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옮겨 사랑하는 것. (앤서 answer, 문경민)
2086년, 우리가 살아있을지 미지수인 숫자, 이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전쟁 이후 모든 것이 사라졌고 무너졌다. 살아있는 인간의 마음도 모조리 무너졌다. 그저 ‘생존’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작은 아르굴의 등장이었다. 아르굴은 인간 대신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인간이 개발한 생명체였지만, 용도와는 반대로 인간을 죽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돌연변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르굴을 피해 점점 한곳으로 모이고 또 모였다. 아르굴에게 쫓기고 쫓겨 동아시아 지역에 앤서라는 국가 연합 셸터 (하나의 도시와 비슷함)에 모여 살았다. 좁고 좁은 섬 안에서 높은 벽을 세우고 사람들은 아르굴을 피해 살아갔다. 열심히 살아간 덕분일까, 앤서는 나름 살만한 장소가 되었다. 앤서에 모인 사람들 외에 여러 곳에서 아르굴로부터 도망쳐온 사람들은 쿠니 지구라는 지역에 살아갔다. 쿠니 지구는 앤서와 반대로 적은 식량과 황폐한 지역으로, 매일 목숨을 걸고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 유이. 유이는 쿠니 지구에서 살았고, 봉사 후 점수를 통해 앤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이는 앤서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죄악이 가득한 인간이 모인 곳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힘을 모아도 살기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물어뜯기 바빴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말이다. 작은 섬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약자에 대한 차별이 이어지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위에서 무자비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런 환경에서 싸움은 끊임없이 지속되었고, 점점 발전하는 앤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자신이 잘 살아가려고, 자신만이 생존하면 된다는 듯이 살아갔다. 마지막이 열린 결말이라 수 없이 상상하고 또 상상했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더욱 자신을 위해,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갈 것 같다는 결론으로 합쳐졌다. 이런 상상들은 지금 현실에 대입되었다. 나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들, 내가 상상했던 상황들이 지금 내 눈앞에, 우리 사회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현실을 마주한 내 마음은 조금 실망했을지도, 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주의, 개인에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사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앞의 책에 나온 이야기와 같이, 간단하게 개인주의는 오로지 ‘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한 가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으며,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나도 모르게 개인주의라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개인주의라는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 방식을 온전히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의견 또한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는 개인주의가 아닌 이타주의를 선호하지만, 막상 삶을 살아갈 때는 이기적 이타주의나 합리적 이타주의적인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기적 이타주의와 합리적 이타주의는 내가 이 글을 적기 위해 개인주의에 대해 검색해 보며 알게 된 새로운 개념인데, 먼저 이기적 이타주의란 겉으로는 이타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돕고,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시 나에게 돌아올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또한 합리적 이타주의란 이타적인 행동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모둠 과제를 할 때 친구를 도와주면서, 이 친구를 도울 때 모둠 과제를 더 완벽하게 해낼 수 있고,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돕는 것이다. 결국 둘 다 모두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닌, ‘나’를 위한 이기적, 합리적인 삶의 방식과 선택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개인주의나, 이기적, 합리적 이타주의나 결국 초점이 ‘나’를 향해 있는 삶의 방식은 사회에서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해가 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우리가 작은 공동체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무조건적인 희생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를 조금 더 돕기 위해 가족을 예로 들어보겠다. 엄마와 아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무조건적인 희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서로 맞지 않은 성격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한 집에서 살기 위해 작은 습관조차 바꾸어가는 것. 모두 상대방을 위해, 상대방을 ’사랑‘하기에 무조건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안, 상대방을 배제하고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간다면, 그 집에서는 큰 소리가 오고 갈 것이고, 그렇게 한 집에서 서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깨어짐‘을 선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작은 공동체, 그 공동체가 모인 사회에서도 이것을 적용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초점을 나에게서 쉽게 돌리지 못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무엇으로? 바로 앞에서도 언급한 ‘사랑‘으로 말이다.
대전쟁 이후 파괴된 여러 셸터 중 하나인 발안 셸터의 사령관이었던 유이 아버지의 부하였던 주하 중사. 대전쟁 이후 유이와 헤어지고 유이는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지만, 앤서의 구조대에서 일하다가 구조 요청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만났을 때 주하 중사의 상태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상태였고, 그렇기에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많지 않았던 시간 동안 유이는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주하 중사를 통해 풀게 되었으며, 죽음으로 향하기 전, 주하 중사는 유이에게 한 마디를 남긴다.
“유이야. 살아. 사는 것처럼 살아. 행복하게 살아. 사랑하면서 살아. 네가 사랑하는 것을 찾고, 돌볼 것과 지킬 것을 잡아. 그걸 손에서 놓지 않고 사는 거야.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였어. 세상이 엉망이면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해야 해. 그렇게 산다면 끝이 와도 슬프지 않을 거야.” 260p.
결국 살아가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주하 중사의 한마디와 같이, 세상이 엉망일수록, 황폐해질수록,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해야 했다. 여러 혼란 속에 놓인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음을, 이 이야기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은 사실 항상 혼란스러웠다. 한쪽에서 잠잠하다면 한쪽에서 일이 터지고,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가도, 시한폭탄과 같이 때에 따라 일이 터지곤 한다. 그런 순간에서 혼란스러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황하여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당장 무엇을 해야 잘 살아갈 수 있을지 헤매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서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함을. 엉망인 순간에서도 ‘사랑’을 통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더 많이, 더 깊게, 더 넓게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공동체와 사회에서 거친 파도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지라도, 우리는 버텨낼 수 있고, 견뎌낼 수 있다.
이것을 실천한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신이신 한 분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 남성과 여성 등 여려 빈부격차와 차별이 있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있던 시대에 태어나셨고, 그곳에서 더 많이, 더 깊게, 더 넓게 사랑을 실천하셨다. 가난한 자와 과부를 살피셨고, 병자를 고치시며,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십자가를 통하여 그의 사랑은 더욱 확실히 드러났다. 죄인이었던 모든 자에게 값없이, 아무 조건과 책임 없이 의로움을 얻게 하셨다. 혼란스럽고 엉망인 세상에, 무조건적인 희생, 즉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셨으며, 결국 참된 승리를 가져오셨다. 결코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그렇기에 그 끝은 슬프지 않다. 사랑을 통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갈 것이지만, 그 속에서 슬프지 않을 마지막, 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른다. 나는 모른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나는 모른다.‘ 유이는 속으로 되뇌며 가야할 곳을 바라보았다. 하이난섬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유이가 맞이할 모든 것이 삶의 이유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끝이 와도 슬프지 않을 삶을 살고 싶었다. 요트가 물살을 가르며 남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302p.
끝이 와도 슬프지 않을 삶은, 결국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는 삶이었다.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고, 공동체를 바라보고, 사회 전체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시선을 돌려 넓은 곳으로, 조금 더 넓은 곳으로 향한다면, 우리는 끝이 와도 슬프지 않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금은 전 세계가 계속해서 흔들리는 불안한 상황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속에서 언제나 사랑을 통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잃지 말아야 함을 기억하길 원한다. 더욱더 ‘나‘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인 나 먼저 사랑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결코 슬픈 끝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서 ‘너’로, ‘우리’로. ‘그들’로 시선을 옮기자.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