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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6:1-3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서두에서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린 혜택을 묵상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물론 다윗으로서는 자신의 예배가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께 굴복하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이 미신과는 아무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그 이유는 완전하고 본질적인 행복은 하나님 안에 쉴 때만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 다윗은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이 선한 것에 결코 부족을 느끼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1. 먼저 "다윗의 믹담" 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 '믹담'의 의미에 대해 유대 주석가들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합니다.
혹자는 그것이 금붙이나 보석인 것처럼 그 어원을 (카탐)으로 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당시에 아주 흔하게 사용된 노래의 시작으로 생각합니다.
다른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종류의 가락으로 보는데 우리는 이 견해를 택하고 싶습니다 이 단어에는 '금, 가장 좋은 금' 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이해하는 자들은 본 시편이 금 글자로 쓰여지기에 합당한 것이라는 점을 지칭하는 뜻에서 이 명칭이 여기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자는 이런 명칭으로 구별된 시편들은 때때로 금으로 쓰여져서 성전에 걸려졌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믹담' 이라는 단어가 '표시하다' '새기다' 의 뜻을 갖는 (카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본 시편이 귀하고 오래 지속되는 기둥에 새겨질 만하여 영원히 기억하기에 적합한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려 합니다. 이것이 칠십인역의 의미로서 이 역본은 이것을 (스텔로그라피아;기둥이나 비에 새겨진 글씨)로 번역합니다.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든 그 명칭은 이 성스런 시에 꼭 맞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Mant 감독은 "그것은 묘비로서 우리 구속주의 무덤에 쓰여질 수도 있었고 승전비로서 떠나간 영혼들의 지역에서 그 누구에 의해 노래 불려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느 경우에서나 이것은 충분히 '황금의' 작문, 곧 그 주제에 있어서 고귀하고 그 구조에 있어서 아주 유쾌한 '은 쟁반의 금 사과' 와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본 제목 가락과(tune) 관계된 것으로 보는데 이 점에서 칼빈은 이 단어와 기타 시편 제목으로 나오는 이상한 단어를 옛날 멜로디의 명칭으로 보는 Aben Ezre의 지지를 받습니다.
시편 16 편
2. 본문 1절은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자주 그랬던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보호자로 나타나실 것을 청합니다.
사실 삶과 죽음에 있어서 우리의 안전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의뢰하다' 는 말씀은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확고부동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울 준비를 갖추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내맡기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 자신의 보호아래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윗은 이 신뢰에서 힘을 얻은 후 그를 괴롭혔던 모든 역경의 폭풍 속에서도 확고부동하게 버틸 수 있었습니다.
3. 본문 2절은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그대는 여호와께 아뢸지어다 - 칼빈)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칠 수 없다고 진술함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유한한 인간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어떤 봉사로도 하나님의 호의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윗은 용기를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과 봉사를 용납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들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점을 단언합니다. 이 임무에 더 효과적인 열심을 갖게 하는 뜻에서 다윗은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아뢸지어다' 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여성으로 오직 영혼과만 관련됩니다.
이 단어를 '그대는 아뢰었도다' 라고 과거 시제로 읽는데 우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에 지속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씀하는 의도는 '나는 정말 하나님이 내게서 아무 유익이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내 마음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우리가 한 마음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는 분명히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우리의 정당한 소유주와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묶여있다 생각할 때 자신이 기뻐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에게 요청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능력과 지배권을 돌림으로써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점을 선언합니다.
이 절에 담긴 특별한 내용은 시편 기자 다읫이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점입니다.
시편 16 편
'나의 선행이 당신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칼빈)
주석자들은 이 마지막 소절을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알레이카)가 '당신 위에'로도 번역될 수 있다 해서 혹자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이끌어 냅니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선행에 의해서이든 우리에게 의무를 지거나 우리에게 빚을 지지 않는 것으로 보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 이라는 용어를 수동적인 의미로 보는데 이것은 마치 다윗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은 무엇이든지 그가 하나님께 지운 의무나 자신이 소유한 공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증한 것처럼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에 더 넓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곧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노력한다 해도 하나님께 무슨 혜택을 도무지 가져올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선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분에게만은 완전한 충족이 있어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모든 선한 것이 텅 비어 있고 부족해서 하나님께 후하게 보여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으로부터 우리가 앞에서 다룬 다른 사항, 곧 인간들이 자신들의 무슨 공로에 의해 하나님에게 의무를 지우며 하나님을 그들의 채무자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따릅니다.
이 강론 요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반드시 모든 오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무슨 선한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한다 해서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몫에 해당하는 존귀의 핵심 부분을 그분으로부터 탈취해 버리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봉사가 모두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 겸손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용납을 얻어낼 달콤한 향수의 향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4. 본문 3절은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방금 고찰한 문장에 이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다윗이 덧붙이는 것으로 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이 자신에게 미칠 수 없기에 자신 대신에 성도들을 대치해 주시고 그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베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상호간에 선을 행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올바르고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16 편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라고 말씀하심같이(마5:45), 우리는 물론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들에게까지 우리의 사랑을 확대해야 옳습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들보다 성도들을 더 좋아하며 그들을 더 높은 지위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거의 모든 주석가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이 가르침이 다윗의 이 말에 담겨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윗이 약간 한 걸음 더 앞서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의 독실한 예배자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동료와 친구가 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동일한 마음과 열성으로 그들의 한 아버지를 섬기고 그를 부르기 위해서 형제적인 단합의 띠로 함께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빚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고서, 하나님께 바칠 것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고백한 다음에 그의 마음의 애정을 성도들에게 집착시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의인들의 집회에서 칭송되고 찬양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의인들은 하나님의 권위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함께 한 마음으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가족으로 입양하게 한 자들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진지하고 마음을 다하는 중에 스스로 의인들의 사회와 관련을 맺으며 경건한 거룩한 띠로 함께 연합되어 그들과 함께 형제적 선의를 돈독히 하고 유지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제사가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바로 여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특수한 백성이 되기 위해 세상의 더러운 오염으로부터 그들을 구별하는 성도들의 교제가 있습니다.
다윗이 "땅에 있는 성도" 라고 명백히 언급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우리를 하나님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할 그의 영광에 대한 특출한 표적으로 눈에 보이는 표지판이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는 것은 그들의 본을 통해서 우리가 자극을 받아 하늘의 생활을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동일한 이유에서 시편기자는 그들을 "존귀한 자"로 부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의 광채를 비춰 보여주는 의와 거룩보다 우리에게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앞 시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되고 독실한 종들을 높이 평가하고 귀하게 여기며 우리들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 옳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진정한 탁월함과 위엄이 있는가를 현명하게 생각하고 세상의 헛된 광채와 기만적인 허세가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시17:1-4 여호와여
본 시편에는 다윗의 원수들의 잔학한 교만에 대한 슬픈 하소연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그들이 자기에게 그처럼 잔학한 짓을 할 만한 일을 그들에게 행한 일이 없기에 그처럼 자기가 매정하게 박해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호자로서 능력을 발휘하셔서 자신을 구출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본 시편의 제목은 어느 특정한 시기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여기서 사울과 그의 동료들을 두고 불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여호와여 나의 의를 ; 칼빈)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입니다
1) 다윗께서는 자신이 명분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제시함으로 시편을 시작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외치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고한 사람들이 압박을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에는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직함' 을 '정직한 기도'로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다윗이 자신의 정직성을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자신과 원수들 사이의 재판관으로 세워 놓고 자신의 사건을 인식하고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종결하실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인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될 경우 당당히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무죄성을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실한 자들에게 선한 양심의 증거가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그의 말에 계속해서 간절한 기도를 덧붙입니다.
신앙 없는 사람들도 정당하게 선한 명분을 가진 것으로 종종 허풍을 떨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큼 자기 양심의 인준만으로 만족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신앙과 기도를 통해서 어떤 위로를 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런 자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모욕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를 악물고 오만불손하게 견디는 것입니다.
시 17 편
이 세상에는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자신들의 명분의 선함에 의지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옹호하고 유지하여 주시도록 위탁합니다.
그리고 어떤 역경이 닥치든지 하나님께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귀절은 다윗이 공정하게 행동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를 비난할 어떤 여지도 제공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원수들에게 부당한 괴롭힘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자비롭게 내려다보실 것을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께 특별히 이렇게 해주실 것을 바란 것은 다윗이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는 가운데 좋은 소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윗께서는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들으소서' 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라는 말씀들이 동일한 내용을 뜻합니다.
'부르짖음'과 '들으소서' 그리고 '주의하소서' 나 '귀를 기울이소서' 라는 말씀 등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에 대한 반복은 서로 다른 표현을 통해서 영혼의 강렬성과 진지성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위선자들이 자신들을 치켜올리는데 있어서 거만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큰 신뢰의 증거를 보여준다면서 큰소리로 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거짓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다윗은 그의 외침과 기도를 자신의 죄악을 가리는 구실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를 통해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정직하고 흠 없는 삶을 살려고 부단히 애써야 하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로 인해서 혹 우리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난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악인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마다 동일한 성령께서는 기도에 몰두할 것을 권고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선한 양심의 증거만 의지하고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사람은 자신의 소송을 하나님께 아뢰지 않는 자입니다.
그것을 재판하고 종결짓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께 속한 존귀를 박탈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또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인위적인 웅변의 장식을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여기서 배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정교한 수사학과 최선의 우아함이란 바로 순수한 소박성에 있습니다.
시 17 편
2. 본문 2절은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입니다.
1) "주 앞에서" 라는 말씀은 '주의 면전으로부터' 또는 '주의 면전에서' 입니다.
다윗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송의 옹호자로서 일어나시지 않는다면 무고한 자신이 여러 가지 중상모략에 의해서 압도되고 말 것이요, 죄책이 있고 정죄 받은 사람으로 멸시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송을 심리하면서 가질 재판권에는 자기에게 불리하게 퍼지고 있던 거짓의 음흉한 날조가 암암리에 대조됩니다.
다윗의 말은 마치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재판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순수한 마음과 선한 소송이 있는 만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꺼려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평을 '살피소서' 라는 표현 역시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경이시라는 뜻이 아니라 그분께서 인간들의 사악을 눈감아 주시지 않고 계시며, 스스로는 변호할 수단이 없는 자들이 부당하게 악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실 때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입증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을 뿐입니다.
3. 본문 3절은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이 말씀은 '주여 내 마음의 모든 은밀한 느낌과 생각을 이해하시는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시험하는 것이 주님의 특수한 대권(大權)인만큼 제가 이중 인간이 아니요 속으로 아무런 기만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옵니다' 라는 식으로 충분하고도 적합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윗은 부당하고 거짓되게 죄악이 있는 것으로 비난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손에서 공의나 인정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 문제에 있어서 재판관이 되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 일을 무모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다윗은 마음의 은밀한 곳까지 샅샅이 뒤져보는 대권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겉모양 때문에 속아 넘어 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공평한 조사의 대상으로 내어놓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신 시간이 '밤' 사이인 것으로 말합니다.
인간이란 자신의 동료 인간들로부터 소외될 때, 그렇지 않을 경우 숨겨지고 말 죄악을 보다 더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시 17 편
그렇지만 반대로 인간들이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수치를 느끼며 이것이 우리 눈을 가리는 휘장이 되어 우리의 잘못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오, 여호와여 밤의 어두움이 양심을 더욱더 자세하게 들추어내며 그때 모든 가식이 사라지게 되는 만큼, 그리고 인간의 성향에 따른 선악간의 느낌이 보다더 자유롭게 드러나는 것은 그것을 보고 판단을 내릴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인 만큼, 하나님께서 이때 저를 감찰하신다면 제 마음에 아무 위장이나 기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생각들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차근차근하게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감찰을 받겠노라고 용감하게 자신을 제시하는 다윗의 정직성이 얼마나 위대한가 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외부적인 죄악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품고 있는 은밀한 악의마저 없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주장처럼 그가 그럴듯한 핑계로 자신의 악의적인 의도를 숨기거나 마음에 품기는커녕 자신의 말이 마음 속에 오고 가는 것에 대한 솔직하고 숨김없는 표현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 하리이다" 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4. 본문 4절은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 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따라서 이루어진 인간들의 행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칭송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인간의 행위를 용의주도하게 가려내는 명석하고 재간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시편기자의 "강포한 자의 길"이 무엇인가 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다윗의 원수들과 관계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삼가서'(지켜보았다 ; 칼빈)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다윗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사악하고 악의적인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자신을 자극했지만 그래도 다윗은 항상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지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언제나 상대에게 폭력을 행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일을 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시 17 편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들의 행사가 무엇이든 원수들이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신경을 건드릴 때, 그들이 자기에게 한 그대로 되 갚을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집착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입에만 매달렸습니다.
사실 인간들이 우리에 대해서 행동하는 그 방법을 무시해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시거나 하라고 하시는 것만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심각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시험인지 모릅니다.
천성적으로 온유와 인정이 많은 사람들마저도, 곧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아무에게도 상처를 입힐 생각을 않는 사람들이라도 누가 신경을 건드리려면 맹목적인 격정에 휩싸인 나머지 앙심을 품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모든 정의와 공평이 뒤엎어지는 때는 혼돈이 너무도 눈을 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리들과 같이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악의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격동시켜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되 갚도록 유혹할 때 자아를 지배하는 훌륭한 규칙을 갖고자 한다면, 다윗의 본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눈을 거기에 고정시키는 법을 배우도록 하십시다.
이런 수단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맹목적인 데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정을 그 계명으로 제지할 뿐 아니라 그의 약속에 따라 인내하면서 그 감정을 단련하실 것이라는 점을 알고서 언제나 사악의 길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지 명령을 통해서 우리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막으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를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보복을 자신의 손으로 행사하실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고 권면하십니다.
시 17 편
시17:5-6 나의 걸음이
본문은 주께서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제 다시 주께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범죄치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엄밀히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범죄한 원인은 그 범죄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든지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애착하지 않았던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이 위험한 때에 무기를 휴대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에는 성령의 검, 곧 성경 말씀을 단단히 마음에 붙들어야 되고 동시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여 받아야 됩니다.
무거운 돌은 그것을 던진 자의 힘에 비례하여 멀리 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도와 주시는 그만큼 죄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자(Beza)는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시작하신 일을 완전히 이루사 항구에 거의 이르러서 파선 당하는 일을 면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의 시험이 가장 위태한 때는 ① 그 시험이 때 맞추어 속이는 형식으로 올 때요, ② 그 시험이 계속하여 올 때요, ③ 그 시험이 강력하게 올 때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기의 무죄함을 말한 끝에(4,5) 필연적으로 이런 애원을 말합니다(6). 응답하실 줄 알고 부르짖는 기도는 또한 과거의 체험에 의한 것입니다. 지난 날의 경험에 의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을 확신하는 기도는 귀합니다.
1. 본문 5절은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입니다.
'주의 길'을 하나님의 율법의 가르침으로 보면 그 의미가 명백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공격한 더없이 심각한 시험의 와중에서도 진리를 따라서 한결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의를 실천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자신의 연약성을 의식하고 있기에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깁니다.
그러는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 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할 능력을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다윗의 말은 마치 자기가 '지금까지 내가 주님의 인도 아래 올바른 길로 전진했듯이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내 발걸음이 미끄러지지 않게 지켜주실 것을 비옵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은혜에 뛰어날수록 더욱더 그는 넘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덕과 힘이라도 우리 안에 경솔을 야기시킬 육적인 확신을 낳으려는 것이 사단의 일반적인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시 17 편
우리는 이런 의미를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지만 다윗이 여기서 문제의 지금 모습이 제아무리 어두워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에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 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말은 '주님께서는 제가 올바르고 진지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시오니 모든 사람들이 주께서 나의 보호자와 안내자가 되시어 내 원수들의 뜻에 따라 짓밟히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을 정도로 나를 다스리소서' 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길"이란 우리의 생활을 규제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올리는 그 능력과 지켜주시는 그 보호를 뜻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이런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만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실 때 또한 우리의 모든 일이 번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대목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지탱되지 않을 경우 순간 우리를 위협하는 무수한 역경과 우리를 멸망시키고 말 위협과 관련됩니다.
2. 본문 6절은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입니다.
이 동사는 과거 시제인데 여기에는 계속적인 행동과 현재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틀림없이'라고 번역한 (키)라는 단어에는 '왜냐하면'의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로 이 문단을 이해한다면 이 말은 다윗이 기도할 용기를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하듯이 이 동사의 시제를 바꾸는 것이 더 좋게 여겨질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내가 체험해 왔기에 나는 앞으로도 기도할 것입니다' 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더 단순해 보이는 해석을 택했습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보건대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을 부름으로 용기를 내며 생기를 얻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는 마치 다윗이 '내가 주께 부르짖고 있으니, 오 하나님이여 나의 기도를 틀림없이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곧 이어 다윗은 자기가 복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품었다고 우리에게 말한 그 복을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시 17 편
시17:7-9 주께 피하는 자를
다윗의 간구가 계속됩니다.
본문 7-8절은 "(7)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8)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입니다.
(하플레)가 어떤 때는 '경이롭게, 또는 뛰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또 어떤 때는 '구별해서 떼어놓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 두 의미는 이 문단에 적합합니다.
시편31편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특별한 보화처럼 창고에 '쌓여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아주 곤경에 처하며 만사가 절망적인 것처럼 보일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그것을 꺼내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를 구별해서 따로 놔두다'는 번역을 택한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고서는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그 특수한 은혜를 하나님의 종 다윗에게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들을 모두 무분별하게 위험에 처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일의 서로 다른 결말을 통해서 두 부류에 대한 그의 관심을 표하십니다.
곧 하나님은 쭉정이와 알곡을 한꺼번에 뒤섞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만을 한데로 모으신다는 점을(마3:12, 25:32)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해석을 따르는 편을 택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오직 특이하고 독특한 수단에 의해서만 구출될 수 있다는 점을 직감하고서 하나님의 경이적인, 곧 기적적인 능력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박해하는 자들로부터 그의 은혜를 보류하실 것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 문단의 의도를 너무 곡해하는 처사입니다.
여기에는 다윗이 처하게 된 극심한 위험이 표현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다윗으로서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자신의 백성에게 호의와 도움을 베푸시는 일상적인 방법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기적적인 구출을 간청하도록 강요한 것은 그의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돌리는 명칭, 곧 '주께 피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주'라는 말은 자신의 요구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이 있었다는 점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시 17 편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모든자들을 구원하는 임무를 스스로 담당하고 계시는 만큼 다윗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자신에게 안전과 구원을 확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그가 공연히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의 보존자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우리의 신앙이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확고하게 의지하는 한 그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도와주시지 못할까 염려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을 먼저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설령 모든 방면으로 우리의 구원이 봉쇄된다 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는 우리를 돕는 경이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 있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찬미하고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뢰하다' 또는 '소망하다'는 단어에 신뢰나 소망의 대상을 표현하는 목적어가 없는 만큼 주석가들 가운데는 이것을 본 구절의 맨 마지막 말인 '오른손'과 관련시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단어의 위치가 도취되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을 '당신의 오른손을 의지하는 자들을 그들에게 대항해서 일어나는 자들로부터 지켜 보호하는 주여' 라는 식으로 해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억지 해석이요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해석이 더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반응을 받고 있는 만큼 우리는 그것을 따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한 문장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시편 기자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게서부터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직무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데 바로 이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어나 공격하며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파멸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손에 대항해서 스스로 일어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둔 신실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상대로 공공연히 전쟁을 펴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 속에 담겨있는 가르침은 아주 유익한 것으로 곧 우리가 괴롭힘을 당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난폭한 행위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의 안녕의 수호자와 보호자이심을 일단 선언하셨으며 우리가 부당하게 공격을 받을 때마다 우리앞에 자신의 손을 보호용 방패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음 구절에서 '눈동자'와 어미 닭이 자기 '날개 그늘 아래' 품는 어린 새들에 대한 두 비유는 동일한 주제를 설명할 목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기 백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큰 관심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기 새끼를 날개 밑에 품어서 보호하려고 날개를 펴는 암탉과 다른 새들에게 비유하면서 신체의 가장 예민한 부분인 눈동자가 사람에게 귀중한 것 못지 않게 그들이 하나님께 귀중하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시 17 편
그러므로 인간들이 의인들을 괴롭히고 해롭게 하려고 일어설 때마다 결국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는 결론이 따릅니다.
이러한 형식의 기도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에 넣어주신 것인만큼 우리는 거기에 하나의 약속이 담겨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신앙을 육신의 생각이상으로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를 낮추시고, 말하자면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독특하고 탁월한 증거를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 9절은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원수들을 비난함으로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무죄성을 제시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들의 잔학성을 하소연하면서 하나님께서 더욱더 자신에게 도움을 베푸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그들이 자기를 파멸하려는 욕망으로 불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이 '자기 영혼을 에워싸고 있다' 는 점을 덧붙입니다.
여기에는 그들이 그들의 사망에 도달할 때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들의 잔학성 때문에 겁에 질리는 공포가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진지하게 기도하는 자세를 가다듬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거나 자극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기도의 용도와 목적은 신실한 자들이 자신들을 내리 누르고 있는 재난과 슬픔을 하나님께 더욱더 자유롭게 아뢰며 그 짐을 하나님 품에 벗어버림으로서 신실한 자들의 필요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시 17 편
시17:10-12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다윗은 대적자들의 악한 상태를 하나님 앞에 고발합니다.
본문 10절은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름을 감쌌으며'라고 번역해도 의미는 동일합니다.
유대인 주석가들 가운데는 이것을 해석하기를 그들이 비계덩어리로 그것으로 그들의 목구멍이 꽉 차 있어서 그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빈약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기름' 이라는 말이 마치 비계덩어리로 꽉 차서 뚱뚱하게 된 사람처럼 그들을 채우고 있는 교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을 속에 있는 지방질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뚱뚱한 사람들에게 비유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교만으로 꽉 찬 것으로의 묘사는 적절하고 인상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그들의 재물과 쾌락에 들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불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더욱더 포식할수록 더욱더 난폭하고 교만하게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름'이라는 말에 내면적인 악, 곧 그들이 사방으로 오만과 뻔뻔스러움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그들이 온갖 종류의 인정에 대해서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 포함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이 점이 그들의 말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다윗의 의도는 그들이 내면적으로 교만에 부풀어 있으며 그들이 내뱉는 기고만장한 말들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금도 그것을 숨기려 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에서 '입' 이란 말은 필요한 반복입니다.
다윗의 의도는 그들이 입을 크게 벌려 모욕적이며 경멸적인 말투를 퍼붓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 속에 있는 교만에 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은 "(11)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 뜨리려 하나이다 (12)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악을 끼치려는 원수들의 불붙는 정열에 대해 앞서 말한 내용을 확증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신의 파멸에 얼마나 열중했던지 그가 가는 길은 어디나 그들이 바싹 따라붙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시 17 편
다윗이 "우리의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때 물론 다윗이 곧이어서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틀림없이 다윗은 자신의 동료들을 포함시킵니다.
어떤 사본에 (세바부누)가 복수로, 곧 '그들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로 되어 있기에 이 독법을 취하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윗은 그저 만약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의 손을 펴서 자기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그가 그들의 분노를 피하려고 발을 옮겨 놓는 곳마다 그들이 당장 추격하며 자신의 모든 발걸음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이제 자기에게 도피구가 전혀 남지 않게 되고 만다는 점을 하소연합니다.
'이제'라는 부사를 써서 다윗은 자신이 당장 큰 위기에 처해 있으며 매 순간 자신이 어디로 향하든 그의 원수들이 자기에게 착 달라붙어 추격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라는 마지막 소절에서 혹자는 다윗이 자기 원수들을 말하면서 땅에 눈을 고정시켜 놓고 조용히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는 사냥군들에게 비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땅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는 구절이 다윗의 원수들의 몸짓이나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교활하고 음험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얼굴을 종종 땅에 처밖는 일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뒤엎어 놓으려는 악한 자들의 끈질긴 열성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데 우리는 이들의 견해가 이 구절의 핵심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주목하고' 라는 것은 그들이 모든 재간을 다 부리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땅에 넘어뜨리려"라는 구절 역시 전복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악한 자들은 비록 그들이 필연적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해도 세상은 계속 서 있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전복되거나 파멸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인간들을 무너뜨리고 파괴시키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이것은 그들을 '사자와 젊은 사자'에 비교하는 다음 문장의 비유적 설명에 의해서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진리는 악인들이 우리에게 그들의 잔학성을 더욱더 교만하게 행사할수록 그들의 야만적인 분노에 대항할 하나님의 손길이 더욱더 우리에게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피흘리기를 즐겨하는 이 야수들을 억누르고 복종하는데서 오는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마땅합니다.
다윗이 '동굴, 은밀하게 엎드리는 곳'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원수들이 간사한 책략에 재간이 많고 해악을 끼치는 방법이 가지가지이며 그 모든 것을 시행할 능력과 수단 또한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것을 저항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시 17 편
시17:13-14 여호와여 일어나
다윗은 기도하면서 또 악인들의 상황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1. 본문 13절은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여호와여 일어나 저의 얼굴을 막으시고 저를 땅에 넘어뜨리시며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 칼빈) 입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에 의해서 더욱 격렬하게 박해를 받을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도움을 베푸실 것을 간청합니다.
다윗은 '얼굴' 이라는 단어를 써서 원수의 재빠른 격렬성을 표현합니다.
이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서두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성령께서는 사망이 당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을 드러낼 경우 하나님께서는 가기에 대한 대책을 완전히 갖추고 계시며 그 대책을 통해서 그는 순식간에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실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주십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직무를 돌리고 있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에게 악인들을 박살내고 때려부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이 자신에 대한 격정적이고 해악적인 행동을 그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낮아지기를 바랄 뿐이지 그 이상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다음 구절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그대로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잔인과 불의를 행하는데 악용하지 않았던들 그들이 외적인 평안과 번영을 계속 누리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힘을 타파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의 혜택을 위해서라는 점, 곧 그가 이런 일을 행하시는 것은 이 불량배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가련하고 무죄한 자들을 파멸에서 구원하시려는 목적에서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당신의 검인 불경건한 자들로부터, 또는 당신의 손인 그 사람들로부터'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어떤 방향에서 우리에게 괴로움이 부딪치든지 우리를 징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며 악한 자들은 하나님이 이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채찍일 뿐이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인내를 기르는데 적절하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시 17 편
그러나 이러한 표현방식은 여기서 좀체로 어울리지 않으며 기도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다윗의 말을 하나님께서 그의 칼을 들어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그의 손으로 너무 장기간에 걸쳐서 권력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자들을 후려쳐 주시기를 바란다는 기도로 보는 자들의 해석을 택하는 바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칼을 인간적인 도움과 인간적인 구원수단과 대조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말한 의도는 '하나님께서 손수 보복하러 나오시지 않으며 그의 칼을 빼시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구원의 가망성이 전혀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2. 본문 14절은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여호와여 오래 지속하고(한 세기 전부터) 있는 사람에게서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저들의 분깃은 생명 안에 있고 저들의 배는 주의 은밀한 재물로 채워지며 자녀로 가득하여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 칼빈) 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여호와여, 나를 주의 손으로, 또는 주의 하늘의 도움으로 사람들에게서 구원하소서' 라고 연결시켜서 '너무 오랫동안 독재를 행하며 하나님이 번영의 오물과 찌꺼기에서 너무 오래 딩굴게 허용한 그 자들로부터' 라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아주 강조적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극악이 너무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되는 것을 보고서 분노를 느낀 나머지 자신의 목이 메이자 첫 마디만 내뱉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합니다.
다윗은 숨을 돌린 다음에 자기를 그처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힙니다.
앞 절에서 다윗은 단수로 말했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한 원수가 아니라 많은 원수가 있으며 그에게 적대하는 자들이 강력하고 힘이 세다는 점을 말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가망을 다른데서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이해시킵니다. 정확한 문자적 번역인 '세상으로부터 또는 한 세기로부터' 라는 단어는 서로 다르게 해석됩니다.
혹자는 그것이 '자신들의 시간이 다 된 사람들' 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행복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다윗의 의도였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당한 설명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이 표현을 통해서 세상에 전적으로 집착되어 온 정신이 지상의 일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다윗은 자기 원수들을 야수들에게 비교하고 있는 셈입니다.
시 17 편
꼭 같은 의미에서 이들은 '저희 분깃은 생애 안에 있고'(칼빈) 라는 구절이 전혀 성령이 없이 일시적인 좋은 것에만 온 마음을 다 쏟기 때문에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실 누구든지 각자가 지복으로 여기는 것이 곧 그의 분깃이라 불리웁니다.
하지만 (헬렛)이라는 단어에는 '한 세기, 또는 인생의 과정'이라는 뜻이 있는 만큼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것은 다윗이 자기 원수들이 인간의 생명에 할당된 일반적인 기간보다 더 오래 살며 번영을 누려왔다는 사실을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저지르는 오만과 격렬한 행위는 당분간은 참아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기승을 부리는데도 계속 번영된 상태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 의미가 되는 것은 우리가 '..... 에게서' 라고 번역한 (민)이라는 전치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다윗이 표현하는 것은 그들이 단지 며칠 전에 곧 최근에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어야 했을 그들의 번영이 그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지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의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이 그들을 '이 세상, 또는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로 부르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이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그들이 인간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차지하며 존귀와 부에 있어서 뛰어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이라는 구절을 우리는 그들이 모든 고통을 면제받고 있으며 온갖 쾌락에 넘쳐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공통적인 상태를 체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역경에 짓눌려 있을 때 우리는 그의 분깃이 사망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암시하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희희낙락거리며 돌아다니며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이 마치 그들의 세습권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음에 덧붙이고 있는 점, 곧 "저들의 배는 주의 은밀한 재물로 채워지며" 라는 구절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빛, 공기, 음식, 그리고 생활의 모든 다른 생활필수품을 즐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들을 마치 그가 그들을 어린애처럼 자기 무릎에 앉히고 먹이면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귀여워하는 것같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정성스럽고 풍성하게 대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은밀한 재물"이라는 말을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희귀하고 더 맛있는 진미로 이해해야 됩니다.
시 17 편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를 그가 베푸시는 세상적인 번영의 정도에 따라서 평가한다면 이는 참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악한 사람들의 행복한 상태를 응시하면서 크게 괴로워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불평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고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이 거북한 하소연을 하다는 점을 그리고 다윗의 본을 따라서 우리 또한 우리의 탄식을 하늘로 지향하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자는 여기에 나오는 "주의 은밀한 재물"을 더 교묘하게 해석하면서 악인들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고 선한 재물들을 게걸스레 먹어치운다는 뜻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재물이 '은밀한'것으로 불리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그처럼 풍성하게 그런 혜택을 쏟는 이유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시한 해석이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만큼 그것이 다른 모든 견해를 충분히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설명의 마지막 요점은 이 사람들이 그들의 자손들, 또 그 자손들의 자손들에게까지 계속 대를 이어가면서 재물을 양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복의 약속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숫자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이처럼 살찌는 것은 그들에게 정해진 도살의 날을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 하소연을 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의 관용과 자비로운 대우를 그처럼 오래 악용하는 것을 보시고 속히 보복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시 17 편
시17:15 나는 의로운 중에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면서 마칩니다.
1. 본문 15절은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힌 수많은 고통을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고 나서 그를 내리누르고 있는 시험의 무게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이제 말하자면 신앙의 날개를 타고 평온한 지대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다윗은 만물이 정돈되어 제 질서를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으로 지금 뒤범벅이 되고 있는 것들의 질서를 회복하실 때 드러나는 만물의 정돈된 상태와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얼굴을 감추실 때 이 세상에 드러나는 엄청나고 가슴아픈 흑암에 대한 대조가 암시됩니다.
다윗은 자기가 열거하는 무수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이 흑암에 빠져서 도저히 구출 받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을는지도 모릅니다.
악인들이 번영을 누리고 존귀를 왕관을 쓰며 재물을 가득 쌓는 것을 우리가 볼 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호의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교만하고 주제넘은 허풍을 넘어서서 승리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비록 감각과 이성의 눈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옮겨놓으신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언젠가 하나님을 친밀하게 뵙는 특권을 누릴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 라는 대명사는 강조적입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당하는 재난과 수모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셨던 아버지로서의 사랑으로부터 넘치는 기쁨을 다시 체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할 점은 다윗이 최상의 행복을 누리고자 하면서 다만 하나님이 자신과 화해하고 계시다는 이 큰 복을 체험하고 맛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행복한 것으로 상상할는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는 한 그들은 스스로 속아 이런 상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시 17 편
"주의 얼굴을 보리니"라는 것은 다만 아버지로서의 호의를 느낀다는 말이고 이 아버지로서의 호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슬픔을 제거함으로서 우리를 즐거워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늘 나라에까지 데려가 주십니다.
'의'라는 말을 통하여 다윗은 선한 양심의 보상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양한 고통으로 괴롭히는 한 세상은 무례하게도 이들의 소박함을 조롱하면서 마치 그들이 스스로 속아 순결함과 순진함을 개발하고 실천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그들의 통증조차 잊어버리고 만 것처럼 말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바로 이러한 종류의 조롱과 멸시에 대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반대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계속 순종하여 지키는 한 자신의 경건과 정직에 대한 보상이 쌓여진다는 점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같은 방법으로(사3:10)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라는 위로를 통해서 신실한 자들이 스스로 용기를 얻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행위를 자신의 구원의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호의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어떤 공로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가를 취급함이 다윗의 목적은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하나의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당분간 그들에게서 그의 얼굴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때가되면 그들에게 자신의 밝은 얼굴을 대하게 하시며 또한 그의 동정어린 눈이 그들에게 미소지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끝 부분은 "만족하리이다" 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온당하기보다는 교묘하게 최후의 날이 있을 부활에 국한시키는데 이것은 마치 다윗이 다가오는 생명이 있기까지는 자기 마음에 이 기쁨을 맛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모든 간절한 소원을 그가 생명을 얻는 그 이후로 미루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다윗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이 만족이란 그리스도의 최후의 강림이전에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의 지식에 대한 어떤 빛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주실 때, 이와 같이 전달된 빛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때문에 다윗이 이 성령의 평화나 기쁨을 '만족'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악한 자들이 평안하게 지내며 좋은 것을 터질 만큼 풍성하게 가질는지 모릅니다.
시 17 편
그러나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갖고 있거나 참 본질이 들어있는 영적인 것을 맛보지 못한 채 바람, 곧 지상적인 것만 먹고 사는 자들이거나 혹은 그들이 날카로운 양심의 가책에 고통을 느껴 너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머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없기에 그들은 결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마음을 안정시키지도 못하며 다만 그들을 괴롭히는 내적 갈등 때문에 불행한 채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무절제한 욕망에 이끌려 마음이 산란하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욕망만 더 자극시키고 증대시킬 뿐이며 영혼을 굶어죽게 만들 뿐인 이 세상의 헛된 기쁨을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데에서 자신들의 최대의 행복을 찾는 자들만이 참되고 본질적인 행복에의 참여자들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나는 당신의 얼굴이 깨어나는 것으로 또는 당신의 얼굴에 의해 깨어나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입니다.
따라서 혹자는 첫 번 해석을 택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이 깨어난다는 말은 지금까지 말하자면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쏟아지는 것 또는 그 빛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깨어난다'는 단어를 다윗에게 적용시키고 자신의 슬픔으로부터 구제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한번도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의 박해를 통한 장기간의 시달림을 받은 후에 다윗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과 같은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육신의 연약성 때문에 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공격에 전혀 무기력을 느끼지 않거나 마치 그들이 흑암에 휩싸인 것을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게 그 모든 것을 물리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이 마음의 고통을 수면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의가 다시 솟아나서 자신에게 밝게 비칠 때 다윗은 자신이 영적 기력을 회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선언하고 있듯이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의 순례자로 남아 있는 한 '시력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걷는 자들'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의 거울 속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수한 증거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있기에 우리 각자는 스스로의 무기력에서 깨어나 하나님께서 알맞은 시기에 우리에게 스스로 당장 나타내셔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해주실 때까지 지금은 영적인 행복으로 만족합시다.
시18:1-2 나의 힘이 되신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다윗은 심한 고난, 거의 통과할 수 없는 장애물을 통과한 다음에 이 나라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을 때까지 다윗은 도망자였으며 추방당한 자로서 무수한 사망의 위협과 위기와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온 그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다윗은 난동과 신하들의 권면 등으로 시달리기 시작했으며 다윗 보다 세력이 우세한 적대파에 완전히 몰락할 지경에 봉착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외적들은 만년에까지 그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능력이 다윗을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이러한 재난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많은 뛰어난 승리를 거둔 뒤에 신앙 없는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뛰어나고 적절한 수식 어귀를 사용하여 장엄하고 숭고한 문체로 하나님을 이 모든 승리의 섭리자로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왕국을 소유하게 하신 후에 그것을 지탱하게 하시면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경이적인 은혜를 품위 있는 시조로 찬송하는 다윗의 시들 가운데 으뜸가는 시입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왕국의 형상과 모양이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신자들에게 온 세상과 그로부터의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측량할 길 없는 성부의 능력에 의해서 항상 승리하실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주며 확신을 시켜줍니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우리는 본 시편의 작성시기를 주목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그의 일이 평화와 안정을 되찾게 되었을 때 신앙이 없는 사람들처럼 과도한 기쁨에 도취되지 않았다는 점을 본 시편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는 자들은 자기들의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천하고 비열한 쾌락에 몸을 내던지거나 그들의 금붙이를 세워놓고 교만한 허풍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할 뿐입니다.
성경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이(삼하22장) 다윗은 거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을 즐길 때 여호와께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 나오는 표제는 이러한 설명과 일치하며 여기 나오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본 시편의 서두에 나오는 것이 부적당하거나 부정확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시편 18 편
다윗이 이 노래가 불려진 시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자신의 원수들로부터 자기를 구원해 주신 뒤에" 라고 그 시기를 지적하는 것은 이때 다윗이 그의 나라를 완전히 태평하게 소유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단 한번이나 한가지 종류의 원수들로부터만 도와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뜻에서입니다.
사실 다윗의 전투는 때때로 재개되었으며 한 전투의 끝은 다른 전투의 시작이 된 동시에 많은 군대가 자기를 대항해서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천지창조 이래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처럼 무수하고 다양한 고통으로 단련한 또 다른 개인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 더욱 잔혹하고 단호하게 그를 박해한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이름이 여기서 분명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앞 소절에서 다윗은 그의 모든 원수들을 일반적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울의 이름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다윗이 자신의 최근의 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이때로부터 약 30년 전에 죽었으며, 그 사건 이후로도 다윗은 많은 외적들을 패배시켰으며 자기 친자식 압살롬의 반란도 진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을 그 많은 해에 걸쳐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울의 통치 하에서 살고 있던 허구한 날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처럼 많은 기적을 베푸셨다는 사실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특출한 제시요, 특별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특별히 이 끈질긴 원수의 손에서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언급하면서 찬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는 것은 틀림없이 자신의 왕에 대한 소명을 증거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다윗은 '나는 무모하거나 내 자신의 권위에 따라서 이 나라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실 다윗이 겪어야 했던 무수한 역경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정해 놓은 뜻만을 따랐다는 점을 스스로 마음에 확신하는 것은 긴요한 믿음의 지주(支柱)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평화로운 항구와 같았습니다.
또 그 무수한 난리와 생소한 재난 속에서 갖는 안전한 피난처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다가 역경에 처한 인간보다 더 비참한 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얼마든지 자신으로 하여금 그처럼 감당하기 힘들고 아픈 결전에 뛰어들게 한 것은 야심이 아니며 그는 조금이라도 부당한 일을 시도하거나 악한 수단으로 행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었으며 그것이 자기의 길을 안내하는 불빛이었다는 점을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시편 18 편
우리도 이 점을 꼭 깨닫고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른다 해서 모든 고통을 면제받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육신의 아프고 곤고한 투쟁에 대하여 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종'이라는 명칭은 그의 공적 직무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의 공적 성격을 지칭하는데서 엿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나는 스스로 만들어 낸 왕이 아니라 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는 말씀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처럼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많은 민족들을 정복한 자요, 그처럼 위대한 위엄과 재물을 소유한 사람이지만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다윗의 겸손을 우리는 특별히 주의해야겠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명예와 재물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직분의 여러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내용이나 다름없습니다.
1. 본문 1절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입니다.
우리는 본 시편과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노래 사이에 있는 몇 가지 철자나 단어의 차이점을 가지고 꼬치꼬치 캐지 않겠습니다.
중대한 차이점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입니다.
사무엘서 노래에는 그것이 생략됩니다.
성경에서는 피엘 변화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라함)이라는 동사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것이 칼 변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주석가들 가운데 몇사람은 이것을 '자비를 구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다윗은 '주님, 나는 주님께서 자비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많이 체험하여 알고 있기에 영원히 주의 자비를 신뢰하겠으며 그 안에서 거하겠습니다' 는 식입니다.
이러한 해석도 부적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다른 견해를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당연히 드려야 하는 예배는 '경외한다'는 말로 더 잘 표현됩니다.
이로서 주님의 위엄이 무한히 광대하게 우리의 시야에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심에서 우러난 모든 애정을 소유하시며 그 애정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함에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듯이 하나님에게는 자발적이요 아낌없는 사랑의 사슬로 우리가 그분에게 단단히 묶여지는 것보다 더 귀한 제사가 없습니다.
시편 18 편
반면에 하나님의 아낌없고 주권적인 선하심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뚜렷하게 비춰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신10:12) 율법의 요약을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 외에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칼빈)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의도 가운데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모든 은혜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배은망덕할 정도로 그분의 은혜에만 한결같이 머물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너무 흔하게 저질러지는 죄악입니다.
오늘날도 대다수의 인류가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아주 마음 편하게 향유하고 있습니다.
혹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대자 고작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런 배은망덕에 빠지지 않으려고 '주여, 주님께서는 내 힘이신 만큼 나는 꾸밈없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주님에게 연합하여 헌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통해서 엄숙한 서원을 드립니다.
2. 본문 2절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이처럼 많은 명칭을 열거합니다.
이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단어의 나열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지성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을 하기에 항상 다른 곳으로 도움과 구조를 요청하러 다니거나 아니면 유혹이 그들을 공격할 때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확신에서 떨어져 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을 자기 구원자와 보호자로 모시는 한 그는 모든 위험과 공격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안전하다는 점을 단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려고 작정하신 자들은 어떤 종류의 위험에 대해서도 안전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방에 견고한 성벽으로 에워싸여 보호를 받기 때문에 수많은 죽음의 위험이 그들 앞에 어른거린다 할지라도 이 무서운 강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말을 했었습니다.
시편 18 편
그러므로 여기서의 다윗의 의도는 자신의 감사의 표로 하나님의 찬양을 송축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확고부동한 신앙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어떤 고난들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항상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며 사악한 무리들이 획책하여 실족시키려는 다양한 수단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여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한 힘과 능력을 그분께서는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충분하게 확신시켜 줍니다. 다윗이 이 점에 대해서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별다른 이유 없이 똑같은 내용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를 도우실수 있음에도 우리는 새로운 시험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추호도 체험해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당장 공포에 질리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을 받을 때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요청하지만 그것이 지난 후에는 다른 면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자들은 그 능력이 여러 다른 방면에서도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서 마치 전투에 나가는 사람이 자기를 방어할 방패와 갑옷을 지녔으니 자기 가슴은 안전하지만 투구가 없으니 머리는 불안한 것으로 여기는 군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완전한 갑옷으로 무장한 신자들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다면 신자들은 자신들이 결코 상처를 입을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다윗의 목적이기에 다윗이 '나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말한 다윗의 선포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본을 통해서 여기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되고 있는 명칭들이 우리들도 우리 자신들의 용도로 적용을 하며 그것을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고난과 고통에 대항하는 해독제로서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틈타는 모든 것을 단번에 저 멀리 퇴치해 버릴 수 있도록 이 모든 명칭들을 우리의 뇌리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권면을 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현재 공격을 받고 있는 재난 밑에서 벌벌 떨고 있을 뿐 아니라 공연히 앞으로 닥칠 잡다한 위험에 대해서까지 우리 상상에 떠올림으로서 쓸데없이 환상의 장난에 이끌려 스스로 불안해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바위" 대신에 "나의 피할 바위시요"입니다(22:3).
'피한다'는 단어 다음에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들은 그 구절을 보다 상세하게 하는 것이지만 의미는 다 똑같은 것입니다.
시편 18 편
시18:3-6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상으로 구원자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성품상으로 구원자이신 사실을 고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는 여러 가지 명칭들을 중복시켜 말하였습니다(2절). 이 사실은 물론 그의 상상이나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의 체험에 근거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그의 구원 체험을 자세히 말합니다(4-6). 그의 구체적인 체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그가 극도의 난관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4-19).
1. 본문 3절은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입니다.
여호와께 아뢴다는 것이 여호와에 대한 완전한 예배의 뜻을 늘 내포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기도의 효과와 열매가 낱낱이 언급됩니다.
계속하여 지금 이 구절은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로서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하는 뜻으로 우리는 확신합니다.
다윗은 제 2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신뢰에 대한 증거로 이것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곤경에 처할 때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의뢰할 것이기에 자신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모든 그 자신의 원수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말을 선포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가리켜 "찬송받으실 여호와"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뜻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은혜의 보좌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기도가 찬양으로 넘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지적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본 구절의 뜻은 과거에 다윗이 하나님에게서 받았던 은혜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새로운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 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사실 누구든지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서 자신을 격려하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라고 염려, 근심을 하나님의 품에 맡겨놓을 것을 권면합니다.
시편 18 편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없는 기도를 드리는 모든 사람들은 엄숙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하여 떠들어대며 불평이나 읊조린다는 책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2. 본문 4-5절은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엄습하는 모든 위험과 재난을 물리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대단히 강력했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증거들을 지금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좀더 간단하고 소박한 문체로도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이 시적인 형태를 빌어서 표현되고 또 모든 고아한 언어와 수식어로 노래하는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 없습니다.
인간들의 사악하고 완고한 인상을 주는 것에 대한 말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도록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위엄, 생동감 및 경이로운 능력이 넘치는 웅변으로 다윗을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베푸시는 도움이 제아무리 명백하고 뚜렷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무관심이나 교만한 혐오가 그것을 무마시킬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의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감동시키고 꿰뚫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하셨던 구원과 도움이 온 세상의 체계에서 뚜렷했었음을 말합니다.
다윗 자신이 비범한 문체로 장엄하게 표현함에 그가 정당한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면 이러한 다윗의 의도를 유념해야 할 필요 있습니다.
다윗이 궁지에 몰리는 재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었으며 그래서 경이적으로 보호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몇 가지 단어를 살펴봅시다.
(헤블레)라는 히브리어에는 굵은 줄(cords), 또는 '슬픔'(sorrows), 또는 인간의 건강과 기력을 탕진시키고 파멸을 가져오기 쉬운 무서운 재앙(evil)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 시편을 사무엘하에 있는 노래와 일치시키는 뜻에서 이 단어를 여기서 '뉘우침'(contrition)으로 번역하는 것을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 사용되고 있는 구절은 (미쉬베레 마벳)인데 '미쉬베레'라는 명사는 '부수다'는 뜻을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굵은 줄이나 올가미에서 오는 비유법이 '에워싼다'는 동사와 더 잘 일치되며 이것의 의미는 다윗이 사망의 위험에 사방으로 에워싸여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는 뜻인데 우리는 이 해석을 택하고 싶습니다.
다음에 '창수'에 대한 뜻은 다윗이 마치 홍수에 머리를 곤두박아 거의 죽게 된 사람처럼 그에 대한 원수들의 강포와 격정으로 인해서 매우 괴롬을 당했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18 편
다윗이 그의 대적들을 가리켜 '벨리알의 창수'로 부르는 것은 자기에 대해서 음모를 꾸민 당사자들이 사악하고 완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벨리알' 이라는 히브리어는 폭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 어원에 관해서 주석가들간에 견해차가 분분합니다.
왜 제롬이 이것을 '멍에가 없이'로 번역했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보다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는 이것이 (블리; not)와 (야알)의 복합어로서 악인들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의 얼빠진 행동으로는 궁극적으로 이로울 것이 없으며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온갖 종류의 망측한 사악성을 표현하는데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윗은 비열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자신의 파멸을 획책한 자신의 원수들을 묘사하는 뜻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주 타당한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을 '무서운 창수'로 번역하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절에서 다윗은 다시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배덕과 사망의 줄이 그를 에워쌌었다 - 칼빈)는 말을 반복합니다.
히브리어 단어상으로는 다윗이 앞 절에서 사용했었던 것과 동일한 만큼 우리가 거기서처럼 여기서도 '줄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다윗이 '포위하다' '에워싸다' '둘러싸다'는 뜻을 갖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곧 이어서 "사망의 올무"라는 단어를 곧 덧붙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우리 견해로는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이 처해 있었던 위험한 상황에 대한 묘사이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더욱더 드높게 해 줍니다.
다윗이 사망의 올무에서 구원받을 희망이 전혀 없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었던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구원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지 조금이라도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3. 본문 6절은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입니다.
다윗이 사망의 심연 속에 거의 내동댕이쳐진 마당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 대단한 신앙의 뚜렷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본보기가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있는 것은 제아무리 크고 괴로운 환난이라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것을 막거나 기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점을 배우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시편 18 편
이것은 다윗이 곧 이어서 언급하는 다윗에게 열매, 곧 경이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보건대 다윗의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점이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이 '부르짖었다'는 말은 기도하면서 지녔던 마음의 열성과 진지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위선자들이나 하나님에 대한 야비한 모독자들은 다급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난잡하고 소란스런 태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과 선하심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기에 친근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같은 부름을 통해서도 악인들과 다윗 자신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신앙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충분히 확신시켜 주며 그 길을 밝혀 인도해 주어야만 그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동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하나님을 자기 편에 두는 다윗의 의중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들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공포하고 있습니다.
이 점 역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과 경외에 의해서 작용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temple)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다른 곳에서처럼 '성소'(sanctuary)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늘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에 곧 이어지는 묘사가 성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다윗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궁지에 몰리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의 외침에 귀를 막았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뻗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8 편
시18:7-11 이에 땅이 진동하고
다윗은 그 때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그를 구원해 주신 일에 대하여 자세히 말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실 때에 천지를 진동할 듯이 위엄차게 임하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본문 7절은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지금까지 체험했던 하나님의 도움이 자기로서는 충분히 있는 그대로 격찬할 재간이 도저히 없는 그런 성격의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 나머지 하늘과 땅을 통해서 그것의 상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말했었던 것처럼 그것은 하늘과 땅에 각각 다른 모습을 가져다주는 변화와 마찬가지로 역력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만약에 자연계가 고르고 통일된 과정으로만 항상 진행된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처럼 인식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갑작스런 비나 우레나 무서운 폭풍을 통해서 하늘의 모습을 뒤바꿔 놓으실 때는 잠들어 있거나 무감각한 자들이라도 필연적으로 깰 수밖에 없으며 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떨면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갑작스럽고 뜻밖의 변화는 자연을 창조하신 위대한 조물주의 임재를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물론 하늘이 맑고 잔잔할 때에도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이란 그 위엄이 자기들 마음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에게 더욱더 강력한 인상을 남기려는 뜻에서 우리를 동요시키는 갑작스런 변화를 말합니다.
그 변화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언제나 감동과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한때는 하늘을 먹구름으로 옷 입히시기도 하시며 또 다른 때에는 폭풍을 통해서 하늘을 혼란 속에 처넣는 것으로 그리고 하늘을 광포한 바람으로 찢어놓기도 하고 번개를 치시는가 하면 이내 청천벽력과 우박으로 내리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본 시편 작가의 의도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하시려고만 한다면 그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떨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시편 18 편
하나님께서 다윗의 구원자로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셨을 때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던 것처럼 분명한 표징들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먼저 다윗은 '땅이 진동하고'라는 말을 하는데 지진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산의 터' 가 사무엘하서의 노래에는 '하늘의 터' 로 되었는데 의미는 동일합니다.
곧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고정되거나 안정된 것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역사적인 사건이나 실제로 일어났었던 것과 관련시켜 설명하지 않지만 다윗은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에 대한 신앙을 더욱더 확증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러한 비유들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의 이해력이 무뎌서 외적 표징 없이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기적들이 실제로 여기에 이야기되고 있는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실행되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윗의 생애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서 그를 위해서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관해서 전혀 언급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주의를 환기한 바 있는 우리의 무딘 이해력과 타락성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식의 과장법에 대하여 정당하게 비난하거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 비해서 통찰력이 매우 깊고 이해력이 무척 빨랐던 다윗은 이해력이 더디고 약한 사람들에게 간단한 방법으로 이야기해서는 충분히 감명을 주거나 효력을 거둘 수 없다는 점을 알고서 자신이 신앙과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 발견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보다 낮은 외형적인 비유로 묘사합니다.
이로서 다윗은 감각이 무딘 부류의 보통 사람들이 지진, 폭풍, 우레, 을씨년스럽게 잔뜩 찌푸린 하늘, 광풍 등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훨씬 분명하게 이해하였고 체험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고 살려 주심에 있어서 경이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다윗의 모든 일들이 순조로운 결과를 맺게 되었던 것을 다윗 자신의 재주, 요행 및 다른 자연적인 수단 등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당시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이와 같은 우매함이나 타락성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종류의 피조물들을 다 열거하여 언급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묘사를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선민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는 유명한 구원 사건을 다윗이 암시하는 것이라고 정당하고 현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에 이 사건을 영원한 기념적인 사건으로 작정하시고 확립하셨습니다.
시편 18 편
그것을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복의 수호자와 보호자이신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이 공적 단체이건 사사로운 개인들이든 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셨던 모든 은혜들은 이 첫 구원의 부가물들인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곳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베푸셨었던 구원을 찬양하는 관점을 지니고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더할 나위 없는 기념비적인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다윗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원형이나 원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자기 본토에서 더나 유랑하는 것으로 해서 그를 하나님의 종족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으로 조롱했습니다.
또 다윗이 불의하고 강압적으로 왕국을 탈취한 것이라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공통적으로 베풀어 주셨던 그 구원 속에 다윗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셨던 보호와 안전을 포함시킬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다윗이 말했었던 것처럼 보호와 안전을 포함시킬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다윗이 말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셨던 근원에서 하나님께서 충분하게 나타내신 뜻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가 교회의 탁월하고 소중한 회원이 됨을 인정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방인이나 타국인처럼 부당하게 내던져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구원의 소망으로 백성들을 격려하려고 했을 때마다 그들은 애굽에서와 홍해를 건널 때와 시내산에서 일어났었던 기적들에 의해서 확증된 가장 중요한 언약을 백성들이 회상하게 했던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땅이 진동한 것은 그의 진노를 인함이다"라고 다윗이 말했을 때 그것은 불신자들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진노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박해하는 자들에게서 그의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조금도 빈틈없이 지켜주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종종 사용하시는 표현법입니다.
2. 본문 8-9절은 "(8)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 이 피었도다
(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입니다.
(아프)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코' 또는 '콧구멍'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노'에 대한 비유적인 의미가 있어서 이것을 '당신의 진노가운데 한 연기가 치솟았다' 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18 편
이것은 우리 견해로 볼 때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대기를 흐리기 하는 안개나 증기를 사람이 화가 나서 씩씩거릴 때 그 콧구멍에서 뿜어대는 짙은 김(smoke)에 비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김으로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며 일원성신의 광채를 어둡게 하셔서 우리를 흑암으로 압도하실 때 우리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아주 감명 깊게 배웁니다.
우리가 제시한 번역을 따를 경우 여기서의 비유가 다음에 곧 이어지는 비유, 곧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와 잘 조화됩니다.
시편 작가의 의도는 하나님께서는 쉽게 입김이나 그의 코에서 돌풍을 내뿜으시고 그의 입을 여시자 마자 그 연기로 온 세상을 어둡게 하고 그 강한 열기로 세상을 삼켜버릴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는 구절은 이 가공할 불(fire)과 잠시 붙었다고 꺼지는 불길(flame)을 구별합니다.
"하늘을 드리우시고"는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흐리게 하신 때를 가리킵니다.
짙은 증기가 하늘 중간에 떠 있을 때 그 구름 모양의 것들이 마치 우리 머리 위에 내려와 드리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이 맑고 쾌청할 때에는 마음껏 즐거워하다가도 하나님의 위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 경우 몹시 두려워하며 번민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흐리고 구름낀 하늘에 대한 이런 묘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라는 것을 다시금 명심해야 합니다.
하늘이 맑게 개인 날이면 정다우시고 너그러우신 얼굴 모습이 우리에게 비취며 즐겁게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면에 일기가 불순한 날일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위협적인 태도로 우리에게 대항해 오시는 것처럼 동물적인 성향의 우울증을 느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슬픈 표정을 짓게 만듭니다.
그와 동시에 천지간에 벌어지는 변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배웁니다.
3. 본문 10-11절은 "(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11)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시고 저를 두른 장막은 흑암의 물이며 공중의 구름들이로다 - 칼빈) 입니다.
시편 기자는 구름이 끼는 것과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상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시편 18 편
또 하나님께서 마치 당신의 무서운 능력으로 인간들을 괴롭히려고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무서운 안색을 하시고 강림하시는 것처럼 묘사했는가 하면 번개와 벼락을 마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작열하는 불처럼 묘사했습니다.
또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빠른 속도로 곧 빨리 날아서 온 세상을 둘러보시려고 바람과 폭풍을 타고 다니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묘사를 시편 104편 3절에서 대하는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사방으로 자신의 빠른 사자(使者)들을 내보내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그가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바람을 조종하시는 그런 바람의 지배자로 묘사하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다니신다는 점을 이야기해 줌으로서 바람의 횡포 자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천사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천사들도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서 언약궤를 암시하고자 말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확신합니다.
자연의 경이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도록 꾀함에 있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보여주신 성전을 항상 바라보게 하신 것과 같은 그러한 방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자로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스스로 그 백성들 한 가운데 성소를 선택하신 분으로 칭송합니다.
다윗은 천사들을 통상적인 명칭에 따라서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언약궤라는 눈에 보이는 상징과 관련된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는 것은 참 신자들로 하여금 본 시편을 노래하면서 항상 그들의 마음이 당시에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로 향하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구절은 앞 문장을 다른 말로 반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어두운 구름으로 덮으실 때 그것은 마치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시려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두꺼운 휘장을 드리운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신하들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 왕이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서 밀실로 잠적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무 사람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딤전6:16) 거하고 계신다고 하지만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양식은 본 문맥의 의도에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의미로 제한되어야 마땅하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시편 18 편
시18:12-19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의 위엄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 위엄이야말로 천지를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 한 개인을 구원하시기보다 온 천하를 심판하여 구원하실 만치 위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스럽게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나타내신 위엄은 저렇게 큰데 그 구원하시려는 목적물(目的物)은 극히 무의미한 듯한 한 개인입니다(16-19).
이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천지를 진동시키셨는가!
1. 본문 12절은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입니다.
다윗은 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있다고 다시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구름들, 곧 인간들이 하나님의 용안의 빛을 향유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 하나님의 분노의 상징으로 자신 앞에 둔 구름들이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지나가 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는 통일된 과정을 따라 움직이는 자연현상에 비해서 훨씬 더 생생하게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agency)을 우리에게 느끼게 합니다.
다윗이 "우박과 숯불"을 계속 덧붙여서 말하는 것은 벼락이 구름을 가를 경우 거기에는 번개가 따르거나 구름이 우박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3-14절은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천둥을 치신 것으로 말함으로서 동일한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다윗은 이 천둥소리를 '하나님의 음성' 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과 무관하게 단지 우연이나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시편 18 편
물론 철학자들은 천둥을 발생시키는 중간원인, 곧 제2원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차갑고 습기 찬 증기가 건조하고 뜨거운 증기의 상승진로를 가로막을 때 충돌이 일어나며 이때 서로 부딪치는 구름의 소음과 함께 우르르 천둥소리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일기 현상을 묘사하면서 그것이 단순한 자연현상 이상의 것인 성령의 섭리 하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이 모든 것의 최고 주권자로 묘사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 땅의 가장 깊숙한 맥까지 파고 드셔서 거기서 증기를 이끌어내시고 이것을 다시 서로 다른 종류로 분류하여서 공중으로 분산시키는 분으로 다시 증기를 함께 모아서 그것을 가늘고 건조한 열기와 맞부딪치게 함으로서 거기서 이어지는 천둥소리가 마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크고 우렁찬 소리처럼 들리게 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사무엘하서에 나오는 노래에도 반복이 담겨 있지만 본 구절과 앞 절, 그리고 사무엘서에 나오는 구절의 의미는 다 비슷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우리가 지적한 점, 곧 다윗이 자신의 구원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총을 더 잘 강조하고 찬미하는 뜻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공할 능력을 이런 비유를 들어서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줄 압니다.
다윗은 곧 이어서 이것이 자신의 의도였다는 점을 밝힙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을 말하면서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그들은 하나님의 화살에 의해서 흩어졌거나 도망했다-칼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원수들이 인간의 손이나 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공공연하게 벼락으로 내리치신 하나님에 의해서 패망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뜻에서가 아니라 이것을 비유적인 언어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지 못하고 깨닫는데 더딘 자들이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이 구원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서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에서 천둥소리를 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점을 부정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 질서에서 특별히 대기권에서 일어나는 경이적인 변화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자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번개를 마치 화살인 양 내려보내시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다윗은 맨 먼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고 다음으로 이것을 그것의 본래 이름을 사용해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
시편 18 편
3. 본문 15절은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입니다.
본 구절에서 다윗은 틀림없이 선민이 홍해를 건널 때 이루어졌던 기적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렇게 하는 의도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밝힌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아브라함 자손들 개인들에게 베푸셨던 모든 특별한 은혜들에 관한 증거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백성과 일찍이 맺으셨었던 언약을 그 증거들로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베풀어주실 것이며 그 변함 없는 구원이 그들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표적이나 보증이 되리라는 확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특별히 베푸셨던 그 도우심을 옛날 회중의 구원과 연관시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셨던 것으로 선언하는 그 은혜는 처음의 그 구원과 동떨어진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은혜는 그 구원의 일부나 혹은 부가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견에 즉 당장 홍해를 말린 옛 기적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도우심을 다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말할 때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홍해를 갈라 길을 열어 보여주셨던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고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생명이 유지되고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확신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옛날 역사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보호와 보존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경이적인 능력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이러한 언뜻 생소하고 과장적인 표현법을 사용함으로서 이방 시인들의 방법을 모방하여 환상이나 만족시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읊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규정해 놓으셨던 양식과 방법을 고찰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근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처럼 훌륭한 비유적 표현의 묘사를 통해서 다윗이 찬미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진지한 사색의 주제로 삼지는 않고 오히려 사악이나 우매성 때문에 눈을 감고는 그것을 모른 체해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원'으로 번역한 (아피킴)의 정확한 의미는 '강의 통로' 입니다.
시편 18 편
그러나 다윗이 이 구절에서 명백히 의도하고 있는 바는 물의 원천 그 자체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서 심히 많고 고갈되지 않는 물을 강들에 대주어서 언제나 강의 진로대로 끊임없이 흐르게 해 주는 물이 분출하는 근원이 식별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줍니다.
4. 본문 16-17절은 "(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입니다.
여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개괄한 숭고하고 장려한 이야기의 취지가 간략하게 나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윗이 마침내 그의 공통의 깊은 수렁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의 재주나 인간들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이적인 수단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실 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위에서 도움을 내려보내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보냄'은 우리들이 보통 엉뚱하게 신뢰하기 마련인 인간적이요, 지상적인 도움과는 반대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천사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피조물들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준비시키시며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서 그들을 명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류의 도움이 하늘에서 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손을 펴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다윗의 의도에는 지금까지 언급된 놀라운 은혜가 아주 평범한 종류의 다른 은혜들에 비할 바 못되는 그 탁월성을 말하기 위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표현에는 여기서 송축되고 있는 하나님의 비상하신 능력의 행사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쓰시는 일반적이며 통상적인 방편들 사이의 무언의 대조가 암시됩니다.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라고 다윗이 말했을 때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을 수백 번이라도 삼켜버렸을지도 모를 원수들의 잔인성을 격렬한 급류에 비유함으로서 그는 그 위기의 긴박성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시편 18 편
'이것은 인간들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가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수렁에서 구원을 받았도다' 라는 듯이 다윗이 말을 했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다윗은 그를 심하게 증오하며 박해했던 '강한 원수'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아무런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서 간단하게 그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더 높이고 찬미하기 위해서 다윗은 이 사건을 들어서 그 어떠한 인간의 능력이나 힘도 하나님께서 아주 극도에 달한 재난을 제거하여 주실 때에나 다윗을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줍니다.
본 구절 마지막에 (키)라는 히브리어 불변화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대체로 서술된 것에 대한 원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의 대다수의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위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은 내 원수들이 너무 많고 강력해서 단순한 인간의 도움으로는 그 어떠한 구제책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라는 해석입니다.
이것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도움을 베푸시는 가장 적합한 시기는 그들의 원수들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때이거나 또는 파선 당해서 육지에 닿을 희망을 완전히 상실한 나머지 걷잡을 새 없이 바다 밑으로 빠져 들어가는 비참한 사람처럼 원수들의 폭력에 부서지고 괴롬을 당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때라는 아주 유익한 교훈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라는 불변화사는 다음과 같이 비록(although)이라는 뜻의 반의적인 불변화사로서 설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해석하면 '비록 다윗의 원수들이 숫자와 힘에 있어서 다윗보다 우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원을 받았다' 입니다.
5. 본문 18-19절은 "(18)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그들은 나의 재난 의 날에 나를 방해했으나 - 칼빈)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앞 문장을 다른 말로 확증합니다.
곧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피할 길이 없던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견디어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가 사방으로 포위를 받았었는가를, 그리고 그 포위가 범상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를 박해하는 그의 원수들로 인해서 그가 언제나 그의 재앙의 날에 혹독하게 괴로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시편 18 편
여기서 그가 결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처럼 갑작스럽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망의 문제가 자신의 수중에 절대적인 자신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 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시편 기자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돌림으로서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선하신 뜻을 지니셨기에 나를 구원하셨다-칼빈)라고 하나님께만 모든 찬양이 돌아가게 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불러주심에 특별한 경의를 품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말합니다.
다윗이 원칙적으로 고수하는 핵심은 자신에 대한 모든 공격과 그가 견뎌야 했던 모든 고통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일어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으며 말씀의 계시를 겸손하게 따랐다는 점입니다.
어떤 일을 시도하든지 무분별하고 제멋대로의 정욕에 따라 저돌적으로 행동하며 위험에 빠졌을 때 무모함으로 대처하는 오만불손한 사람들이 간혹 그들의 대담하고 단호한 분투로 인해서 그들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불운을 맛보게 되고 오래지 않아 그들의 성공의 가도에서 벗어나게 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번영을 누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명 안에서 무슨 일을 시도한다는 보장이 다 근거가 없기에 그들은 그들의 터무니없는 건물을 하늘에까지 쌓아올려서는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을 교란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결코 그를 저버리셨던 적이 없으신 것은 자신이 저절로 왕의 직분을 감히 맡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의 비천한 처지에 만족하고 양의 우리에서나 그의 아버지의 오두막에서 미천하게 사는 생활을 기꺼이 살고 있었을 그때에 사무엘의 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증거합니다
바로 그것은 그 보좌를 맡기기 위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상징이었습니다.
시편 18 편
시18:20-24 여호와께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많이 체험한 후에 그 구원하시는 행동원리를 밝히 말합니다.
1. 본문 20절은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입니다.
언뜻 보기에 다윗은 모순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방금 앞에서는 그가 소유한 모든 복의 원인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선포해 놓고는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정당한 보응을 하신 것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슨 목적으로 자신의 정직성에 대한 이런 칭찬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관련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언뜻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 말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다윗은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가 품고 있는 미래의 왕국에 대한 소망의 유일한 창조자이시라는 것과 자신은 인간들의 투표에 의해서 왕위에 올려진 것도 아니요, 자신의 마음이 단순한 충동에 이끌려 그곳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순종을 바쳤으며 결코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한 일이 없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은총을 값없이 보여주셔야 했던 것과 그 다음으로 다윗은 순종하는 정신과 순수한 양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처럼 값없이 주신 그 왕국을 받아들여야 했던 반면에 더욱이 악인들이 그의 신앙을 전복하거나 요동하려고 획책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소명의 똑바른 길에 계속 집착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을 마치 전투에서의 사령관처럼 묘사합니다.
또 하나님의 권위와 지휘아래 다윗이 그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선택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셨기에 그를 왕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곧 이어지는 구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과 직분의 여러 임무를 최대한으로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합니다.
시편 18 편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으며 명백한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전투를 받아들였던 하나님의 전사를 보호해 주셨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못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윗이 인간들에게서 칭찬이나 받으려고 의도적으로 허풍을 늘어놓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우리가 소명을 따르며 그것의 한계를 지키며 하나님의 명령이나 보장이 없이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결코 우리를 저버리시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유익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켜 주시고 효과적인 부름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예지하실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올바른 인생 항로를 시작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에게 이 복을 주시는 기회를 하나님께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기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공정한 보응을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 대해서 관용을 베푸실 때 각자의 값어치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성경이 '보상'이나 '보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에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행위에 무슨 공로나 가치가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도무지 근거가 없고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재판관으로 각자의 행위에 따라 보상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책무를 지시지 않으며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런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 어거스틴이 표현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안에서 보상할 만한 아무런 의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에 달라붙어 있는 흠과 결점을 용서하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정당하게 거절하실 수 있는 그것을 우리의 의로 전가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에 뒤섞여 있는 죄악이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행위 때문에 베푸시는 보상이 우리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고 과분한 은혜로부터 나온다는 당연한 귀결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에 따라서 보상하신 것으로 말하는 특별한 이유를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18 편
다윗은 자신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자신의 칭의의 근거로 신뢰하거나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어전에 주제넘게 불쑥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인정하셨다는 점을 알 뿐 아니라 자신의 원수들의 거짓되고 사악한 중상모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혐의를 벗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심중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믿는 다윗은 하나님 자신을 자기의 소송의 재판관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부당하고 수치스럽게 수많은 중상모략을 당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험담은 다윗의 명예와 이름에 대해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전체 교회의 안녕과 지위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울을 격동시켜 그로 하여금 다윗에게 불을 내뿜게 한 것은 단순한 앙심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람들이 순진한 한 개인을 상대로 그처럼 악의를 품고 그에게 노발대발 대들게 한 것은 그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틀림없는 사실은 사단이 다윗의 왕국에 이처럼 거대한 공격을 자극함에 주요한 주동자였으며 그 많은 공격을 통해서 사단이 다윗의 파멸을 노린 것은 이 한사람 속에 하나님께서 전체 백성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두시고 봉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다윗은 그처럼 용의주도하게 자신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그의 원수들과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때의 이것은 자신의 전체 생활이 아니라 한가지 특정한 명분 또는 특별한 사항에 대해서만 국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강론의 정확한 주제와 다윗이 여기서 논란을 벌이고 있는 내용을 잘 파악해야 옳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혐의를 둔 죄악의 종류가 많았다는 데 있습니다.
첫째는 반역과 배신, 곧 다윗이 자기 장인인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요, 둘째는 노략질과 강도, 곧 다윗이 강도처럼 그 왕국을 장악했다는 것이요, 셋째는 선동, 곧 다윗이 이 왕국이 태평성세를 구가하고 있을 때 그것을 혼란 속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잔인성과 악명 높은 행위, 곧 다윗이 여러 살인사건의 원인이요 수다한 위험스런 방법과 부당한 책략에 의해서 자신의 음모를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난에 대항하는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이 문제에 있어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동했다는 점을 항변하며 확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보장이 없이는 아무것도 행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원수들이 다윗에게 무슨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든 다윗으로서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규정된 한계를 항상 지켰기 때문입니다.
시편 18 편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의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판단에 따라 그들에게 자비롭게 대하신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의도는 단순히 어떤 특정한 명분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그것을 악한 모략자들과 대조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전 생애를 고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목적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다윗은 그 효과와 그 결과에서 결론을 내리며 변함 없는 승리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어떤 선한 목적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우심에 대한 표적을 통해서 다윗의 편에 계시다는 점을 명백히 입증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본문 21절은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입니다.
다윗은 앞 구절에서 자신의 손이 깨끗하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지만 인간들이 자신에 대해서 사악하게 판단하고 있으며 악평을 퍼뜨리는데 있어서 아주 적극적이라는 점을 발견하고서 자신이 여호와의 길을 계속 지켰다는 점을 확언합니다.
이 말은 이 문제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상소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입니다.
물론 위선자들이 습관적으로 동일한 방법에 따라서 하나님께 독단적으로 하소연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농락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는 덮개로 삼는 일보다 더 주제넘은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설혹 인간 사회에 공의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인간들이 확실히 진실된 것으로 믿지 않을 문제는 전혀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이 본을 통해서 무엇보다 선한양심을 가지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음을 크게 먹고 인간들의 거짓된 판단을 무시하고 우리의 성격과 명분에 대한 옹호자를 찾아 하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다윗은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여기에는 비록 악한 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신은 항상 자신의 부름의 표적을 향해 올바로 노력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어떤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을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격리시키며 소외시켜 놓는 배교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물론 다윗이 때때로 육신의 연약성 때문에 죄악에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시편 18 편
그러나 다윗은 결코 경건을 추구하는 길에서 벗어나거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맡겨주신 그 임무를 어겨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3. 본문 22절은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기 때문에 - 칼빈)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어떻게 굽히지 않는 정직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정직함으로 그 무수하고 심각한 시험들 가운데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상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단은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무기에 의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반격할 갑옷을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의롭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날마다 하나님 말씀 연구를 통해서 자신을 단련시키도록 배워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훈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할 경우 그는 곧장 경솔과 우매에 떨어지고 말며 하나님께 대한 모든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규례'(judgments)와 '율법'(ordinances)의 두 단어 사이에 대한 어떤 미묘한 구별을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양자를 구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규례'를 율법의 둘째 돌판과 관련되는 것으로 '율례' 또는 '법령'을 히브리어에서는 (후코트)라 하는 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신앙의 의무와 의식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최선의 구별입니다.
4. 본문 23-24절은 "(23)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입니다.
이 구절의 모든 동사는 '나는 정직할 것입니다' 라는 식의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어떤 선행이나 어떤 행동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길(course)에 대한 한결같은 인내를 두고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점, 곧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재판관으로 모시는 것은 그가 인간들의 부당한 정죄를 받고 있다는 점을 그분께서 보셨기 때문이라는 점이 '나는 당신 앞에서 정직하게 지내왔습니다' 라는 내용에서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시편 18 편
물론 성경은 성도들에게 종종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는 가운데 그들을 종교적 준수에 대한 외형적인 가면만 걸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들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에 대한 악평을 두고 이처럼 하나님께 자신만만하게 탄원하는 것은 널리 퍼진 그 거짓된 소문이 틀리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곧 이어지는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라는 반복적인 표현에 의해서 더욱더 자세하게 확증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눈과 세상의 눈, 또는 악의적인 눈에 대한 대조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은 악하고 비뚤어진 감정 때문에 결코 왜곡되는 일이 없으므로 우리가 그분 앞에서 순결하고 정직하기만 하다면 거짓되고 악한 중상모략을 무시해 버린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윗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정직성은 완전성이 아니라 거짓이나 위선과 대조되는 진실성입니다.
이 점은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라는 23절의 맨 마지막 소절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이야기함으로서 다윗은 원수들의 악의가 자신에게 분노를 자주 일으키고 자신의 폐부를 찌르지 않을 정도로 죄악스런 감정으로부터 순결하고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점을 암암리에 시인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마음 속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여러 번 육신을 통해서 번민과 분노의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억제했다는 점에 대한 증거입니다.
인간이란 자신의 불의로부터 스스로를 면밀하게 보호하지 않는 한 결코 정직과 경건의 습관을 끝까지 지속할 수 없습니다.
시편 18 편
시18:25-27 자비한 자에게는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 없이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받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상(賞)을 받는 의미로 하나님에게서 받는 보호와 구원은 우리 자신의 의(이것도 궁극적(窮極的) 의미에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를 따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뒤에 회개하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의(義)로 간주됩니다(눅18:14).
하나님은 이렇게 상선벌악에 명백하시지만(특별히 25-27), 이것을 알아 볼 자는 진정한 신자들 뿐 입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것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색맹(色盲)이 어떤 빛에 대하여는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1. 본문 25-26절은 "(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 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 이시리니"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정직에 대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 원수들의 근거 없고 수치스러운 중상모략에 대해서 승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위선자들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행동하는데 익숙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성공할 때 파렴치하게도 인간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교만하게 으시댈 정도로 우쭐댑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하도록 권유하실 때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악하고 못된 오만은 다윗이 자신을 두고 격려하는 자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두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거기에 특수한 겉치레를 꾸며 댐으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를 남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악을 용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도움을 통해서 그분께서 자신에게 자비롭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8 편
또 그 모든 도움을 하나님의 호의의 명백한 증거로 정당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악한 사람들과 신실한 자들에 대한 구별입니다.
곧 악한 사람들은 번영에 도취된 나머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운명에게 제사를 바치며 그것을 그들의 신으로 삼으면서도 파렴치하게 자신들이 하나님께 용납된 것으로 떠들어댑니다.
반면에 신실한 자들은 번영을 누릴 때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의식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분의 정당성 때문에 자기에게 도움을 베푸셨다는 점을 들어 자랑합니다.
우리는 맨 먼저 이 말을 전체 문맥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무고한 사람에게 죽음이 닥쳐올 때 그를 거기서 구원하실 때마다 주님께서 자비로운 자들에 대해서는 자비롭고 순결한 자들에 대해서는 순결하다는 점을 보여주신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온순하고 참을성 있게 자신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한 결코 자신의 종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결국에는 그들에게 자비롭게 대하신다는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의도에서 야곱은 창세기 30장 33절에서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하나님께서는 나의 의를 나에게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칼빈)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강론의 요지는 각자는 자신의 의의 열매를 거두기 마련인 만큼 하나님의 백성은 좋은 소망을 품고 의와 정직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라는 26절의 마지막 소절에는 언뜻 생소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조금도 모순된 것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런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무런 위기에 대한 염려없이 자신들의 죄악 속으로 스스로 자장가를 부르며 잠들어 가는 위선자들과 흉측한 하나님 모독자들을 일깨우려는 뜻에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심각하고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고 또 하나님께서 스스로 처참한 재앙을 내리실 것으로 말씀하실 때 거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지 않고 이 모든 것을 그냥 넘겨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에게서 보는 이런 금수적인 징그러운 우매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새로운 표현을 고안하도록 하고 다른 인물로 분장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됩니다.
레위기 26장 21절부터 24절에 이와 비슷한 문장이 나오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시편 18 편
이것은 그들의 오만과 고집이 하나님 편에서 자신의 습관적인 오래 참음과 온유를 망각하고 그들에게 마구잡이로 대들게 강요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고집센 자들이 그들의 오만을 통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욱더 강하게 하시면서 그들을 더욱더 산산조각으로 박살내며 만약에 그들이 돌맹이로 되어 있으면 그분께서는 자신에게 철의 강인성이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의 표현에 대해서 우리가 또 하나 덧붙일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는 악인들에게 자신의 강론을 펴실 때 통상적으로 그들의 이해력에 맞추어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뜻에서 그들에게 호령하실 때 그들이 그들에게 덮치는 맹목적인 공포 때문에 자신을 실제 모습과 다른 인물로 바꿔버리고 마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야만적이요 잔인하며 포악한 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윗이 하나님에게 재판관의 칭호와 직임을 돌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격정적인 횡포로 무장되어 있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이 사악한 자들을 물리치고 압도하려는 이유에서입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매듭이 단단하면 그것을 푸는 도구도 그만큼 단단해야 하는 법입니다
2. 본문 27절은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는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에 대한 교정책이 담겨 있습니다.
다들 체험하고 있듯이 자비로운 자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성실한 자들이 아주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무도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자들을 상대로 자비롭게 대하신다는 말씀을 거짓된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우리가 끝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장 선한 자들에게 도움을 베풀려고 달려오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잠깐 동안 그들의 인내를 단련하신 다음에 그들이 넘어져 있는 땅바닥에서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시며 그들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들을 효과적인 구제책으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결말을 보고서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비로운 자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분으로, 순결한 자들에 대해서는 순결한 분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판단해야 옳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 18 편
만약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미결 상태에 두어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그분만의 대권(大權)으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수한 역경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된 자신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지체하면서 우리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고통을 받고 낮아진 다음에 우리를 구원하는 그분의 선하심을 체험하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깨닫는 것은 적잖은 위로입니다.
우리에게 부과된 부당 행위를 두고 너무 비통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그의 호의를 제시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본 구절 둘째 소절의 해석은 사무엘 하서와 약간 다른데, 거기에는 "주께서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의미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거기서는 성령께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들을 무너뜨리려고 망을 보고 계시므로 그들이 파멸을 모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그들에게 더욱더 뚜렷한 경고를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 양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곧 악한 자들이 위험에 대한 아무 공포없이 자신들의 욕심만을 만족시킬수록, 그리고 더욱 더 교만하게 그들의 발 밑에 있는 가련한 자들을 무시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파멸에 가까워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잔인하게 조롱과 멸시를 내뿜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들의 완고한 고집을 물리칠 만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들의 교만이 극에 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시편 18 편
시18:28-32 주께서
다윗은 주께서 그에게 능력주셔서 승전하게 하신 체험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28-50)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악을 이기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다윗은 군인으로서 전쟁 때에 받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 부분에서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그런 어려운 때를 당한 일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경과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알게 해 주는 귀한 기회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역경을 당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하여 깨달은 진리가 여기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롭다는 것" 입니다(30절).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뒤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참됨을 더욱 정확히 느낍니다.
1. 본문 28-29절은 "(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입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노래에 보면 그 표현양식이 좀더 정확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등불을 켜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우리의 등불이 되신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곧 흑암에 내던져지게 되었던 다윗이 빛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등불을 켜주신 사실 뿐 아니라 흑암 속에 빠졌던 그를 빛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신데 대해서 감사를 돌립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그런 극심한 고통에 몰리게 되었으며 자신이 버림받고 절망적인 사람의 처지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혼란하고 괴로운 상태를 흑암에 비교합니다.
시편 18 편
물론 이것을 물질적인 것을 영적인 것에 전용한 것으로서 이해에 대한 조명에 적용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윗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유의함으로서 참되고 올바른 의미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번영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이 하나님의 호의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는 빛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의 본을 받는 가운데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흑암을 분산시키고 기쁨의 빛을 회복시켜 주시기 전에는 우리의 역경이 끝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한 사실로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등불의 직분을 수행하는 한 흑암 속을 거니는 것을 괴로운 일로 여기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다윗은 그의 승리를 하나님의 덕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지휘아래 그가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그의 원수들의 쐐기 모양의 대형, 곧 방어진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칼빈)는 것과 그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강습해서 빼앗았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비록 용맹스러운 전사였으며 싸움에 있어서 뛰어났지만 아무것도 자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동사의 시제를 본 시편에서 다윗이 과거와 미래 시제를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그가 서로 다른 역사를 한꺼번에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 있는 사건들이 직접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듯이 말하며 그와 동시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지속적인 과정을 묘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신자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30절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입니다.
"하나님의 도" 란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역사하시는 방법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특별한 혜택이 돌아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부하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이 없는 인간들과는 달리 자기 종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결코 실망시키거나 속이시거나 저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의 보호 아래 받아들인 자들을 신실하게 방어하고 지탱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시기 전에는 결코 그분께 가까이 나갈 수 없습니다.
시편 18 편
바로 이런 이유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선의에서 도와주신다는 점을 밝힌 다음에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시는 수호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실 것으로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하고 틀림없는 진리라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에 대해서 정직한 분으로 드러나실 것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이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점은 뒤에 나오는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방패로다 - 칼빈) 라는 구절에서 쉽게 드러납니다.
하나님 말씀이 순결하고 사기와 기만이 섞여 있지 않아서 모든 찌꺼기를 걸러낸 순수한 은과 같다는 말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칭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비유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불신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과 확실성의 숭고한 개념을 갖게 하는 뜻에서입니다.
결말이 우리의 예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으례껏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속되고 불신적인 생각을 품기 시작합니다.
이 말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제12편의 6절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3. 본문 31절은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외에 누가 반석이뇨"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스스로 자신들의 환상에 따라서 수호신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고안을 비웃으면서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점, 곧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증합니다.
만약에 다윗이 자신의 소명의 한계를 벗어났더라면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계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우기 이 말을 통해서 물론 그는 인간들이 고안해 낸 모든 거짓된 신들을 참된 하나님과 대조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다윗이 품고 있는 의도는 세상 전체가 온통 몰두하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그것을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 하나님 믿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헛된 소망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단지 하나님의 칭호와 이름에 관해서만 말함이 아니요 다윗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하든 우리가 그것을 다른 곳에서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구해야 하는 것은 오직 그분에게만 그런 능력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라는 말로서 선언합니다.
시편 18 편
하지만 우리는 다윗의 의도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원수들과 대적하시며 하나님을 지휘관으로 모시고 그의 깃발 아래서 그들을 상대로 용맹스럽게 싸운 것으로 묘사함으로서 자신이 아무것도 자신의 환상이나 악하고 저주스러운 양심에 따라서 시도한 것이 없다는 점을 확언합니다.
4. 본문 32절은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입니다
이것은 전사의 허리띠(belt 또는 girdle)나 고삐에서 취한 비유로서 성경은 인간의 힘이나 정력이 거기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이것은 다윗이 '연약하고 허약할 수밖에 없던 내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강하고 용감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윗은 곧이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호의로 베풀어주신 성과 그 자체를 두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만약에 사람들의 사업이 그래도 번창한 결말로 장식되지 않을 경우 기민하며 적극적인 용기와 힘이 뛰어난 힘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이 번창한 결과가 자신들의 사려분별이나 운명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다윗은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라는 말로 그렇게 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그것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여기에 나오는 '길'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행동의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다윗이 무엇을 시도하든 하나님께서 거기에 복을 내리사 거기에 성공적인 결말을 맺도록 역사하셨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시편 18 편
시18:33-36 나의 발로
다윗은 역경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 둘째로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다고" 합니다(35절).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돌보아 주시는 능력을 체험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하여 낮아지시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는 행위는 모두 다 우리를 낮추어 찾아오시는 온유의 덕입니다.
본문 33-36절은 "(33)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35)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 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워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요새들을 차지하고 나서 특별히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극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암사슴 발"같은 발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상하게 빠른 걸음, 곧 보통 인간들에게 없는 그런 걸음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다윗이 특출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으며 날쌘 사슴처럼 경이적인 속도로 접근 불가능한 바위를 오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정복자로서 전쟁에서 차지한 요새를 "나의 높은 곳"으로 부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이 요새를 차지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타인의 것을 아무것도 차지한 일이 없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얼마든지 떳떳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손'이 '싸우도록'(to war)가르침 받고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말로서 전투에 있어서 다윗의 기민한 능력이 자신의 기술이나 체험과 단련에 의해서 그것을 기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묘하신 선하심을 통해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전쟁에 있어서의 힘과 기술이 하나님께서 전달하시는 은밀한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은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곧 이어서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전쟁을 수행하는 힘이 크게 부여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놋활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도다-칼빈)라고 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은 천성적으로 체질이 용맹스럽고 힘이 센 사람이지만 성경은 그를 키가 작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시편 18 편
따라서 다윗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비유에는 인간의 자연적인 힘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라는 말로서 자신이 피할 수 있었고 완전히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주의 구원하는 방패" 라는 말 속에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경이적으로 자기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무수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패는 자기가 지니고 있던 모든 방패와 갑옷이 암암리에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의 안전의 원인을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선으로 돌립니다.
이 선하심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로 그를 존귀와 성공의 길로 안내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크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에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의 표적이 지속되며 줄곧 보강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라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무 길이 없던 곳에 고르고 적당한 길을 열어주셨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말에는 넓고 훤히 트인 장소와 사람이 자기 발조차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곳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더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고 더 이상 돌파구를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그를 그의 협소한 길과 곤경에서 이끌어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불신을 교정함에 있어서 아주 유익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멋대로 즐길 수 있는 아름답고 쾌적한 평원을 보기 전에는 마치 땅이 우리 발 밑에서부터 꺼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마음을 조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을 넓히며 그것을 평평하게 하는 직무가 하나님께 속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정당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이러한 실제적인 효과를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라는 말로서 곁들여서 표현합니다.
다윗에게 떨어진 그 어떤 저항이나 역경, 재난도 그에게서 용기를 박탈하거나 그를 절망 속으로 내던질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시편 18 편
시18:37-40 내가 내 원수를
이 부분에서는 다윗이 승리한 형편을 진술합니다.
본문 37-40절은 "(37)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38)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 다
(39)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40)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이 그처럼 강조하는 핵심은 결말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승리의 원인이 하나님의 호의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명분이 선하고 공정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물론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과 악인들에게까지도 성공을 허용하시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내내 그들, 곧 그의 원수에게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결과로서 마침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은 호의의 표적을 체험하는 자는 오직 그분의 종들뿐이며 그분께서는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 그들이 용납과 시인을 받고 있다는 점을 증거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자기 원수들을 모조리 파멸하기까지 살육을 그치지 않았다는 다윗의 말에서 그가 너무 많이 군인의 양식을 흉내내어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윗이 모든 참 신자들에게서 당연히 빛나야 하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야 하는 온유와 부드러움을 망각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의 모든 감정은 성령의 지도와 조정을 받고 있었던 만큼 우리는 이것이 피흘리는 것을 즐기는 잔인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위임하셨던 심판을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의 말이라는 점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시편 18 편
그리고 사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자신의 직분의 임무나 필연성이 요구하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방울의 피라도 흘리는 것을 극도로 꺼릴 정도로 성격이 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소명과 육신의 모든 격정과 거리가 먼 그의 순수한 열정을 참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별히 유의할 점은 시편 기자가 여기서 하나님의 복수를 자초할 정도로 굽히지 않는 격정적인 오만의 소유자들을 가리켜 자기 '원수들'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품격을 예표한 사람이었던 만큼 온건하고 부드러운 권위만 행사한다면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아주 고집이 센 자들에게만 사망의 형벌을 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 자체는 다윗이 회개하고 새 생활을 하는 자들을 용서해 주는 것을 가장 즐거운 일로 여겼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모든 인간을 회개하도록 부드럽게 권유하지만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버티는 자들에게는 철퇴를 가해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싸웠으며 그분에 의해 왕으로 선택되고 그분의 보장이 없이는 아무것도 시도한 일이 없던 다윗이기에 그분의 도움을 받아 모든 원수들의 공격을 능가할 수 있었으며 아주 크고 강력한 군대까지 퇴패 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상징 속에는 그리스도 왕국의 무적의 성격과 상태가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것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의 원수들을 전복하고 파멸시키는 분이요, 모든 전투에 있어서 한결같이 승리하시는 분이요, 자신의 권위와 능력에 대항하는 온 세상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계속 왕으로 남아 계시는 그러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확보된 승리에는 우리도 비슷하게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점이 내포되어 있는 만큼 여기서 우리에게 사단의 모든 노력, 죄악의 모든 음모, 육신의 모든 시험에 대한 견고한 방어가 약속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전투를 통해서만 평온한 왕국을 차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이 왕국의 보전을 위해서 뻗치실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 한 가지로 만족해야 합니다.
다윗은 한동안 도망자였으며 들짐승의 굴 속에 피신하는 등,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원수들에게 등을 돌려대게 하시며 그들을 패주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을 다윗에게 넘겨주어 그가 그들을 추격해서 전멸하게 하셨습니다.
시편 18 편
마찬가지로 우리 원수들은 당분간은 우리를 파멸하려고 우리의 목에 칼을 들이댈 준비를 갖추고 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이 우리 앞에서 도망치게 하실 뿐 아니라 보응으로서 우리 앞에서 그들이 멸절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싸우게 하는 전투의 종류가 무엇이며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이 어떤 자들이며 그가 우리에게 무장시켜 주시는 갑옷이 무엇인가를 명심함으로서 마귀, 육신 그리고 죄악이 그분의 영적 능력에 의해서 우리 발 밑에 거꾸러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검의 능력을 허락하신 자들을 자신께서는 그들을 방어해 주실 것이요 그들이 그리스도 아래서 통치하며 자신을 그들의 머리로 인정하는 한, 그들이 부당한 반대를 당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실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만장일치로 40절 처음부분에 나오는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를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그들이 패주했다-칼빈)로 번역합니다.
물론 이것은 동일한 의미지만 (오렙)이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머리' 또는 '목'의 의미가 있는 만큼 우리는 얼마든지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원수들의 목을 허락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윗의 손에 맡겨 죽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8 편
시18:41-45 저희가 부르짖으나
여기서는 다윗이 승리한 형편이 계속 진술됩니다.
1. 본문 41-42절은 "(41)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42)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쏟아버렸나이다" 입니다.
동사의 시제가 과거에서 미래로 바뀐다 해서 이야기의 흐름이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우리는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기도를 거절하셨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앞에서 설명하려 했던 동일한 주제를 계속해서 언급합니다.
그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도움과 지지를 받았다고 거짓되이 허풍을 떨었음이 결말을 통해서 마침내 드러나며 하나님이 그들을 저버리셨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원수들의 사업이 계속 번영할 때 그들은 때때로 갈채와 칭찬을 받기도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셨지만 반면에 다윗은 저버리셔서 그가 밤낮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별 응답이 없었던 것으로 대부분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의 인내를 충분히 단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저버리셨고 그들의 소망을 헛되게 하고 낙심시켜 놓고 마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도 않으신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이러한 말들에서 우리는 다윗의 말의 의도를 파악하게 됩니다.
악한 자들이 그들의 부당한 소행들을 하나님께서 호의를 보이셨던 것으로 가장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멋대로 악하게 모독해 왔기에 시편기자는 그들을 완전하게 좌절시키고 만 허풍을 두고 조롱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윗이 하나님을 결코 진지하고 참되게 부르는 일이 없는 위선자들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라는 이 약속은 영원불변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8 편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의 원수들이 하나님께 진지한 마음으로 호소하였을 때도 그들이 배척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습관적인 뻔뻔스러움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악한 사업들을 인도하셔서 잘 되도록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그들을 저버리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극심한 곤경에 처할 경우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으며 공포에 질려서 임박한 재앙을 보고 무서워 벌벌 떨면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악한 길을 참으로 회개하고 고칠 정도로 그들의 의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더우기 신앙의 영향력을 받기는커녕 그들은 마음의 오만과 강퍅성에 꼬임을 받거나 오히려 의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투덜거리기 위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이지 마음놓고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 유익한 경고를 얻습니다.
고통받는 가련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조롱하며 보잘것없는 간청자로서 그들에게 나오는 자들에게 교만하게 등을 돌려대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내던지신 다음에 그들이 온갖 수모를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며 "거리의 진흙"처럼 짓밟히게 그들을 넘겨주신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다윗은 교만하고 잔인한 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소리칠 경우 하나님은 그 외침에 귀를 막으실 뿐 아니라 보응의 섭리에 따라서 그들이 남을 대우한 것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줍니다.
2. 본문 43절은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입니다.
1) 43절초는"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입니다
다윗은 몇 마디로 다양한 방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다는 점을 밝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경이적으로 그의 신하들을 달래지 않고 백성들의 격렬함을 진압하지 않았을 경우 신하들이 일으킨 난동들로 심한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본 구절의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광범한 승리를 거두었는가 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력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인근 민족들을 정복하기도 했습니다.
시편 18 편
패배와 학살로 말미암아 크게 쇠퇴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과거의 상태를 불시에 회복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적대성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과 평화롭게 도저히 살 수 없던 인근 민족들을 그의 속국으로 삼은 것은 놀라운 변혁이었습니다.
극심한 재앙을 받고도 이 나라가 여전히 생존하며 힘을 모아 과거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보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에 자기들의 정복자였던 자들까지 정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 두 가지를 다 언급합니다.
다윗은 먼저 백성들이 자기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 이 나라 안에 벌어진 이 소요를 잠잠케 하신 분은 그 어떤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다음으로 강대국들이 자기에게 복종하고 사울 시대에는 허약하기만 했던 왕국의 경계선이 크게 확장된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 및 능력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그의 왕국 내에서 일어나는 국제 문제뿐 아니라 외국의 적들에 있어서까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의 왕국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우리에게 예시하여 주시려고 의도하신 모형이었던 만큼 그 왕국을 세우고 보존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길을 펴셔서 밖으로부터 그에게 대드는 공공연한 원수들에 대항하여 싸우실 뿐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소란과 분쟁도 진압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초부터 분명하게 보여졌던 것이기도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민족 가운데 얼빠지게 완고한 자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다음으로 모든 세기의 체험에서 알 수 있듯이 위선자들이 교회를 가르고 난도질함에 있어서 사용하는 분쟁과 분열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해독스런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적들의 포악한 노력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붕괴시키는 해독을 끼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나를 발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 앞에 있는 외적들을 전복하실 뿐 아니라 내적인 다툼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그의 나라, 곧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툼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 하서에 있는 노래에는 이러한 말들 대신에 "주께서는 ........ 나를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라고 말하는데 거기서는 '지키다' 또는 '경호하다' 는 뜻을 가지는 (티쉬메레니)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다윗이 안전하게 오랫동안 이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8 편
다윗은 멍에 메는 습관이 없던 자들에게 규율과 복종을 부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복에 의해서 얻어진지 얼마 안 되는 나라는 자주 새로운 소요에 의해서 흔들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무엘의 노래에서 자기를 열방의 으뜸으로 삼을 정도로 그러한 높은 권력의 지위로 올려주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꺼이 베푸셨던 왕권을 계속 소유하도록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2) 본문 43절 후반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입니다.
이 문단의 전체 의미, 곧 여기에 나오는 말은 다윗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장차 올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는 것을 강하게 확증해 줍니다.
물론 다윗은 그 습관과 성격을 아주 희미하게 알고 있었을 뿐인 민족들이 자기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한 것은 다윗이 정복한 민족 중에 한 민족도 자기에게 전혀 생소했거나 그들에 대한 지식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정복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복종은 하나님께서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말1:11)뻗치는 전 세계를 그 왕국으로 삼는 하나님의 아들의 무한한 지배에 대한 희미한 예표를 약간 우리에게 보여주신 어렴풋한 비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 본문 44절은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입니다.
1) 본문 44절 초두는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입니다.
이것은 앞 절의 하반절과 의미가 동일합니다.
비록 다윗이 여러 승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버리고 자발적으로 굴복할 정도로 평판과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이웃이 쓰라리게 체험한 무기의 힘에 대한 공포 때문에 복종했던 만큼 제대로 단순히 다윗의 명성만 듣고 굴복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더욱 더 잘 적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수단으로 세상을 복종시키며 이전에는 자신에게 반항했던 자들을 이름만 듣고도 순종하게 만드십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의도된 사람이었던 만큼 하나님은 그때까지 이스라엘과 친밀한 관계가 없던 생소하고 멀리 있던 민족들을 다윗의 권위아래 복종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약속된 지배의 서곡이자 준비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지배 영역은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확대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편 18 편
마찬가지로 다윗은 무력과 전쟁의 위력을 통해서 어찌나 큰 명성을 차지했던지 다윗의 원수들 가운데 무서워서 그에게 굴복한 사람들이 수다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상대로 가질 정복에 대한 모형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만으로도 이방인들을 정복하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배의 기초가 되는 신앙의 순종은 "들음에서 나기"(롬10:17) 때문입니다.
2) 본문 44절 후반부는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입니다.
이것은 정복에 의해 얻어진 새로운 지배권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묘사입니다 피정복자들은 정복자들에게 큰 경의를 표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되고 강요된 굴종입니다.
그들은 굽실거리며 순종하지만 자발적이거나 기꺼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분명히 그 의미입니다.
주석가들 중에 '복종하다'(lie)는 단어를 서로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원수들이 그들의 기대에 있어서 실망했다거나 다윗이 그들에게 부과할지도 모를 처벌을 피하려는 뜻에서 자신들이 다윗에게 적대적인 어떤 것을 꾸미지 않았다는 점을 선언했다는 뜻으로 말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이 다윗의 의도를 충분히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견해로서는 이 '복종하다'라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처럼 일반적인 의미, 곧 '노예같은 방법으로 비천하게 되다'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복종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카하쉬)라는 히브리어는 종종 비유적으로 마지 못해서 '비천하게 되다' '굴복하다' '복종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다' 라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방인 또는 이방인들의 자녀들' 로 불리어지고 있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하지 않고 다윗에게 정복되기 이전에 그들 스스로 전혀 다른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했던 민족들입니다.
우리는 이것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겸손한 자세를 하고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만 참된 마음이 아니라 거짓된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 이들을 가리켜 '이방인들'(strangers)로 부르는 것은 적절합니다.
물론 그들이 선택받은 백성들과 함께 섞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신앙에 의해서 그들과 한 몸에 연합된 자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을 교회의 자녀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시편 18 편
물론 모든 이방인들은 그들이 처음 교회로 불려들여질 때 낯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새 마음과 정을 품기 시작한 뒤로 전에는 '낯선 자요 외국인'이던 그들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2:19)이 되었습니다.
2) 45절 후반은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입니다.
다윗이 얻은 위대한 명성과 무서운 이름을 더욱더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은밀한 곳에서 보호를 받고 있으며 가파른 요새에 숨어 있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걸어나와 굴복할 정도로 겁에 질린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공포가 다윗의 원수들로 하여금 숨어있는 곳에서 걸어나와 그에게 굴복하게 만들었듯이 복음도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굴복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무서운 공포로 그들을 후려칩니다.
바로 그것이 예언의 능력입니다.
곧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4절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인간의 양심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은밀한 마음을 들춰냄으로서 과거에 반역자인 자들로 하여금 무서워 엎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그것이 바로 예언의 능력이요, 말씀의 전파입니다.
시편 18 편
시18:46-50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여기서는 다윗이 하나님이 주신 승리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1. 본문 46절은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입니다.
기원법으로 이 독법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를' 바란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표현은 좀 어색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어떤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랄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할 뿐 아니라 자기 왕에게 마땅한 경의를 표하고자 할 때 큰 소리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습관에서 빌어온 것이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개선가에 적합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다윗이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곧 그에게 주권적인 힘이 있다는 점을 밝히는 단순한 주장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주 적합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이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생명은 하나님의 존재, 또는 본질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는 점을 제시해 보여주는 그분의 업적에서 추론할 수 있는 살아 계심에 대한 증거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눈앞에서 능력의 역사하심을 철회하실 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도다' 라는 진리에 대한 의식이나 이해가 우리 마음에서도 사라져버리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으로 말씀되는 것은 그분께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통해 이 세상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분이 자신이라는 점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았던 만큼 찬양과 감사로 송축합니다.
우리가 이 처음 상반절을 '주께서는 살아 계시도다' 라는 현재 시제로 읽을 경우 이어지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추론의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호와께서는 살아 계시도다. 그리고 따라서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힘이여' 라고 분해되어 해석되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나의 힘'이라는 호칭은 48절에 '나의 구조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자신 속에 곧 자신의 은밀한 곳에 사시는 것이 아니라 이 온 세상에 대한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생한 힘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가 '나의 힘'으로 번역한 (추리)라는 히브리어는 여기서 '힘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타동사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시편 18 편
2. 본문 47-48절은 "(47)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48)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자신이 얻은 여러 승리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다윗이 만약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지 않았더라면 이 승리들을 차지할 것으로 결코 예상할 수 없었기에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을 이 모든 승리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경솔하게 자신의 승리에 대한 찬양을 아주 적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없게 하려는 뜻에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특별한 표현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위로부터 그에게 부여된 능력이 그로 하여금 원수들에게 그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복수를 실행하도록 무장을 시켜야만 하는 것이 이상한 것 같겠지만 우리는 항상 다윗의 소명을 명심해야 옳습니다.
다윗은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왕적 권위와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이기에 다윗이 행사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손해를 입자마자 앙갚음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직분을 횡령하는 셈입니다.
개인들이 그들에게 가해진 손해들을 사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당돌하고 불신앙입니다.
왕들과 위정자들로 말하자면 보복을 자신의 것으로 선언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칼자루를 쥐어주어 그들을 자신의 보복의 사역자들과 집행자들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육신의 격렬한 힘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올바르게 조절받는 열정의 힘에 이끌려 행동한 것이라면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부과한 공정한 형벌을 보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왕들이 그들의 소명의 여러 임무를 수행함에 이러한 절제가 따르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복을 내리는 임무를 위임하신 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자기들에게 사용하도록 허용된 칼을 자신의 환상이나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없이 칼자루를 쥐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부당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휘하에 있는 전투하는 교회는 교화되기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오만한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고는 누구에게도 보복을 행사하라는 허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원수들에게 선을 행함으로서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원수들을 이기도록 힘쓰라는 명령을 우리는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도저히 가망이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점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전에는 그들이 회개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시편 18 편
그와 동시에 보복으로 말하면 우리가 때가 되기도 전에 무턱대고 그것을 행사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하나님께 맡겨져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그가 처해 있던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만약에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보존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저히 안전하게 피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주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 건지시나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드시고'라는 말은 다윗이 경이적으로 원수들의 힘과 악의를 능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다윗이 그들의 포악에 짓밟히거나 그들이 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수 없다는 것입니다
3. 본문 49절은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입니다.
본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지금까지 말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복들이 비범하고 특별한 찬양을 받아 마땅하며 이방인들에게까지 그 명성이 퍼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 구절에는 당시 신자들이 습관적으로 성전에서 수행하던 일상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그처럼 좁은 한계 속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다윗의 이 감사의 차이에 대한 대조가 암시됩니다.
그 의미는 '오 주여 제가 주께서 율법에 정하신 의식에 따라서 백성의 집회 가운데서 감사를 드려야 할 뿐 아니라 주의 찬양이 더 먼 곳에까지 퍼지게 할 것은 저에 대한 주의 은혜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더우기 이러한 말들에서 이 구절이 앞으로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한 예언이 담겨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방인들이 선민들과의 교제를 누리도록 권고를 받지 않고 그들과 한 몸을 이루도록 연합하지 않는다면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귀머거리들 가운데서 그분을 찬양하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소명이 우연한 것이거나 아무렇게나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아주 적합하고 타당한 것입니다(롬15:9).
우리는 뒤에 가서 여러 구절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찬양을 선포하는 성소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택하시고 복음으로 그들을 부르셔서 이방인들의 귀가 열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유대지역 아닌 다른 곳에서 올바르고 유익하게 찬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18 편
4. 본문 50절은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입니다.
이 결론 구절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런 선하심과 관용을 행사하신 이유를 밝힙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왕'으로 부름으로서 무모하게 그 직분을 탈취하거나 음모와 악한 계략에 의해서 당돌하게 끼어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합법적인 권리에 의해서 왕권을 장악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증거합니다.
이 점을 다윗은 기름 붓는 의식을 통해서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손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심으로서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눈에 보이게 자신의 손을 뻗치셔서 그를 왕좌에 등극시켜 놓으신 것이나 다름없이 왕권을 장악하였다는 다윗의 정당성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선택이 계속되는 일련의 큰 구원들에 의해 확증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에서 하나님의 소명이 없이 무슨 일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이 모든 구원의 원인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돌리는 것은 이 나라가 순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을 가르쳐주려는 뜻에서입니다.
더우기 본 시편의 마지막 결론 문장을 볼 때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다윗은 여기서 역사적인 사건의 서술을 통해서 다윗이 몸소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독특하고 다양한 예들을 열거하기보다는 그의 왕국의 영원한 지속성을 예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후손'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그의 모든 자손들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마고 약속하시면서 사무엘 하서 7장 12절에서 언급하는 다윗의 후계자를 특별히 지목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왕국은 하늘에서 해와 달이 비취는 한 오래오래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 예언되어 있는 만큼 이 예언은 당분간이 아니라 영원히 왕이 되기로 언약된 분에게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솔로몬이나 다윗의 어떤 후계자에게도 전적으로 적용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독생자에게만 적용되는 다윗의 후손이 이 놀라운 약속에 의해서 존귀하게 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히브리서(1:4)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대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천사들을 능가하는 위엄입니다.
결론으로 우리는 실체되시는 그분의 그림자와 모형을 생각함으로 해서 인도를 받을 때라야 본 시편을 연구하여 충분히 이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