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721. 묵상글 들 ( 연중 16주 수요일-불평할 시간에 기도하라. 등 )
----------------------------------------------------
21072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6주 수요일-불평할 시간에 기도하라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오늘 탈출기는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불평을 하는 얘기이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불평을 들어주시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온 공동체를 들고일어나게한 것입니까?
먹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고작 먹는 문제로 온 공동체가 들고일어났냐며
이스라엘 공동체가 참으로 천박하다고 폄훼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고상한 척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먹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하는 것을 누가 천박하다고 깔본다면
그는 대단히 성인 경지에 오른 사람이거나 굶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그의 태도는 매우 철부지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일 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먹는 것 때문에 불만이 있고 불평도 하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크게 문제 삼기보다는
다른 것 때문에 오늘 문제 삼고 싶습니다.
첫째는 배고픈 것 때문에 이집트가 오히려 좋았다고 하고
더 나아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점입니다.
배만 부를 수 있다면 노예도 좋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배고픈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것을
배고프지 않기 위해 노예가 되겠다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는 욕망을 위해 인간의 고귀함을 포기하는 것과 비슷하게
먹고 사는 것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평을 하느님이 아닌 모세와 아론에게 터트리는 점입니다.
배고프니 배고프다고 아우성칠 수 있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우성과 불평이 같은 인간에게 향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너무 잔인할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너무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하거나 죄를 지어서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누구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것이 아닌데도 신이 아닌 인간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잔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과녁이 잘못된 거라는 말입니다.
제가 관구장을 할 때 미성숙한 형제들은 어떤 문제의 책임과 해결을
다 저에게 넘기는데 저도 신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모든 문제를 다 예방할 수 없고 다 해결할 수 없지요.
반면에 성숙한 형제들은 저의 한계를 인정해줍니다.
아니, 저나 자신들의 인간 공통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성숙에서 더 나아가 신앙적으로도 성숙한 형제들은 그렇기에
같은 인간에게 화살을 돌리고 인간에게서 해결책을 찾지 않고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해결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인간에게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평만 하는 것은 전향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닐뿐더러
하느님에게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인간에서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불평할 시간에 기도를 함을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우리입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오복음> 13장에서, 예수님서는 하늘나라의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 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요,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첫째>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서 밭을 구별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며,
<둘째>로는 그 씨앗은 열매를 맺고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이사 55,11),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밭을 잘 가꾸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
그렇다면,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은 땅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이 뿌려지기 전의 땅의 상태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진 후에 땅을 갈고 가꾸는 것에 의해 그 땅의 성질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의 씨를 가꾸는 농사법’은 먼저 밭을 잘 쟁기질 한 다음에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땅이든 상관없이 먼저 씨가 뿌려진 다음에 그 밭이 쟁기질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러니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채 여전히 묻혀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한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며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 열매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보다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4)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씨앗의 모시고 살고, 씨앗을 기르며 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아멘.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마음의 밭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좋은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 열매는 하느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4. 뿌린 씨 전 부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5.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7.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 시나이 광야로 탈출한 히브리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먹을 음식이었습니다. 장정만도 60만 명이 넘었다고 했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만 명이 훨씬 넘었을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남감한 노릇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이 없이 파라오와 이집트 군대에 쫒겨서 그야말로 무작정 빠져나온 지경이었으니, 굶주리게 된 히브리인들이 불평을 털어 놓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당신의 배려에 의해서만 먹고 살 수 있게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그분의 대책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탈출 16,4.11). 이것이 만나였고, 40년 동안 그들을 먹여 살린 음식이었습니다.
이 고사(古事)를 기억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중이 굶주리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만나의 기적과 빵의 기적을 합하여 결정적인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하느님으로 인해 살 것이고, 먹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요한 6, 35.41.48.51.58). 이 말씀은 당신의 생애를 두고 하신 말씀이고, 성체성사로 인하여 당시 군중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나 그 후 교회의 역사에서나 그리고 오늘날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길바닥에 떨어졌다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이감이 되어 버린 씨앗처럼, 성체성사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무신론자들이 제일 많고 또 어쩌어찌 해서 전해 듣고도 알아듣지 못하는 타 교파 그리스도인들, 타종교인들도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머리로는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깨달음이 없는 가톨릭 신자들도 세례자의 80% 이상입니다. 게다가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처럼, 성체성사가 중요한지는 알겠는데 온전히 투신하지 못하고 양다리 걸치는 이들도 적지만 있습니다. 결국 성체성사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작으나마 거룩한 변화를 자신의 삶에서 이룩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남습니다. ‘가톨릭 아나빔’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남은 자들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중핵입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좌 신부로 지내면서 사제는 돈 문제에 신경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본당 신부님께서 “사제는 본당 재정을 잘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신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헌금한 돈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시설 공사도 거뜬히 하셨습니다. 꼭 필요한 비용은 지출하지만 알뜰하게 재정 관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로 기억되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IMF는 저의 가족에게도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말을 귀담아 들었고, 지금까지 금전출납부를 쓰고 있습니다. 금전출납부를 보면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도박에 쓰는 돈은 어쩌면 길가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트지만 해가 나면 말라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위험 부담이 큰 투기가 돌밭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돈 때문에 친한 친구가 갈라지기도 하고, 돈 때문에 형제간이 다투기도 하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다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는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성껏 헌금해 주셨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되는 돈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돈은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쌓는 보화가 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생각합니다. 좋은 씨앗은 비록 땅이 거친 황무지라도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나쁜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어도 싹이 트지 않는 것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거친 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땅으로만 가서 선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은 거친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전대에 돈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겉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784년 조선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분명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벼슬을 포기했습니다. 신앙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신앙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생명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럼에도 씨앗은 힘들게 뿌리를 내렸고, 싹이 텄습니다. 200년이 되는 1984년에는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103위 순교자들을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230년이 되는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오셔서 124위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2021년 한국은 분명 좋은 땅입니다. 박해도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원하면 언제든지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씨앗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이라는 가시덤불에 막혀서 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좋은 땅을 찾습니다. 그런 곳을 블루오션(Blue Ocean)이라고 합니다. 좋은 땅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좋은 땅에서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척박한 땅이라도 그곳을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련과 박해와 죽음이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성인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은 땅이라면 감사하면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시밭길이라면 그곳을 옥토로 만들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땅은 선택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넷플릭스 창업자 마크 랜돌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밝힌 자신의 아버지가 적어준 8가지 성공지침이 있습니다.
1) 시키는 일보다 최소 10% 이상은 더 해라.
2) 네가 모르는 것에 대해 사실처럼 말하지 마라.
3)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예의를 갖춰라.
4) 트집 잡거나 불평하지 마라. 진지하게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유지하라.
5) 결정을 두려워하지 마라.
6) 가능하다면 숫자로 표현하라.
7) 마음을 열어두되 끊임없이 의심하라.
8) 시간을 엄수하라.
모두가 우리에게 와닿는 지침입니다. 사실 이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지침들이 크게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알면서도 실천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한 노력을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공을 바라는 요행만을 주님께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농부는 11월 초순 무렵에 단비가 내리면 먼저 밭에 밀이나 보리를 훌훌 뿌리고서 밭을 갈게 됩니다. 먼저 밭을 갈고서 이랑에 씨앗을 뿌리는 우리 농사법과는 정반대이지요. 그런데 씨앗이 길에 떨어질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4월부터 10월 사이의 건조기에 사람들이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다니다 보면 길이 날 수도 있고, 밭 가에 길이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갈릴래아 평원을 빼고 이스라엘 전체가 온통 석회석투성이 돌밭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쟁기는 돌과 돌 사이를 갈아야 하니까 우리나라보다 쟁기의 날이 훨씬 좁습니다. 씨앗이 가시나무 속에 떨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들판에 가득한 가시 돋친 잡초를 연상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이유를 생각하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비유였습니다. 당시는 적대자들이 반대하고 심지어 제자 중에도 반대자가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길가, 돌밭, 가시나무의 상황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씨를 뿌린다고 말이지요.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은 바로 여러분이 꿈꿔오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오프라 윈프리).
---------------------
본다.
병아리의 부화 직후, 병아리의 항문과 날개만 보고서 그 암수를 구별하는 사람을 ‘병아리 감별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정확도가 (6개월 이상 감별하면) 98%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구별하는 시간은 한 마리당 1초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초보 감별사는 이를 어떻게 배우는 것일까요? 사실 별거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명령한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보다 보면 암수를 자연스럽게 구별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본다’라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봐야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딱 한 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또 보고…. 계속해서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을 보고 있습니까?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 묵묵히, 한결같이 씨뿌리는 정주의 삶 -
오늘부터 마태복음 13장의 시작입니다. 13장 58절까지 긴 장은 전부 일곱 가지 비유들로 이루어졌습니다. 1.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2.가라지의 비유, 3.겨자씨의 비유, 4.누룩의 비유, 5.보물 비유, 6.진주 장사꾼의 비유, 7.그물의 비유 일곱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비유의 주체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분명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200주년 성서주석에서 마태복은 13장에 관한 아름다운 개괄적 설명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여기 일곱가지 비유는 일차적으로 하늘 나라의 성격, 곧 하느님 통치의 성격을 전하는 상징적 이야기들이다(신론적 의미). 비유는 저마다 하늘 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풍경화처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이 비유들은 부차적으로 하늘 나라의 선포자요 구현자이신 예수님의 처신을 암시하는 상징적 이야기들이기도 하다(그리스도론적 의미).
예수님이야말로 어는 누구보다도 하느님 아빠를 깊이 체험하고 맑게 반사하는 분이 아니신가. 아니 자비 지극하신 임의 화신이 아니신가! 그러니 하늘 나라 비유들에는 함축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신상발언이기도 하다.‘
참 적절한 설명입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모든 비유가 일상의 평범한 일들에서 하늘 나라에 관한 삶의 깊은 지혜를 길어 올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평생 화두가, 평생 꿈이, 평생 비전이, 평생 희망이 하늘 나라였습니다. 바로 이 생생한 하늘 나라의 꿈이 한결같은 희망과 믿음의 원천이었습니다.
민심이 천심이라 합니다. 어느 이념도 민생의 밥을 이기지 못합니다. 결국 정치도 경제의 밥으로 직결됩니다. 밥은 하늘이라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념이 좋아도 결코 밥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을 이기는 꿈이, 비전이 있으니 하늘 나라의 꿈이자 비전입니다. 요즘 대선 주자들의 공통적인 결함은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지도자든 종교지도자든 우선적 자질이 신뢰와 비전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늘 나라의 비전을, 즉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의 하늘 나라의 꿈을 지니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하늘 나라 비유가 참 아름답고 심오합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물론 참 농부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이런 한결같은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자세는 하느님께 대한 철두철미한 신뢰와 희망, 사랑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야 말로 말그대로 신망애信望愛의 예수님이자 그를 따르는 참 제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절망은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그리고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묵묵히 한결같이 씨뿌리는 사람, 전혀 불평이나 불만이 없어 보입니다.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딱히 요구하는 바도 없이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묵묵히 책임을 다할 뿐입니다. ‘1.피하지 않는 것, 2.요구하지 않는 것’ 참된 영성의 표지입니다. 바로 이런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실한 삶자체는 결과에 상관없이 그 과정 자체가 성공입니다. 결과보다는 삶전체의 과정을 중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이런 삶 자체가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수도 정주 영성이 목표로 하는 삶입니다. 그러니 씨뿌리는 사람은 그대로 우리 정주 수도승의 이상적 모습입니다. 어제의 깨달음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강론 서두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수도공동체입니다. 제 가장 가까이 있는, 제 평생 몸담고 살아가는, 제 평생 보고 배워야 할 가장 큰 스승인 수도공동체입니다. 수도공동체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새벽 강론 쓰기를 마친 후, 산책기도중 벼락같은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내 가장 큰 스승은 내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이 말마디로 강론 제목을 삼았고, 게시판에 써서 붙여 놨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스승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통해 은연중 드러나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요, 우리의 일상의 삶 전체가 스승이 됩니다.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둘은 ‘감사’와 ‘부끄러움’입니다. 공동체를 보면 감사요 자신을 보면 부끄러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렉시오 디비나 할 책은 하루하루 ‘내 삶의 책 성서’입니다.
삶은, 마음은 날씨와 같습니다. 한결같지 않습니다. 이에 관계없이 일체의 원망怨望, 절망絶望, 실망失望의 삼망三望없이 씨뿌리는 사람의 한곁같은 삶의 자세로 살면, 바로 이것이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께 날로 희망의 뿌리를, 신뢰의 뿌리를 내리며 견뎌내고 버텨내는 끝없는 기다림의 인내가 있을 때 가능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참으로 상황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깊고, 넓고, 긴’ 하느님의 시야가 필요합니다. 단기적으로 볼 때 실패인 듯 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성공인생입니다. 살다 보면 최선을 다해도 길바닥 같은 상황도, 돌밭같은 상황도, 가시덤불 같은 상황의 실패도 있지만 궁극에는 좋은 땅의 성공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의 처분에 맡기는 삶, 실패인 듯 하나 결국 성공의 삶이니 깊이 경청하여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묵묵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했던 우리 수도공동체 정주의 삶은 세상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숱한 열매들로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희망과 신뢰의 사람은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과는 너무 대조적인 탈출기의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온갖 시중을 다드는 참 부지런하고 참을성 많으시고 착한 하느님이요 그의 종 모세입니다. 무엇보다 영혼에 치명적인 것이 ‘무지無知의 병’에 이은 ‘망각忘却의 병’입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셨던 하느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까맣게 잊고 당장의 곤궁한 현실에 원망과 불평을 하느님과 모세에게 쏟아 놓고 과거의 이집트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신뢰는 얼마나 허약한지요!
베네딕도 성인이 가장 혐오한 것이 공동체 형제들의 불평이었습니다. 무려 투덜거리며 불평하지 말라는 말(murmuratio)이 규칙서에 11회 나옵니다. 규칙서 제40장 ‘음료의 분량에 대하여’라는 항목의 결론은 다음 짧은 말마디로 끝납니다. “무엇보다도 이점을 권하는 바이니, 불평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의 자화상이자 우리 정주 수도승의 자화상입니다.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묵묵히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책임을 다하는 자세요 더불어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씨뿌리는 정주의 삶, 하늘 나라의 삶을 잘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영육의 양식을 어떻게 얻는지 보여 주십니다.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3)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림에 직면하자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파스카의 지향과 목적까지 왜곡한, 도를 넘긴 원망이긴 한데, 극한의 배고픔을 아는 이라면 그들의 절규를 그저 불평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5)
그들의 굶주림이 탐욕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기에 주님께서 기꺼이 해결해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진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들게 하시고 광야 위에 아침마다 이슬과 함께 만나를 뿌려 주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육적 생명을 지탱하는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는 그들이 머무르는 광야 도처에 내립니다. 백성이 있는 곳에 만나가 있으니 경쟁하지 않아도 모두가 거둬들여 양식을 삼을 수 있습니다. 만나는 욕심껏 많이 거두어도 쌓아둘 수 없고, 적은 듯 거두어도 모자라지 않는 신비의 양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일용할 양식을 이런식으로 주신 건 아닐까요?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먹으면 누구에게도 넘치지 않고 또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 충분한 양으로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탐욕스런 이들이 공공의 양식을 약탈하고 축재하여 힘과 무기로 삼아 부를 누리면서 훨씬 더 많은 대다수의 다른 한 쪽이 굶주리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수님은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땅을 네 상태로 나누십니다. 만나가 광야 도처에 깔리듯 말씀의 씨도 땅을 가리지 않고 뿌려지지요. 그런데 여기서 '과연 나는 길바닥인가, 돌밭인가' 고민하고 자책에 빠지는 순간 묵상을 길을 잃어버립니다. 주님의 마음을 만나는 기도가 아니라 성찰과 반성, 실망으로 끝나버릴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누구는 길바닥이고 누구는 좋은 땅이 아니라, 한 존재 안에도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혼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상태에 따라 이런 조건들이 번갈아 위세를 떨치며 존재를 장악하기도 하지요. 우리의 육신은 물론 이성과 믿음, 감정 등이 완전하지 못해서 늘 최상의 상태, 가장 좋은 조건에만 머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말씀은 일단 뿌려집니다. 씨 뿌리는 분, 주님께서 조건을 붙이지 않고 당신을 우리에게 무상으로 던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내게 거부당해 튕겨나가지 않도록, 영혼이 척박한 상태든 비옥한 상태든 일단 어떻게든 심겨지도록, 적어도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을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영혼이 좋은 땅의 상태일 때 심겨진 말씀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싹 튀우지 못한 씨앗의 실패와 유실을 만회하고도 남겠지요. 이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양식의 신비입니다.
사실 육적 양식이나 영적 양식이나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그런데 물리적 양식인 재화를 신비의 양식 만나처럼 모두가 균등히 누릴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 쪽은 독점으로 쌓아둔 채 썩고 과용과 남용으로 병드는 반면 다른 한 쪽은 굶주려서 스러져가니 말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양식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은 귀를 활짝 열어 경청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머무르며 손을 활짝 열어 실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열매를 맺지요.
영의 원리도 육의 원리처럼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긴"(마태 13,12) 하지만, 영혼의 성장과 풍요가 타인을 빈곤하게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명백히 다릅니다. 오히려 영적 양식에 대한 열성으로 맺은 열매를 통해 교회와 세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복음 환호송)
오늘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십니다. 말씀이신 분이 말씀을 전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만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말씀을 품는가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달라지겠지요. 주님께서 우리 존재를 채워주시려 뿌리시는 영육의 양식을 겸손히, 은혜로이, 감사히 받아 풍성한 열매 맺으기를 기원합니다. 이 양식은 우리만이 아니라 형제와 이웃과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살게 할 귀한 선물입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여 든 군중에게,
씨가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지 않고,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비유 끝에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들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땀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들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들을 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교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귀는 오로지 세속적인 것에만 열려져 있었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만 열려져 있었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숨은 소리'를 들으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강론이나 강의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단순하게 잘 들으려면, 그리고 하느님 말씀 안에 숨겨져 있는 숨은 소리를 잘 들으려면, 그것을 잘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있어야 합니다.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들에만 갇혀 있으면,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더라도 그것을 세속적인 소리로 듣게 됩니다.
오늘도, 다양하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잘 듣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자'가 됩시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삶 속의 성경.”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성서 사도직의 소임을 맡으면서 언제나 마음에 품고 사는 표현입니다. 성경을 머리로만 배우고 익혔던 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가슴으로 삶으로 느끼고 다가가지 못하였습니다. 성서 사도직 소임을 하면서 성경을 통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성경, 나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만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오 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단어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렵고 난해한 신학적 단어나, 율법에 나와 있는 개념적 지식으로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씨 뿌리는 일, 수확하는 일, 빵 만드는 일, 고기 잡는 일, 물건 파는 일 등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서 하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비유 말씀은 어쩌면 사람들의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의 언어를 듣게 하시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 속에서 쉬이 지나치고, 또 잊고 살았던 하늘 나라를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비추어 보고 또한 어떻게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은 우리의 몫입니다. 땅을 갈아엎고 돌을 골라낸 뒤 흙을 부드럽게 하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 햇볕이 잘 드는 땅으로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의 신비를 실현하기를, 나의 마음과 삶을 햇볕이 잘 드는 비옥한 밭으로 가꾸기를 기도합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지, 얼마 되지 않는 수확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 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자라야 할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이라고 살 수 있도록 매일 매 순간 노력하자.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열매는 백배가 되었다."(마태 13, 8)
열매 앞에서
겸손을 배운다.
그냥 이루어지는
열매란 없다.
열매는
여정을
필요로 한다.
열매로
새로운 세상을
우리는
보게된다.
익숙해져 있던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의 삶을
이제는 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움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씨앗이
죽지 않고서는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씨앗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결국
씨앗과 열매는
하나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씨앗 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참된 기쁨이다.
씨앗은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땅에
과감히
뿌리는 것이다.
삶이란 밭에
씨를 뿌리는
실천이 바로
살아있는
우리들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은
도전이며
모험이다.
확실하지 않기에
희망하고
두려워하기에
간절히 기도한다.
말씀의 씨앗은
깨달음의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씨앗은
간절하기에
열매를 맺는다.
씨앗의
엄청난 신비는
우리를
좋은 땅이
되게한다.
좋은 열매를
맺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씨앗이
이미 뿌려졌다.
간절함과
부서짐과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할 뿐이다.
씨앗은
십자가의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씨앗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이라도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9).”
1)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심판 때에 심판을 받는 사람의 최종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처음부터 ‘길, 돌밭, 가시덤불’에 씨를 뿌린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냥 ‘백지 상태’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 태어날 때부터 ‘좋은 땅’인 사람은 없고,
또 태어날 때부터 ‘나쁜 땅’인 사람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백지 상태인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누구는 끊임없이 노력해서
성인이 되고, 누구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악인이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지만,
즉 처음부터 ‘좋은 땅’이었던 분이지만, 그래도 평생 꾸준히 노력해서
그 ‘좋은 땅’의 상태를 유지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승천하신 것은 아닙니다.)
2)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심판을 받을 때의 최종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좋은 땅이라고 해도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되고,
또 ‘지금’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라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는 동안에는 성인이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타락할 수도 있고,
도저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막 살았더라도
회개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고,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점과 관련해서 마태오복음 12장에 있는 말씀이 자주 인용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부러진 갈대’는 이미 부러져서 다시 살아날 희망이 안 보이는 갈대이고,
‘연기 나는 심지’는 이미 불이 꺼진 상태의 심지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도 잘 가꾸고 관리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당사자 자신이 예수님의 노력에 응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포기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3) 신앙생활은 백지 상태로 시작해서 ‘좋은 땅’이 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은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끝까지 가지 못한 사람은,
또는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은 ‘나쁜 땅’이 되어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가지 못한(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 대하여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좋은 땅이 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
“좋은 땅이 되겠다고 작정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전력을 다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신 것은
‘내가’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일도 생기고, 유혹도 많이 받고,
위험한 고비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런 때에는 바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만 뿌리고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좋은 땅’이 되는 것은 ‘나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고, 공동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6-8).”
이 말은, “나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고, 기꺼이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사도 직무를 수행했고, 복음 선포 활동을 했고,
신앙인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이제 주님께서 나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모두
그 월계관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좋은 땅’으로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자만심에서 나온 ‘잘난 체’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을 회상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시점이 되면,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라고
말하면서 생을 마무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실제 농사에서는 척박한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는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이 적용됩니다.
남은 생이 얼마 안 된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됩니다.
평생 아무렇게나 막 살다가 죽기 직전에야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투덜거릴 사람이 있겠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한다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20장에 있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바로 그런 가르침입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2019년 7월 24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까지 가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성공을 했습니다.
그들이 홍해의 마른 땅을 밟으며 걸을 때까지만 해도 희망과 설레임이 가득했지요.
그런데 사막의 엘림이라는 곳과 시나이 사이에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입에서는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3)
이런 사람들의 ‘변덕’에 그래도 끝까지 참아줄 수 있는 이는 세상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조석으로 변한다.’고 그래도 이 변덕을 끝까지 참으시는 분은 하느님 뿐이시지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탈출 16,4)
하느님께서는 배고픈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배불리 먹도록 저녁 어스름 할 때에는 메추라기가 날도록하시고 아침에는 이스라엘 진영에 이슬이 내립니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서로 “이게 무엇이냐?”라는 뜻을 가진 ‘만나’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매일 메추라기가 날도록 하시고 만나를 이슬처럼 내리십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배에 오르시고 청중은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씨 뿌리는 이의 비유‘ 말씀을 들어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씨는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떨어졌는데, 여기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자라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길에 떨어진 씨는 다 딱딱하고 부드러운 흙이 없다보니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뭐 자랄 틈도 없는 것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흙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딱딱한 돌들이어서 뿌리가 나자마자 말라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자라다 만 것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뿌리도 내리고 잘 자라는가 싶더니 가시에 엉기고 제대로 뻗지를 못해 결국 성장해서 열매를 맺지는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정점은 ‘좋은 땅’입니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면 어떤 씨는 백 배, 어떤 씨는 육십 배, 어떤 씨는 삼십 배의 열매를 맺고 소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와 닿습니다.
수 많은 씨가 땅에 떨어지지만 자라지 못한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제대로 떨어진 것은 결실로 이어지듯이 하느님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리지만 구원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그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꽃이 피게 할 뿐 아니라 많은 결실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뿐 아니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게 하고 있으니 종말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구원의 결실을 내어야 하겠지요.
신앙인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희망하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밭이 되도록 굳은 땅을 부드럽게 고르고 돌을 치우며 가시덤불도 베면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농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2016년 7월 20일)
희망과 인내 속에 커가는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서기 27년경부터 활약하셨는데 초기에는 인기가 높았으나, 30년경 말기에는 인기가 떨어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는 고작 열두 제자와 몇몇 부인들만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이는 상황에서 아마도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핵심은 씨 뿌리는 것 자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처음에는 씨 뿌리는 농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나 마지막에는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13,8).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기대와 희망을 두며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는 거듭된 실패에도 성장해가며 어떤 경우에도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씨 뿌리는 사람은 결과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씨가 어디에 뿌려지듯 성장해가고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내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실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은 결실도 그것을 내는 이에게는 넉넉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거울이요 씨앗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가지만 주님 때문에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가진 것이 없고 배우지 못해서, 때로는 정의의 편에 선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기도 하고, 거대한 자본의 힘이나 부당한 권력 행사 앞에 불의하게 짓밟히는 억울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협력하여 가꾸어나가야 할, 인간의 마음속에 던져진 한 톨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추수 날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이 작은 씨앗을 잘 가꿔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배척과 소외, 차별과 불의에 맞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랑과 정의의 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투신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 차별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 진정한 인간의 해방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과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정의를 부르짖고 정의롭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부당한 탄압과 고통을 더 심하게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장 어려움, 문제, 대결,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맞서게 됩니다.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로운 행동과 말, 사소해 보이는 작은 배려와 사랑의 몸짓이 별 볼일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며 끝까지 이런 실천을 이어갈 때 희망이요 사랑이신 그분께서는 그 작은 씨앗을 통해서도 넉넉한 열매를 맺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보잘것없는 사랑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을 이루시고 우리 삶을 변화시켜주시며 바로잡아주시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인내하며 그분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온갖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빛은 어둠 속에서, 앎은 모름 속에서만 보인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 안에 뿌려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들을 귀’가 없어서 씨가 뿌려져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비유를 깨달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마음이 무디고 눈은 감겼고 귀는 닫아버렸기에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열린 마음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인 금태섭 씨가 쓴 『확신의 함정』 책의 머리말 소제목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입니다.
법을 집행하면서 확신을 하지 않으면 재판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법조인 생활을 한 끝에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검사 초년 시절 자신 앞에서 한없이 울던 막 12년의 복역을 마치고 나온 서른 살의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랜저를 훔쳐서 잡힌 사람이었는데, 큰 죄도 아닌 작은 범죄를 여러 번 저질러서 결국엔 12년을 살다가 이제야 출소한 것입니다. 만약 법대로 하면 그를 다시 7년 이상은 집어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도 와서 사정하고 자신도 그 사람을 장발장으로 만들 수 없어 결국 그 사람은 집행유예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차를 상습적으로 탈취하고 그 안에 탄 사람들을 폭행하며 돈을 빼앗는 등의 중범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검사는 다시 범죄 기록과 그랜저를 훔친 정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분명 놓친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검사 앞에서 연기하고 있었고 검사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사건을 수사하거나 변론을 하다 보면, 분명히 내 판단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질 때가 있다. 의뢰인이 가장 억울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도 너무 분해서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 사건을 처리할 때 나는 내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틀렸고, 또 틀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신중해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 때문에 많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은 ‘양자역학’이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심지어 양자컴퓨터까지 개발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머리가 좋다는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이 처음 나왔을 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양자역학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보어는 상보성 원리를 주장하며 전자는 입자로 존재할 때는 특정 위치에 존재할 수 있지만, 파동으로 존재할 때는 중첩 현상으로 명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니 물어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입자나 파동도 관찰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게 측정됩니다. 관찰자가 있다면 빛이 입자로 보이다가 관찰자가 보지 않으면 파동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미시세계로 갈수록 도대체 인간의 능력으로는 무언가를 확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 양자역학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인과응보가 정확한 계산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양자역학의 세상에서는 그것으로 측정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만약 아인슈타인처럼 인간이 다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양자역학의 세계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닐스 보어는 말합니다.
“아인슈타인 씨, 신이 무엇을 할지 당신이 결정하지 마시오.”
제가 초등학교 때 복사를 했기에 방학 때는 성당에 매일 나가야 했습니다.
중간에 가게 하나를 지나쳐야 했는데 그렇게 매일 성당에 출근하는 저를 보며 가게 사장님은 제게 왜 신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신을 믿으려면 태양을 믿으라고 합니다. 자신은 태양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누구도 살 수 없으니 태양이 곧 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태양을 만드신 분을 믿어야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웃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분은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저는 아는 어린이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비진리’, 곧 진리가 아님을 고백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만큼 진리는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복음 묵상을 할 때도 이전에는 ‘다 했던 것인데 또 뭐 새로운 묵상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볼수록 더 깊은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다 안다고 규정해 놓는다면 더 깊은 진리는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영성에서는 『무지의 구름』과 같은 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지의 구름이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 계명 판을 받기까지 40일간 구름 속에서 있었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때 주님 앞에서 모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몰랐기 때문에 전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나훈아 씨는 인생 막바지에 와서 ‘소크라테스’를 찾으며 인생도 사랑도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드디어 조금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고백해야 그분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받을 귀가 열립니다.
내일도 모르고 한 시간 앞도 모릅니다. 그러니 대화할 때 결론을 내며 대화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귀가 열리고 대화가 흘러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알려주십니다. 모든 것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의 말씀 앞에서 귀를 여는 방법입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공생활 절정기에 사목활동에 전념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은혜롭고 감미로웠던지 구름같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종래 그 어떤 예언자나 지도자도 흉내낼수 없는 흥미진진하고 풍요로운 가르침에 사람들은 깊이 매료되어 에수님 가시는 곳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엄청난 인파를 보신 타고난 교육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 선포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아이디어 하나를 내놓으셨습니다. 청중들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삥 둘러앉았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호숫가에 매어진 어선에 올라타 앉으셨습니다.
마침 호수 중심에서 호숫가로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예수님의 말씀은 청중의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습니다. 상상만 해도 흥미롭고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 굶주린 당신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배려와 따뜻한 마음이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으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은 기존 예언자들이나 지도자들의 말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고리타분하거나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구름잡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구체적인 말씀, 백성들의 구체적인 일상과 연결되는 현장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만 해도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이었다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오 복음 13장 3~8절)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
집은 편안한 휴식 공간입니다.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신앙인에게 그 장소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최초의 장소이며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이 공간은 언제든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안락함을 만끽하다 열정을 잃을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터전이 자칫 나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유혹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십니다. 안락함에 젖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다시 광야로 초대하여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도록 이끄십니다. 그 뜻을 몰랐던 백성은 하느님을 원망했지만 모세와 아론을 통해 다시 깨달은 백성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분은 집에서 나와 호숫가로 나아가셨습니다 군중을 집 안으로 초대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지만 결국 귀 있는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안락함에 머물고자 한다면 유혹은 시작됩니다.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신 선물을 받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열린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담을 귀는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임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나아가 그분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자리 잡길 바랍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워낙 잘 알려진 내용이고 또 강론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원론적인 강론 내용에서 벗어나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씨와 밭의 관계를 가지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씨라는 것은 밭이나 흙이 있어야 싹이 나거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를 뿌리는 거지 씨를 심는다고 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만약 심는다고 하면 돌밭에 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복불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좋은 밭에 떨어진 게 상대적으로 잘 자랄 확률이 높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밭은 환경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통 보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잘 성장하는 건 일반적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훌륭하게 성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꼭 하느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똑같은 말을 듣고도 그 말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양각색 다 다릅니다. 사람의 말도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끔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라 믿어야겠지만, 실제로 와 닿지 않는다고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예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잘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씀이 우리 가슴에 잘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근데 누구는 철떡 같이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지금까지 제 경험칙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또 순수하게 믿으려는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아니 신뢰와 같은 것은 하루아침에 좋은 믿음을 가지는 표양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양파 껍질처럼 하루하루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걸 소화시키려고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한 껍질이 쌓이고 쌓여서 마치 하나의 양파가 되듯이 믿음은 그렇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원론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만약 좋지 못한 환경에서는 운명적으로 잘 성장할 수 없다고 하는 운명론과 같은 복음의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을 더 훌륭하게 평가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씨가 우리 영혼에 심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인간의 영혼에 심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조건만 본다면 다 동일한 조건입니다. 이 씨가 잘 성장할지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씨를 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면 이 씨에 관심과 애정을 쏟을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리고 싶은 마음과 애정이 없다면 잘 성장하지 못할 거라는 건 명확한 내용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환경에다 초점을 맞춘다면 씨가 잘 자라고 못 자라는 것은 자신의 책임과는 무관하다는 결론이 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원인을 외부적인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잘 믿기 위해서는 이해를 해야 하고, 또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어떤 성인이 하셨는데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하신 말씀 같은데 확실한 건 아닙니다. 어떤 성인이 하신 말씀인 것은 분명합니다.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환경보다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은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까 하는 그 마음가짐과 자세에 따라 밭이 훌륭한 밭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또한 이런 마음도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210721.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제1독서 (탈출16,1-5. 9-15)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 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4-5) '이제 내가'로 번역된 '히느니'(hinni; Behold,I)는 '나를 보라, 내가 이제 중대한 일을 너희 앞에 보일 것이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 하느님께서 이제 놀라운 방법으로 즉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적을 통해 그들의 원망을 해결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로 번역된 '마므티르'(mamtir)는 '(비를)내리다'(창세2,5; 이사5,6)라는 뜻을 지닌 동사 '마타르'(matar)의 강조 능동형 분사이다. 이처럼 행동의 계속을 나타내는 분사형이 사용됨으로 인해 '계속해서 (비를) 내릴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원문은 동사 자체에 '억수같이 쏟아지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하느님께서 양식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공급하실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지금 주님께서 원수 이집트를 징벌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권능의 은총을 베풀어 노예의 신분에서 구원해 내신 하느님의 손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양식을 비처럼 충분히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 백성에 대한 오래 참으심(예레15,15; 로마9,22; 2베드3,9)과 더불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자비로운 보살핌을 보여주는 것이다(느헤9,15; 시편78,24-25 ; 105,40; 요한6,31.32; 1코린10,3).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로 번역한 '웰라케투 떼바르 욤'(wellaqetu debar yom)에서 '모으다', '거두다'로 번역된 '라케투'(laqetu)의 원형 '라카드'(laqat)는 '모으다'(gather)(창세31,46)라는 뜻으로 광야 지면에 흩어져 있는 만나를 모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떼바르 욤'(debar yom)는 '일'(1열왕15,5), '것'(탈출9,4)등을 뜻하는 명사 '떼바르'(debar)와 '낮'(창세8,22), '날'(창세1,5)를 뜻하는 명사 '욤'(yom)이 함께 쓰여 '날의 것' 즉 '하루의 것'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곧 '하루 동안 먹을 분량의 양식'을 의미한다. '시험해 보겠다'라고 번역된 '아낫쎈누'(anassennu; I may prove them)는 '시험하다'(창세22,1; 1열왕10,1)라는 뜻을 지닌 '나싸'(nassa)의 강조 능동형 1인칭 단수 미완료형에 대명사 접미어가 불은 형태로 '내가 그를(그 백성을)시험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시험하다'로 번역되는 '나싸'는 '유혹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입증하다'(prove), '검증하다'(test)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인데, 여기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때는 대개 어려운 상황을 통해 그 대상의 진가를 입증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매일 하루 분량의 양식을 거두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고 쉽지만은 않은 일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양식을 거두는 노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하루 분량 이상의 식량을 거두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하루 분량을 거둔다 하더라도, 다음 날을 위해 그것은 남기거나(탈출16,19.20) 엿샛날에 안식일을 예비해서 이틀 분량을 거두지 못해서 안식일을 어기는(탈출16,27)등 만나와 관련된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입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날 거두어 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장만해 보면'으로 번역된 '웨헤키누'(wehekinu)는 '세우다'(잠언3,19), '견고케하다', '존속하다' (시편89,37)란 뜻의 동사 '쿤'(kun)의 강조 능동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이다. '쿤'이 이렇게 강조형으로 사용될 때는 '준비하다', '장만하다'(창세43,16; 시편147,8)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엿샛날(제 육일)에 거둔 것을 미리 장만해야 했던 이유는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므로 만나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율법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6일간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신 하느님의 창조의 원리와 질서에 의해(창세2,1-3) 하느님의 경건한 백성들은 제 7일에 안식하는 규정을 지켜왔을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출애굽하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공식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관한 규정을 가시화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으로 계시가 발전되면서 마침내 탈출기 20장 8-11절에서 안식일 규정이 십계명으로 성문화 된다. '날마다 모아 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5) '될 것이다'로 번역된 '웨하야'(wehaya; and it shall be)에서 '존재하다', '있다'는 뜻의 동사 '하야'(haya)가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비록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틀림없이 갑절이 될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갑절이 되는 원인이 엿샛날에 거두는 양을 배로 늘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거두었는데 결과적으로 갑절의 양이 되었는지 탈출기 16장 5절의 원문상으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엿샛날에 거둔 만나가 그 다음 날이 되어도 다른 때와는 달리 전혀 상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일의 배후에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역사하심이 있었다. "엿샛날에는 한 사람에 두 오메르씩, 양식을 갑절로 거두어들였다." (탈출16,22)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13-15)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영 위로 갑자기 올라오는 메추라기 떼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메추라기 떼의 규모가 '진영 이쪽과 저쪽으로 하룻길 되는 너비로 떨어뜨려, 땅 위에 두 암마 가량(약 90cm) 쌓이게 하며'(민수11,31) 엄청난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경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메추라기'를 뜻하는 '셀라웨'(sellawe; the quail)는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와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과의 철새이다.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티나를 중심으로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왔다가 가을쯤 아바리아와 시리아 쪽으로 이동해 겨울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이 메추라기 떼가 이스라엘 진영에 내린 것은 단순히 철새 이동에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마치 이집트에 메뚜기 재앙을 몰고 오신 것처럼, 하느님 당신 자신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바람을 불러 일으키시어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오신 것이다(민수11,31). 그런데 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탈출16,35)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졌다(민수11,21). '진영 둘레에'로 번역된 '싸비브 람마하네'(sabib lammahane)는 '그 진을 향하여 둘레에'라는 뜻이다. '싸비브'(sabib)는 원래 '~둘레에'(round about)라는 뜻이고, '람마하네'는 '진'을 뜻하는 명사 '마하네'(mahane)에 '~쪽으로', '~을 향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레'(le)가 결합한 것으로, 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이슬이 진 둘레에 내렸다는 말이다. 메추라기가 진 안에 덮인 것과는 달리, 만나가 이처럼 진 둘레에 내린 것은 사람의 발에 밟혀서 쓸모없게 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신 하느님의 세심한 배려가 있는 것이다. 또한 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내렸다는 것은 만나를 거둘 때 각 진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깝고 편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연중 제16주간 수요일복음(마태13,1~9)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3ㄴ~8) 마태오 복음 13장 1~52절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7가지 비유'의 말씀이며,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스런 성격을 매우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등을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말씀의 씨를 뿌려도 바리사인들과 같이 완고하고 사악한 무리들의 마음은 말씀을 거부함으로인해 결실을 하지 못하는 밭인 반면에, 말씀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듣는 제자들과 같은 무리들의 마음은 결실을 맺는 밭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비유'로 번역된 '파라볼라이스' (parabolais)의 원형 '파라볼레'(parabole)는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비교한다는 뜻을 지닌 명사이다. 즉 '파라볼레'는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례에 빗대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야기 진행 방법이다. '씨뿌리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스페이론'(ho speiron; a sower)에서 '씨뿌리는'으로 번역된 '스페이론'(speiron)은 '씨를 뿌리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페이로'(speiro)의 현재분사로서 앞에 있는 관사 '호'(ho)와 함께 분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씨뿌리는 사람'(파종하는 자) 즉 농부(a farmer)를 가리킨다. 농경사회에서 밭에 파종하는 자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농경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그것의 결실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키고, 씨 뿌리는 네가지 밭은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장하는 네가지 밭은 별개의 각각의 밭이 아니라 한 밭에 있는 다양한 땅의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원래 팔레스티나에서는 밭을 경작하기 전에 씨 뿌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씨가 떨어지는 밭은 대부분 돌이나 가시도 섞여 있었고, 잡초도 어느 정도 나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자신이 뿌리는 씨가 어떤 땅에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씨앗을 이곳 저곳에 뿌린다. 그러던 중 씨앗의 일부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길에'에 해당하는 '파라 텐 호돈'(para ten hodon; along the path)인데, 씨앗의 일부가 밭 사이의 길 내지는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한 길을 따라 뿌려진다. 말하자면, 여기서 '길'이란 밭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이나 농부들이 밭일을 하기 위해 자주 걸으면서 다져져 길과 같이 된 땅을 말한다. 그래서 밭 사이에 나 있는 다소 딱딱한 좁은 길에 떨어진 씨앗은 땅을 뚫고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의 기대와는 달리 결실은 커녕, 뿌리 한 번 제대로 내려보지 못하고, 그 주위에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타 페테이나'; ta peteina; the birds)의 눈에 띄게 되고, 결국 그들의 먹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새들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는 악한 자를 상징한다(마태13,19). 또한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은 '흙으로 얇게 덮인 바위가 많은 밭'이라는 말인데, 밖으로 싹이 돋지만, 곧바로 무섭게 뜨거운 태양이 솟아올라 그 열기와 빛으로 말미암아 메말라 죽게 된다. 이 비유에서 '솟아오르는 해'는 '환난이나 박해'로 상징되고 있다(마태13,21). 우리의 내면이 마치 돌밭과 같이 깨어지지 않는 완고한 자아로 가득 차 있으면, '환난이나 박해'가 신앙을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번째로 '가시덤불'로 번역된 '아칸타스'(akanthas; thorns)는 '가시'나 '가시덤불'을 뜻하는 명사 '아칸타'(akantha)의 목적격 복수형으로서 '가시들' 내지 '가시덤불'을 의미한다. 이 '가시덤불'위에 떨어진 씨앗은 그보다 먼저 높이 자라버린 가시에 찔리고 그 그늘에 막혀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기도와 말씀과 성체로 일구고 돌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내면은 이미 선점하고 있는 가시와 같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무성해질 것이다(마태13,22). 그래서 그 마음에서 복음의 씨앗은 자라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좋은 땅'에 해당하는 '에피 텐 겐 텐 칼렌'(epi ten gen ten kalen; on good soil; into good ground)에서, '좋은'으로 번역된 '칼렌'(kelen)의 원형 '칼로스'(kalos)는 기타 다른 것보다 더 우수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씨앗이 자라기에 '적합하고'(suitable),'쓸모있는'(useful) 땅을 말한다. 이 땅은 위의 세 가지 종류의 땅보다 훨씬 우수하고 좋은 땅으로서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식물 경작에 매우 적합한 땅'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호'(ho; some)는 지시 대명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호스'(hos)의 주격 중성 단수로서, '어떤 것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각각의 씨앗들이 좋은 땅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또한 씨앗들의 조건이 동일한 땅에 떨어져도, 그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質)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합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씨앗이 아무리 부실해도 열매맺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과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
----------------------------------------------------
====================================================
2021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매일미사ㅣ김영남 다미아노 신부 집전
https://youtu.be/OaucX3nlM8E 35:55
2021. 7. 21.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김영남 다미아노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 본당 주임) 집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