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을 열다(묵시 6,1-8)
현실이 아름답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현실을 비현실로 만들어 놓는다. 성공주의…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성공해야 한다. 처절하고 지난한 삶의 현장을 어떻게든 바꿔 놓아야 한다. 새 세상에 대한 기대를 잔뜩 안고 우리는 어린양이 열어젖힐 봉인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적어도 ‘이 삶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을 지닌 채, 봉인을 쳐다본다.
묵시주의에 찌든 이들은 ‘봉인’을 ‘로또’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유다 사회의 숱한 묵시문학 작품들은 천상의 자리에 지상에서 ‘돈되는 것들’을 화려하게 진열하는 데 급급했다. 그리스-로마 문화 속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는 현실의 욕망을 투사한 이야기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희망하고 희망하는 것들로 인해 지금을 전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린양이 봉인을 해제하며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들은 어떠한가. 화려한가, 대단한가, 아니면 우리가 바랐던 바로 그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인가. 불행히도 봉인이 뜯겨진 후,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인간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 그 자체다. 네 마리의 말들이 각자의 색을 지니고 나타나는데, 천상의 영광을 가리키는 흰색, 전쟁과 불의를 상징하는 붉은색, 기근과 결핍의 검은색, 그리고 죽음의 색인 푸른색의 말. 서로 다른 색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우여곡절을 대변한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네 마리의 말들의 첫째 자리가 하얀색이라는 것. 고통과 슬픔을 가리키는 붉고 검고 푸른색들에 앞서 우리의 인생은 영광과 기쁨의 자리라는 것.
이제 우리에겐 해석의 숙제가 남는다. 고통과 슬픔의 자리가 영광과 기쁨의 자리와 교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숙제. 인생이란 게 그런 것 아닌가. 성공과 행복만이 지속되는 천국일 수 없고 슬픔과 고통만으로 짓눌리는 지옥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네 마리의 말들은 질서 정연하게 성공과 행복을 슬픔과 고통 속에서 지극히 사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사실, 이러한 관점으로 안내하는 건 다름 아닌 어린양 그 자신이었다. 죽음과 생명을 한 몸 안에 하나로 간직하는 어린양(묵시 5,6)은 봉인을 뜯어 흑백의 논리와 대립의 논리를 모조리 제거해 버린다. 그가 안내하는 세상은 저것을 부수어 이것을 살려 내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죽어가도, 슬퍼해도, 살아나도, 기뻐해도 그 어떤 순간에도 어린양은 모든 것을 자신의 몸 안으로 수렴하며 우리와 함께한다.
주석학자들은 그런다. 어린 양이 봉인을 열어 보여 주는 것은 이 세상을 다시 보게끔 하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이 세상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냐고. 우리가 기쁠 때, 우리가 슬플 때,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다시 보는 것은 어떤 것이냐고.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가끔씩 생각한다. 마치 2000년 전 유다 사회의 묵시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로마 문화가 신들의 이름을 빌려 상상했던 것처럼.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달리 생각하고 달리 상상하고, 그래서 현실은 어떻게든 견디어야 할 객체로 남아 버겁기만 하다.
일곱 개의 봉인이 모두 열리는 묵시 8,1은 반 시간의 침묵을 언급한다. 그리고 곧장 일곱 천사의 일곱 나팔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늘은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는다. 하느님의 신비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고 우리에게 남은 건, 지금 살아가는 삶 자체다. 어린양이 봉인을 여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볼 새롭고 신비스러운 진리나 계시를 전해 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제대로 직시하라고, 그 세상을 어떻게든 껴안아 보라는 격려와 위로가 아닐까.
사실, 영광스럽고 기쁜 인생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세 번째 검은 말의 출현에서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가 이러했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가정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말하는 밀 한 되의 값은 1세기 당시 거래되는 가격의 여덟 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검은 말을 타고 있는 이가 들고 있는 저울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경제적 상황을 상징하며 서민이 감당해야 할 힘겨움을 암시한다. 오늘도 여전히 서민은 힘들고 재화의 편중은 심각하다. 인생이 고달픈 건, 나누지 않아서다. 서로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서다. 서로의 경쟁과 경쟁을 위한 개인의 처절한 노력이 당연시되는 현실에서 이런 생각은 너무 순진한가. 경쟁과 그를 위한 노력에 익숙한 나머지 서로의 능력으로 서로를 향해 승부수를 띄우는 현대사회를 폴란드 사회 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은 ‘액체 현대’로 요약한 바 있다. 서로의 다양한 욕구가 발산되면서 우연과 혼돈,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은 그 자체로 ‘액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기댈 만한 귄위도, 챙겨야 할 정체성도, 뜨겁게 지켜야 할 신념도 제거된 개인’의 절박한 사냥터가 현대 사회라는 말이다. 결핍과 기근을 가리키는 세 번째 말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는 두 번째 붉은 말의 당연한 결과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는 ‘액체 현대’의 메타포가 붉은 말이고 그 ‘액체 현대’의 실체가 검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르다. 어린양을 기반으로 탄탄한 성을 쌓고 열두 개의 문을 모든 민족들에게 열어젖히고 되도록이면 많은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묵시 21장 참조), 그래서 살아가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모조리 전가하지 않고 공동체의 친교 안에 함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고달프고 외로울 수 있다. 배고픈 이를 위해 밥 좀 나누자고 말해야 하고, 목마른 이를 위해 함께 마시자고 외쳐야 하기에. 어린양이 봉인을 열어 놓는 건, 우리 신앙인이 현실 안에서 해 나가야 할 친교의 과업을 제안한 것이리라.
세상을 달리 보기 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 현실의 어려움과 부조리와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쁨과 행복의 전제 조건이 아닐까. 세상은 하얗다. 세상은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이 가득한 곳이다. 그런 현실이 아픈 건, 이 세상 말고 저 세상, 다른 세상을 꿈꾸는 우리의 비겁함 때문이 아닐까. 지금 우리 인간의 삶 안에 태어나시고 살으시고 죽으셨던 예수님 어린양이 봉인을 열어 다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가 사는 이 삶이 부디 아름답고 행복하기를… 못나고 슬프고 아픈 삶도 그 어떤 삶보다 소중하고 황홀한 삶이 되기를…, 어린양은 우리를 다그친다.
-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