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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애에 대한 사랑의 반응
호세아서 6:4~6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러분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저의 경우는 사랑에 대한 반응을 얻었을 때였습니다. 제 아내는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2층에서 내려오는 22살의 풋풋한 처녀는 제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갈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데이트를 신청하였고, 두 번째 만나는 날 버스를 타고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를 향하여 갈 때였습니다. 기다란 손가락에 반짝이는 실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에 제 마음이 설렜습니다. 그래서 살짝 반지를 만지며 “참 잘 어울리는 반지네요?”하면서 손가락을 살짝 만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손을 만졌는데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설렜던 마음은 지금도 잊지 못할 만큼 남아 있습니다. 제 사랑의 감정을 받아주고 얼굴에 홍조를 띠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살그머니 얼굴을 쓰다듬고 안아 줄 때 아이가 웃을 때 참 행복했습니다. 내 아이가 나의 사랑에 반응하는 모습이 대견하게 여겨 이리저리 사랑의 표현을 하며 까르르 웃는 모습에서 내가 아빠가 된 것이 보람되고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때 행복을 누리고 기뻐한다고 하면 하나님 역시 그렇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오늘의 본문에서는 ‘인애’라고 하였습니다. 인애는 원문으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자비 mercy, 친절 kindness, 사랑 love과 같은 단어들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신 사랑의 특징은 긍휼, 자비, 영어로는 mercy입니다. 즉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엾게 여기셔서 자신을 겸손하게 굽혀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 인애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죄인과 상종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실 만큼 엄청난 사랑을 베풀어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답답한 상황이라도 거기서 벗어난 밝은 빛으로 나타나는 새벽을 주시고 땅에 씨를 뿌린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비를 때를 따라 내려주시므로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을 기억하고 반응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애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호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인애를 아침 구름과 이슬에 비유하여 쉽게 잊은 백성임을 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름과 이슬이란 비유적인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인애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구름’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뜨거운 햇빛을 가려 주었던 은혜의 상징이며 광야의 성전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이슬이란 표현에서 하나님의 인애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밤과 낮의 극심한 온도차로 인하여 많은 이슬이 내렸으며, 여름의 가뭄기에는 이것이 초목을 살아남게 해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아침 이슬은 만나를 동반하여 이 이슬이 증발한 다음에 만나를 남겨 놓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애는 세심한 영적 감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애에 대한 사랑의 반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애에 제대로 반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자로 인정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상급을 받지만, 하나님의 인애에 사랑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아무 가치도 쓸모도 없게 되어 영원한 쓰레기 더미인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애에 사랑으로 반응하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감격할 때 비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모습을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 생존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므로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생활할 때 저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매일 해 뜨기전에 저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셔서 양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눅 12: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반드시 갖춰야 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공중에서 날개를 펴고 먹이를 구하려는 새까지도 하나님의 인애의 손길이 펼쳐 저들이 구하는 먹잇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찌 그 인애의 손길을 멈추겠냐는 것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인애에 반응하여 사랑하는 것은 내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축과 들짐승의 차이는 주인이 있느냐 없느냐일 것입니다. 가축의 경우 사계절 어느 때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먹을 것을 마련해 주고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축은 갈수록 온유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들짐승은 혼자 힘으로 험난한 들판에서 자기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목숨 걸고 싸우며, 쫓고 쫓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의기양양하겠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지 않는 교만한 인생도 야생 동물의 삶과 비슷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위한 조그만 왕국 하나를 만들고 그곳이 안전지대라고 생각합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며, 그 욕망이 강할수록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도 커집니다. 이에 대하여 팀 켈러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는 삶의 무엇이든 우상 노릇을 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사랑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사랑에 반응하는 바른 모습입니다.
둘째는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시므로 인애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잠을 자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살펴 주시는데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 중 눈동자는 가장 예민하면서도 약한 부위입니다. 작은 먼지 하나만 날아와도 뇌가 생각하기 전에 눈꺼풀이 0.02초 만에 본능적으로 닫히며 눈을 보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것은, 우리가 위험에 처하거나 위협을 받을 때 하나님이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으시고 가장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보호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눈동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중 하나는 ‘이숀’(Ishon)으로, 눈동자에 반사되는 ‘작은 사람’을 뜻합니다. 누군가의 눈을 아주 가까이 바라볼 때, 그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언제나 당신의 시선 한가운데 우리를 둔 채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애(헤세드)는 기분에 따라 변하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너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언약에 기초한 신실한 사랑입니다. 눈동자는 외부의 충격에 매우 약합니다. 우리 인생도 작은 고난이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는 깨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인애의 약속에 따라 우리를 한시도 방치하지 않고 눈동자처럼 싸고돌며 보호하십니다.
이렇게 돌봄의 가장 절정의 시간을 보낸 것은 광야에서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돋보이는 광야에서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32장 10절은 하나님께서 광야의 거친 황무지에서 “그들을 호위하시며 지키시고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고 기록합니다. 인애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때조차, 하나님의 인애는 취소되지 않기에 그분의 눈동자 같은 시선은 우리를 향해 계속 유지됩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애에 대한 사랑의 반응입니다.
셋째는 소망의 빛을 베푸시는 인애입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날 때, 하나님의 인애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찾아오는 희망의 새벽빛이 됩니다. 시편 2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안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소망은 환경에 따라 쉽게 꺼지지만, 하나님의 인애에서 비롯된 소망은 절망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의 골짜기에서 벗어날 때만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에도 빛으로 함께 걸어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너머 영생을 얻게 하는 소망의 빛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절망과 어둠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이 절망의 큰 장벽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애를 인정하지 않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사랑으로 반응하여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바랍직합니다.
하나님의 인애에 대한 사랑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목자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는 환경에서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고 평강의 주님을 누리는 것이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을 지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 사랑의 반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낮고 천한 것이 변하여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보배롭게 하실 것입니다. 약한 것을 강하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애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존귀한 영광을 안겨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때를 따라 은혜의 손길로 감싸 주십니다.
제가 올 연초에 300여만원에 달하는 비싼 컴퓨터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런 컴퓨터가 갑자기 먹통이 되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원인을 찾아봐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워낙 신형이라 예전에 사용하였던 PC와는 달라서 저도 어떻게 해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럴 때 수리를 맡기면 터무니없이 비싼 비용이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를 마치고 책상 의자에 앉았는데 성령께서 컴퓨터의 Memory Card를 꺼내어 꼭 끼어 보도록 하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순종이 컴퓨터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우연으로 돌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의 어려움을 이기게 하심을 믿으면 앞으로 더 전진하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인애를 늘 기억하십시오!
내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로 괴로워하고 방황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이것을 치워주십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기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때 이 땅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