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
이 수 영
토담이 길게 이어진 시골마을, 양지바른 모퉁이에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몇이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 사금파리 가장자리를 곱게 다듬어 그릇을 만들고 그 그릇에 흙, 모래, 냉이, 달래들이 밥과 국 그리고 반찬으로 한 상 차려지고 엄마 아빠가 된 아이들부터 후루룩 쩝쩝 맛있게 먹는 흉내를 낸다.
무릇 뿌리를 곱게 다듬어 그 잎줄기를 세 줄로 땋아 놓으면 그건 아기가 되었다. 그 아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부르면서도 가끔 고개를 들어 고샅길 바깥 먼 곳을 내다본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봄이 왔지만 마을의 양지바른 토담 밑에 소꿉놀이하는 아이들 몇몇을 제외하면 마을은 휑하니 비어 있다. 너무 조용했다.
해가 서산마루로 기울고 어둑살이 끼이기 시작하면 한 집 두 집, 10여 세의 여자아이들부터 아주머니들까지 자기 몸뚱이보다 더 큰 임을 머리에 이고 들어선다.
그제야 마을은 활기를 띠고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봄이면 시골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중의 하나였다. 그 보퉁이는 봄나물이었다. 각자의 힘에 맞추어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서부터 마을 앞 들판까지를 샅샅이 누비며 뜯어온 그 나물들은 그 자체로 혹은 시장에 나가 곡식 낟알과 바꾸어 보릿고개를 살아남게 해 준 일등공신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구황섭요’또는 ‘구황본초’ 등의 책을 통해 춘궁기를 이겨낼 수 있는 구황식물의 이용법을 소개하고 있었으나 그 책이 무슨 소용이랴.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이미 그 참담한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책의 내용보다 더 절실한 방법으로 봄살이를 해 왔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 봄나물이 건강식품으로 먹고 싶어도 구하기 어려운, 모두가 찾는 귀한 몸이 되었지만 그 옛날 그것은 흔하고 천한 듯 했지만 귀한 정도를 넘어 생명 연장의 수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내가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곳은 Y고을의 일월산자락 산골학교 였다. 계절은 봄이었고. 하숙집의 밥은 쌀알이 드문드문 섞인 잡곡밥에 반찬은 나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산나물이 내가 그때까지 먹어왔던 고향마을의 달래 냉이, 씀바귀 쑥 등과는 모양도 맛도 향기도 다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진한 향기와 쌉싸름한 맛이 좀은 생소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 맛에 동화되어 갔다. 내가 초임지의 하숙집에서 먹은 그 산나물들은 요즘처럼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것이 아닌 자연산 그대로였다.
퇴계 선생이 그의 시에서 봄나물의 첫째는 산상목두채(山上木頭菜)라고 불렀던 두릅에서부터 참나물, 산당귀와 각종 야생의 취나물까지,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최상의 웰빙 식품을 먹고 살았던 셈이다. 당시로서는 내가 ‘풀만 먹는 사람이냐’고 하숙집 주인에 대해 약간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식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나는 울릉도라는 섬에서 또 한 차례 봄나물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울릉도 태하 마을,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상당한 양의 달래를 캐 와서 반찬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 달래가 거기서는 길가에 흔하게 자라고 있어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울릉도에는 달래말고도 좋은 봄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얼음 속에서 자라는 전호나물에서부터, 명이나물, 부지깽이, 그리고 고비나물과 삼나물 등, 그 특이한 맛과 낯선 울릉도의 풍경들이 어우러져 이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니 내 또래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봄나물들과 함께 살았다. 빈부의 관계없이 친구들과 함께 찔레를 꺾어 먹고, 띠풀의 새순인 ‘삐삐’랑, 야산에 자라는 잔대를 캐서 그냥 먹거나 골담초의 노란 꽃과 참꽃을 따서 먹으며 자랐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본대로 들은 대로 그렇게 생활했던 셈이다.
세월이 흐르고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등산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 산길의 곳곳에는 산도라지가 고운 자태로 피어나고, 음지 진 곳에서는 코를 벌름 거리기만 해도 산더덕의 냄새가 났다. 때로는 그 산더덕을 캐서 먹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걸 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봄의 다래순, 고사리에 이어 가을의 머루 다래까지 산은 눈만 밝으면 건강식품의 보고였다. 하지만 지금은 등산로 어디에서도 산도라지 한 포기 보기 어렵고 금낭화, 할미꽃들의 야생화도 사라지고 없다.
우리 땅의 모든 식물은 건강식품이다. 흔히 잡초라고 말하는 민들레, 엉겅퀴, 질경이로부터 모든 봄나물들은 각종 비타민과 항 산화물질을 다량 함유하여 암 발생을 억제시키거나 면역력을 향상시키는 기능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제 바야흐로 봄이다. 그리고 그 봄의 시작과 함께 봄나물의 전성기를 맞았다. 요즘은 산나물을 제대로 알고 채취할 사람도 거의 없고, 입산이 금지된 곳도 많아서 밭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 봄나물들만 생각하면 입에 군침이 돈다.
오늘은 엄나무의 새순인 쌉싸름한 개두릅을 초고추장에 찍어 한입 가득 먹어봤으면 좋겠다. 아니면 막걸리 한 잔을 반주로, 쓴 맛이 도는 씀바퀴 무침에 밥을 썩썩 비벼서 먹고 싶다. 상큼한 봄맛이 돈다. 입에 침이 고인다.
2015. 3. 19
첫댓글 선생님! 보리고개시절 지천에 나는 봄나물이었으나 거의가 한의학적 효능을 지닌 건강식품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그저 초근목피라도 먹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으니 씀바귀나 쑥, 냉이 등의 봄나물이 신체의 어떤 기능을 좋게하는 지 몰랐죠. 돌이켜보면 정말 건강식품이었습니다. 울릉도에서 지내실적 산마늘을 비롯한 진귀한 봄나물을 드시던 그 때가 선생님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셨습니다. 언제 한번 몇몇 문우님들과 봄나물 반찬으로 막걸리 한잔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봄나물에 얽힌 보리고개 시절의 정서를 잘 묘사하셨습니다. 감동을 많이 느끼고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려하고 절제된 문장에서흠뻑
봄내음을 느낍니다.
글에 봄내음이 가득합니다. 따뜻한 글 힘이나는 글 감사합니다.
모두가 어릴적 보고 먹은 동시대라 정감이갑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봄나물로잘 표현하셨습니다 .
봄나물 말만들어도 입맛이 나네요..봄나물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일월산 산자락이 어딘지 모르나 6,70년대 시골풍경이 실감나게 연상됩니다.초목근피로 생명을 연장하던 시절이 아스라이 떠 오릅니다. 마음에 여유를 갖고 과거를 되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오늘을 감사히 생각해야겠습니다. 깨달음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