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⑳ 윌리엄 린튼 선교사(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한 나라를 사랑하고 한 민족을 사랑한 선교사
윌리엄 린튼 선교사(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앞서 선교사 열전에서 살펴보듯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성장 뒤에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미지의 땅으로 찾아온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이 땅에 처음 선교사로 들어온 아펜젤러 선교사로부터 경남 부산지역에 처음 사랑을 전한 호주선교부 데이비드 선교사 등…. 특별히 선교에 있어 두 명문가가 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와 린튼 선교사의 가문의 대를 이은 섬김은 잊을 수 없는 사랑이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고, 윌리엄 린튼 선교사(William Alderman Linton 한국명 인돈)는 미국 남장로교가 파송한 선교사로 110여 년 전 이 땅에 찾아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선교의 대를 이어 봉사한 신앙의 명문가문이다.
미국 남장로교 21세 최연소 선교사
윌리엄 린튼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 빌에서 아버지 텔 린튼과 어머니 폰더 앨더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6월, 미국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제너럴 일렉트릭(GE) 입사가 예정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1912년 8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하여 9월 20일 목포항에 도착, 입국했다.
미국 남장로교 21세 최연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1년 만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한글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1917년 전임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됐다.
윌리엄 린튼은 주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기독교 복음 전파와 교육 선교를 위해 종횡무진 다니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기도 했다.
한남대 부지 선정을 위한 선교사들의 활동
한남대 건축현장
독립운동가 윌리엄 린튼
지난 3월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3.1절을 앞두고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군산 3·5 만세운동 주역으로 윌리엄 린튼 선교사를 발표한 것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에는 군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갔다. 린튼 선교사는 일본의 부당한 압제에 분노했고,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군산 3.5만세운동 당시 교사들과 학생들의 준비를 은밀히 지원했다. 이는 호남 최초 만세운동으로 당시 참여 인원만 3만 7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전북 지역에서 28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뒤 애틀란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한국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비폭력 시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계를 향해 자유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라며 3.1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또한 애틀란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상황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일제의 신사참배가 가장 먼저 강요된 곳은 교육계였다.
린튼은 신앙 양심을 내걸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신흥학교를 자진 폐쇄시켰다. 이때 호남지역에서는 전주 기전여학교,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 영흥학교, 정명여학교가 문을 닫았고, 순천 매산학교, 매산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등이 문을 닫았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선교사들에게 출국 명령을 내렸다. 1940년 10월 미국 영사는 선교사의 철수를 명령했다. 윌리엄 린튼은 가족을 이끌고 1940년 11월 14일 출국했다.
인재 양성을 위해 대전 한남대 설립
윌리엄 린튼은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고 난 후 1946년에 다시 돌아와 신흥학교 교장직에 복직했다. 그는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8년에 대학 설립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1950년 전쟁으로 설립이 지연되었다.
이후 1954년부터 2년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쳐 1956년 대전대학을 설립하였고, 대전대학은 후에 한남 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금의 총회 KPM본부 근처 오정동 선교사촌이 선교지부 스테이션을 이루며 사역했다.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한남대 초대 총장을 맡았다. 그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대학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대학 개교 후 병이 깊어져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고 완치되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었다. 그는 학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병상에 누운 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 8월 13일 테네시 주 녹슨빌의 큰 아들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21세에 입국하여 한국전쟁과 전후 혼란기의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한국인의 따뜻한 친구로 48년을 헌신했다. 이밖에도 500여 교회를 세우는 등 교육을 통해 이 땅을 깨웠다.
한남대는 선교사 사택 일부에 ‘인돈학술원’을 개원하고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와 각종 서적과 편지, 그림, 도자기 등을 원형대로 보존하며 린튼 선교사를 기억하고 있다.
윌리엄 린튼 가족사진
윌리엄 린튼과 샤롯 벨 선교사 결혼
윌리엄 린튼 가문의 한국 사랑
린튼 가문 머릿속에 아로새겨진 대한민국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윌리엄 린튼은 유진벨 선교사의 사위로, 지금도 후손들이 한국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의 딸인 샬롯 벨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샬롯 벨은 아그네스 스콧 대학을 졸업했다. 윌리엄 린튼과 샬롯 벨의 결혼은 린튼 가문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 유진벨(1대), 만세 시위운동을 지도한 윌리암 린튼(2대), 미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한 휴 린튼(3대), 북한 결핵환자를 돕는 유진벨재단 스티브 린튼(인세반) 회장과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 존 린튼(인요한) 등이 후손이다. 한 나라를 사랑하고 한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린튼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리라. 특별히 그의 아들 휴 린턴 선교사는 미국 PCA 선교부와 한국교회를 연결하고 무교회 지역에 복음전하며 상호협력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미국 선교본부가 철수할 때는 고신총회에 선교부지를 이양해 열방을 향한 선교의 사명을 함께 감당하고 있다.
출처 : 고신 뉴스 KNC
첫댓글 선교사님의 그 열정 본받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