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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씨름을 호령했던 천하장사 이만기. |
“씨름판이 열린다.
징소리가 울린다. 동서남북 방방곡곡 팔도장사 다 모인다. 천하장사 만만세!!”
징소리와 함께 우레 같은 박수갈채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던 장사들의 포효, 우람한 몸짓이 이젠 어슴푸레하다. 관중으로 미어터져 나갔던 그 자리가 이 빠진 듯 듬성듬성하다. 개성이 강한
씨름꾼들이 모래판을 주름잡던 씨름의 옛 영화(榮華)가 아스라하다.
설날이나 단오, 한가위 명절이 돼야 ‘아, 씨름이
열리는구나’ 하고 그제야 실감하는 게 우리네 전통 민속경기인 씨름이다. 그 모습이 자못 처량하다. 올해 1월 27일, 대한체육회는 대한씨름협회를
관리단체로 지정했다. 체육회 산하 가맹단체가 ‘관리’로 전환되는 것은 그 단체의 행정 수장(단체장)이 장기간 공석이거나 사고로 인해 행정수행
능력이 없을 때 한시적으로 체육회가 관리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대한씨름협회가 유고(有故)라는 얘기다. 2월 5~10일 사이 충남 홍성에서
열린 ‘2016년 설날장사씨름대회’는 정부(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열었다.
그런 와중에 2월 1일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씨름을 사랑하는 순수 모임’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스스로 ‘순수’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절실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모임을 주도한 한 씨름인은 ‘씨름인들의 세 과시’라는 내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엘리트 체육(대한체육회)과 생활체육(국민생활체육연합회) 단체의
통합 일정에 따라 대한씨름협회와 생활체육씨름연합회 역시 타의에 의한 통합을 앞두고 있는데다 여전히 공석 중인 대한씨름협회장 자리를 놓고 물밑에서
‘샅바 싸움’을 하고 있는 씨름계 상황과도 그리 무관치 않은 모임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씨름이 행정의 기틀을 잡고
체계화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1927년에 조선체육회 산하 전조선씨름협회의 발족이었다. 그 후 씨름은 일제의 모진 압제를 견뎌내고
‘난장(亂場)에서 체육관’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대한씨름협회의
내홍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씨름선수 이준희(왼쪽)와 이만기. |
씨름은 야구, 축구 등 인기종목에 이어 1983년에 프로화
기치를 내걸고 ‘민속씨름’이라는 이름으로 그해 4월 14일부터 17일까지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장충체육관에서 열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그
대회에서 이만기라는 무명 선수가 초대 천하장사로 탄생, 1980년대는 가히 씨름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좋으리만치 융성을 이룩했다. ‘이만기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프로씨름은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등 이른바 ‘모래판의 3이(李)’를 인기 중심축으로
흥행이 고조되면서 한때는 천하장사 결승전 중계를 끊을 수 없어 주관 중계 방송사였던 KBS TV의 오후 9시 정규뉴스 시간을 잠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머지않아 안일과 방종, 밥그릇 싸움이 깔려 있는 끝없는 내부 분규로 시나브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7년 IMF
사태로 최다 8개 팀이었던 프로씨름단이 2003년에 3팀으로 오그라들었다가 그마저도 공중분해 되거나 실업팀으로 전환, 근대적인 씨름으로
‘복고(復古)’돼 버렸다.
프로씨름은 애초에 아마단체인 대한씨름협회 산하 민속씨름위원회라는 곁가지 조직으로 출발,
사단법인체인 한국씨름연맹으로 독립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씨름단의 잇단 해체로 한국씨름연맹 조직 자체가 형해(形骸)화,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한 뒤 대한씨름협회가 실업팀을 그러모아 프로씨름의 체급 이름을 그대로 본떠 장사대회를 열고 있는 이즈음이다.
씨름단체의 분화와 합종, 연횡의 역사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씨름협회의 행정 표류도 따지고 보면 그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분규의 원인도 내부에 잠복, (회장 선거 시기에 맞춰) 간헐천처럼
분출되고 있다.
어쨌든 씨름 행정의 중심인 대한씨름협회의 내홍은 씨름인들 간의 밥그릇 다툼, 비리 전력자들의 행정 전횡과
심한 편 가르기, 씨름의 미래에 대한 발전전략 부재, 전통 민속경기에 대한 정책당국의 소극적·미온적인 대처 등이 복합적으로 반작용, 부작용을
낳은 데 따른 것이다.
씨름계는 이만기(54·인제대 교수), 이준희(59·대한씨름협회 경기위원장),
이봉걸(59·민속씨름동우회 회장), 홍현욱(59·전 한국씨름연맹 경기본부장), 강호동(46·개그맨), 이태현(40·용인대 교수) 등 프로씨름
선수 출신들을 흔히 ‘민속씨름 세대’로 일컫는다. 그 민속씨름 1세대의 맏형 격인 이준희 경기위원장도 이미 나이 환갑에 이르렀지만, 변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만큼 세대교체가 더딘 곳이 또한 씨름계다.
현역 시절 깨끗한 매너로 ‘모래판의 신사’라는 별칭을 들으며
팬들의 굄을 아낌없이 받았던 이준희 위원장으로부터 씨름이 처한 갈등상황과 대처방안 등 ‘씨름의 어제와 오늘’을 간단하게 들어보았다.
“저희끼리 모여서 의사 발언하고 결정”
“결국 씨름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대한씨름협회는) 저(희)끼리 모여서 의사 발언하고 결정해요. 투표도 안 됩니다. 하다못해 이사회를
해도 저끼리 재청, 삼청 다 떠듭니다. 곪아 터졌어요. 협회 돈을 횡령해도 흐지부지되고, 10년마다 이럽니다.”
이준희
위원장이 언급한 ‘10년마다 일어나는 일’은 1983년 프로씨름 출범 이후 공교롭게도 10년 주기로 일어나는 대의원총회 폭력사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지난해 6월에도 대한씨름협회는 회장선거 때 원로 씨름인의 분신소동 등으로 난장판이 됐고, 결국 남병주 회장 당선자가 체육회의 정식
인준을 받지 못했다.
씨름은 살아 있는가. TV 중계 화면에는 관중석에 젊은이들이 눈에 별로 띄지 않는다. 여전히 중장년,
노인들 위주로 관객층이 구성돼 있다.
이준희 위원장은 “씨름 자체는 아직까지는 살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는
솔직히 바닥에 떨어져 있다. 팀은 지자체가 하나씩 만들어 이번 대회(2월 설날대회)에는 18개 팀이 출전했다”며 “팀당 선수를 7~8명으로 보면
150여 명이다. 옛날 프로씨름과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저변은 살아 있다”고 설명했다.
씨름 인기의 복원 가능성은
한시적으로 관(官) 주도로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게 이준희 위원장의 생각이다.
“현재는 어차피 씨름의 자생력이 없으니 정부의
재정과 행정지원을 받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주도권을 못 놓겠다, 칼자루를 계속 쥐고 있겠다는 것은 자리 욕심일 뿐이죠. 문제가 있어도
자기네가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한 해법은 없습니다. (대한씨름협회를 좌지우지한 사람들은) 문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인적 쇄신안이 나와도
‘우리끼리 똘똘 뭉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판을 굳이 키울 필요가 없다는 게 그네들의 생각이죠. 파이를 키우면 외부 힘이 들어와 통제가 어렵게
됩니다. 적당히 해먹자는 것입니다. 개인회사로 생각하는 식이죠.”
그의 말은 신랄했다.
“전성기? 그런
시대는 안 옵니다. 예전엔 장충체육관에 사람이 미어터졌어요.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져 돌아갔었죠. 그때도 씨름인들이 차고앉아 행정은
엉망이었어요. 암만 제도가 좋고 잘해도 사무실이 엉망인데… 앞에서 물건 잘 팔고 뒤로 밑지는 격인데… 제도적인 뒷받침이 안 되니까 비전도 없고…
지금은 돈이 없으면 행사도 못 합니다. 언론 홍보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없어요. 그때(1980~90년대 프로씨름 시절)는 방송 붙들고 중계권료도
받았는데, 지금은 돈 주고라도 방송 잡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합니다. 로비해서 풀면 된다, 이런 식입니다. 턱도 없는 옛날
방식이에요.”
이준희 위원장의 말은 이어진다.
“자생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길러서 방송이 원하는 걸
줘야 합니다. 안 되는 대회는 빼야 해요. 민속씨름 세대가 협회에는 없어요. 유일하게 나 혼자 있지만 아웃사이더죠.”
“지금은 씨름 자체를 보지, 선수를 안 본다”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항구에 배가 들어왔던’ 호시절을 회고했다.
“1980년대 프로씨름 때는 시청률이 50%를 넘었어요. 나
같은 경우 기사들이 택시비도 절반은 안 받았습니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죠. 그때는 씨름 자체도 보았겠지만 이준희, 이만기, 이봉걸을 보러
왔어요. 지금은 씨름 자체를 보지, 개인은 안 봅니다. 선수 개인의 인기가 없어 젊은 팬이 없어요. 그저 씨름을 보러 옵니다. 야구는 누구 팬,
특정인을 보러 가지 않나요? 개인 마케팅이 필요합니다. 실업팀 선수들이 자체 상금, 포상금도 받지만 실제로 외부 인기는 없어요. 전국체전 때문에
팀을 붙들고 있지만 만약 전국체전에 못 나가면 지자체 팀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어요.”
씨름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키우고
인기를 되찾으려면, 전통 민속경기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프로씨름처럼 조직을 분리해서 전담기구를 둬야 한다. 야구나 축구처럼.
“돈, 행정을 떠나 민속씨름을 분리해야 합니다. 정 안 되면 대한씨름협회 산하에 두면 되죠. 지금도 실업팀은 몇몇 선수에게는 계약금과
연봉을 줍니다. 못 받는 선수도 있지만…. 분리해서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프로화가 가능해질 겁니다. 3~4명의 선수로 팀을 꾸리면 개인기업도
(창단이) 가능할 텐데, 협회가 팀 엔트리를 제한하는 말도 안 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제도적인 발전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문호를
개방하고 상금도 더 줄 수 있어야 해요.”
결국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는 문제로 아퀴 지어진다. 자칫 ‘다람쥐
쳇바퀴’ 논쟁으로도 흐를 수 있다. 인기가 올라가야 광고 붙고 (예전처럼 타이틀스폰서를 물색해) 재원이 마련되면 살이 찔 텐데, 제작비 오히려
주고 중계해야 할 판이다.
그래서 나오는 얘기가 정부의 행정, 재정지원이다. 반향 없는 메아리만 울리다간 허송세월할
뿐이다.
일본의 스모는 진작 외국인 선수들에게 문호를 개방, 안착시켰다. 우리의 천하장사 격인 요코즈나도 하쿠호라는 몽골
태생이다.
이준희 위원장은 “공감대는 형성돼 있지만 막상 해도 데려올 선수가 있을까. 투명하게 돈을 써야 하는데, 제도적인
개선, 바른 행정을 할 수 있는 인력의 문제로 귀착된다. 자금 확보, 행정 인력 확보가 우선”이라고 결론지었다.
전두환 정권의 막강한 힘으로 프로씨름 출범
천하장사 출신으로 민속씨름동우회 회장인 이봉걸. |
‘이만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이만기라는 걸출한 씨름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한국 씨름의 부활과 융성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1980~1990년대 한국 씨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이만기의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1983년 4월 1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에서 이만기가 초대 천하장사로 탄생했다. 애초에 천하장사는 홍현욱, 이준희, 이봉걸 등 기존
강자들의 다툼으로 결판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1962년생인 이만기는 당시 경남대 재학생으로 21세의 어린
나이에 모래판 천하를 단숨에 평정했다. 준결승에서 이준희를 2-1로 물리친 이만기는 결승에서 최욱진을 3-2로 꺾었다. 그때만 해도 이만기라는
이름은 씨름판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대 초 씨름계 일각에서 ‘민속씨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한국민속씨름협회를
창설, 프로화 작업에 나섰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씨름은 지방에서 아주 성행했다. 특히 씨름 본고장인 대구에서 열리는 경기에는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이에 고무된 대구 지역 인사들이 씨름 프로화에 공감, 손을 잡았다.
프로씨름은 당초 경북 의성
출신인 씨름인 김태성이 주동이 돼 1981년 11월 30일 ‘한국민속씨름협회’라는 이름으로 서울시교육위원회로부터 창립허가를 받아놓고 있었다. 그
조직이 모태가 돼 럭키금성 그룹 허씨 일가의 허완구 대왕육운 대표를 회장으로 한 ‘한국민속씨름협회’가 정식 발족, 천하장사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씨름 프로화에는 프로야구가 그랬듯이 전두환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뒷받침이 됐다. 특히 12·12쿠데타 주역 중
한 명인 이학봉은 전두환 정권 초창기 정무수석으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는데 프로씨름 출범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공영방송 KBS가
주관방송으로 참여, 씨름 활성화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출범 당시 한국민속씨름협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보면 그야말로
쟁쟁하다. 회장단은 허완구 회장을 필두로 김해수(씨름인, 대구 삼화건설 대표), 김동수(인천 거성산업 대표)가 부회장, 김태성이 전무,
김수근(공간 건축 대표), 이홍구(서울대 교수), 김정룡(서울의대 교수), 변종하(화가), 이어령(월간문학사상 주간), 전성우(보성고교 교장),
박세호(KBS 체육국장) 등 유명인사들이 이사로 참여했다.
한국민속씨름협회는 제1회 천하장사대회를 앞두고 1983년 3월
16일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프로 출범을 공식 선언했다. 당시 협회의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1983년 한 해 총 상금만
4억7520만원이었고, 천하장사 우승 상금은 1500만원이었다. 이만기가 받은 1500만원은 당시 물가로 따져 서울 강남 지역 30평형대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선수들은 청룡(1군)과 백호(2군)로 나누어 성적에 따른 승강제를
실시했고, 체급은 우리나라 명산의 이름을 따서 높이 순으로 4체급(태백급 80kg 이하, 금강급 90kg 이하, 한라급 105kg 이하, 백두급
105.1kg 이상)으로 나누어 대회를 치렀다.
한국 씨름의 몰락
원인은…
민속씨름판의 세대교체를 이끈 최홍만, 박광덕, 김영현(왼쪽부터). |
이만기의 천하장사 탄생과 은퇴는 바로 한국 프로씨름의
융성·몰락과 그 궤를 거의 같이한다. 이만기의 등장은 씨름계의 변혁이었다. 182cm, 98kg으로 씨름꾼으로선 그리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타고난 유연성과 순발력, 허리(배지기, 들배지기, 잡채기 등), 다리(안다리걸기, 밭다리걸기, 호미걸이 등), 손(무릎치기) 재간이 두루 뛰어나
그와 필적할 만한 상대가 드물었다.
1983년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이만기는 1991년 3월 25일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모래판을 떠났다. 만 11년에 걸친 그의 모래판 경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영광의 자취 그 자체였다. 민속씨름판에서 그가
거두어들였던 타이틀은 천하장사 10차례, 백두장사 18번, 한라장사 7번, 기타 대회 7번 등으로 모두 42개의 황소 트로피를 탔다.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던 수식어는 ‘모래판의 황제’ ‘만기(萬技)의 만기(萬基)’ ‘씨름천재’ ‘씨름달인’ 등으로 극찬 일색이었다.
이만기가 은퇴하게 된 것은 그의 마산상고 직계 후배였던 강호동에게 패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의 시대가 끝나면서 씨름판의 흐름은 몸무게
중심, 이를테면 기술 씨름이 아닌 무게 씨름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김영현과 최홍만같이 220cm에 육박하는 장신 씨름꾼들이 득세를 한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지루한 장기전으로 인해 관중의 흥미가 뚝 떨어졌다.
한국 씨름의 침체, 심하게 얘기하면 몰락은,
물론 경기적인 요인 외에도 1997년 외환위기의 국가적인 재난이 덮쳤기 때문이었다. 한때 8개 팀으로 흥청거렸던 프로씨름이 2003년 말에는
겨우 3개 팀 50명의 등록선수로 지탱하긴 했으나 현저히 위축됐다. 그러다가 2008년 10월을 고비로 프로씨름을 관장했던 한국씨름연맹은 소속
팀이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소멸,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씨름 행정의 주도권은 그동안 한국씨름연맹과 대립각을
세우며 티격태격했던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인 대한씨름협회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 씨름은
자정과 발전 노력의 부족으로 시나브로 골병이 들어 있었다. 필자는 2003년부터 1년 남짓 한국씨름연맹의 사무총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연맹의 수장은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인 이호웅이었다. 막상 씨름조직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작은 파이를 놓고 자리다툼이 막심해 서로 헐뜯고 할퀴는
진흙탕 속이었다. 신생팀 창단이 조직의 살길로 여겨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연맹 수장의 힘을 얻고자 했으나 진정성 없는 건성 조치만 돌아왔다.
결국 그 조직은 파탄이 났다.
2004년 말과 2005년 초, 프로씨름의 붕괴를 재촉하는 두 가지 상징적인 사태가 잇달아
일어났다. 3개 프로씨름단 가운데 한 축을 이루고 있던 LG투자증권씨름단이 2004년 12월 6일 팀을 해체한 직후인 12월 13일, 천하장사
출신으로 LG 씨름단의 간판선수였던 최홍만이 이종격투기 K-1 진출을 선언했다. 최홍만의 격투기 전향이 불러온 파장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 후
이태현, 김영현 같은 프로씨름의 기둥 선수들마저 덩달아 이종격투기 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이탈은 초라해진 씨름의 위상을 여지없이
추락시켰다.
2005년 3월 4일에는 신창건설씨름단과 해체한 LG씨름단 선수들이 한국씨름연맹이 자리 잡고 있던 장충체육관
앞에서 집단으로 상복(喪服)을 입고 시위를 벌이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됐다. 선수들은 “연맹의 집행부는 물러가라. 씨름을 살려주세요”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그러나 선수들의 외침은 반향 없는 메아리로 그쳤다. 선수들의 ‘상복시위’는 사실상 프로씨름의 조종을
울린, ‘장송곡’이나 다름없었다.
2005년 7월 말에는 현대삼호중공업씨름단과 더불어 어렵사리 팀을 끌어왔던
신창건설씨름단마저 팀 해체를 선언, 프로씨름은 공중분해 하고 말았다.
韓민족과
씨름 씨름은 ‘은근과 끈기’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가장 오래된 민속경기이다. 씨름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도읍지에서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을 각저총(角觝塚·씨름무덤)이라 부르는데 무덤 안쪽 벽에서 씨름 벽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그려져 있듯이 씨름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한반도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씨름’이라는 말이 현존하는 한글 활자의 최고본(最古本)인 《석보상절》(1447년)에 ‘실흠’으로 표기된 것만 봐도 그 뿌리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씨름’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 민족의 삶이 배어 있다. ‘씨름한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대상을 극복하거나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온 힘을 쏟는 것’을 ‘씨름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씨름은 농경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공격, 방어, 종합기술 등 전수돼 내려오는 기술만도 106가지인데, 그 가운데 호미걸이, 연장걸이, 콩꺾기, 자반뒤집기, 낚시걸이 등 농어업 관련 기술용어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씨름대회의 우승 부상은 으레 황소였다. 이 또한 농경사회의 전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씨름은 생존의 한 수단인 원초적인 힘겨룸에서 출발하여 차츰 놀이의 틀을 갖추며 발전돼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들에게 씨름은 화합과 단결을 추구하는 평화의 경기로 자리매김하였다. 주요 명절이나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씨름을 통해서 하나 된 마음으로 그 자체를 함께 즐겼다. 특히 단오나 한가위 같은 민족의 큰 명절에는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씨름판이 열렸다. 씨름의 기본적인 동작은 ‘상대를 끌어당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김의 미학이 배어 있다. 이는 ‘운명의 끈’인 샅바를 착용하고 승부를 가리는 씨름 특유의 경기방식에 기인한다. 샅바를 잡고 몸을 서로 밀착시켜 승부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 씨름이다. 일본의 전통 씨름인 ‘스모’가 ‘밀어내기’를 승부의 동인으로 삼는 것과는 딴판이다. |
씨름은 씨름이라야 제맛이다!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시사했듯 프로씨름은 더
이상 치유하기 어려운 중병에 걸렸다.
급기야 2006년 9월 4일 한국씨름연맹이 느닷없이 천하장사 출신 이만기를 영구제명
처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만기의 징계 파동은 잇단 팀 해체로 현대삼호중공업 달랑 한 팀만 남아 가뜩이나 위축된 민속씨름의 입지를 더욱
오그라들게 만든, ‘엎친 데 덮친’ 격의 폭거였다.
당시 한국씨름연맹은 이만기의 징계 사유로 ‘김재기 총재에 대한 명예훼손과
근거 없는 비방’을 들었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로는 민속씨름동우회장을 맡고 있던 이만기의 연맹을 향한 잇단 쓴소리가 연맹의 정체성을
흔드는 데 대한 괘씸죄였다는 게 중론이었다.
한국씨름연맹의 마지막 명줄로 남아 있던 프로팀 현대삼호중공업씨름단이 2008년
10월 20일 연맹에 탈퇴서를 제출, 그 이후 연맹은 대회를 치를 수 없는 고사상태로 몰리며 장기간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생전 이런 글을 썼다.
〈…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스포츠가 씨름이다. 이렇게 말해 놓고 나니 좀 우스워진다.
스포츠라는 말은 듣기에 궁합이 안 맞는다. 운동이라고 해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냥 씨름은 씨름이라고 해야 제맛이 난다.…〉(에세이집 《서
있는 여자의 갈등》 중에서)
씨름의 요체를 아주 쉽고도 적확하게 표현한 글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힘이
센 사람을 일컬어 ‘장사(壯士)’라고 불렀다. 장사는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의 통칭이기도 하다. 1959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대회 때
처음으로 장사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으뜸가는 장사에게 ‘천하장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하장사는 장사들 중에서도
가장 센 장사를 이르는 말이다.
이런 씨름이 이제는 ‘시름에 겨운’ 민속경기, 모래성으로 변해버린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됐다. 2012년부터 단오(음력 5월 5일)를 씨름의 날로 정했다. 씨름이 한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민속 스포츠임을 공인한
것이지만, 공허하다.
작가 황석영의 소설 《장사의 꿈》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 나는 역시 씨름판에
나서는 게 제일 신이 나더라. 앞에 떡 버티고 선 놈이 어떻게나 정다워지는지 몰라. 아라랏차차…. 고함이 신명 나고 소름 끼치게 즐거운 울림이
귀에 쟁쟁하구먼.…〉
귀에 쟁쟁한 장사의 고함, 혼을 일깨우는 그 소리가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3&nNewsNumb=20160319766&nidx=19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