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68회 현충일을 맞이하여 고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를 소개한 서울 허영협신부님의 글과 영화 '포화속으로'를 소개합니다.ᆢ
학도병의 마지막편지 / 허영협신부
1980년 9월22일 오후2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는 이틀전 선종하신
이문근 신부님(1917년 ~1980년)의
장례미사가 봉헌되었어요. 입당성가는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찬가(전엔 복자찬가)가 불려졌지요.
”장하다 복자여~주님의 용사여~“
이곡은 이문근 신부님이
직접 작곡하신 곡이었죠. 이 신부님은 우리나라의 가톨성가를 대부분 작사, 작곡하셨죠. 그래서 아마 가톨릭 성가집에서 이문근 신부님의 이름은
아주 쉽게 찾을수 있지요.
김수환 추기경님은 장례미사강론에서 "이문근신부님의「순교자찬가는
한국교회가 살아있는한 우리모두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것"이라며
극찬하셨어요. 이문근 신부님은 우리 한국교회음악의 거장이셨죠.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이문근 신부님의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 동생 이우근 학도병에 관한 것이예요 .나는 정진석 추기경님의 회고록을 쓰면서
6.25전쟁 부분에 오래전 자료를 조사했던 이문근 신부님의 동생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를 소개했어요.
6ㆍ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편지예요.
1950년 8월 11일 포항에서 학도의용군 2개 소대 71명이 포항여고 근처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죠. 새벽녘 학교 정문으로 공격하는 북한군과 학도병들은 일제히 전투를 벌였어요. 학도병들은 실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응전했는데
실탄이 소진되자 맨 주먹이 된
학도병들은 적의 수류탄을 받아 던지고 육박전을 전개하는 등
혈전을 펼쳐 60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어요. 하지만 이 전투에서 학도병들도 48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보았어요.
후에 포항지구 전투에서 산화한 학도병들을 기리며 경북 포항시가 내려다보이는 용흥공원 내에
이우근 학도병의 시비를 제작했어요 그리고 이 실화를 토대로 ”포화속으로“(차승원, 권상우 출연)란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지요. 다음은 당시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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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적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적군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 앞에 도사리고 있는 적군의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는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하고 부르며 어머니 품에 덥석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壽衣)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죽은 자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님! 제가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이 저희를 살려두고 그냥 물러날 것 같진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중략)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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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7살의 이우근 학도병은 다시 그 편지를 이어서 쓰지 못했어요. 학생모를 쓴 채 참호에서 전사한
그의 피묻은 주머니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부치지 못한 편지가 들어 있었어요. 이 편지가 잊힐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건을 전해주는계기가 되었어요. 기록이 중요한 의미도 새롭게 깨닫게되죠
사진 1: 포항에 있는 고 이우근 학도병의 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