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낙지
오성인
얽힌 발을 지닌 물고기라 하여 옛말로 낙제어絡蹄漁라 불렸던 낙지는 수명이 고작 일 년입니다만 그 힘 하나는 허벌나지요 매년 봄, 가을에 열리는 투우 대회를 앞두고 싸움소들 강변 모래밭에서 연신 무거운 수레 끌고 둘레가 한 아름 넘는 나무 밑 둥치 뿔로 치고 걸며 맹훈련하는데요 워낙 고된 나머지 다리 풀려 주저앉기 일쑤이지요 이때, 소의 입에 큼지막한 낙지 하나 넣어주면 생각도 못한 호강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러나 모든 낙지가 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낙지 중의 낙지는 바로 꽃낙지, 겨울잠에 들기 전 영양 비축 들어간 요맘때가 맛이 가장 솔찬하여 요로코롬 어여쁜 이름이 붙었다나요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반드시 나는 놈 있다고 기절낙지란 놈은 그야말로 정점을 찍지요 낙지를 바구니에 담고 굵은 소금을 뿌려 사정없이 문지르면 글쎄 이놈이 더 이상 견뎌낼 재간이 없어 몽글몽글 거품을 내며 잠에 빠져드는 겁니다 사지가 절단나도 여간해서 아우성을 그치지 않는데 어찌 그리 새색시마냥 얌전해질 수 있는지 접시에 가지런히 누운 모습이 정돈된 드레스 같은데요 하여튼 이랬던 것이 삭힌 막걸리로 만든 초장에 들어가면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식은땀 흘리며 잠 깨듯 소스라치며 일어납니다 이러한 까닭에 눈으로 한 번, 그 맛에 두 번 놀란다고 하니 어떻습니까 쓰러진 소를 일으켜 세운다는 이야기가 결코 실없는 우스갯소리가 아닌 게지요
----애지, 2020년 봄호에서
일찍이 칸트는 “정부가 학자의 일에 관여하려면 비판의 자유를 허용하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왜냐하면 비판은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며, 비판없이는 그 어떠한 사상과 이론도 정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비판의 힘으로 종교의 가면과 권력의 가면을 벗겨냈고, 그야말로 눈부신 학문의 발전과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연출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연, 지연, 혈연, 상하의 신분과 계급장을 다 떼어버리고, 언제, 어느 때나 상호토론과 상호비판이 가능한 사회는 열린 사회이며, 저마다의 타고난 개성과 능력에 따라서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고급의 학자는 상승장군과도 같으며, 그의 승리는 가장 영양가가 풍부하고 맛 좋은 과일처럼 만인들의 공동의 승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스스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그 모든 것을 어떠한 댓가도 없이 전인류에게 헌납한 것이 도덕군자로서 칸트의 비판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성인 시인의 걸작품 [기절낙지]를 읽으며, ‘쓰러진 소가’ 아닌 전인류를 위해서 몸을 바친 세계적인 대사상가들을 생각해 보았다. 천하제일의 미모의 여성과 연애를 할 것인가? 오직 공부하고 글을 쓰며 학문의 즐거움을 향유할 것인가? 모든 사상가들은 니체처럼 매독에 결려 죽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문의 즐거움을 선택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냈던 것이다.
학자는 싸움소들을 일으켜 세우는 ‘꽃낙지’이고, 수많은 지식과 지혜들을 창출해낸 낙제어絡蹄漁이며, “사지가 절단나도 여간해서 아우성을 그치지 않는” 기절낙지이다. 학자란 쇼펜하우어처럼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하면서까지도 “전인류를 위해 봉사할 책임”이 있다. 진정한 학자가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명예와 명성이 아니며, 그는 자기 자신의 불멸의 업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를 않는다. 요컨대 학자는 수많은 박해와 곤궁과 음모에 의해서 소금 뿌려진 기절낙지이며, 그러나 그의 불멸의 업적에 의하여 문명과 문화의 횃불은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가 다같이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을 위한 기절낙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성인 시인의 [기절낙지]는 전라도 가락의 ‘이야기 시’이며, 기절낙지의 설화를 아주 재미있고 구수한 입담으로 창출해낸 시라고 할 수가 있다.
학자가 비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축구선수가 골을 못 넣고, 야구선수가 홈런을 못 치는 것과도 같다. 한국호는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썪었고, 표절과 뇌물과 부패의 바다로 침몰해간다.
25시. 더 이상 그 어떠한 구원의 손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