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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87
3월2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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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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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c2XObc6W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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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보다 열배 백배 더 겸손해야합니다!>
항간에 떠도는 우스갯 소리가 제 가슴을 철렁하게 만듭니다. 주일 미사 다녀오면 웬지 손해보는 느낌이랍니다. 강론 시간, 라떼형 신부님께서는 한 주간 동안 당신 힘드셨던 일들 원없이 하소연하시고, 당신 하고 싶은 이야기들, 자화자찬 실컷 늘어놓으시면서 스트레스 제대로 푸신답니다.
그런데 신자석에 앉은 우리는 꼼짝없이 그 모든 말씀 다 들어 드리고, 헌금까지 해야 하니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신 신부님으로부터 만 원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강론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저 역시 오랜 세월 강론을 해왔지만, 강론대에 설때 마다 늘 큰 부담감과 두려움을 안고 서게 됩니다. 사목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가고, 미사는 어김없이 드려야 하고...
언젠가 유럽 한 교구에서는 강론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신자들을 중심으로 ‘강론 없애기 운동’을 펼쳤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한 칼럼니스트는 ‘강론을 폐지하자.’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현대인들이 견뎌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일 들 가운데 가장 괴로운 일은 강론을 듣는 것이다.”며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특히 요즘 세상, 참으로 강론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사람들의 넋을 ‘쏙’ 빼놓고 마는 갖은 첨단 매체들,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다양한 볼거리와 놀 거리로 넘쳐나는 이 시대, 강론 대에 서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집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열심히 사제의 강론을 경청할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강론을 기다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강론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강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적독서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깊은 묵상과 성찰을 통해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채찍질하면서, 보다 정성껏 강론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내가 선포한 강론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여러 부류의 계층의 백성들 가운데 유달리 예수님의 눈밖에 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인자하신 예수님이시지만, 유독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날카로운 독설을 수시로 날리셨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위선적인 삶, 왜곡된 신앙, 그리고 이중성이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실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론은 완벽한데 실제는 보잘것 없었습니다.
말 하나는 대단했습니다. 번지르르 하고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보란듯이 학위를 내걸었고, 교사로서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선택된 민족, 선택된 존재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남에게 드러낼 수 있는 자선이나 기도, 단식, 고행은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신심없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실천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의 결심은 구체성이 없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론은 결과없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자화자찬과 허세만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 행위에는 본질과 핵심이 사라져버리고 껍데기만 남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듣는 백성들의 마음 속은 적대감과 비웃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보다 열 배 백 배 더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이 성찰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거짓 신심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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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e1OykpD-h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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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 무대 공포증을 없애는 방법>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위선에 대해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상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나를 잘 보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며 늘 두려워합니다. 어떤 스님의 즉문즉설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많이 긴장하는 것이 고민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기 바쁘고 늘 정신이 없고 잔뜩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너무 말이 없고 대하기 불편하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너무 속상한데도 사람들 앞에서는 제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대 공포증’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인관계로 확대되면 대인관계 공포증이 됩니다. 이 마음의 근저에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강의할 때 여전히 긴장될 때가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을 만날 때도 여전히 긴장합니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대인관계,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려면 2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 단계는 ‘깨달음’입니다.
우선 우리 대부분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란 착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삽니다. 심지어 부모까지도 자녀를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녀를 이용하며 삽니다.
“너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니?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어?”
자기 영광을 위해 자녀를 이용할 때 나오는 전형적인 말입니다. 부모도 자녀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겠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애인은 안 그럴까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 에릭은 7살 때부터 클라리넷을 시작해 캐나다 콩쿠르에서 3번이나 우승한 천재입니다. 대학에 가야 할 나이가 되자 에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이 모이는 미국 콜번 스쿨에 대학 입학 원서를 냈습니다. 특별히 세계적 클라리넷 연주자 예후다 길라드 교수에게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합격 통지서가 오지 않아 캐나다의 하버드라 불리는 맥길 대학교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학교를 마치고 다시 콜번 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길라디 교수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는 2년 전에 합격하고도 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또 입학하려는 것인가?”
이에 의문을 느낀 에릭은 이메일 복원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입학 허가 이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길라드 교수의 지도뿐 아니라, 수업료, 기숙사비, 생활비, 학비 전액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합격 메일은 삭제되어 있었고 입학 거절 메일까지 보내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을 꾸몄던 범인은 당시 여자친구였던 제니퍼 리였던 것입니다. 에릭은 당시 여자친구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이메일 비밀번호 등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입학 통지 메일을 처음 본 것은 제니퍼였고 그 메일을 지우고 몰래 입학 거절 메일까지 보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애인이 자신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에릭은 교육 기회 상실, 그동안의 잠재적 수입 손실 등을 들어 제니퍼를 고소했고 법원은 한화 약 3억 원의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랑이나 부부관계, 가족 관계, 친구 관계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반은 하느님 사랑, 반은 이기적인 사랑이 섞입니다.
어떤 존경받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세상 영예는 아무 소용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 강론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영광을 받는 것은 평생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제가 단 세 마디로 평생 쌓아 올린 영광이 지푸라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에게 욕을 한 마디 했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을 좋아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뭐 저런 신부가 있나?’라고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욕을 한 번 더 하자 자리를 뜨는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세 번째 찰진 욕을 하자 신자들도 신부님에게 삿대질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말했습니다.
“평생 쌓은 영광도 단 세 마디에 무너집니다. 이것을 위해 평생 긴장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단계는 단순합니다. 첫 번째가 세례와 같은 것이라면 두 번째는 견진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에 변할 수 없으므로 자꾸 해 보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강론을 처음 시작할 때, 역시 떨렸습니다. 그러나 강론 시작 전에 속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되뇌었을 때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도 강렬하여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긴장할 때마다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다음번도 떨렸습니다. 하고 또 하다 보니 나중엔 강론하는 게 전혀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두렵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주 해 보십시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체와 같은 것인데,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입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나를 봉헌하지 않으면 나는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나를 봉헌하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이 세 단계는 매일 계속되어야 하고 그러면 점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들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좋아한 것입니다. 남에게 영광을 주면서도 결국 그것이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모았던 우표나 나뭇잎은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당시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하는 마음 안에는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23,33)라고 부르십니다.
자녀의 본성은 부모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의 본성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게 만드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의 본성은 아버지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둘은 양립될 수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하라고 보내시며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예레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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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절) 칭호 만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사제여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사제는 거룩하여야 한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자리에서 나쁘게 처신하는 이는 누구나 그 자리에 해를 입히는 사제가 되고 만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절) 나쁘게 처신하는 사제들 때문에 훌륭한 사제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버려진 땅에서도 귀한 금이 나올 수 있다. 그 금이 버려진 땅에서 나왔다고 금을 버리느냐? 금만을 취한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얹어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 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주님은 이들을 두고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파멸을 불러 올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5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8절)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9절)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절)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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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사제로서 저는 강단과 제대에 올라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내가 말한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언제나 저를 일깨웁니다. 좋은 말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눔은 좋은 것이라며 나눔의 실천을 강조하지만, 그 나눔과 자선의 결과물 속에서 나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면 언제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바로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식과 오만을 비판하고 험담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무엇을 하고 있냐며 따져 묻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판하고 지적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가식과 거짓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오만과 독선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먼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말로만 하는 우리의 가식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우리의 오만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우리의 위선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 부끄러움들이 한 번 더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조금은 아깝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라도 나누고 사랑하고 내어놓는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줄 것입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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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1)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 말씀은,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의 위선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고, 또 그들을 비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반성하는 일입니다.
2) 우리는 우리 안에도 바리사이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음을 늘 반성해야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바리사이일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사실 위선자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이 그의 위선을 지적하면 화를 내는데, 바로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절대로 위선자가 아니다.” 라고 큰소리치지 말아야 하고, “나도 그들과 같은 위선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이 말씀은, 말보다 행실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말은 잘하는데 실행하지 않는 것은 사상누각을 짓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실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잘 알고 있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하는 일을 잘해도,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알고 있다는 것’과 ‘설명을 잘하는 것’은 모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밥상에 차려져 있는 음식의 이름과 맛과 영양가를 아무리 잘 알아도, 또 설명을 아무리 잘해도, 실제로 그것을 먹지 않으면, 잘 안다는 것과 설명을 잘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먹지 않는 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무겁고 힘겨운 짐을 올려놓고서는 그 자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엄격하고 철저한 극기고행을 해야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고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교리를 잘못 배워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옛날의 위대한 성인들을 흉내 내려다가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그냥 멍에나 짐으로만 생각된다면, 우선 먼저 자기 안에서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겨서 우리에게 ‘참 기쁨’과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11,28-30)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5-10)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 허영,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말은 ‘좋아한다.’ 라는 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권하는 사람들, 또 장터에서 그들에게 인사하면서 존경심을 표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윗자리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고,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는 위선자들의 그 ‘좋아하는’ 태도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좋아한다.’라는 말에는 ‘즐긴다. 원한다.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과 권한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교만이고, 교만은 죄입니다. (존경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고, 존경받으면 누구나 기분이 좋은데, ‘기분이 좋다.’는 그 느낌이 죄를 짓게 만드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승님, 아버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문제 삼으신 것은, 교만한 위선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감히 하느님(예수님) 위치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 하느님(예수님)처럼 행세하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큰 죄’가 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인간 세상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높은 직책이 있고, 그 직책을 맡은 높은 사람이 있지만, 그 ‘높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도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존재, 즉 구원받아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향해서 “나는 높은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탄 쪽에 서는 사람입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도전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묵시 13,5)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고, 사탄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겸손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모두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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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평화신문에 ‘미카엘의 순례일기’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7일에는 ‘아이스크림과 노사제의 투박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서품 42년을 기념하면서 동창 신부님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작은 섬에 성모승천 성당과 종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에 매달린 줄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종탑이었습니다. 종탑에서 기다리던 신부님이 친구 신부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겸손하게 살아온 동창 신부에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이었습니다. 70이 넘은 노 사제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잘 들어 주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마태 7,12)”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때는 1995년입니다. 교구의 배려로 동창신부들과 이집트, 이스라엘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마치 여행객처럼 순례를 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보다는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교우들은 미리 성서를 읽었고, 기도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려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길을 할 때입니다. 서로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심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모습을 떠올리고 울었습니다. 5처와 6처를 묵상하면서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고자 다짐했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드리고자 다짐했습니다. 성지순례는 순례자로 갔다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 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 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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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모세의 자리”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마치 모세처럼 율법의 의미를 해설하고 조상들의 관습을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올바로 살아가도록 길을 제시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은 따르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의 말은 옳지만 그들의 행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길을 제시하지만 스스로 그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말과 행실. 오직 예수님 시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는 것과 말하는 것을 모두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말만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좋든지 싫든지, 지도자들과 길을 제시하는 이들에게 맡겨진 책무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은 그것에 합당한 실천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표현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섬기셨던,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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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그런데 과연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눈과 같이 희게 될 수 있을까요?
이사야서의 첫머리는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1,1) 환시를 보았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그 주민들을 가리켜 “소돔의 지도자들,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부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 때문에 완전히 멸망한 성읍들이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에 악으로 가득하여 그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듯이,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도 절정에 도달하여 그들도 멸망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시비를 가리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희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잘 압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이사야 예언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회개하여 멸망을 피할 기회를 놓치고 패망하고 맙니다. 자신들의 죄가 진홍빛 같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그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다는 것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용서에 대한 믿음을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게도 용서의 기회는 없지 않았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를 깨끗하게 만드실 수 있으심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희망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음 말씀을 귀담아듣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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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선으로 작용할지, 악으로 작용할지도 모른 채 많은 말을 되풀이하며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여 주십사 주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이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가기를 청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에 따라 온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 곧 우리를 위하여 계획해 두신 당신의 모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곧, 당신께서 약속하신 바를 우리에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용할 양식, 곧 영원을 향하여 걸어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육적, 영적인 양식들,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죄의 용서, 악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굳이 우리의 기도나 도움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당신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제1독서가 이야기하듯, 하느님 입에서 나가는 모든 말씀, 곧 하느님의 계획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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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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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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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c)
예수님께서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았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복음 안에 드러나 있는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복음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보면, "나는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6,60/공동번역) 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어려웠을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알아듣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낮아지고 너를 위해 죽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복음을 실행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더 많이 이해하고 알려고 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 공동의 집인 지구가 힘들어하고 있고,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지쳐있는 세상이 믿는 이들에게 던지는 강한 메시지는, '복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와 입으로만 살지 말고, '몸으로 살라'는 메시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끝까지 간직했던 '복음의 단순성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더 듣고, 더 알고, 더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겸손하게 '보다 더'(radical) 복음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아는 것을 실행하지 못하면서 말만 해댄 나의 죄를 깊이 뉘우치면서, 나를 부르시는 자비로우신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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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하는 사람과 사는 사람>
마태오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말하는 사람과 사는 사람>
기도하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사랑하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도와주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곁이 되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곁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깨끗해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지요
낮추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섬기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말하는 사람은
그리 살지 않을 수 있지만
사는 사람은
늘 그렇게 말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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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1년 6월 14일부터 쓰기 시작했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묵상 글, 2021년 3월 2일인 오늘까지 이 묵상 글을 계속 쓰고 있을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 했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기껏해야 3년, 조금 더 시간을 더하면 6년 정도 꾸준히 써도 대단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벌써 만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솔직히 처음에는 글 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글의 소재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재가 생기면 무조건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에 메모를 붙여놓고서 글을 쓸 때 사용하고 쓰레기통으로 메모를 찢어서 버립니다. 미리 써 놓은 글 역시 인터넷에 묵상 글로 올라간 뒤에는 파쇄하거나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참고로 저는 묵상 글을 먼저 펜으로 종이에 적습니다.)
이런 생활을 20년 동안 한 것입니다. 그렇게 끈기 있는 저도 아닌 데 오랜 시간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니, 버리는 재미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썼던 글을 버리는 것, 내용을 사용한 뒤에 메모를 찢어서 버릴 때의 기분이 좋습니다.
기억을 통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줄어드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20년 동안 쓸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힘들다고 하는 것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버려야 가벼워질 수 있는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삶의 무게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역시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후계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 자리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권위로 말하는 것을 실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일 뿐입니다.
윗자리, 높은 자리만 좋아하고, 인사받고 존경받기만을 원합니다. 모세의 자리는 하느님의 권위를 누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남들보다 윗자리에 오르려는 권위를 차마 놓을 수 없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권위는 하느님의 것인데도 놓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타락한 하느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권위는 모두 버리고,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권위는 우리 스스로가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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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믿음}
어느 스승과 제자의 대화입니다.
제자: 기도보다 소중한 게 있습니까?
스승: 네 옆에 있는 나무에서 가지 하나만 잘라 보아라. 나무가 살아 있느냐?
제자: 네. 멀쩡합니다.
스승: 이제 뿌리를 잘라보아라. 어떻게 되겠느냐?
제자: 그럼 나무가 죽습니다.
스승: 기도란 무릇 나뭇가지 같고, 믿음은 그 뿌리라 할 수 있다.
믿음은 기도 없이도 존재하지만, 믿음 없는 기도는 허상이다. 형식적인 기도가 믿음 없는 기도는 아닐까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 자신의 열심함만 보이려는 기도는 믿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결국 말라 비틀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 시간 성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 말씀을 더 많이 듣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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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행함으로써 행복하라>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자기만 잘났다고 하며 상대의 소리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삶이 뒷받침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오늘만큼은 행동함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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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의 사랑,섬김의 권위>
-너희는 모두 형제다-
어제는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은총의 봄비였는데 오늘 3월 둘째날은 봄눈입니다. 사순시기 깨끗한 마음으로 살라 내려주신 흰눈, 봄눈의 선물같습니다. 눈 덮인, 흰눈꽃(雪花) 가득 피어난 수도원 주변의 풍경이 신비롭고 아름답기가 천상적이자 환상적입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
한눈에 들어온 오늘 복음중 한말씀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교황님의 세 번째 회칙인 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다루는 사회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입니다. 우리 수도원의 아랫집 숙소의 명칭도 ‘형제의 집’입니다. 수도공동체 성원들의 삼중 신원,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중 특히 강조되는 측면이 주님의 형제들로서의 형제애입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와 더불어 최대의 화두로 등장한 말마디는 ‘기후위기’일 것입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인류의 종말이 얼마 안남았다는 절박한 분위기입니다. 그 마지노선이 2050년이라 하며 앞으로의 10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합니다. 새벽 이색적 뉴스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환경파괴를 집단 학살처럼 국제범죄로 규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뉴스였습니다.
자연만물까지 형제라 부르면서 형제애를 강조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이 생태문명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회개의 사순시기, 쓰레기를 덜 내는 생태적 회개가 참으로 절실한 때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요즘 많이 강조되는 것이 식탁의 기본을 바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기사를 인용합니다.
“육류에 대한 인류의 열렬한 선호 탓에 600억 마리가 넘는 동물이 사육되고 있으며, 그 동물들을 위한 식량과 목초지를 위해 농지의 4/5가 이용되고 있다는 충격적 사실이다. 이산화탄소, 아산화질소, 메탄을 포함한 축산 배출물은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의 20%를 차지한다. 농업에서 삼림벌채, 음식물 쓰레기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식품 관련 배출에 축산까지 추가한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이야말로 지구 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지구의 온 생명을 게걸스럽게 갉아 먹어치워왔다. ‘먹방’은 동시대 인간의 생활 방식에 대한 가감없는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하여 식습관의 변화는 지구의 진로를 변경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강력한 처방일 수 있다. 하여 누군가는 ‘우리가 날씨다(We are the Wether)’라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간소한 삶이 지구 형제는 물론 인류를 살리는 구체적 회개 실천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향하는 대상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들입니다.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내 제자들인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당대 예수님의 제자들중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윗자리나 높은 자리를 탐하고 인사받기를, 스승이라 불림받기를 좋아하는 허영의 사람들도 있었던 듯 합니다.
사실 이런 허영은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참으로 단호합니다. 추호의 주저함도 없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이런 철저한 자각에서 겸손과 섬김의 영성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우리 세 주교님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교황님의 회칙에 싸인 모습입니다.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francisco’ 라는 철자입니다. 또 “예 이문희입니다.” “예 장익입니다” 라는 전화 받을 때의 두 주교님, 김수환 추기경 고별사 때 “강우일 아뢰옵니다” 라는 말마디들이 참 신선했으니 이 또한 겸손의 표현이겠습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이 섬김의 모습입니다. 잘 귀기울여 듣는 경청의 섬김의 자세로 거룩한 공동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분도성인 역시 당신의 수도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이 모두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섬김과 겸손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봅니다. 섬기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진정 누구나 승복하는 권위도 섬김의 권위뿐입니다. 제가 참 많이 인용했던 수도원 초창기에 있었던 예화가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불친절했던 제 행위에 거칠게 항의하는 피정신청자의 질책에 소스라치게 깨달았던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대한 자각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의 3대 필수요건 즉 ‘1.친절한 사람, 2.실력있는 유능한 사람, 3.내외적 좋은 환경’을 갖춰야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대표적인 서비스업인 음식점의 요리사, 학교의 교사, 병원의 의사, 주님의 서비스업 수도원의 우리 수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거짓 경신례와 참된 경신례’에 관해 다루는 내용중 일부입니다. 전례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참된 경신례는 그 삶을 통해 진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섬김이나 정의나 공정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참된 경신례의 전례라는 것입니다. 사회교리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참된 경신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참된 경신례의 핵심은 사순시기의 구체적 회개 실천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모두가 섬김의 형제애에 포함되는 사랑의 실천 행위들입니다. 주님 친히 섬김의 형제애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섬기자(Serviamus invicem)”, 바로 고故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의 모토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섬김의 직무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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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한 아버지의 형제자매임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언급하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모세를 통해 내려온 하느님의 말씀이니 당연히 따르고 지켜야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한 위선이니 닮지 말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교종 프란치스코가 강조하듯이 아버지는 하느님 한 분이시고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영적이건 육적이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여받은 이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위임받은 직분에 겸손과 사랑을 다해 봉사해야 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군림하거나 자기 이익만 취하라고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스승이나 선생이라고 불리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도 안에서 가르치는 직무를 부여받은 이들의 행위를 금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직무와 권위를 자기 것인 양 행세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권위의 원천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이시니까요. 이를 부여받고 위임받은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형제애는 스스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오만과 무시, 직무유기로 인해 병들고 오염됩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이들이 진정 높은 사람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당신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가장 비천한 죽음까지 끌어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소위 지도자라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가 들립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이사 1,10)
호명되는 지도자와 백성은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소돔과 고모라는 일찌기 아브라함 시대에 멸망한 도시로 타락과 징벌의 대명사처럼 불리우지요.(창세 18-19장 참조) 그만큼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의 죄악이 크고 무거움을 표현합니다.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7)
주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당신 앞에서 깨끗함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들려 줍니다. 선행과 공정, 그리고 약자를 돌보는 것이 곧 자신을 씻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존재로 거듭나는 길이지요.
이야말로 복음에서 "너희는 모두 형제다."(fratelli tutti)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길입니다. 한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가 "형제애"를 회복하는 길이지요. 물론 이 세상에는 아버지나 스승, 선생의 직분과 역할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다만 이 모든 관계의 저변을 떠받치는 본질이 형제애임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 누구도 소외와 억압의 고통을 겪지 않을 겁니다.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가 많을수록, 섬기는 이가 많을수록 형제애는 더 돈독해집니다. 형제애는 겸손으로 배양되고 존중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물론 사회 공동체와 지구 공동체, 온 우주의 생태계 공동체로 눈을 돌려 형제애를 회복하는 오늘 되시면 좋겠습니다. 몸을 낮추고 보면 고통받는 형제가 더 잘 눈에 띈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낮추고 낮추어 새로운 형제를 얻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나의 귀한 형제이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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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왜 삽니까? 이 질문은 죽을 때까지 놓아서는 안 되는 질문?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적어는 무엇입니까? 자기 인생을 전부 거는 目的語(목적어) 말입니다.
“오늘날 인생의 시간은 늘어났지만 그 시간 안에 <의미>를 담는 법을 상실했다.” 인간은 유일하게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는 동물인데도 삶 안에 의미와 시간을 담는 법을 잊어버리고 산다. 신앙인은 일상의 시간 안에 무엇을 담을까요? 신앙의 단어 세 개만 고른다면, 당신의 인생의 단어는 무엇일까요? 왜 삽니까?
“행복의 궁극적 목표는 매일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며 주어진 삶에 가치와 의미를 더한다."
“행복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 곧 충만한 삶과 관련된다.”
“행복이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우주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행복한 사람은 누구나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카라마조프의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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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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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nbrNibq3Xg&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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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3.02.화.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여기저기서
봄꽃소식이
전달된다.
자연의 실행은
대자연의
섭리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실행하는
삶의
기쁨이다.
서로의 아픔과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실천의
기쁨이다.
실행하지
않으면
기쁨도 없다.
실행이
은총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는
실행이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다.
가장
중요한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실행의
탄생이다.
언제나 시작은
올바른 실행에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우리 삶의
기본은
믿는 것을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는
말씀의 실천이다.
공동체를
살게하는 것은
실행이다.
공동체와
실행(實行)은
몸과 피의
관계이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는
우리의 실천이
되살아나는
은총의
시기이다.
은총과 실천의
관계처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십자가로
더욱 절절해진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실행이 필요한
때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천이
사랑의 복음이다.
실천으로
단련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관계는
삶으로 전하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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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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