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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4
구원의 표징 / 한서노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실을 기념하는 기념물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기념물들을 통하여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기억하고 믿음생활에 큰 도전과 자극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기념물들이 사무엘상 7장에 있는 에벤에셀입니다. 이 기념물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미스바에서 회개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주신 사건을 기념하여 세웠습니다. 그 이전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보여준 기념물입니다.
고라 자손들이 반역한 이유는 "왜 모세와 아론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의 위치에 서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고라를 따르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던 사람에게 염병이 임하여 무려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죽었습니다.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특별한 위치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각 지파별로 지팡이에 이름을 쓰게 하여 회막 안에 있는 언약궤 안에 두게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는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나무가 열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언약궤에 계속하여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보관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17:10) 이 기념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택하시고 세운 주의 종들에게 대적하는 자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두고두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기념하거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표징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기록된 성경과 그 구원사역을 기념하는 성찬 예식 외에 모든 기념물들과 상징들은 없어졌습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구원사역을 경험하는 방편으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 외에 허락하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매년 해오던 방식대로 새해 첫 주일을 시작하면서 성찬예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성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약의 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구약의 한 사건과 성찬과의 관련성을 함께 살펴보므로 성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성찬은 구원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첫 번째로는 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 두 번째로는 기념물을 세우신 목적, 세 번째는 이 기념물과 성찬예식과의 관련성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역사적 배경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본문은 그 과정 가운데 요단강을 건너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하나님께서는 강을 둘러가게 아니하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여호수아 3:10에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본문에서 "안다"는 동사의 목적절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는 사건은 이 두 가지 목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그 사건 개요가 3장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고, 역시 4장에 다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당시에 상황에 대하여 3:15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팔레스타인에 추수하는 시기는 4-5월경인데 이 때에는 봄비와 헤르몬 산에서 녹아내린 눈으로 인하여 요단강이 넘쳤습니다.
여기에 "언덕"이라는 표현은 홍수를 막기 위하여 쳐진 둑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 부산 근교의 김해에 가면 내벽과 홍수를 막기 위한 외벽이 있습니다. 강이 범람하지 않을 때에는 바깥 둑 안에 있는 땅에 여러 가지 농작물을 재배합니다. 하지만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범람하게 되면 그곳까지 물이 차게 됩니다. 여기서 작물을 재배할 때는 이러한 시기와 관련하여 주의를 기울입니다. 역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당시 요단강도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시기에는 홍수가 범람하여 바깥 둑에까지 물이 차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대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그 범람하던 요단강에 발이 잠기자마자 염해로 흘러내리던 물이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이라는 마을에 물이 쌓이고 그 앞에는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른땅같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넜습니다(수3:13-17).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건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역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2. 기념물을 세운 목적
여호수아 4장의 내용은 앞에 있었던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이후에 그 사건을 기념하여 기념물을 세우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실 때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가운데 12명을 따로 세워서 제사장들과 함께 건너게 하였습니다(수3:12; 4:1).
왜 그들을 따로 세웠는지를 4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서 있는 곳에서 각 지파 별로 각각 한 개의 돌을 취하였습니다. 이 돌을 취한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호수아 4:4-7에 그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 두 사람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여기서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 옆에 있었던 돌을 취한 것을 가리켜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너희 중에"(히. ࠎइࡪধࡪ, among you)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할 말씀은 "표징"(히. ࠛࢫࠀ, sign)이라는 말입니다. 이 표징이라는 말은 어떤 사실을 보여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언약궤가 서 있었던 곳에서 가져온 열 두 개의 돌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어떤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돌들은 어떤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 본문에서 이 돌이 어떤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표징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나님께서 요단강이 범람하여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상태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을 주시고,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기적적으로 요단강 물을 위에서부터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념물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실들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념물이 여호수아서가 기록된 후에까지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4:9에 보면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념물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구원의 표징으로서 단순한 표징이 아니라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역사의 그 현장에서 그 사건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후손들이 미래에 그 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어오면 설명해 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우리가 주일학교 어린이나 여러 교육 프로그램에서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묘사하는 내용과 그 의미를 설명해 주는 일이 구약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념물을 볼 때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자기 백성들 가운데 함께 계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념물은 단순한 기념의 성격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 실제적인 목적은 여호수아 4: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단순한 기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가나안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전도적인 목적과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그 주변의 여러 나라에 큰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 사실은 여호수아 5:1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하신 일을 듣고 주변의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념물을 세운 실제적인 목적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잘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기념물과 성찬과의 관계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 요단강 물을 위에서부터 막으시고 마른땅같이 지나가게 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물이 오늘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동일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돌을 보지도 못하였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이 돌은 옛날에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문제는 이 사건의 신학적 교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의 신학적 교훈을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역사가 어떤 종류의 역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나라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는 신학적인 역사입니다. 여기에 "신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계시해 주시며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가, 즉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주시는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역사를 구원역사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구원의 역사를 기록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며 또한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본문도 역시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에서 요단강 물을 위에서부터 막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땅같이 지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이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시기 위하여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역사에 개입하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념물은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 모든 일의 예표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구원의 역사가 기록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읽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을 것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배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 외에 오늘날 우리가 기념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표징은 성찬예식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 마26:26; 막14:22)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5; 마26:27-28; 막14:23-2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특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는 말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나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원문은 성찬을 행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찬을 행하는 목적을 말씀하시기를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과거에 있었던 한 역사적인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이 모든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어떤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떡과 잔에 참여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주님이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찬은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찬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과거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만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더이상 기념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성찬예식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상을 대하는 것은 이러한 미래에 대한 관점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행할 때 성령께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임재하십니다. 하지만 그 날에는 기념이나 상징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과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성찬상을 대하면서 이 사실들을 머리 속에 그림을 그리면서 참여하십시오.
과거에 요단강을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옆에 있었던 돌을 가지고 기념물을 삼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면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도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함으로 크고 놀라운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실을 보여주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표징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비록 우리에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십시오. 과거의 역사 가운데 요단강을 위에서부터 막으시며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 구원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도 구원을 경험하게 하시고 재림 시에는 완전한 구원을 보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