다고 한들, 글을 모르면 허사 虛事 아니요?”
“두메산골 오지 奧地 출신인 제가 글을 알고 있듯이, 몇몇은 스스로 글을 깨우치는 후배도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무리 중에 몇 명이라도 글을 아는 자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 문자도 알기 쉬운
비교적 단순한 글자를 사용하였으며, 내용도 간결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죽간을 몇 번 들추어 보며, 병서 내용을 대충 훑어본 이중부는 병법을 축약 縮約시킨,
읽기 편하고 쉽게 이해되는 그 간결한 내용에 탄복 歎服을 한다.
“알았소, 수고 하였소”
“감사합니다”
“일단, 우리 무리 중에 글을 아는 자들에게 익히도록 합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전쟁 전문 서적으로는 무경칠서 武經七書가 있는데, 시대적 순서 時代的 順序가 아니라,
유명세 有名稅에 따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손자병법 孫子兵法. - 손무가 저술.
2. 오자병법 吳子兵法. - 오기가 집필하였다.
'무능한 지휘자는 적보다 무섭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위의 두 병법서가 워낙 유명 有名하여, 후대 後代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독일
의 비스마르크도 그 내용을 읽어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두 병서를 합하여 ‘손오 병법 孫吳 兵法’이라 칭하기도 한다.
3. 육도 六韜. - 태공망 강상이 쓴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4. 삼략 三略. - 황석공이 쓴 병법서이다. 후에 장량에게 넘겨주었다.
5. 사마법 司馬法. -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장 사마양저의 용병술을 전국시대에 제 나라 위왕(威王)이
정리한 병법서. 일부인 5편만 전하고 있다.
6. 위료자 尉繚子. - 진시황의 병법가 위료가 저작한 병법서이다.
7. 이위공문대 李衛公問對. - 당의 개국공신 이정이 자신과 당태종 이세민이 병법
에 관하여 질의 문답한 것을 기록한 병법서이다.
특히, 손자병법은 책의 체계적인 구성이나 서술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세련된 기법으로
전략과 전술의 현실성이 뛰어난 최고의 병서로 평가받고 있었다.
손자병법은 총 6,600여 자로 구성된 13편의 죽간 竹簡 책자인데,
후에 삼국지의 조조가 그 내용을 간추려 13편을 새로이 엮었다.
무경칠서 외의 기타 병서.
* 김해병서 金海兵書. - 지금은 실전 失傳되어 버렸으나, 고구려 연개소문이 저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손빈병법 孫臏兵法. - 손무의 후손 손빈이 쓴 것이다. 손자병법의 저자가 손빈이 라는 설도 존재하였지만,
1972년 산둥성 임기현에서 손자병법과 손빈 병법 두 가지의 죽간이 함께 출토되어,
각 저자가 다른 것으로 판명났다.
* 제갈량집 諸葛亮輯. - 삼국지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쓴 병법서이다.
* 백전기략 百戰奇略. - 명나라 개국공신 유백온이 지은 병법서이다.
* 삼십육계 三十六計. - 만들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느 한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시대에 이루어진 것도 아닌, 여러 가지 고사 故事를 17세기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기에 수집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송 宋 무제 武帝의
개국공신 단도제 檀道濟가 편집 編輯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병법 兵法의 전술 36개를 여섯 항목으로 분류하여 편집한 것이다.
36계는 승전계, 적전계, 공전계, 혼전계, 병전계, 패전계의 총 6개의 큰 분류에서 각각 6개의 계책이
실례 實例를 제시하며, 구체적으로 서술 敍述 되어있다.
제1계 計: 만천과해(瞞天過海 :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넌다)로 부터 시작되어,
제36계 計: 주위상(走爲上 : 형세가 불리할 때는 도망치는 것도 뛰어난 상책 上策의 전술이다.)으로 마무리 된다.
시중 時衆에서 흔히 사용하는
“안 될 때는 36계 計 줄행랑이 최고다”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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