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를 읽어 내려갈 때, 우리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을 보며 “타자”(the Other)로서의 성서를 만나게 된다. 사실 구약성서는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볼 때 우리로부터 멀리 있다. 이 먼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매우게 하는 것이 성서 번역자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서의 세계관의 구조가 현대의 과학적인 구조와 다르다는 점을 잊어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무리하게 현대인의 입맛에 맞추어 번역하는 시험을 받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신화적인 짐승들의 영상에 대한 다양한 번역들을 고찰하는 것은 ”세계관”과 “번역”의 충돌에 대한 좋은 모범이 될 것이며,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된다.
구약성서에서 신화적인 짐승들은 “리워야단”과 “라합”과 “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개역」과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에서 뿐 아니라, 여러 다른 나라의 번역들을 살펴보면 이 용어들의 번역에 있어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신화적인 짐승들은 구약성서에서 창조와 구원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영상”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번역의 통일성 뿐 아니라 성서를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번역들을 검토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I. 리워야단
리워야단은 오랫동안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악어, 구렁이, 뱀, 돌고래, 고래, 참치, 하마” 등의 자연계의 짐승이나 물고기로 이해되었고, 상징적인 관점에서 “사단, 악, 대적, 이집트의 왕 바로” 등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1895년 헤르만 궁켈이 그의 책 「창조와 혼돈」에서 리워야단의 영상은 바벨론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혼돈의 짐승 티아맛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한 후부터(Gunkel 1895:41-61),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짐승의 기원을 바벨론의 창조신화에서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 시리아의 한 농부에 의해 옛 우가릿(현 라스 샤므라)의 문헌들이 발굴되고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1934년 비롤로드(Virolleaud 1934:305)는 첫 줄에 ltn이 담긴 토판을 출판하였고, 올브라잇(Albright)은 이미 1931년에 이 본문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이듬해에 ltn은 로탄(Lotan)으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리워야단과 로탄 두 짐승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 후로부터, 대부분의 우가릿 학자들은 성경의 리워야단이 바벨론의 티아맛보다 바알 신화에 등장하는 혼돈의 바다 짐승인 로탄과 더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리워야단은 자연적인 짐승이나 상징적인 짐승보다 신화적인 배경에서 더 많이 이해되게 되었다.
리워야단의 정체를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근에 근거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다. (1) 리워야단의 어근을 lawah로 보는 자들은 칼(Qal) 형에서 “동반하다”(to accompany), 니팔(Niphal)형에서 “가담하다”(to be joined unto)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고 “동반자”나 “가담자”로 여겼다(KB 475). (2) 어근을 아카드어의 lawu 혹은 lamu는 “에워싸다, 감싸다”(to surround, encircle, CAD 9:69)로 보는 자들은 아랍어의 동족 동사인 lawa, “돌다, 비틀다”(to turn, twist)와 연관하여 “구부러지고 꼬여 있으며 비틀린” 어떤 존재로 보았다(BDB 531). 이들은 우가릿어 ltn도 동일한 셈어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이런 어근의 의미에 근거하여, 리워야단은 자주 뱀이나 용과 같은 존재로 여겨져 왔다. (3) 어근을 아카드어의 latu, “to check, to control”와 우가릿어 lyt/lwt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자들은 “폭군”으로 번역한다(de Moor, 1979:641). “꼬여있는 존재”가 리워야단의 모양에 대한 설명이라면, “폭군”은 그의 성격에 대한 설명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리워야단의 진정한 모습과 정체는 성경에 나타나는 문맥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1. 이사야 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1). 고유명사 리워야단은 「개역」과 「표준새번역」(이후 「표준역」)과「개역개정판」(이후 「개역개정」)에서 “리워야단”으로 음역된다. 그러나 「공동번역」(이후 공동역)은 아마 벌게이트역(Leviathan)을 따라 “레비아단”으로 읽는 것 같다.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음역하지 않고, drakon 즉 “괴물”(dragon)으로 해석하고 있다.
2). 이사야 27:1에서 리워야단을 묘사하는 세가지 병치어에 대해서는 번역들이 달라지고 있다. 먼저 「개역」의 “날랜 뱀”(「개역개정」)은 “도망가는 레비아단”(「공동역」), “매끄러운 뱀”(「표준」)으로 새롭게 제시된다. 영어 번역 중 KJV의 “찔린 뱀”(the piercing serpent)은 어떤 어휘의미론적인 지지도 받지 못하며, 현대의 여러 번역들은 모두 “도망치는 뱀”(the fleeing serpent; NKJ, RSV, NRS, NAS)으로 통일하여 제시한다. 이 번역은 70인역의 “ton drakonta ophin pheugonta”('괴물, 즉 도망치는 뱀')와 일치한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bariah는 우가릿어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번역된다. 우가릿어 brh는 “미끄러운”(slippery; van Selms, Gibson, Emerton, Driver), “도망치는”(fleeing; Coogan, Young, de Moor), “날아가는, 빨리 지나가는”(fleet; Margalit 1980:88), “날랜”(swift; Pope, Ginsberg), “파괴적인”(verderblich; Aistleitner)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라빈(Rabin 1946:39f.)은 “셈어의 어근에서 다양하게 발전한 의미들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두개의 기본적인 의미를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1) 비틀다 (to twist; coiled up; convulsion), (2) 머리카락이 없다, 부드럽다, 밝다(to be hairless, smooth, bright)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아랍어 barh, “뒤틀다”(to twist)와 barih, “뒤틀리는 고통”(twisting pain)에 근거하여 “격동적인”(convulsive), 혹은 “뒤틀린”(tortuous)으로 번역하였다.
최근에 클라인스가 편집한 「히브리어 사전」(DCH II 1995:263)에 따르면, bariah는 명사형에서 “도망자”라는 의미를 가지며(사 15:5; 43:15), 형용사형에서는 (1) “신속히 도망치는,” (2) “악한,” (3) “위험한,” (4) “태고의”라는 네가지 의미를 제시하며, 이것들이 모두 리워야단에 적용될 수 있음을 말한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한 단어는 몇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bariah는 셈어에서 다양하게 증거되고 있으므로, 이사야 27:1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용어가 (1) 주님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리워야단을 심판하는 맥락에서 나타나며, (2) “도망치는 뱀”은 문맥에서 너무나 갑작스러우며, (3) “날랜”이란 단어는 “도망친다”는 의미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날랜 뱀”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게 보인다.
3).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liwyatan nahas 'aqallaton)은 「개역」, 「개역개정」, 「표준역」에서 일치하며, 「공동역」의 “꿈틀거리는 레비아단” 에서만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형용사 “꼬불꼬불한”(`aqallaton)은 우가릿 문헌에서 여러번 나타나지만(CTA 5:1:1-2, `nt III:38, Gibson 1977: 50, 68을 보라) 구약성경에 단 한 번 나타난다(hapax legomenon). 그러나 그 동족어 `aqal은 하박국 1:4에서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me`uqqal) 행함이니이다”로 나타나 “굽었다, 왜곡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약간 형태는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의미가 사사기 5:6에서 “소로”(「개역」; “오솔길” 「공동역」, “뒷길” 「표준역」; 히.'arahot `'aqalqallot)와 시편 125:5에서 “굽은 길”(hammattim `aqalqallot)로 나타나고 있다(어근은 `aqalqal임). 따라서 이사야 27:1에서 리워야단은 꼬부라지고 비틀어진 뱀의 영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4). “바다에 있는 용”(「개역」)은 “그 바다 괴물”(「공동역」), “바다의 악어”(「표준역」)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악어”는 “바다”와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용”이나 “바다 괴물”이 더 적절하다. 그렇지만, 이 단어(tanin)의 번역 문제는 좀 복잡한 문제이므로 뒤에서 다시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2. 시편 74:13-14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나이다“
1). 여기에서 「개역」의 “악어”는 “리워야단”(「개역개정」, 「표준역」)과 “레비아단”(「공동역」)으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도 “악어” 대신 “리워야단”으로 통일하여야 할 것이다.
2). 바다를 “나누다”(parar)는 동사는 구약에서 세 번 사용되었으며(시74:13; 사24:19; 욥16:12), 기본적으로 (1) “깨뜨리다, 파괴하다, 부수다”(shatter)와 (2) “나누다, 쪼개다”(divide)의 두가지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BDB 830). 쾰러-바움가르트는 “소용돌이치게 하다, 나누다”(stir, divide)로 번역하였다(K&B 782). 따라서 이 절은 “주께서 바다를 부수셨나이다,” 혹은 “주께서 바다(yam)를 나누셨나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개역」, 「개역개정」). 문법적으로 볼 때, 두 번역이 다 정당하나 어떤 번역을 따르느냐에 따라 암시하는 바가 상당히 달라진다. 첫번째 뜻을 따르면 이 시의 배후에 신화적인 암시가 깔려있음을 느끼게 되며, 두번째 뜻을 따르면 출애굽이 배경을 이루게 된다(NASB, AV). 이 두 번역은 각각 문법적으로 정당하므로, 문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히브리어 성경에서 “바다”(yam)는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 않으므로 가나안의 바다 신의 이름을 따라 고유명사화 하여 “얌”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보통명사로서 “바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두번째 동사인 parar는 가나안의 신화의 배경 속에 볼 때, “나누다”(to divide)는 뜻보다 “부수다”(to shatter)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표준역」과 「공동역」의 “가르다”는 개역의 “나누다”와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 더구나 출애굽 기사에서 홍해를 가르는 맥락에서는 이 동사가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McKenzie, 1950:279). 크로스(Cross 1973:149) 역시 “부수다”는 번역을 따르고 있으며, “부수다”는 번역은 뒤따라 나오는 “깨뜨리다”와 좋은 평행을 이룬다.
3).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개역」, 「개역개정」)는 “바다 위로 솟아 오르는 타닌들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셨으며”(「표준역」)로 음역되며, “바다 위에 솟은 괴물들의 머리를 깨뜨리시고”(「공동역」)로 제시된다. 「표준역」과 「공동역」에서 “솟아 오르다”는 영상은 파도가 일어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지만, 본문의 뒷밭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용”은 히브리어에서 복수형(tanninim)이다. 따라서 「개역」은 “용들”로, 「표준역」은 음역하여 “탄닌들”로 번역하였다(사실 「표준역」은 이 단어를 번역하는 데 일관성이 없다). 그러나 히브리어 복수형은 늘 가산명사로서 숫적인 복수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고, 여기에서처럼 “강의형 복수,”(intensive plurals) 혹은 “영광의 복수”(pluralis majestatis)로 나타나기도 하므로, “용들”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용”으로 번역해야 한다(Waltke & O'Connor 1990:122). 욥기 40:15에 있는 “베헤못”도 복수형이나, 바로 다음 절에서 단수 대명사(“그의”)가 뒤따라 나옴을 주목하라(40:15, 19). 바다 가운데 있는 용(혹은 괴물)의 모습이 너무나 무섭고 엄위하기 때문에, 위엄의 복수형으로 소개되고 있다.
4). “리워야단의 머리를 파쇄하시고”는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개역」,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개역개정」), “레비아단, 그 머리를 깨뜨리시고” (「공동역」), “리워야단의 머리를 짓부수셔서”(「표준역」)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시인은 리워야단이 바다의 용으로서(사27:1) 머리들(ro'se)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용의 머리들”과 “리워야단의 머리들”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이 흥미롭다. 바알 신화에서도 로탄은 여러 머리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UT 67:I:1-3, 'nt III:39등). 비록 로탄의 “일곱머리”(slyt. d. sb't. rasm)는 여기에 나타나지 않지만, 바다에 있는 용(Tannin)의 “머리들”과 리워야단의 “머리들”이란 평행법은 서로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편 74:13-14에서 여러개의 머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리워야단은 고래(Calvin 5:174f.), 돌고래(Eerdmans 1947:356), 악어(Kirkpatrick 446, Leupold 538), 하나의 동물로서 리워야단(Udd 207)과 동일시 되기 힘들며, 우리는 단수 “머리” 대신에 “머리들”로 번역하길 제안한다.
5).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나이다”(「개역」)는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개역개정」), “그 고기로 사막의 짐승들을 먹이신 분”(「공동역」), “사막에 사는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셨으며”(「표준역」)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사막에 거하는 자들”(le'am lesiyyim)의 정체는 파악하기 힘들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번역 한다면, “백성에게, 마른 땅에게”(to people, to dry country) 혹은, “마른 땅(광야)의 백성에게”(to the people of dry country)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막에 거하는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 커크패트릭(Kirkpatrick 446)과 키드너(Kidner 269)는 이들을 사막의 야생 짐승으로 보며, 역사적인 해석을 따라 애굽 군대의 시체가 해변에 밀려와(출14:30) 사막의 야생 동물에게 먹힌 것으로 본다. 알렉산더(J. A. Alexander1975:316)는 이들이 “홍해 해변에서 원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고기를 낚아 연명하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Ichthyophagi로 불렸다”고 한다. 테일러(Taylor in K & B 715)는 로에브(Immauel Loew)를 따라서 l'mlst ym으로 수정을 하여 “바다의 상어”로 번역하였다. 영(W. A. Young 101)은 마소라 사본의 자음을 le'am lesi yam으로 재배치하여 “바다 배의 사람들, 혹은 뱃사람들을 위하여”로 번역하였다. 현재 있는 그대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나 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될 때 까지, “사막의 짐승들”(NIV)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게 보인다. 히브리어에서 “백성”(`am)이 짐승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잠30:25-26에서 개미와 바위에 사는 사반). 신화적 배경에서 보면, 아낫이 모트를 죽이고 그 시체를 조각내며 들판에 던지자, 새들이 와서 그 시체를 먹는다(ANET, 140; ii, 30-39). 이와 유사한 영상이 이집트 왕 바로를 심판하는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겔29:5; 32:4).
3. 욥기 3:8
“날을 저주 하는 자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1). “날을 저주 하는 자”(「개역」)는 “날을 저주하는 자들”(「개역개정」“, ”날을 저주하는 자들아“(「공동역」), ”주문을 외워서 바다를 저주하는 자들이“(「표준역」)로 제시되어 원어에서 복수형으로 나타남을 잘 드러내어 준다.
2). 위의 번역들을 보면, “날”(「개역」; NSA, RSV)이 “바다”(「표준역」; NRS)로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헤르만 궁켈은 욥기 3:8에서 리워야단과 개념적으로 연관된 것은 “날”(yom)이 아니고 “바다”(yam)이므로, 본문의 “날”을 “바다”로 읽어야 한다고 가장 먼저 제안하였다(1895:59, n. 1). 그 이후로, 킷텔(R. Kittel), 포우프(Pope 1965:3), 왈레스(Wallace 1948:64), 올브라잇(Albright 1938:227-28) 등 많은 학자들이 궁켈의 수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NEB는 “깊음의 짐승(”the monster of the deep“)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의 난하주도 궁켈의 제언을 따르고 있다. 드라이버(G. R. Driver 1955:72)는 아람어로 된 주술용 술잔(Aramaic incantation bowl)에서 ”내가 바다의 주문과, 용 리워야단의 주문을 너에게 발하리라(I will cast spells upon you with the spell of the sea and the spell of the dragon [Tannin] Leviathan)는 외증을 발견하고, 욥기 3:8에서 날을 바다로 수정하기를 제언한다. 이 주문 형식을 볼 때, 리워야단이 바다(yam)와 용(Tannin)과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며, 고대의 마술사들이 리워야단을 요술에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다를 저주하는 자 즉, 리워야단을 격동시키는데 익숙한 자가(내가 태어난)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표준역)은, “바다를 저주하는 자들이, 리워야단도 길들일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자들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이렇게 수정하는 것이 아주 신빙성이 있지만, 두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로 욥기 3장의 전체적인 문맥이 바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욥의 중심관심은 그가 태어난 날과 밤에 있었지 바다에 있지 않다. 본문의 문학적 구조가 이점을 잘 지지해 준다. 앞에 제시된 구조 분석을 보면, 본문은 “날”과 “밤”의 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A), “나의 난 날”과 “나를 밴 그 밤”(3절)
(B), “그 날”(hayyom hahu' 4, 5절)
(B') “그 밤”(hallayla hahu' 6-9절)
(A') 결론: “내 모태의 문”과 “내 눈”(10절)
이 구조 분석에 따르면 리워야단을 다루는 본문은 밤과 낮의 대조 속에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8절에서 날을 바다로 수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제임스 바아(J. Barr 1974: 56)는 이것과 연관하여 흥미로운 조언을 한다. “우리는 리워야단과 바다 사이에 내재적인 관계가 있음을 안다. 리워야단이 바다의 괴물이라는 것은 말할 여지 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욥기의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결정해 주지 못한다. 이 본문은 낮과 밤을 기본적인 축으로 삼고 있으며, 그가 잉태된 날, 혹은 태어난 날을 주제로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마소라 사본이 보전하고 있는 그 '날'(yom)이 옳을 수 있다. 시인은 '날을 저주하는자' (day-cursers)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바다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3). “리워야단”(「개역개정」, 「표준역」)은 “큰 악어”(「개역」)와 “악어”(「개역개정 각주」), “악어처럼 생긴 바다 괴물”(「표준역 각주」), “바다 괴물”(「공동역 각주」로 제시된다. 이 상이한 번역들은 모두 “리워야단”으로 통일해야 할 것이다.
4).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는 “레비아단을 깨울 수 있는 자들아”(「공동역」), “리워야단을 길들일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자들아”(「표준역」)로 제시된다. “격동시키다”(`orer)는 원래 `ur의 첫째 의미(rouse oneself, awake)에서 나온 형태(polel infinitive)로서 잠자고 있던 자를 일으켜 움직이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표준역」의 “길들이다”보다는 「공동역」의 “깨우다”가 원어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깊은 침묵과 수면에 빠진 리워야단을 깨워,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는 경사스런 날을 저주하겠다는 사상이 드러나게 된다. 이사야 14:9에서도 “음부가 깨어난다”(`ur)는 표현이 나타난다. 즉, 음부에서 자고 있는 죽은 자들이 바벨론 왕의 지옥 강하 소식을 듣고 모두 잠에서 깨어나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 고대의 주술사들은 셈 족의 신화에 보편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혼돈의 신화적 괴물을 불러 일으켜 저주하는데 사용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욥기 3장에서 욥은 전문적인 술사가 주술을 통해 리워야단을 다시 불러 일으킴으로써, 창조의 질서를 뒤엎어 버렸기를 소원하고 있다.
4. 욥기 41:1
“네가 능히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 NIV는 Leviathan 대신에 the leviathan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개역」의 “악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아마 번역자는 각주에 있는 그의 설명처럼 여기의 리워야단을 악어(the crocodile)로 보고 있는듯 하다. 우리말 성경의 현대어 번역에서는 모두 “리워야단”으로 고유명사화 하고 있다.
5. 시편 104:25-26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배가 거기를 다니며 주의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1),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개역개정」)은 “주의 지으신 악어”(「개역」), “손수 빚으신 레비아단”(「공동역」),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표준역」)으로 제시된다.
2). “그 속에서 노나이다”(「개역」, 「개역개정」)는 “당신의 장난감입니다”(「공동역」), 그 속에서 놉니다“(「표준역」)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리워야단은 ”바다에서 노는 자“ 혹은, ”주님과 함께 노는 자“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lesheq-bo는 둘 다 의미할 수 있다. 만약 첫째 뜻으로 번역하면 리워야단이 바다에서 신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부각되며, 두 번째 뜻으로 번역하면 주님께서 리워야단과 함께 장난치는 모습이 부각된다. 후자의 의미가 욥기 41:5상과 일치한다. ”네가 새와 놀듯이 그와 놀 수 있겠느냐(hatesaheq-bo)?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무능과 하나님의 능력이 대조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시편 104편에 따르면, 리워야단은 더이상 혼돈의 짐승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걸작으로서, 이제 길들어진 애완용 바닷 고기가 되었다. 따라서 리워야단도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자상한 아버지처럼, 리워야단까지도 돌보시며, 참 좋은 주인처럼, “때를 따라” 돌보신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다양한 문맥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리워야단의 영상을 사용하고 있다.
II. 라합(Rahab)
구약성경에는 리워야단 외에도 라합과 용이 바다의 괴물로 등장하고 있다. 먼저 바다에 사는 괴물로서 라합은 구약성경에서 시편 40:4(히5절)에 있는 복수형 “교만한 자”(rehabim)를 포함하여 일곱번 나타나고 있다. 어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라합은 동사형 rahab, “난폭하게 굴다, 사납게 굴다, 거만하게 행하다”(to act stormily, boisterously, arrogantly; BDB 923)에서 나온 명사형으로 “난동자, 난폭자, 교만한 자, 거만한 자, 반항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어근의 관점에서 보면 라합은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라, 반역과 악으로 특징지어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1. 시편 89:10(히브리어 11절)
“주께서 라합을 살륙 당한 자 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1). 라합은 우리말 성경에서 모두 “라합”으로 음역되어 고유명사로 취급된다.
2). “살륙당한 자 같이 파쇄하시고”는 “죽임당한 자 같이 깨뜨리시고”(「개역개정」), “격파하여 죽이시고”(「표준역」), “찔러 죽이시고”(「공동역」)로 번역된다. 먼저 “파쇄하다”(daka')는 기본적으로 “부수다”는 뜻으로 먼지나 가루처럼 “갈아 부수는” 모습을 그려준다(피엘형의 “결과적 용법”). 특히 라합은 여기에서 “시체처럼” 죽임을 당한다. 이 단어(halal)은 전쟁에서 “창에 찔려 죽은 자”에 대한 전문 술어이다(TDOT 4:418; 왕상11:15; 삼상17:57; 렘 14:18등 참조).
2. 욥기 26:12-13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셨다“
1).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개역개정」, 「공동역」)는 “바다를 정복하시며”(「표준역」)와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개역」)로 달리 제시된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라가(raga')는 (1) “격동하다, 자극하다, 휘젖다”(to disturb, stir up, churn up; 렘31:35, 사51:15)와 (2) “잠잠케하다, 쉬게하다”(to be at rest, repose; 렘31:2, 50:34)라는 두개의 상반된 의미를 갖고 있다(BDB 920). NIV와 한글 개역 성경은 첫번째 의미를 채택하여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였다”로 번역한다. 그러나 만약 12절 상반절이 하반절과 반의적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면, “잠잠케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 다시 말하자면 라합을 쳐부수는 것은 격동하는 바다를 잠잠케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것은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나이다”라는 시편 89:9 상반절과도 평행을 이룬다. 주님께서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과 라합을 쳐서 파하시는 것은 같은 일이었다. 흉용한 바다가 잠잠케 되는 것은 라합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라합은 도전자로 일어나지만, 주님은 그를 다스리신다.
2). 「개역」의 “날랜 뱀”(nahas bariah)은 “날렵한 뱀”(「개역개정」), “도망치는 바다 괴물”(「표준역」), “레비아단은 도망치다가”(「공동역」)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라합은 날랜 뱀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우가릿의 로탄과 성경의 리워야단의 성격과 같다. 즉, 리워야단이 “날랜 뱀”(nahash bariah)인 것 같이, 라합도 “날랜 뱀”(nahash bariah)이다(이사야 27:1의 토론을 보라). 이 사실을 미루어볼 때 라합과 리워야단은 동일한 존재이든지 혹은, “날랜 뱀”으로서의 유사한 성격을 가진 다른 존재일 수 있다.
3). “찌르신다”(「개역」)는 “무찌르신다”(「개역개정」), “쳐부순다”(「표준역」), “쳐부쉈네”(「공동역」)로 새롭게 제시된다. 여기에서 라합은 “찔림받아 죽어가는”(holalah) 뱀으로 나타난다(시편 89:10상 참조).
3. 욥기 9: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늘“
이 본문에서 “라합을 돕는 자들”('ozere rahab, 「개역」, 「개역개정」)은 “라합의 부하들”(「공동역」)과 “라합을 돕는 무리도”(「표준역」)로 새롭게 제시된다. 여기에서 “돕는다”는 단어는 전쟁의 맥락 속에서 자주 사용되므로, 단순한 도움이아니라 군사적인 도움(대상 5:20, 12:1; 대하 26:15; 겔 32:21; 시 89:20)을 의미한다. 따라서 명사형 “돕는 자들”은 “용사들”(cohorts, [NIV])로 번역하는 것이 나아보인다. 우가릿어에서도 gzr는 “영웅, 용사”를 뜻한다(Gordon, UT 463). 이 용어는 우가릿 신화에서 죽음의 신 모트(Mot)의 칭호 중 하나였다. 그는 “엘의 사랑을 받는 자, 용사”였다. 욥기 9:13에서 라합은 배후에 많은 용사들을 이끌고, 창조를 부정하는 세력으로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라합의 용사들”로 번역하길 제안한다.
4. 이사야 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개역」, 「개역개정」)는 「표준역」에서“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주의 팔이여”로 어순이 도치되며, 「공동역」에서는 “야훼여, 당신의 팔을 벌떡 일으키십시오”로 의역된다.
2). “라합을 저미시고”(「개역」, 「개역개정」)는 “라합을 찢던 그 팔을”(「공동역」), “라합을 토막내시고”(「표준역」)로 새롭게 제시된다. 원어(mahtebet)는 “나누다, 짜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동역」과 「표준역」의 번역이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3). “용을 찌르신 이”는 “용을 찌르시던 바로 그 팔”(「표준역」), “용을 찔러죽이던 그 팔”(「공동역」)로 연결되어 제시된다. 「표준역」과 「공동역」은 주님 자신보다 그의 능력, 즉 “팔”을 부각시키고 있다.
4). 여기에서 라합은 태초의 짐승으로 등장한다. 그는 옛날(kime qedem; 시74:12, 잠 8:23), 옛 시대(dorot 'olamim)에 존재하였으며, 주님의 왕권에 도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도전자 라합을 부수시고, 자르시고 동강내셨다.
5. 이사야 30:7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여기에서 “가만히 앉은 라합”(「개역」, 「개역개정」)으로서의 이집트는 “맥 못쓰는 라합”(「표준역」), “종이 구렁이”(「공동역」)로 새롭게 번역된다. NIV 역시 이 구를 “가만히 앉은 라합”(Rahab the Do-Nothing)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히브리어sabet를 “제거되다, 파괴되다”(암 8:4; 호 1:4등; BDB 992)는 뜻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 따라서 “파괴된 자 라합”(rahab hem sabet, Rahab the destroyed)이 더 적절한 번역으로 여겨진다.
III. 용(Tannin)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tannin은 모두 15회 나타나며 그 중 세 번은 정관사와 함께(사27:1; 겔 29:3, 32:2), 세 번은 복수형 tanninim(출7:12; 창1:21; 시 148:7)으로 나타나고 있다(Lisowsky 1958:1525). 이 단어가 정관사와 함께 나타나며 복수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용어가 바다의 괴물에 대한 총칭(the generic term)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리워야단이나 라합은 단 한번도 정관사와 함께 나타나지 않으며 복수형도 없다. 이것은 이 둘이 바다의 괴물에 대한 고유명사 임을 말해준다.
“꾸불꾸불한” 리워야단과 “교만한” 라합은 동일한 문맥에서 단 한번도 같이 나타나지 않지만, “용”(tannin)은 시편 74:13, 14와 이사야 27:1에서 리워야단과 함께 나타나며, 이사야 51:9에서는 라합과 함께 등장한다. 더구나 이사야 27:1에서는 “날랜 뱀”(nahas bariah)과 “꼬불꼬불한 뱀”(nahas 'aqallaton)이 “바다의 용”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뱀과 용 사이의 평행법에 대하여 모세의 지팡이는 뱀(nahas)이 되고(출4:3) 아론의 지팡이는 용(tannin)이 되는 것(출7:9)을 참조하라.
구약성경에서 용이 나오는 본문을 살펴보면, 셈족의 신화에 나오는 바다 괴물이 암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용은 원래 신화적인 바다의 짐승이었을 것이다. 우가릿 문헌에서 tannin은 정관사나 복수형이 없이 10번 나타난다(Whitaker 1972:619). UT 80:13과 300:2:10에서는 탄닌(용)과 연관된 짐승들 즉 bn. tnn, “son of Tannin”의 이름이 나타난다. UT 126:5:31, 32에서 탄닌(용)은 4번이나 나타나지만 본문이 깨어져서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우가릿의 탄닌은 원래 바다 괴물에 대한 고유명사였을 것이다. 또한 바다의 신 얌(Yam)은 우가릿 문헌에서 용으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여신 아낫은 바다의 신을 이긴 후에 'nt 3:38에서 “우리가 용을 완전히 자갈먹이지 않았는가?”하고 자랑하고 있다. UT 1001:1, 1003:8에서도 “바알이 탄닌을 죽였다”(ymhs)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1. 욥기 7:12
“내가 바다(yam)니이까 용(tannin)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mismar)?“
1). “바다”(「개역」, 「개역개정」, 「공동역」)는 「표준역」“바다 괴물”로 제시되나 적절하지 않으므로 “바다”로 통일되어야 할 것 같다.
2). “용”(「개역」)은 “바다 괴물”(「개역개정」), “바다의 괴물”(「공동역」), “깊은 곳에 사는 괴물”(「표준역」)로 새롭게 제시된다.
3). “나를 지키다”(「개역」, 「개역개정」, 「공동역」)를 “나를 감시하다”(「표준역」)로 수정하는 것은 적절하다. 여기에서 용은 바다와 함께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은 주님의 지속적인 감시 아래 있기 때문에(samar), 「표준역」의 번역이 적절하다. 용은 단지 하나님께서 지으신 거대한 바다의 짐승 정도가 아니라 주님과 갈등 속에 있고, 주님을 그를 지키고 결박하고 있다.
2. 예레미야 51:34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나(우리)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로 빈 그릇이 되게 하며, 용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1) “용”(「개역」)은 “바다의 괴물”(「표준역」), “바다의 용”(「공동역」)으로 다양하게 제시된다. 「개역개정」의 “큰 뱀”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2). “좋은 음식”(「개역」)을 “맛있는 음식”(「표준역」)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한다. 여기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용의 영상을 통하여 잔인한 바벨론 왕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바벨론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는 맥락 속에서(렘 51:1-58), 느부갓네살 왕의 잔악한 행동을 용으로 묘사한다(34-35 절). 즉, 바벨론의 왕은 그의 먹이를 삼키고 배를 채우고 또 토해내는 용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바벨론의 왕과 용 사이에 밀접한 유추가 있다. 전자는 지상의 왕이요 후자는 바다의 왕이나, 둘 다 함께 악의 세력을 대표한다.
3. 에스겔 29:3-4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 강 가운데 누운 큰 용이라.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집트 왕 바로를 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기 강 가운데 누운 큰 용”(hattannim haggadol)이라는 용어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라”(「개역개정」), “나일 강 가운데 누운 거대한 악어야”(「표준역」), “나일 강 가운데 엎드려 있는 큰 악어야”(「공동역」)로 모두 수정된다. 물론 본문이 이집트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악어”로 번역할 수 있지만, 오히려 “용”이나 “괴물”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다시 한번 32장에서 바로에 대한 애가를 읊조리면서 그의 성격과 운명을 혼돈의 짐승인 용으로 묘사하고 있다(2절). “너는 열국의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용(tannin bayyammim)이라. 강에서 뛰어 일어나 발로 물을 요동하여 그 강을 더럽혔도다”. 바로는 나일의 괴물로서, 그 강에서 뒹굴면서 물을 요동하고 맑은 강물을 뻘물로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 용은 마치 나일의 왕처럼 묘사된다. 우리말 새번역에서는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개역개정」), “나일 강 속에 있는 악어라”(「표준역」), “물 속의 악어”(「공동역」)로 제시된다.
4. 혼돈의 바다 짐승으로서 탄닌(용)의 성격 외에도, 이 짐승은 몇몇 구절에서 뱀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편 91: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밟고 누르리로다”에서 “밟다”(tidrok)와 “누른다” 혹은 “짓밟는다”(tirmos)가 평행을 이룬다. 또한 여기에는 “독사”와 “뱀”이 아름다운 평행을 이루고 있다. “독사”와 “뱀”(「개역」,「개역개정」)은새로운번역들에서 “독사”와 “살모사”(「표준역」) 및 “독사”와 “구리뱀” (「공동역」)으로 제시된다.
독사(peten)와 뱀(tannin)의 평행법은 우가릿 문헌에도 나타난다('nt III:37-38; Dahood 2:333).
listbm. tnn. isbhnh. mhst. 'qltn.
“진실로 나는 용을 재갈 먹였고
그를 침묵시키고 꼬부라진 뱀을 쳤도다“
우가릿 문헌에서는 Tannin이 “꼬부라진 뱀”보다 앞에 나오나, 시편 91:13에서는 독사 다음에 용이 나온다. “용” 혹은 “뱀”의 독성은 신명기 32: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hamat tanninim)이요 독사의 악독이라('akezar ro'se petanim)”에도 나타나고 있다. 성경의 탄닌이 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다른 여러 성경구절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참조하라(출7:9, 10, 12; 사27:1; 느2:13).
5. 창세기 1: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 보기에 좋았더라”
여기에서 개역의 “큰 물고기”(hattanninim haggedolim)는 “큰 바다 짐승”(「개역개정」), “커다란 바다 짐승들”(「표준역」), “큰 물고기”(「공동역」)로 새롭게 번역된다. 여기에서는 “탄닌”은 전혀 신화적인 색채를 띠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이 지으신 큰 바다의 물고기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성격이 완전히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즉 창세기의 저자는 고대 근동아시아의 신화에서 “신적인 존재들”로 여겨지는 것들을 비신화화 시키며, 자연스러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고 있다.
6. 시편 148:7
“너희 용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개역」의 “용(tanninim)과 바다(kol-tehom)”는 “바다의 괴물들과 바다의 심연아”(「표준역」), “큰 물고기도 깊은 바다도”(「공동역」), “너희 용들과 바다여”(「개역개정」)로 새롭게 제시된다.
이 본문에서도 탄닌의 신화적인 색채는 완전히 배제되고 그냥 자연스러운 동물로 나타난다. 시인은 하늘, 땅, 바다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하면서, 바다 동물의 대표로서 용(탄닌)을 부르고 있다. 용이 주의 영광을 찬양하는 모습은 시편 104:26에서 리워야단이 바다에서 유쾌하게 놀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결론
우리는 이상의 연구에 근거하여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짐승의 영상들을 아래와 같이 통일하여 번역하기를 제안한다.
(1) 리워야단과 라합은 고유명사로서 「개역」의 음역을 따르는 것이 적절하므로, “악어,” “큰 악어,” “악어처럼 생긴 바다 괴물,” “바다 괴물” 등으로 번역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2) 리워야단과 라합의 모습 중 nahas bariah는 “날랜 뱀”으로 통일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사 27:1; 욥 26:13).
(3) 리워야단의 모습 중 nahas `aqallaton은 “꼬불꼬불한 뱀”으로 통일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사 27:1).
(4) “바다에 있는 용”은 “바다 괴물”이나 “바다의 악어”나 “깊은 곳에 사는 괴물”보다 “바다의 용”으로 통일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사 27:1).
(5) “용”의 복수형 tanninim은 “용들”이나 “타닌들” 대신에 “용”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6) “용의 머리”는 “용의 머리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시 74:14).
(7) “라합을 돕는 자들”(욥 9:13)은 “라합의 용사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8) “라합을 저미시고”(사 51:9)은 “라합을 토막내시고”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9) “가만히 앉은 라합”(사 30:7)보다는 “파괴된 자 라합”이 더 강렬하고 원문에 가깝다.
(10) 창세기 1:21과 시편 148:7에서 히브리어 tanninim은 “용”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큰 물고기”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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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aker, R. E. 1972 A Concordance of the Ugaritic Literatu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