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11/200313]아내가 그립다
지난해 초 정년퇴직 이후의 삶(백수白手라 하지 말고 자유인自由人이라 말하자)을 생각하며, 나에게도 ‘버킷 리스트buchet list’가 있긴 있었다. 일단 석 달여에 걸쳐 고향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후, 남향南向인 사랑채에서 온종일 ‘해바라기’를 하며, 그동안 이리저리 쫓겨 못읽었거나(나중에 읽으리라 사놓은 책들이 부지기수다), 읽었으나 다시 또 읽고 싶은 책들을 실컷 보는 것이 ‘제1번’이었다. 다음으로, 책만 읽고 살 수는 없을 터이므로, 호남지역의 문학관들을 싸그리 관람한 후『호남지역 문학관 순례』라는 책을 쓰는 것. 그리고 나의 인문학특강 한 갈래인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에 대한 대중교양서『기록의 나라, 대한민국』를 집필하겠다는 것이었다. 부단不斷한 독서讀書와 집필執筆, 얼마나 환상적인 노후의 삶이란 말인가.
버킷 리스트는 숨을 쉬지 못하는 때까지는 현재진행형일 것이므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지레 자책할 필요는 없겠다. 그래도 요즘, 나 자신에 대해 상당히 실망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거주지가 ‘농촌’이라는 게 문제다. 농촌農村은 흙과 더불어 일을 하는 곳이다. 푸성귀를 갈아먹는 등 자급자족도 해야 하고, (논이야 대리代理로 지으면 되지만) 밭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묵히면 되잖으냐고 쉽게 말하겠지만, 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禮義가 아니다. 더구나 일평생 그 흙만을 파서 칠남매를 먹이고 키우고 가르친 부모님 생각을 하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농사일에 손방일망정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겠냐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니, 봄이 오는 길목의 고향에서 나의 일상日常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데도 부산하다. 그러나 치명적인 결함은 사랑하는 아내의 부재不在이다. 물론 내가 원한 일이기에 할 말은 없다. 어제 점심의 일이다. 오전에 두어 시간 묵은 밭 정리를 하다보니 때가 넘었다. ‘배꼽시계’는 왜 그리 정확한지. 귀향 이후 처음으로 라면을 끓어 먹었다(아내는 당뇨라며 라면도 먹지 못하게 했다). 유제(이웃) 82세 아주머니가 “나도 밥 허기 귀찮아 라면 끼려 먹었어. 여자도 그런디 남자는 오죽 허것어” 하며 웃었다. 아내가 있었더라면, 같이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나절 동안 심한 일을 하고 끼니때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점심상을 정성스레 차려줄 터인데.
청소와 설거지, 빨래도 마찬가지다. ‘나홀로 생활’에 익숙해지려고 습관을 붙이려 애를 써보건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언제쯤 몸에 배어 아무렇지도 않게 ‘내 살림’을 할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물론 아내가 최소 한 달에 한번은 내려와 온갖 밑반찬을 해주고, 날마다 안부전화를 하니 외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여동생네도 자주 와, 오라버니 걱정에, 부엌살림 보조에, 아버지 보살핌에 바쁘다. 사개월만 있으면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유투브 동영상을 보며 반찬 만들어본 적도 몇 번 안된다. 그러니 투정을 부릴 처지도 아니다.
다만, 어제 점심같은 경우처럼, 정지용의 ‘향수’의 시구절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떠올라, 시시때때로 아내가 눈물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이 구절은 잘못 됐다. 감히 아내에게 어찌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다고 하는가? 나의 아내는 예쁘기도 하고, 결코 아무렇지도 않지 않다. 그리고 농촌이라한들 ‘사철 발 벗’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 말은 밭일은 ‘1도(하나도)’ 시키지 않겠다는 말이다. 매일 아침 헤즐럿 커피를 타주며 ‘여왕 모시듯’ 할 테니 말이다. 우아한 안락의자에 앉혀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게 할 자신이 있는데, 아무래도 아내의 부재는 당분간 오래갈 듯하다.
그것이 ‘큰 문제’이긴 하나, 글처럼 비관적이거나 회의懷疑에 빠질 일은 아니다. 평생 우리 육신의 ‘껍데기’이셨던 아버지가 계시므로, 그분을 봉양하는 것이 어쩌면 버킷리스트 ‘영순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부자지간父子之間이므로, 효녀 딸내미들처럼 ‘나발나발’ 시시콜콜 말상대를 해드리거나 옷이나 먹을거리를 잘 챙겨드리지는 못하고, 대개 데면데면하지만, 아버지도 ‘나의 마음’만큼은 충분히 읽으시리라. 어느 때에는 나의 쓸만한 생활글을 읽어드리기도 한다. 흡족한 표정이 역력하다. 복지센터에 가셔서 동료분들에게 ‘자랑’도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안계시면, 이 세상천지에 ‘내 자랑’을 해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내와 자식들이 하는 자랑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않는가. 그러니 귀하고 또 귀한 분이 아니신가. 당분간은 아버지와 같이 살므로, 아내를 그리워하는, 아내와 함께 사는 ‘호사豪奢’는 미뤄놓아야겠다.
첫댓글 자랑스런 친구라 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