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뜨락에 넘실댄다. 개나리는 고샅에 노란 물감을 풀어내고 살랑한 바람은 얼굴을 간질인다. 봄은 이렇게 소문도 없이 찾아와 나를 불러낸다. 따스한 볕에 등을 기대고 산책길에 나섰다. 아양산 언저리에 보일 듯 말 듯 봄빛이 다가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러 한적한 언덕배기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 고등학교에 다니며 밥벌이를 찾아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였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어머니는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동뫼까지 자박자박 걸어 나와 막내아들을 기다리곤 하셨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고향의 동뫼 언덕을 떠올리며 아양산 언덕바지를찾아온다.그때 어머니의 기다림은 설렘이었을 텐데, 나는 그리움이 가슴 바닥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목울대를 타고 울컥 솟아오른다.
아마도 여기 아양산 마루에 월하 부인의 기다림은 나보다 더 절절한 애잔함일 것이다. 봄볕은 이곳 굽이진 언덕에도 찾아와 부인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애달픔이 깊어서인지 북쪽 하늘만 바라보고 서 있는 부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그대 품에」를 노래한 하동균은 “기다림은 잊지 못한 연인을 품고자 하는 열망으로 어두운 그린(Green)표정이거나 갈색 이미지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일까. 월하 부인의 어둑한 모습이 내 마음을 더 안타깝게 한다.
머뭇거리는 마음을 다독이어 부인의 곁에 앉으려니, 고매한 자태에서 풍기는 향취에 다가가기가 조심스럽다. 이럴 때는 무슨 말로 부인을 위로해야 할지 난감하다. 부인의 얼굴에 웃음을 띠게 하려면, 도림 총각과 월하 낭자가 샘바다 마을 우물가에서 속삭이던 사랑이야기를 꺼내 볼까. 망해봉 위로 달이 차오르던 날 밤이었다. 월하 낭자는 피리 소리에 이끌리어 버드나무 우물가에서 도림 총각을 만나 둘의 사랑이 무르익어 부부로 이어졌다.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정으로 깊어진다는데, 색색의 사연들이 켜켜이 쌓인 정이 얼마나 그립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부인께서는 가슴에 묻어둔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듯 머리를 외로 돌리고 말까. 아니면 잠시 시름을 잊고 입가에 미소를 지을까. 낭군이 그리워 눈가에 이슬이 맺힐까. 하지만 부인의 온유한 성품으로 보아 어떤 내색도 하지 않을 듯싶다.
샘바다 마을에 산그늘이 내려와 어둠에 묻히면, 부인의 마음은 걱정으로 날을 샜으리. ‘낭군은 지금쯤 전주를 지나 삼례 근방 어느 마을에 소금 짐을 짊어지고 발품을 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논산, 탄천의 저잣거리를 서성거리다 백제군에 이끌려 황산벌싸움에서 봉변이나 당하지 않았을까.’ 행상 나간 낭군이 돌아올 날짜가 지나자 이런저런 걱정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마중을 나가다 보니 아양산 마루에 이른다. 언덕바지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돌처럼 서 있는 부인의 곧은 정절에 숙연해진다.
부인의 시선은 정읍천을 건너고 시가지를 지나 북쪽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낭군이 오가며 쉬곤 했다는 말고개 느티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을 성싶다. 이제는 말고개길로 오가던 발길도 뜸해지고, 맥없이 서 있는 아름드리 노목만이 세월의 어귀에서 애달픈 사연을 떠 올려주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 올 적마다 부인의 마음을 헤아리노라면 순정의 연인 「솔베이지의 노래」를 읊조리게 된다. 어머니를 모시고 연인 페르귄트를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애련함이 도림을 기다리는 월하 부인의 애절함에 얹히어 들리는 듯하다.
“뒤돌아보면 보이는 자리는 그대를 매일 기다리던 곳 쉬어가던 큰 나무 그늘도 그대로…… 나를 기다리더라도 우린 다시 만나 사랑하고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
페르귄트는 어머니와 청순한 연인 솔베이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돌며 살았다. 그리고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모아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산적을 만난다. 무일푼으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다시 떠돌다가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연인 솔베이지가 병들고 지친 페르귄트를 맞이한다. 솔베이지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페르귄트는 그녀의 자장가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페르귄트를 안고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르며 장지로 간다. 그리고 그녀도 뒤를 따른다.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 저세상에서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
솔베이지는 청춘을 기다림으로 보냈다. 봄이 가고 또 해가 바뀌어도 연인 페르귄트는 돌아오리라 믿고 기다렸다. 가슴이 저리어 오는 기다림이었지만, 이별의 순간이나마 함께 누릴 수 있었다. 월하 부인의 기약 없는 기다림에 비추어 보면 그나마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오늘도 봄볕을 맞으며 아양산 언덕바지에 서 있으려니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아, 멀리멀리 비추어 주소서” 애타는 월하 부인의 읊조림이 귓가에 맴돈다. 봄은 계절을 타고 또 오고 있으니, 부인의 기다림은 비할 데 없이 애틋하고 간절하다.
월하 부인의 기다림은 낭군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다.어쩌면기다림에 지쳐있으면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천년 세월을 사랑으로 버티느라 눈물도 말라버린 부인에게 무슨 수로 “기다림을 놓아 버리라.” 고 말할 수 있을까.
「달하 노피곰 도다샤…… 즌대를 드대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다시 읊어봐도 애잔함이 가슴 속에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