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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세상간의 외적인 투쟁은 보다 깊은 내적인 배경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사단과의 투쟁에서 비롯된다.
첫째, 교회와 세상과의 외적인 투쟁의 이유가 무엇인가?
둘째, 투쟁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셋째, 지상의 교회의 확신하며 계속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교회의 사명은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세상의 죄와 악과의 투쟁을 계속하는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교회는 죄와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교회이다.
1. 여인과 용, 그리고 남자 아이(1-6)
요한은 하늘에서 펼쳐지는 상징적 광경을 본다. 요한이 보았던 이러한 환상 가운데 주님이 계시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용과 여인 사이에는 명백하게 적대감이 있었다. 그 적대감은 세계역사를 지배해왔던 적대감이다. 요한이 보았던 그 장면 가운데는 세가지 성격의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찬란하게 성장한 해를 입은 여인이 등장한다(1,2).
이 여인은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을 상징한다. 구약과 신약시대를 통하여 교회는 하나이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한 백성이다. 지상에서는 이 교회가 보잘 것 없게 보이고, 또 가끔 비난과 조롱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볼 때에 바로 이 교회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영광과 찬란함으로 충만한 것이다.
해로 옷을 입은 것은 교회가 영광스럽고 고귀하기 때문이다. 발 아래 달이 있음은 그가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이요, 열 두 별로 장식된 면류관을 머리에 쓴 것은 그가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를 밴 것은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심'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둘째,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용이 나온다(3,4).
이는 사단(계 20:2)을 상징한다. 머리 일곱에 일곱 면류관을 쓴 것은 마귀가 세상을 통치함을 말한다. 비록 이들이 일곱 면류관을 썼을지라도 이는 승리를 뜻하지 않과 다만 권세를 참칭해서 세상의 권세잡은 자로 세상을 통치함을 말한다. 사단은 파괴력을 나타내는 열 개의 뿔을 가진 모습을 하고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삼키려고 그 앞에 서있는 것이다.
이 용은 매우 커서 그의 꼬리로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다! 이것은 악령의 무수한 숫자이다.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땅에 던지는 것은 사탄의 힘이 하늘과 땅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 가공할 괴물이 해산하려는 여인 앞에 서 있을까? 용이 해산하려는 여인 앞에 서있는 것은 새로 태어날 아이를 삼키고자 함이다! 이것은 아이를 없애버리려는 사탄의 시도이다. 이것은 사단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파괴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사단이 이스라엘을, 특히 메시야의 핏줄을 반대하는 것은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매우 명백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약전체의 역사적 사실들과 신약의 사건들은 여인의 씨와 용과의 사이의 투쟁이며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싸움임을 알 수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방해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쐐기를 박으려고 한다. 이는 하나님과 자기백성 사이의 교제를 가능케하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셋째, 남자 아이, 즉 여인의 씨가 등장한다(5,6).
"이 남자 아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이다(시 2:9). '여인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성경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어있다(창 3:15, 갈 4:4 참조). 아이가 들려 올라가는 것은 승천을 나타내는 말이다.
2. 내어 쫓김을 당한 용;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나다(7-12)
두 번째 상징적인 광경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속 그리고 하늘 위에 오르사 보좌에 앉으심으로 그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하늘에 한 전쟁이 발발한다. 선한 천사의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천사 미가엘이 악의 천사이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자인 용과 싸운다. 두 장수와 두 군사가 서로 대적한다. 싸움의 결과, 용은 대패하였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했다(9).
사단이 '내어 쫓김을 당하더라'는 말은 형제를 송사하는(괴롭히는) 자의 위치를 잃었다고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고 죄의 대가로 모든 것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을 송사하고, 괴롭힐 정당한 이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나 실제로 끊임없이 송사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나 마귀는 더 이상 구주가 구속사역을 완성치 못했노라고 트집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충분하고 완전하게 성취되었으며, 그가 고난받은 후 승천하실 때에 죄의 값을 충분히 지불하셨던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를 송사하리오?'
사단과 그의 사자의 실패가 준 세가지 영향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사단의 실패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워질 구원이 천명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입증이요 그의 백성들 심령 속에 그의 권세가 성취되었고 그의 위엄이 나타나 보인 것이다(10). 그 결과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었다.
둘째, 사단의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기까지 인내하고 순종함으로써 그 신앙의 순수성을 증명하므로써 승리한다(11). 따라서 하늘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셋째, 사단의 실패로 인하여 사단은 크게 분을 낸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역사의 종말에 있을 최후의 좌절을 예고한다(12). 그 결과 하늘은 환호에 가득차게 된다.
3. 용의 최후의 발악; 용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여인의 자손들(13-17)
세 번째 상징적인 광경에서 땅으로 내어 쫓김은 받은 용은 남자 아이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여자를 죽이려는 시도와 또한 실제로 어린 아이에 대한 분노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때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고 광야로 피신한다. 하나님께서 광야에다 여자를 위한 처소를 예비해두셨다(6). 이곳에서 여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1260일 동안(6) 양육을 받는다. 여기서 여자는 '그 뱀의 낯을 피하여' 있게 된다. 그러나 용은 포기하지 않고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고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내니,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이 토한 물을 삼킨다. 그래서 용은 여자에게 크게 노를 발한다. 어린 아이를 죽이려고 시도했던 계획이 실패로 돌갔을 뿐 아니라 여자도 해치지 못하게 되자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살며시 돌아간다.
우리는 위의 광경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패한 사단은 교회를 계속하여 공격한다. 사단이 교회를 향하여 분노를 발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낳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독수리의 날개롤 품으신다. 주께서는 수난의 광야인 이 땅에서 체재하시며 교회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시며 말씀의 만나로 양육하신다. 여기서 교회는 '뱀의 낳을 피하여' 거하는데, 이는 교회가 사단의 맹렬한 직접적인 공경으로부터 멀리 피하여 있음을 말한다. 마귀는 여자를 멸할 수 없다. 이것인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이다.
물론 마귀는 거짓의 물결, 혼란, 여러 가지의 종교들, 철학적 허구, 정치적 이상향, 그럴 듯 한 과학적 요설 등등으로 교회를 삼키려고 애를 쓰지만 참되고 신실한 교회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세상적인 사람들은 이 모든 강물(이스라엘을 박멸하려는 사단의 노력)을 마시려고 한다! 마귀는 '그 여자의 남은 자손', 즉 성도 개개인에게 공경의 방향을 돌린다. 용은 최후의 발악을 한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계속되는 사단과의 전쟁이 있는 것이다.
사단의 핍박과 교회를 공격하고 파괴하려는 시도를 좌절케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교회가 체험하는 기간을 '한 때, 두 때, 반 때'(42달, 일 천년, 1,260일=오랜 기간, 즉 전 복음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는 두 증인이 예언하는 때(11장)인데, 이 기간 동안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큰 성읍의 대로에 놓이게 된다(계 11:7하).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이 삼년 반은 심판의 바로 직전이다. 따라서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 즉 탄생과 사역, 십자가상의 고난, 보좌에 앉으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의 재림 직전까지 연장된다.
이 오랜 기간을 왜 '삼년 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하였는가?이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잊지못할 삼년반이라는 기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왕상 17장, 약 5:17). 그 기간은 수난과 고통의 기간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기간이다. 삼년반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교회는 핍박을 당하였으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능력을 보여 주었다. 엘리야와 기타 다른 선지자들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여호와에 의해 먹여지고 양육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복음활동의 오랜 기간, 즉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시작하여 그의 재림이 거의 이를 때까지 전 기간을 통해 교회는 핍박을 계속 받을 것이나 없어지지는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있는 영향을 끼치며,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양육을 받는다.
Chirst will conquer Satan! Christ is more than Conqeror!
교회와 세상 간의 투쟁은 그리스와 용과의 싸움에 대한 외적 표현에 불과하다. 용이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용은 여인을 핍박하게 된다. 이는 여인이 그리스도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핍박도 실패한다. 결국,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는 용과 용의 동맹자들을 이긴다.
제목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본문 : 눅 12: 13-21(딤전 6: 6-10, 약 1: 10)
우리의 본문은 "어리석은 부자"(rich fool)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하고 계십니다.
첫째, 우리 인생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둘째, 탐욕에 빠질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배경(13)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상속받는 일에 있어서는 거의 99퍼센트의 사람들이 탐욕스러워진다." 두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예수께 찾아와 예수께서 그들의 상속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예수께 찾아온 동기는 돈에 대한 욕심, 즉 물질에서 자기 인생의 안정을 바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정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서 찾았다.
2. 예수님의 교훈 :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14,15)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그 부탁을 받아들이시 않으셨다. 그 이유는 재산을 분배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당국의 권세이지, 주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그 보다도 더욱 귀중하고 숭고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이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간청자가 자기 마음 속에 탐욕이 가득차 '세속적인 일들'에 열중해 있음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Beware, and be on your guard against every form of greed).
사도 바울도 같은 취지로 딤전 6: 8-1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탐심"(covetousness)이란 무엇입니까? "더욱 더욱 가지려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탐심은 다툼(strife)과 그릇된 인생철학을 갖게 합니다. 이는 마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소금물을 마시려는 사람과 같다. 예화) 황금을 버린 두 형제(639).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보게 한다. 우리에게도 물질적 소욕, 명예욕, 위선, 권세욕, 지위, 권력에 대한 지나친 열심을 내어 살고 있는 않는지! 주님은 인간의 생명은 물질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에 탐심을 물리쳐서 우리가 이 탐욕의 종이 되지 말라고 경고 하신다. 이는 인간의 생명의 가치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3. 우리가 탐심에 대한 경계를 더욱 확실히 하기위해서 비유를 베푸심(16-20)
이 비유에 등장한 어떤 부자 농부의 잘못은 무엇일까? 그가 성공했다는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와같은 성공과 부를 비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솔로몬, 욥, 아리마대 요셉 등이 부자였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신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 부자에게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가 정직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의 부를 축적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실제로 그가 잘못한 것(그의 어리석은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세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첫째, 이 부자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자기 육신이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여러 해 동안' 먹고 살 수 없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가 즐거워하는 '많은 물건'은 자기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그의 영혼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이 부자의 사고 방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물질만능주의와 현세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현대인은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기갈과 궁핍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둘째, 이 부자는 다른 사람들의 궁핍을 조금도 생각지 않는 자이다.
즉 전적인 이기주의자이다. 본문 17-19절에 "나"라는 말이 12번이나 나온다. 그는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요구를 생각했어야 했으나,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자기의 곡식을 저장할 생각에만 열중해 있었다. 이 부자의 사고는 현대의 전형적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생활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이 우리의 신앙인격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바른 관심을 가지고 배려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실제로 그는 무신론자였다. 그의 풍성한 수확을 고려해 볼 때, 그는 마땅히 이렇게 외쳤어야 하지 않을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러나 그는 그 어떤 것으로도 여호와께 감사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혼자서 스스로 중얼거린 말은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는 말 뿐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없이 사는 자였다!
이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주님은 심각한 말씀을 하신다(20).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은 자"(you fool)라고 부른다.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하나님이 조금도 필요치 않으며, 자신이 자기의 생명을 주관하는 자라고 착각하여 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은 "여러 해" 후가 아니라, 바로 "오늘 밤"에 그의 영혼(목숨)을 친히 요구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어리석은 부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 부자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모았던 재물을 상속자들이 나누어 가지면서 그를 얼마나 비웃었을 것인가? 그 어리석은 부자의 재물을 상속자들이 나누어 가질 때, 그 부자는 과연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궁금하시지요?
시편 73:18-20을 보십시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시편 39:4-6의 말씀을 마땅히 상기해야만 했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른지 알지 못하나이다."
4.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요약하심(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서 생활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감사하면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애쓰며 노력해야 한다(잠 6:6). 동시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21)에 분명하게 나타난 원칙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마 6:33).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일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항상 바른 선택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고전 10:31).
여러분, 참으로 여러분은 부요한 사람들입니까?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처럼 실제로 영적인 부요함을 소유한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부요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Security for man lies in the grace of God)(롬 8:31-39). 인생의 참된 안정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그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