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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와글와글 스크랩 베리칩 - 나치 ID 타투, 666 바코드 마이크로칩 (짐승의 표)
신동날개 추천 0 조회 64 11.12.17 2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차대전은 3차대전(대환란)의 모형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히틀러가 강제수용소의 유대인과 집시 등 수감자들의 왼쪽팔에 개인 식별 ID 번호를 문신으로 영구적으로 새기고 이들을 관리한 것은, 적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의 오른손(팔)과 이마에 바코드 마이크로칩을 새기고 사람들을 관리할 것의 모형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들의 왼쪽팔에 개인 식별을 위한 ID 번호를 새기게 하고 IBM의 홀러리스 천공카드 시스템을 사용하여 왼팔의 문신 ID 번호들을 관리하고 홀로코스트에 사용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오른손(팔)과 이마에 바코드 마이크로칩을 넣고 슈퍼컴퓨터를 사용하여 이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2차대전 때 히틀러와 나치가 유대인과 집시들을 대학살한 홀로코스트는 3차대전(대환란) 때 일어날 야곱의 환란의 모형입니다.
 (히틀러는 전세계 유대인의 1/3, 유럽 유대인의 2/3를 학살하고 죽였음)
 2차 대전의 홀로코스트는 3차 대전 때 짐승 적그리스도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고 죽일 것의 모형입니다.
 (3차 대전은 후 3년 반의 대환란 기간입니다. 3차 대전의 마지막 전쟁이 아마겟돈 핵전쟁입니다.)
 
 히틀러는 강제수용소에 유대인과 집시들을 가두고 그들의 왼쪽 팔에 개인 ID 번호를 영구적으로 새겼으며, IBM의 홀러리스 천공카드 시스템을 사용하여 이들을 관리했습니다.
 강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과 집시들은 그들의 옷에 ID 번호를 붙이고, 그들의 왼팔에 ID 번호를 새겼습니다.
 
 히틀러는 2차 대전 때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왼팔에 개인 ID를 문신으로 새기고 관리했으며, 이것은 3차 대전(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짐승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오른손(팔)과 이마에 마이크로칩으로써 개인 ID를 넣고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나치가 수감자들의 왼팔에 새긴 문신 ID는 666 짐승의 표의 모형이며, 
 마이크로칩으로써 ID를 오른손(팔)이나 이마에 새기게 되는 베리칩(Verichip)이나 제가(Xega)를 비롯한 바코드 마이크로칩은 666 짐승의 표입니다.

 

 

 

 

 

 

 

 

「국가란 이름의 학살자

 

 1933년에 이미 독일에는 다하우(Dachau)를 비롯한 50개의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점령지가 확대됨에 따라 수용소는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수용소들과 동유럽의 숲 속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대략 600만 명으로 추산되지요.
 소련군 포로들과 집시, 정신치제인, 정신질환자, 동성애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다른 이유로 학살된 사람들까지 모두 합치면 그 숫자는 약 1100만 명에 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치 독일이 벌인 이 끔찍한 학살극을 그저 히틀러라는 미치광이와 그를 둘러싼 몇 명의 극렬한 동조자들에 의해 벌어진 일회적이고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소수에 의한 광란의 잔치였다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완벽한 시스템의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혈통과 신앙이 섞인 개념이고 이주와 개종을 거듭했기 때문에 유럽인들 가운데서 유대인들을 구별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새로운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마치 전 유럽의 유대인 명단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귀신같이 유대인들을 찾아내어 그 집을 수색하고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이제는 유대교 회당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 이미 수백 년 전에 선조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 외모로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유대인들을 족집게처럼 뽑아내는 작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아직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말입니다.

 

 200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윈 블랙(Edwin Black)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 《IBM과 홀로코스트(IBM and the Holocaust)》를 출간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가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분류하고, 강제 추방하고, 수용소에서 학살하는 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의 최신 기술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데마호그 홀레리스(Demahog Hollerith)라 불린 펀치 카드(punch card)와 카드 분류 시스템이 바로 그 기술이었습니다.

 

 IBM의 독일 자회사인 데마호그가 판매한 이 최신 기계들은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을 분류하여 단시간 내에 처리하는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독일 내에서만 약 2,000 대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유럽 전역에서 역시 수천 대가 활용된 이 기계의 역할은 엄청났습니다.

 

 유대인들을 수용한 주요 강제수용소마다 빠짐없이 설치되어, 히틀러 이전의 수많은 군주들이 계획했었지만 결국 실패했던 유대인 청소의 과업(?)을 실현하는 데 최고 공신 노릇을 한 것입니다.

 

 에드윈 블랙은 IBM이 단순히 기계를 만들어 판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치의 요구에 따라 기계들을 특별히 제작해주고, 유지, 보수해주었으며, 기계를 사용할 나치 장교들을 훈련시켰다고 폭로했습니다.

 

 심지어 강제수용소 안에 설치된 기계들까지도 다달이 애프터 서비스 점검을 받았다고 합니다.

 

 IBM은 1896년 독일계 미국인 발명가인 허만 홀레리스(Herman Hollerith)에 의해 설립되어 주로 인구 센서스에 필요한 기계를 만들며 성장한 기업입니다.

 

 홀레리스는 1879년 19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인구조사청, 특허청에서 일하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공학도였습니다.

 

 한때는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1884년에서 1890년의 기간 동안 그는 인구 센서스에 쓰일 기계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종이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많은 양의 정보를 집계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인구 센서스에 활용되도록 하지요.

 

 1890년 미국 인구조사청이 센서스에 활용할 기계를 공모하였을 때 그의 펀치 카드 시스템은 다른 발명품들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선택되었으며, 1890년 한 해 동안에만 인구조사청이 약 500만 달러를 절약하는 데 기여합니다.

 

 10년에 한 번씩 행해지는 인구 센서스에만 목을 매달 수 없었던 홀레리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다양화하면서 동시에 그의 특허가 모방되는 것을 막고자 기계를 임대만 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기계를 판매하지 않고 임대만 하는 IBM의 정책은 이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덕분에 IBM은 나치가 범한 홀로코스트에까지 깊숙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나중에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모사드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 1962년 이스라엘에서 교수형 당한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 책임자)은 "오스트리아 합병 몇 주 전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을 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분량의 카드 분류 작업에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라고 증언합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중요한 모든 정보는 이미 카드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938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독일의 인구 센서스는 합병된 오스트리아와 함께 분류를 마치기 위해 연기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전 작업을 통해 순식간에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을 청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인구 센서스의 종료와 함께, 크리스탈 나하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라 불리는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이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홀로코스트를 공부하는 학자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행위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할 때 보통 독일과 유럽 전역을 잇는 열차 운용의 예를 듭니다.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한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이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수백 명이 열차 한 칸에 짐짝처럼 태워져, 앉을 공간도 없이, 먹을 것도 없이, 화장실도 없이 이동하는 가운데 굶주림과 열기 때문에 죽어간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고통 못지않게 '수백만 명이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이동할 수 있었던 시스템' 에 주목합니다.

 

 지금도 당시 독일 점령지역의 열차 운행기록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에 분 단위, 초 단위로 어김없이 기차들이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이렇게 철저하게 운행되던 기차 이야기를 하면서 독일 사람들의 특성이 반영된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곤 했습니다만, 이제는 그것도 모두 IBM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또한 에드윈 블랙은 IBM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솔루션(Solution)' 이라는 표현이 나치 독일이 유대인 학살계획의 암호명으로 사용했던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 과 무관하지 않다는 데 착안하여 과연 IBM이 얼마나 많은 솔루션을 독일 측에 제공했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흩어진 단편들을 모아 IBM이 홀로코스트에서 얼마나 엄청난 역할을 했는지를 밝혀내지요.

 

 많은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이 자신들은 수용소 안에서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숫자라기보다는 IBM이 만들어낸 펀치 카드 한 장에 가까웠습니다.

 

 그 한 장의 카드에 그들의 출신국가, 생년월일, 결혼 여부, 자녀 수, 수용 이유, 신체의 특징, 노동 기술 등이 모두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죽어 나가는 생명들도 이들 카드에서는 그저 통계를 내고 관리해야 할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IBM뿐만 아니라 독일이라고 하는 국가 전체가 컴퓨터처럼 착착 손발을 맞춰 작동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법률가는 법률가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철도원은 철도원대로,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법률과 행정 시스템에 철저한 신뢰를 가졌던 독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정신지체인들을 안락사시킬 때는 반드시 법원에서 허가서를 발부받아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거기에 서명한 판사들은 훗날 그것이 안락사에 악용될 줄은 모르고 서명했노라고 변명했지만, 그들이 적어도 묵시적으로는 정신지체인들의 안락사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의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컴퓨터처럼 잘 조직되어 운영된 나치 독일의 이야기는 국가가 우리에게 얼마만큼 위험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개인의 범죄도, 어떤 깡패조직의 범죄도, 국가가 괴물로 돌변하는 순간 만들어낼 수 있는 참극과는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전 국민을 한 장의 펀치 카드에 입력한 후 그들을 통제하고 살해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출처 : 헌법의 풍경 (국가란 이름의 괴물, 김두식)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대량학살을 고안해 낸 사람은 주로 제3제국의 인구정책을 수립하는 데 관여했던 독일 지식인 집단의 기술 관료였다.
 
 이들 인구통계학 전문가들은 광신적인 나치이기는 커녕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성을 지닌 학자이자 유능한 관료로서, '근대화' 를 신봉함과 동시에 나치의 유럽 '신질서 New Order' 라는 구상에 협조하여 입신양명을 꾀한 사람들이었다..

 


 대량학살의 기구에는 직접적인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독일인 수만 명이 연루되어 있었다.
 외교관, 법률가, 의사, 회계원, 은행가, 사무원 및 철도 노동자들이 없었더라면 학살수용소행 기차는 제대로 가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끔찍스러운 살해기구는 고도로 조직된 관료화된 사회가 아니었더라면, 곧 살해 업무에 대한 책임성을 의도적으로 분산시키고 그것을 타성에 젖게 만드는 체계적이고 완벽주의적이며 동시에 철저히 '근대적인' 사회가 아니었더라면 작동될 수 없었다.

 

 이 일관 공정의 학살 방식이 특히 근대적이었음은 또한 제3제국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을 체포하고 그들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며, '최종 해결' 과정에서 최신식의 펀치카드 방식을 도입했고, 유대인이 겪는 고통의 정도를 통계화할 정도로 체계적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유대인이라는 신원이 밝혀지면, 이들은 곧바로 재산 몰수, 강제 이송, 게토화, 강제 노동, 그리고 결국 처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담당 부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최근 에드윈 블랙이 밝혀낸 것처럼, 독일인이 열차수송 조직 및 강제수용소 기록은 물론이고, 인구조사표, 주민등록표, 호적등본을 통해 유대인 신원을 확인하는 데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성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IBM의 소비자 관리기술 덕분이었다.

 

 (Edwin Black, IBM and the Holocaust. The Strategic Alliance between Nazi Germany and America's Most Powerful Corporation, 2001 - 에드윈 블랙, IBM과 홀로코스트, 나치 독일과 미국의 가장 강력한 회사와의 전략적 동맹)
 
 이와 마찬가지로 이 대규모 대량학살은 1939년 초 나치가 소위 '안락사'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 제국의 물리학자들은 독가스와 살인 주사를 사용하여 정신적 ·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러운 독일인 8만 명을 제거하는 데 적극 협력하였다.

 

 소위 T4 작전(이 명칭은 중앙사무소가 베를린 티르가르텐가 4번지에 소재한 데서 유래했다)은 히틀러가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헨리 프리들랜더가 지적한 대로, "안락사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나치 지도부는 대량학살이 기술적으로 실행 가능하다는 것, 보통 사람들도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는 데 기꺼이 참여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유례없는 작업에 관료제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점들을 확신하게 되었다."

 

 T4 작전이 장애인들을 살해하는 것임을 숨기기 위해 이용되었던 끔찍한 방법들이 나치의 학살수용소에 다시 그대로 등장할 것이었다.」

 
  - 출처 :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Hitler and the Holocaust), 로버트 S. 위스트리치 저

 

 

 

 

 

 

 

 


IBM과 홀로코스트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세계는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봤지만, IBM은 나치를 좋은 교역 상대로 보았다.
 IBM의 회장 왓슨은 재빨리 IBM과 제3제국 사이에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그 날부터 2차대전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 동맹으로 나치 독일은 미국 바깥에서 IBM의 가장 중요한 고객으로 부상하였다.
 유태인들을 확인하고 사회적으로 격리하며 몰수하고 게토에 몰아넣고 수용소에 가두어서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서 IBM과 나치는 유태인 처형 방법을 자동화하는 법을 공동으로 디자인하고, IBM이 독점 생산했다.

 

 최근에 발견된 나치 문서들과 폴란드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IBM과 나치의 동맹은 독일의 IBM 지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다.
 폴란드 대학살에서 IBM의 기술은 핵심 요소였다.
 그 고객 맞춤 기술은 IBM 뉴욕 본사에 보고하는 특별 폴란드 지사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공급되었다. 

 


 IBM에게는 좋은 뉴스

 

 왓슨은 정부가 시민들을 일일이 감시하는 것은 IBM에게는 좋은 뉴스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IBM은 세계 펀치카드와 소팅 시장의 90%를 통제했다.

 

 IBM에 관련된 수천 개의 문서를 보면, 나치 시장에서 IBM의 독점을 유지하고, 경쟁자들을 배척하고 판매 쿼터를 맞추기 위해 계약을 늘리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제3제국을 자동화시켜 주는 것에 대한 도덕성을 의문시하거나, 유태인 대량 학살이 헤드라인을 장식해도 그 관계를 중단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단 한 줄의 문장도 발견되지 않았다.

 

 IBM의 독일 지사는 Deutsche Hollerith Maschinen Gesellschaft 인데, Dehomag 로 알려져 있다.
 왓슨은 Dehomag 를 철저히 감독했다.
 모든 주요한 독일어 편지들은 영어로 번역되어서 뉴욕 본사에서 읽혀졌다.
 왓슨은 종종 그 편지들을 직접 읽었다.
 그는 독일 경영자들에게 구두로 직접 지시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왓슨은 법적인 비토권을 갖고 있었다.
 왓슨의 회계사들은 단돈 1마르크나 페니히까지도 다 조사했다.
 베를린의 IBM 변호사들과 경영자들은 항상 왓슨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렸다.

 

 기계를 팔지 않고 임대만 주었다.
 IBM은 펀치카드의 유일한 공급자였다.
 보편적 펀치카드는 없었다.
 모든 시리즈는 들어가는 정보를 모으고 나오는 정보들을 표로 만들기 위해 IBM 공학자들에 의해 고객 맞춤용으로 디자인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시리즈는 종교, 조국, 모국어만이 아니라, 유태인, 폴란드어, 폴란드 국적, 직업은 모피상, 베를린 거주 같은 특별 카테고리도 만들었다.
 IBM 서비스는 유럽 전역에서 나치의 인프라를 통해 제공되었다.

 


 왓슨의 사업 기계들

 

 IBM의 새로운 폴란드 회사는 Watson Business Machines 라고 불렸다.
 그것의 유일한 목적은 나치의 폴란드 점령 동안 폴란드를 박멸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IBM이 제3제국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합법이었고 (미국이 1941년 12월에 선전포고를 하기 바로 전까지 합법이었다)
 나치 센서스, 등록과 통계표는 고객맞춤 IBM 펀치카드 프로그램과 기계들에서 행해졌다.
 군비 공자에 동원될 노동력과 숙련공에 대한 통계와 매달 매달의 기아 사망자 수가 다 기록되었다.

 

 히믈러의 보안 서비스 SD의 장인 Reinhard Heydrich 는 1939년 9월 21일의 “점령지에서의 유태인 문제” 라는 제하의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제1단계는 전략적 인구조사와 등록을 통해 인구를 통제하는 것이다.
 첫째, 유태인들은 “철도 연락역이거나 최소한 철도역에” 있는 수용소 마을에 재배치되어야 한다.

 

 1939년에 뉴욕타임스는 “나치가 폴란드의 유태인들을 숙청하려 한다” 는 헤드라인을 냈다.

 

 동유럽 전역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의 이송을 수량화하고, 조직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인가?
 종이와 연필로는 수년이 걸릴 것이었다.
 번개 같은 속도의 Hollerith 컴퓨터를 사용해서 단지 수일 걸렸다.
 나치 독일은 센서스를 행하는데 오직 한 가지 방법만 사용하였다:
 특정 센서스에 맞게 디자인 된 고객 맞춤 IBM 펀치카드 과정들.

 


 뉴욕의 컴퓨터 통제 


 바르사바 의 Kreuz 23에 본부를 둔 뉴욕이 통제하는 특별 지사인 Watson Business Machines 을 통하여 IBM은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에 계속 관여하였다.

 

 중요한 Watson Business Machines 고객 사이트인 크라쿠프의 22 Pawia Street에 위치한 폴란드 철도의 Hollerith 사무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 사무실은 모든 기차들에 대한 색인 표를 보관하였다.
 승객들과 화물 열차들을 포함해서 모든 열차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15개의 펀쳐와 두 개의 소터 그리고 “소파보다 더 큰” 하나의 타불레이터(Tabulator, 표 작성용 전산기)가 있는 방이 5개인 무장한 철도 경찰들이 보초를 서는 사무실이었다.

 

 15명의 폴란드 여자들이 카드를 펀치하고 소터에 올려놨다.
 3명의 독일인들이 그 사무실을 감독하고, 최종 도표와 요약 통계를 극비리에 지휘했다.

 

 IBM 의 대변인인 Carol Makovich 는 1년 전에 그녀가 말한 공식적인 발언을 반복했다: “IBM은 이 시기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IBM의 맞춤용 철도 경영 프로그램과 바르사바 게토의 IBM의 6개의 Rymarska 인쇄소에서 프린트 된 수백만의 고객맞춤 펀치카드들과 철도에 리스된 컴퓨터들은 독일 지사 소속이 아니고, 바르사바에 있는 뉴욕이 통제하는 지사 소속이었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그러나 Watson Business Machines 는, 나치가 폴란드를 침략한 후에 제국의 약탈과 인종 청소 프로그램들에게서 이윤을 얻기 위하여 뉴욕의 IBM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그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유일한 생존자인 폴란드인 Krzemieniecki 는 “그것은 독일 기계들이 아니었다. 라벨들은 다 영어로 쓰여 있었다. 기계를 유지 보수하는 사람들은 가끔 다이어그램을 펼쳤는데, 그 기계에 대한 다이어그램들의 언어는 전부 다 영어로 쓰여졌다.”
 “로고는 영어로 쓰여졌고, 'Business Machines.' 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면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이 질문에 Krzemieniecki는 “아니, 'Watson Business Machines.'” 라고 대답하였다.

 

 왓슨은 여러 나라들에 자신의 이름을 딴  IBM 지사들을 만들었는데, 각 나라에 오직 하나였다.

 

 500명의 펀치를 하고 표를 만드는 피고용인들과 수십 개의 컴퓨터를 가진  Krak?w의 24 Murnerstrasse에 있는 Hollerith 통계 센터는 폴란드의 철도 사무실에 비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베를린에 있는 the Central Office for Foreign Statistics and Foreign Country Research가 새롭게 발견되었는데, 이는 Krak?w의 통계 사무실로부터 계속적으로 상세한 통계 자료를 받았다.
 이 발견으로 폴란드의 모든 통계 자료의 많은 부분이 어디에서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IBM NY은 나치 통계 컴퓨터들을 설치했는데, 규모가 워낙 컸음으로 Hollerith 분과(Department)가 아니고 Hollerith Gruppe으로 불렸다.
 이것을 설치함으로써 나치는 폴란드를 조직적으로 약탈하고 복종시킬 수 있었다.

 


 진주만 이후에도 IBM은 어떻게 해서 계속 이윤을 얻었는가?

 

 1941년 12월 10일에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자, 제3제국은 IBM에 종사하는 나치인 Hermann Fellinger를 적국 재산 관리인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Watson Business Machines의 원래의 경영진들과 참모들을 그대로 두어서 제3제국에 봉사하게 하였다.
 물론 IBM NY는 덕분에 계속 돈을 벌 수 있었다.
 폴란드 지사는 계속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지금은 IBM의 제네바 사무실로 보고하였고, 다시 거기서 IBM NY으로 보고되는 과정을 밟았다.
 Watson Business Machines의 재산들은 몰수되지 않았고, 리스된 컴퓨터들도 안전했다.
 “로얄티” 는 제네바를 통해 IBM NY로 송금되었다.
 리스 지급액과 이윤은 특별 계좌에 보관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IBM은 폴란드의 모든 이윤들과 컴퓨터들을 되찾았다.」

 

 

 

홀로코스트 피해자 "IBM 부분적 책임있다" 소송
 
 세계 최대의 컴퓨터 업체인 미국 IBM이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피해자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유럽의 은행과 보험사, 기업 등을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벌여온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10일 "미 연방법원 브루클린 지원에 IBM이 홀로코스트에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며 소송을 제기했다.

 

 IBM의 홀로코스트 책임론은 나치가 데이터 처리에 사용한 데호마그(Dehomag · IBM의 독일 내 자회사)사의 제작 기기가 미국 내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에도 전시됨으로써 수십 년 전부터 제기돼 왔지만 소송으로까지 비화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소송은 미국 작가 에드윈 블랙이 쓴 'IBM과 홀로코스트' 의 12일 출간에 맞춰 이뤄진 것.
 홀로코스트 피해자와 변호인들이 치밀한 전략에 따라 IBM을 겨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소장에서 "나치가 홀로코스트에 IBM의 데이터 처리기술을 이용했으며 IBM측은 이 기술이 박해와 학살에 이용될 것이란 점을 알면서도 제공했다" 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IBM은 장비를 임대해 지속적으로 기술지원을 하는 시장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IBM의 기술이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 지를 알고 있었다" 면서 "국제법을 위반하며 벌어들인 이윤을 피해자 보상에 사용하고 과거의 전력을 낱낱이 공개하라" 고 요구했다.

 

 에드윈 블랙은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 출간된 저서에서 컴퓨터의 시초가 된 IBM의 펀치카드 분류기가 유럽 내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유대인 분류와 강제수용소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용됐다고 주장했다.

 

〈뉴욕 연합〉동아일보 (2001.02.12)」
 

 


IBM 나치학살 협조 혐의.. 집시단체 120억달러 소송

 

 한 집시 단체가 IBM을 상대로 과거 나치가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자행하는 데 협조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냈다.
 스위스의 제네바 법원은 집시 단체가 IBM을 상대로 낸 120억 달러 규모의 소송에 대한 예심을 3월 20일 진행한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중부 및 동유럽에 거주한 약 60만명의 집시들은 홀로코스트 동안 나치와 그 동맹군들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집시들은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한 각종 보상금과 지원금 수혜대상에서 배재돼 왔다.

 

 소송을 제기한 집시 단체(Gypsy International Recognition and Compensation Action)의 파스토르 메이 비텔 회장은 "우리는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소송을 제기했다" 고 주장했다.

 

 이 집시 단체가 제기한 소송의 주요 근거는 에드윈 블랙이 지난 2001년 펴낸 `IBM과 홀로코스트 : 나치와 미국의 거대기업간 전략적 동맹` 이라는 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세계2차대전 동안 IBM은 나치가 유태인과 유럽의 집시들의 학살을 도모하는 데 사용된 펀치카드와 초기형 컴퓨터를 제공했으며, 나치를 돕기 위해 제네바에 사무실도 운영했다.

 

 비텔 회장은 "IBM은 이 시스템들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는 데 사용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나치를 위해 시스템을 고안했다" 고 주장했다.
 IBM의 설립자인 토머스 J.왓슨은 1937년 히틀러에게 훈장을 받았으며, IBM은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과거에도 유태인들과 소송사건에 휘말린 바 있다.

 

 한편, IBM은 "이번 소송이 가치가 없는 일" 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 출처 : 박정연기자, 디지털타임스」

 

 

 

IBM에서 만든 펀치카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집시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생체실험을 한 후 가스실에서 죽였다.
 나치는 이러한 과정을 체계적으로 처리하고 싶어했고, IBM의 유럽지소는 인명자료를 코드화하여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펀치카드 기술을 나치에게 판매했다.
 이 기술로 나치는 사람들은 더욱 신속하게, 보다 많이 죽일 수 있었다.
                                                                        - [IBM과 홀로코스트]

 

 2002년 2월 4일, 세계 최고의 컴퓨터 기업 IBM을 상대로 유럽의 집시단체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보상금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한편 IBM측에서는 "이번 소송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나치와 IBM

 

 에드윈 블랙은 2002년 'IBM과 홀로코스트, 나치와 미국의 거대기업 간 전략적 동맹' 이라는 책을 펴냈다.

 

 'IBM과 홀로코스트' 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세계적인 컴퓨터 기업인 IBM이 제네바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며 나치가 유태인과 집시들을 학살하는 데 사용한 펀치 카드와 초기형 컴퓨터를 제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IBM의 설립자인 토머스 왓슨은 1937년에 히틀러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진주만 공습 이후에도 미국 기업인 IBM은 나치 정권의 지원하에 유럽에서 지속적인 이윤을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럽 거주 집시의 수는 약 60만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집시단체에서는 100만명을 상회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03년, 스위스의 제네바 법원은 집시단체인 집시 국제인정 및 보상행동(Gypsy international Recongnition and Compensation)이 IBM을 상대로 낸 120억 달러 규모의 소송에 대한 예심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50개국 600만명의 집시를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GIRCA측은, "IBM 유럽본부의 소재지이자 2차 대전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활용된 장비들이 제공된 장소이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소송에 착수한 것" 이라며 "우리는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소송을 제기했다." 고 밝혔다.」

 

 

 

「2002년 에드윈  블랙(Edwin Black)은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는 <IBM and the HOLOCAUST> 를 출판한다.
  그의 부모는 홀로코스트 당시 수용소에서 죽음직전에 살아남은 유태계 폴란드인이다.

 

 블랙의 책에 의하면 홀로코스트 당시 히틀러는 유럽 전역의 유태인을 보다 체계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 방안에 찾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한다.
 이때 IBM은 새로 개발한 펀치 카드 기술을 히틀러에게 판매하여 유태인 신분 확인, 수용소의 강제노동자 및 유태인 관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IBM이 그 댓가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음은 물론이다.

 

 설마 IBM이 그 기술이 대량학살에 사용될 것을 예측했을까?
 그 기술을 악용한 히틀러가 문제이지 기술을 판매한 IBM이 무슨 책임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그리고 실제로 IBM의 공식적 입장은 위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기술이 그렇게 악용될지 우리도 몰랐다. 억울하다” 라는게 IBM의 입장이다.
 과연 그럴까?

 

 1941년 3월에 IBM사의 매니저 한 사람은 “유럽의 전쟁지역에서 독일 정부는 우리 기계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독일군은 현재 가능한 모든 목적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 고 전보를 친 기록이 있다.
 1941년 이후 IBM 독일지사는 독일의 강제관리를 받게 된다.
 1943년 나치는 심의회를 구성하고, 지사의 감독에 나섰다.
 1943년 6월의 심의회 회의록에는 ‘IBM은 자신의 의무를 항상 충성스럽게 수행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들어 있다.
 당시 심의회는 뉴욕 본사와의 대화상대로 SS(친위대) 여단장인 나치 열성당원 베젠마이어를 선택했다.
 그는 1944년부터 부다페스트 주재 독일 공사로서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한 장본인이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서 프랑스의 한 소송 의뢰인은 “강제수용소 ‘부헨발트’ 는 ‘홀러리트’ 를 위해 노동력을 공급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주간동아 2001 년 03 월 08 일 (274 호) 56 ~ 57 쪽)

 

 나치 피해자들은 IBM이 나치 정권을 위해 유대인 신원 확인과 집단노동수용소 운영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며 에드윈 블랙의 저서 출간에 맞춰 뉴욕 연방지방법원에 IBM을 대상으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미국의 정보 거대기업 IBM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처럼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치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변호사인 마이클 하우스펠드는 주장한다. 

 

 하우스펠드 변호사는 IBM 경영진도 자사의 기기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캠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제의 기기 대여 및 유지 비용 등 수백만 달러의 수입 때문에 이를 묵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소장에서 IBM의 보관 문서 공개와 함께 IBM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불법적으로 취득한, 1940년 당시 액수로 1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이익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워싱턴ㆍ바르샤바 APㆍAFP/연합뉴스)」

 

 

 

IBM이 나치의 협력자였다고?
 ‘유대인 살생부’ 작성에 결정적 역할 혐의로 법정에 … 사장 왓슨은 히틀러에게 훈장 받아 
 
 “IBM은 독일 제3제국이 저지른 집단학살의 공범자였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인 미국 IBM사가 뒤늦게 2차 세계대전의 ‘전범’ 으로 내몰리고 있다.

 

 전쟁 중 유대인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올드리히 스트란스키와 5명의 유대계 체코인들은 2월 중순 IBM사의 전쟁 범죄 혐의를 담은 광범위한 기소장을 뉴욕의 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이는 나치 정권에 협력해 노동자를 강제 고용했던 독일 기업들이 줄줄이 법정에 선 이후 외국계 회사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담당 변호사 하우스펠트는 배상문제 전문가로 지난해 나치 강제노동 배상문제와 관련해 독일정부 및 기업들과의 협상에 참가한 인물.
 그와 소송 의뢰인들은 당시 미국의 IBM 본부도 독일지사의 상세한 영업보고를 통해 자사가 나치의 인종정책과 박해정책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집단 학살 공범자” 외국 업체론 처음

 

 IBM사가 받고 있는 전범의 혐의 내용은, 소송과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출간된 ‘IBM과 홀로코스트’ 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의 유대계 칼럼니스트인 저자 에드윈 블랙(Edwin Black)은 이 책에 대해 “전세계로부터 수집한 2만여 개의 기록자료를 가지고, IBM사가 독일지사를 통해 나치정권에 어떠한 기여와 협력을 했는지 소상히 밝혔다” 고 자평했다.
 이 문제가 안고 있는 폭발력을 증명하듯, 이 책은 8개 언어로 출간되어 25개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 시절 IBM사는 독일에 지사를 설립하고, 데이터의 자동처리기인 이른바 홀러리트 구멍카드(펀치카드) 처리기를 생산-관리해왔다.
 독일계 미국인 홀러리트(Hollerith)에 의해 고안된 구멍카드 정보처리시스템은 컴퓨터의 전단계로, 20세기 전반기에 정보처리를 자동화 단계로 끌어올리며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독일지사는 이후 IBM사 전체 판매액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다.

 

 1930년대 히틀러가 등장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무렵, 독일에서는 정보의 자동처리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홀러리트 기계가 단지 수를 세는 정도가 아니라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공할 수 있는, 즉 정보를 ‘관리’ 할 수 있다는 장점을 파악한 나치 정권은 인구정책의 모든 분야에 이 시스템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독일 홀러리트 기계회사(Dehomag), 즉 IBM 독일지사의 기술자와 당시 이 회사의 최대 고객이었던 나치정권은 손으로 작성된 등록서류가 구멍카드 기계에서 처리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전쟁 준비의 첫 시작인 인구조사를 위한 것이었다.

 

 이후 독일 내의 모든 자료는 홀러리트 시스템의 기술적 처리에 부응하도록 작성되어야 했으며 IBM 독일지사는 구멍카드 처리기에 알맞은 서류 작성방법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독일 관리들에게 독일인의 개별 특징을 어떤 영역에 어떻게 세분해 기록하면 되는지에 대한 교본이었던 셈.

 

 인구조사 업무를 위탁받은 IBM 독일지사는 1939년 5월 75만명의 인구 조사원을 고용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자발적 지원자들이었다.
 한 달 정도의 집중훈련을 받은 이들은 5∼7명 단위로 독일 전역에 퍼져 열성적 활동을 시작했다.

 

 히틀러 정권은 경찰과 근위 기병대에 총력을 기울여 이들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릴 만큼 인구조사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대대적 인구조사에 의해 나치정권은 당시 2200만의 독일 도시가구와 350만의 농가, 550만의 상점과 공장들을 거의 완벽하게 등록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문제는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독일 전역의 가구조사였다.
 이 조사를 통해 독일은 2550만에 달하는 가구를 개개인의 혈통과 인종에 따라 분류하는 데 성공했다.
 가구마다 작성된 특별 보완카드에는 각 가구마다 호주 이름과 주소, 그리고 혈통의 계보를 밝혀 기록했다.
 이 기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히 ‘안보국’ 이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배척과 노동착취, 그리고 1942년부터 기계적으로 진행된 유대인 몰살의 ‘살생부’ (殺生簿) 역할을 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후 나치가 점령한 지역에는 어디에나 이 홀러리트 시스템이 가동됐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을 색출해 집단수용소로 끌어가는 데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수감자 관리에도 유용했다.
 이동하는 수감원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시스템 역할을 했던 것.

 

 심지어 수감자들을 16개 카테고리로 분류해 특별한 학대방법이나 처형방법의 규정도 이 시스템에 의해 관리됐다.
 수감자들은 이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고, 카드에 적힌 번호로 존재할 뿐이었다.

 

 
 50여개 다른 업체도 잔뜩 긴장

 

 그렇다면 IBM사는 나치가 자신들의 기계를 ‘범죄’ 에 사용하고 있음을 몰랐던 것일까.
 IBM사는 지금까지 나치의 기계 사용에 대한 자사의 책임을 부정해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독일지사의 홀러리트 시스템을 나치가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 뿐” 이라며 “홀로코스트(대학살)와 관련된 자사의 증거서류는 전혀 없다” 고 주장한다.

 

 하지만 ‘IBM과 홀로코스트’ 의 저자 에드윈 블랙의 조사는 오히려 그에 대한 답이 ‘정반대’ 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1940년의 예가 보여주듯, IBM사는 고객과 기계의 모델 이름이 적힌 목록표를 독일지사로부터 받았으며, 기계들이 운영되고 있는 독일 내 장소들을 잘 알고 있었다.
 1941년 3월에 IBM사의 매니저 한 사람은 “유럽의 전쟁지역에서 독일 정부는 우리 기계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독일군은 현재 가능한 모든 목적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 고 전보를 치고 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1941년 이후 IBM 독일지사는 독일의 강제관리를 받게 된다.
 1943년 나치는 심의회를 구성하고, 지사의 감독에 나섰다.
 1943년 6월의 심의회 회의록에는 ‘IBM은 자신의 의무를 항상 충성스럽게 수행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들어 있다.

 

 당시 심의회는 뉴욕 본사와의 대화상대로 SS(친위대) 여단장인 나치 열성당원 베젠마이어를 선택했다.
 그는 1944년부터 부다페스트 주재 독일 공사로서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한 장본인이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서 프랑스의 한 소송 의뢰인은 “강제수용소 ‘부헨발트’ 는 ‘홀러리트’ 를 위해 노동력을 공급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IBM사의 이런 처세를 고운 눈으로 볼 리가 만무했다.
 1940년 미국은 이미 당시 IBM 사장 왓슨(Watson)이 나치와 이데올로기-기술동맹을 맺고 있다며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법무부의 각서에 의하면 IBM을 나치와 동일선상에까지 두고 있었다.
 왓슨은 1937년 히틀러로부터 공로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제국의 몰락이 분명해지자 IBM은 신속하게 다른 표정을 짓는다.
 이미 한쪽으로는 미국 정부와 협력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
 멸망하는 독일제국의 기반구조가 ‘홀러리트’ 기술에 의존하고 있던 관계로 미국으로서는 그 기술이 아니고는 패전국 관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연합군의 대대적 폭격이 이루어지던 때에도 독일지사의 중앙 생산공장은 큰 피해를 받지 않았고, 종전 후 독일지사는 독일의 종업원에 의해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미국의 다른 기업들도 ‘홀로코스트’ 에 관련이 되었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원고측 하우스펠트 변호사는 미국 기업 중 전범재판이 IBM사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강력히 경고했다.

 

 이제 IBM에 대한 소송은 IBM사뿐만 아니라 나치시절 독일에 지부를 두고 나치와 거래했던 다른 50여 개 미국 기업들에도 심리적 압박을 주고 있다.
 반세기 이상 묻혀 있던 미국 기업들의 ‘양심불량’ 이 재판대 위에 줄줄이 오를 날이 머지 않은 듯하다.

 

  - 출처 : 강여규 하이델베르크 통신원, 주간 동아」

 

 

 

홀로코스트 당시 IBM(미국)은 나치에 유대인 관리 기술을 제공했다.
 
 70여 년간 IBM은 기술 혁신과 사업 효율성에서 선두를 달려왔다.
 IBM은 자칭 '솔류션' 기업이라고 자랑한다.

 

 현재 IBM은 최신 마이크로칩과 컴퓨터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취급하였지만, 1930년대 IBM 기술의 절정은 다섯자리 홀러리스 숫자와 천공카드였다.

 

 탐사보도기자 에드윈 블랙은 2001년에 독창적인 책 <IBM과 홀로코스트>를 통해, 어떻게 나치 정권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유대인과 유대인 자산을 집계하여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들을 강제수용소로 이동시킬 수 있었는지 폭로했다.

 

 나치 정권은 IBM 독일 지사의 도움으로 홀러리스 숫자와 천공카드 그리고 기타 최신 기술을 이용하여 집단학살과 테러작전을 자동화하여 수행할 수 있었다.

 

 IBM이 천공카드 기계 2000 대 이상을 강제수용소에 제공하였고 나치는 천공카드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찍힌 끔찍한 낙인은 바로 홀러리스 숫자였다.

 

 이 숫자는 강제노동시스템에서 이동할 때 흔적이 남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홀러리스 숫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쓸모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폐기되었다.

 

 IBM 독일 지사가 나치 정권에 기계를 판 것 이상으로 도움을 준 사실을 뉴욕 본사도 알고 있었다.

 

 독일 지사는 고객맞춤시스템을 설계했으며 나치장교들을 훈련시켰고 나치가 사용하도록 1년에 15억 개에 달하는 천공카드를 생산했다.
 또 IBM은 한 달에 한 번 기계 수리도 해주었다.

 

 기술 대다수는 도덕적으로 중립이다.
 자동차 제조업체에게 음주운전자의 행동을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IBM의 기술을 이용한 사실이 직접적으로 IBM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IBM이 기술지원을 하여 나치가 효과적으로 포로들을 확인하고 관리하고 이동시켰다는 것은 엄연한 이 회사의 과거 비밀이며, IBM은 아직까지도 그 관련 자료에 대중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IBM이 나치 독일에서 한 역할을 생각해볼 때, IBM의 표어 '작은 지구를 위한 솔루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아이러니다.

 

  - 출처 : 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Corporation)은 세계 컴퓨터 시장의 약 50%를 지배하며, 거액의 연구개발비(총수입의 10% 이상), 탁월한 영업정책, 강력한 노무관리로 전세계 164개국에 진출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다.
 천공카드시스템(PCS : 통계 · 회계기)을 고안한 H. 홀레리스가 1896년 창설한 회사와 1911년 타임레코드사와 저울 제작사가 합병하여 세운 CTR(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이 전신이다.
 원래 기술자들이 모여서 만든 CTR사는 경영부진에 빠졌으나 1914년 토머스 J. 왓슨(Thomas J. Watson, Sr.)을 사장에 영입, 급성장의 계기를 이룩하였다.
1924년 현재 이름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 출처 : 엔싸이버」

 

 

 

 

 

 

 


 

「이 사람들은 쉰들러 리스트 영화에서 본 것처럼 밀폐된 화물열차에 움직일 틈도 없이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밀어 넣어진 상태로 식료품도 없이 7~10일 간의 긴 여행끝에 오시비엥침 화물역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SS(나찌 독일 친위대)장교와 SS 의사인 요제프 멩겔레 박사와 마주치게 된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병자와 노약자, 그리고 키작은 어린이들은 왼쪽으로 분류되었다.
 이 곳 병원에서 생체실험에 몰두했던 멩겔레는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오른쪽을 표시하여 유태인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이렇게 분류된 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일하면 자유로워 진다" 라는 기만적인 글자가 아치형으로 걸쳐져 있는 문을 통하여 수용소로 들어갔고,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분류된 자들은 목욕탕으로 위장된 가스실로 바로 보내졌다.
 70~80%는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가스실로 보내질 유태인들은 가능한 한 조용하게 남녀가 분리된 채로 끌려갔다.
 탈의실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근무하는 같은 처지의 유태인이 끌려온 유태인들에게 이를 없애기 위해 목욕을 하는 것이라면서, 목욕하고 나서 자기 옷을 다시 잘 찾아 입을 수 있도록 옷 위치를 잘 확인하라고 거짓말을 했다.

 

 안심한 유태인들이 들어가는 가스실은 정말로 샤워장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샤워기에서 나오는 것은 독가스였다.
 그렇게들 죽어갔다.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도착하자마자 명부에 등록도 하지 않고 곧바로 죽음을 당했기에 현재까지도 정확한 희생자 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용되었던 사람들도 감금, 총살, 교수형, 강제노동, 질병, 굶주림, 고문, 인체실험 등의 여러가지 방법에 의해 학살당했다.

 

 각국에서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약 15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계 2차대전이 끝날 즈음에 약 600만 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생자들은 친위대원들의 따가운 감시아래 가스실로 향한 뒤 연기로 변해 하늘을 그을렸다.

 

 작업조로 뽑힌 사람들은 머리를 깎이고, 왼쪽 팔뚝에 죄수번호를 문신했으며, 제복과 밥그릇 · 스푼을 지급받은 뒤 막사로 내몰렸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해방 60년 : "100여만명 희생된 나치 살인공장"

 

 박물관 안내원 로레타는 아우슈비츠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나치는 왜 이곳에 수용소를 세웠나.

 

 "당초 이곳은 폴란드군 막사였다. 유럽의 중심부로 교통 요지다.
 1940년대 6월부터 정치범 수용소로 이용했다.
 제1수용소에는 모두 28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재소자가 늘자 41년에는 이곳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비르케나우)에 제2수용소를 세웠다.
 인근 모노비체 지역에는 제3수용소가 건설됐다."


 - 얼마나 많은 인명이 학살됐나.

 

 "아우슈비츠는 나치의 대표적인 살인공장이다.
 40∼45년 초까지 나치는 100만명이 넘는 유대인, 15만명의 폴란드인, 10여만명의 집시와 소련군 포로, 동성애자, 정치범들을 실어날랐다.
 42년 6월 독가스실이 본격 가동됐다.
 대략 110만∼150만명이 독가스와 총살, 굶주림 등으로 숨졌다.
 희생자의 90%는 유대인이었다. "


 -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무대가 여기인가.

 

 "이곳에서 촬영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마치 가축처럼 화물열차에서 끌려 내려와 일렬로 줄을 선다.
 나치는 현장에서 이들을 노동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노약자로 분류했다.
 노약자는 샤워를 시켜준다며 옷을 벗긴 뒤 가스실로 보내 학살됐다.
 나머지는 머리를 깎고 팔에 등록번호를 새겼다.

 강제노역에 동원돼 많은 수가 탈진과 학대로 숨졌다.
 또 생체실험의 대상이 됐다."

 

  - 출처 : 유권하 특파원 (중앙일보)」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으로 알려진 프리모 레비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화학자이면서 동시에 문학자였던 그는 전 생애에 결쳐 스스로 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그래서 1987년 그가 자살했을 때, 모두가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으로 그가 자살한 장소와 무덤을 보기 위해 토리노까지 나섰던 것이다.

 

 레비의 무덤은 토리노 공동묘지의 일각을 차지한 유대인묘지 구획에 자리 잡았다.
 검은 돌을 이용한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간소한 무덤이었다.

 

 하지만 그의 묘비명에는 그의 성명과 생몰년 이외에 '174517' 이라는 여섯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그의 팔에 문신된 수인번호였다.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 고쳐 만든 성(姓)이 새겨진 무덤, 죽은 자의 이름을 잘못 적은 무덤, 수인번호를 적은 무덤 ······.
 모두 마치 20세기라는 시대의 진실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고요하게 이야기해주려는 듯했다.

 

  - 출처 : 난민과 국민 사이」

 

 

 

내 이름은 ‘174517’… ‘이것이 인간인가’

 

 1941년 이탈리아 토리노대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면서 받은 졸업증서에는 ‘유대인’ 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아무리 수재라도 유대인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직장에 취직할 수가 없었다.
 프리모 레비(1919∼1987)는 그 대신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3년 12월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된다.

 

 국내외 지성들의 저서에서 너무도 많이 소개된 레비.
 그는 화학자이지만 대단히 문학적인 에세이와 회고록 등을 남겨 움베르토 에코와 함께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이것이 인간인가’ 는 ‘평균수명 3개월’ 이라는 아우슈비츠에서 10개월을 살아낸 레비의 기록이다.

 

 레비의 이름은 174517.
 빵과 죽을 받을 때 배급이 늦어지지 않도록 팔뚝의 숫자 문신을 재빨리 보여줘야 한다.
 익숙해질 때까지 수차례 따귀를 맞고 발길질을 당해야 했다.

 

 그는 인간 내부의 집단적 광기를 온몸으로 체험했으며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알고 있었다.
 “불관용 압제 예속성 등을 내포한 새로운 파시즘이 이 나라 밖에서 탄생해 살금살금 들어오거나 내부에서 서서히 자라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혜로운 충고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유럽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이 저항할 힘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

 

  - 출처 : 김지영 기자 (동아일보)」

 

 

 

 

 

 

 

 

 

 

 

 

 

 

 

 

 

 

 

 

 

 

 

 나치가 사람들의 왼팔에 개인 ID를 새긴 것은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사람들의 오른손(팔)과 이마에 바코드 마이크로칩으로 개인 ID를 넣는 것은 의료용이나 납치 방지용 등 여러가지 말을 하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짐승 적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되게 될 것입니다.

 

 

 

 

 

 

 

 

 

 일란성 쌍둥이인 에바 모제스 코르와 미리암 모제스.
 에바 모제스 코르와 미리암 모제스의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두 언니, 삼촌들, 숙모들과 사촌들은 살해되고, 에바와 미리암은 쌍둥이였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주로 쌍둥이들을 실험했던 멩겔레 박사에게 보내지게 되고, 멩겔레의 생체실험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에바는 일련의 집시 쌍둥이가 등과 등이 꿰매진 뒤 멩겔레의 실험실로부터 어떻게 다시 돌아왔으며, 멩겔레가 혈관과 기관들을 연결함으로써 샴 쌍둥이(몸의 일부가 붙어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던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쌍둥이들은 괴저가 생길 때까지 밤낮으로 비명을 질렀으며 3일 뒤 그들은 죽었다.

 

 성인이 된 후 에바와 미리암은 심각한 건강적 문제들로 고통받게 된다.
 에바는 유산과 결핵으로 고통받고, 그녀의 아들은 암에 걸렸으며, 미리암의 콩팥은 끝내 완전하게 성장하지 못했고, 미리암은 아마도 요제프 멩겔레의 알 수 없는 의학 실험과 주사주입으로 인해 야기된 듯한 희귀한 형태의 암으로 1993년 사망하게 된다.

 

 

 

「에바 모제스 코(Eva Mozes Kor)는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실상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직접 그곳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곳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도저히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루마니아의 포르츠라는 작은 마을 출신인 열 살짜리 일란성 쌍둥이 에바 모제스와 미리암 모제스(Miriam Mozes)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아이는 1944년 3월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가축 수송 열차를 타고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나치 친위대 소속 경비병들이 빨리 기차에서 내리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와중에 그들은 아버지, 두 언니와 헤어졌다.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쌍둥이를 붙들고 있었지만, 한 병사가 와서 이 아이들이 쌍둥이냐고 묻더니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아이들을 데려가버렸다.
 아이들은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그 병사가 아이들을 데려간 것은 악명 높은 요제프 멩겔레(Joseph Mengele) 박사 휘하의 나치 과학자들이 일란성 쌍둥이를 상대로 실험하는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쌍둥이는 이상적인 실험 동물이었다.
 둘 중 하나를 대조군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니까.

 

 인종적 순수성에 집착하던 멩겔레는 쌍둥이 실험을 통해 생명 창조의 비밀을 캐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비밀을 알아낸다면 '아리아인들' 이 다시 세상을 차지할 수 있을 터였다.

 

 모제스 자매는 몇 달 동안 1천5백 쌍의 다른 쌍둥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실험 대상이 되었다.

 

 나치의 과학자들은 그들을 거세하거나, 눈을 멀게 하거나, 목을 베거나, 일부러 병에 감염시켰다.

 

 에바와 미리암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약물이 수백 번이나 주입되었다.
 IG 파르벤의 바이엘이 생산한 실험적인 티푸스 치료약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주사를 맞은 에바의 몸에 급속히 열이 오르더니 팔다리가 평소 때의 몇 배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이것이 주입된 약 때문에 생긴 증상인지, 아니면 나치 친위대 소속의 기술자들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고무호스로 묶어놓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멩겔레는 에바의 침대 옆에 서서 그녀의 차트를 읽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안됐군, 이렇게 어린데.  이제 2주밖에 못 살겠어,"  그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에바 모제스와 미리암 모제스는 아우슈비츠에서 실험을 당하고도 다행히 살아남았다.
 실험에 이용됐던 쌍둥이 1천5백 쌍 중 살아남은 사람은 2백 쌍 뿐이었는데, 에바와 미리암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다행' 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에바는 어른이 된 후 아이를 유산하고 결핵에 걸렸으며, 미리암의 콩팥은 끝내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다.
 그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바는 이스라엘에서 한동안 살다가 미국 인디애나로 이주했으며, 현재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위한 작은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1999년 2월에 그녀는 수백 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함께 바이엘 AG를 포함한 독일 제약 회사들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데 참여앴다.
 강제 수용소에서 실시된 실험에 유독성 화학물질을 제공하고, 그 실험에서 얻은 정보로 약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판매한 혐의였다.
 

 

  - 출처 : 아스피린의 역사 Aspirin (다이어무이드 제프리스 저, 김승욱 역, 동아일보사)」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

 

 의사이자 과학자로 ‘죽음의 천사’ 라는 별명을 갖게 된 멩겔레(Josef Mengele)가 수행한 실험은 나치 의사의 냉혈적 속성과 살인적인 잔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멩겔레는 ‘과학자적’ 냉철함과 침착함으로 죽일 사람들을 가려냈으며, 병에 걸린 수용인들을 ‘위생을 위해’ 대거 가스실로 보냈고, 직접 여러 사람들 앞에서 살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32세에 아우슈비츠로 온 멩겔레는 수감자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멩겔레는 비밀리에 쌍둥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70세의 오스트리아 노인 쌍둥이부터 어린이, 난쟁이 등 온갖 종류의 쌍둥이 약 25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하였다.
 멩겔레 연구팀은 인류학 연구라는 미명 아래 측정 가능한 인체의 모든 부위를 측정 · 비교하였고, 혈액을 뽑아 검사하였다.
 멩겔레는 특히 유전학 실험과 세균학 실험에 집중했는데, 실험대상 쌍둥이들을 부검을 하기 위해 죽이곤 했다.
 멩겔레를 보조하였던 강제수용소 조수 나이스즐리는 멩겔레가 어떻게 14명의 집시쌍둥이를 죽였는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해부실 옆에는 일하는 방이 있었는데 14명의 집시쌍둥이들이 심하게 울며 대기하고 있었다.
 멩겔레는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10cc와 5cc 주사기를 준비하였다.
 한 상자에서는 에비팔, 다른 상자에서는 클로로포름을 꺼내어 수술대 위에 놓았다.
 첫 번째 쌍둥이가 들어왔다.
 14세 소녀였다.
 멩겔레는 나에게 그 소녀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소녀의 오른팔 정맥에 에비팔을 주입했다.
 그 애가 잠들자 멩겔레는 좌심실을 만져 확인한 다음 10cc의 클로로포름을 주입하였다.
 잠깐 움찔하더니 그 아이는 죽었고 멩겔레는 시체실로 데려갔다.
 이런 방법으로 그날 밤 쌍둥이 14명을 모두 죽였다.

 

 멩겔레는 세 쌍의 쌍둥이가 눈 색깔이 달라서 흥미로워 했다.
 이들을 죽인 다음 안구와 기관들을 적출하여 ‘전쟁 물질-긴급’ 이라고 적은 뒤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보냈다.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에바 모제스-코르는 멩겔레의 비르케나우 실험실에서는 인간은 단지 과학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군인들은 모제스-코르 쌍둥이 자매를 가족과 분리시킨 뒤 발가벗기고 왼쪽 팔에 번호 문신을 새겼다.
 멩겔레가 수행한 세균학 실험은 쌍둥이 중 하나에게 세균을 주입하여 죽으면 나머지 쌍둥이도 같이 죽여 부검을 실시하여 두 시체의 기관들을 비교하는 실험이었다.
 에바는 세균을 주입받아 죽을 뻔했지만 살아남아 다시 실험실로 보내졌다.

 

 에바가 수용되었던 막사에는 한살 반부터 13살까지의 쌍둥이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멩겔레가 만든 일과표가 걸려 있었다.
 쌍둥이들은 다섯 시에 기상하여 여섯 시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막사 밖에서 점호를 받았다.
 죽은 쌍둥이들도 밖에 내어다 숫자를 세었다.
 멩겔레는 수감자가 죽으면 실험재료가 없어졌다고 매우 화를 내곤 하였다.
 점호 뒤에는 각종 실험, 측정과 X-선 촬영 등의 일과가 이어졌다.
 ‘연구자들’ 은 혈액을 뽑아가기도 하고 무엇인가 주입하기도 했다.
 어느 쌍둥이들은 죽을 때까지 얼마만큼 혈액을 뽑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에 사용되어 하얗게 되어 쓰러지기도 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세 번씩 비르케나우에서 아우슈비츠까지 걸어가, 그곳의 큰 방에서 발가벗긴 채 실험대상이 되었다.
 연구자들은 쌍둥이들 신체 각 부위를 측정하고, 다른 색깔들로 칠하고는 사진 찍고 기록했다.

 

 19세난 소년 쌍둥이는 “소년을 소녀로 만들고 소녀를 소년으로 만들기 위한” 실험에서 혈액을 교차 수혈하는 데 사용되었다.
 소년들은 거세되기도 했고, 수혈 반응을 보기 위한 실험에 쓰이기도 했다.
 한 쌍의 집시 쌍둥이 소년들은 등이 서로 붙도록 꿰매진 뒤 다시 멩겔레의 실험실로 보내졌다.
 멩겔레는 쌍둥이의 혈관과 기관들을 붙여 샴쌍둥이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 쌍둥이들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밤낮으로 울다가 상처에 괴저가 생겨 3일만에 죽었다.
 멩겔레는 또한 7세난 소녀의 요도를 대장에 연결하는 실험을 포함해서 남성과 여성 비뇨생식기에 대한 실험도 많이 자행하였다.

 

 에바는 쌍둥이 자매 미리암과 더불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평생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에바는 인체를 이용하는 실험을 할 경우 과학자들은 자신에게도 똑같은 실험을 해서 피험자가 갖는 느낌을 갖는지 과학자들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연구는 과학(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봉사하는 인간들로부터 절대로 자신들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에바는 국제사회와 각 나라가 인체실험을 통제할 법과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고 절규하였다.

 

  - 진보평론  제26호 (김옥주,황상익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교실)」

 

 

 

 

 

 

 

 

 

 욥은 구약시대의 대표적 의인이지만, 의인으로써 고난을 받은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아직까지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2,000년간 나라가 없어지고,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겪었지만, 그동안 자신들이 받았던 고난을 욥의 고난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치가 욥의 팔에 새긴 ID 문신은 욥처럼 의로운 이스라엘이 나치에게 받은 고난을 나타냅니다.
 욥은 의인이지만 고난받았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의롭지만 고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자신들을 의롭게 생각하고 회개하지 않고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들이 메시아로 받아들였던 적그리스도가 짐승으로 변하는 후 3년 반의 대환란인 야곱의 환란 때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고, 그들의 진정한 나라인 영적인 이스라엘의 나라, 그동안 이방인에게 잃었던 진정한 이스라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게 됩니다.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박물관 (Yad Vashem Holocaust History Museum)

 

 나치스에 의해 학살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세운 추모 박물관.

 

 설립연도 : 2005년,  소재지 : 예루살렘,  규모 : 면적 4,200㎡
 주요소장품 : 유대인 희생자 유물 및 증언 · 사진 자료, 생존자의 고백 자료

 

 정식 명칭은 홀로코스트역사박물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희생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으로, 원래는 1953년 야드 바셈(Yad Vashem) 기념관으로 건립되었다.
 야드 바셈은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라' 는 뜻이다.

 

 뒤에 21세기에도 계속 홀로코스트(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해, 10년의 공사 끝에 2005년 3월 15일 재개관하였다.

 

 새로 개관한 박물관은 기존 기념관의 4배 규모로, 면적은 4,200㎡이다.
 이스라엘계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하였고, 총 공사비는 미화 5600만 달러가 들었다.
 건물은 크게 전적박물관 · 미술박물관 · 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외관은 꼭대기가 뾰족한 가파른 산(山) 모습에, 각 모서리는 긴 선형(線形) 구조를 하고 있다.
 내부 길이는 180m이다.

 

 나치스에 학살된 600만 유대인의 위령탑과 희생자들의 유물 및 사진, 생존자들의 증언 자료, 희생자들이 수용소 안에서 그린 그림 등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원뿔꼴인 '이름의 홀(Hall of Names)' 내부 벽면은 무수한 희생자들의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이 박물관 외에도 세계 각국에는 곳곳에 홀로코스트박물관 및 추모관들이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 1993년 미국 내 유대인들의 기금과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워싱턴의 미국홀로코스트박물관이 가장 규모가 크다.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박물관은 세계 각국에 있는 이들 홀로코스트 관련 박물관과 추모관들의 본부 역할을 한다.

 

 2005년 3월 15일 개관식 때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연합 사무총장을 비롯해 세계 40개국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 명도 초청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면서도, 오히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를 홀로코스트에 비교해,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국제사회에 이미지를 조작한 데 따른 것이다.
 
  - 출처 : 엔사이버」

 

 

 

「내가 이스라엘에 살면서 몇 차례 "야드바셈"(대학살 박물관)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당할 당시의 상황을 그림이나 사진이나 실물들로 전시해 놓았다.
 그때도 여기 아우슈비츠를 둘러볼 때 느꼈던 마음이었었다.
 그 전시장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 출구 벽에는 "기억은 우리를 자유케 하나 망각은 우리를 다시 포로로 만든다." 는 글귀가 쓰여 있다.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글이고 오래 오래 기억하며 생각해야 할 글이다.
 또 정원에는 600만 그루의 나무들이 심겨져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어디서 희생당했다는 장소 이름도 적혀있다.

 

 또 한 곳에는 욥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바로 자기네 민족을 욥과 동일시하는 신념에서다.
 자기네 민족은 욥처럼 죄를 짓지 않았지만 그냥 의인으로서 고난당한다는 민족의식이다.
 언젠가는 욥이 고난당하기 전의 욥으로 돌아온 것처럼 자기네 민족도 그러리라고 믿는 희망에서다.

 

 

 

 

 

 

 

 

 

 

 

 

 

 

 

 
 바코드의 유래
 1952년 우드랜드라는 사람이 특허 출원
 1970년대 미국 IBM사에서 채택, 세계만국생산 코드로 사용
 1974년 오하이오에 있는 마쉬라는 식료품점에서 최초로 선택 사용 실용화되기 시작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바코드(Bar Code)’ 의 경우에는 우드랜드라는 개발자가 처음 그 아이디어에 착안을 한 뒤 IBM에 의해 사업화가 되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현재 바코드의 특허권은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IBM사가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1988년 나라별 코드를 부여받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KAN 코드에는 표준형 13자리와 단축형 8자리의 두가지가 있다.

 

 

 

「바코드란 컴퓨터가 정보를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 굵기가 다른 검은 막대와 하얀 막대를 조합시켜 문자나 숫자를 코드화한 것입니다.
 바코드의 구성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통 13자리이며, 첫머리의 세 자리는 국가명, 다음 네 자리는 제조업체명, 그 다음 다섯 자리는 상품명, 끝머리의 한 자리는 코드의 에러를 체크하기 위한 숫자 기호이고, 가격은 별도로 표시됩니다.

 

 바코드의 특허권은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IBM사가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EANA(European Article Numbering Association)로부터 국가코드를 부여받아 한국유통정보센터에서 각 제조업체 코드를 등록하여 상품에 바코드 심볼을 부착하고 있습니다.」

 

 

 

다박사와 함께하는 생활과학 '바코드'
 레이저 스캐너 반사된 빛의 양으로 인식

 

 '0'과 '1' 이진법의 마술.
 최초로 바코드를 개발한 사람은 미국의 우들랜드이다.
 굵은 선과 가는 선, 선의 유무를 가지고 이진법(0과 1로써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을 표시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떻게 읽는 것일까.
 바코드에 있는 정보를 읽기 위해서는 레이저 스캐너가 필요하다.
 먼저 균일한 간격으로 레이저를 쏘면, 바코드의 검은 부분은 빛을 흡수하고, 반대로 흰 부분은 빛을 반사하게 된다.
 반사된 빛의 양은 광검출기에 의해서 전기신호로 변하게 된다.
 바로 이 차이를 이용하여 이진법인 0과 1의 조합을 알아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988년 유럽상품번호협회(EANA)로부터 국가코드를 받았으며, 한국유통정보센터에서 각 제조업체 코드를 등록하여 상품에 바코드를 부착하고 있다.

 

 바코드는 표준형 13자리와 단축형 8자리의 두 가지가 있는데, 주로 표준형 13가지를 사용한다.
 처음 3자리는 국가부호(한국은 880), 다음 4자리는 제조업체, 그 다음 5자리는 제품의 내용, 마지막 한 자리는 바코드의 에러체크용이다.
 바코드의 가장 큰 장점은 스캐너로 바코드를 읽는 순간 물건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전체 물품의 숫자와 이동경로 등 다양한 정보처리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바코드의 특허권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바로 미국의 IBM사가 갖고 있다.

 

  - 출처 : 김병인 박사, 부산과학기술협의회 교육연구팀, 부산과학기술협의회」

 

 

 

짐승의 수 666

 

 징조

 

 실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확하게 그 시와 때는 알 수 없지만, 징조를 보이시겠다는 말씀처럼 성경의 예언들이 그대로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666 표’ 와 ‘바코드(bar code)’ 의 연관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바코드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2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코드는 미국의 IBM사가 특허를 내면서, 미국의 슈퍼마켓에서 좀더 신속하고 편리하게 전산처리를 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편리한 수단이기 때문에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그리고 물품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는 사람에게까지 이미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바코드는 666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666 표와의 연관성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물품 외에 사람에게 바코드가 적용된 것은 불과 십 년 남짓 되지 않나 생각된다.

 

 직장 신분증과 학생증에 바코드가 찍힐 때, 사람들은 바코드를 편리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인간통제수단 운용의 시작에 불과하지만, 사단은 사람들이 그러한 시스템을 익숙하게 여기도록 차근차근 일하고 있는 것이다.

 

 통합 카드가 등장한 후에는 사람에게 직접 바코드를 이식하는 방법이 등장할 것이다.
 통합 카드도 분실이나 도난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스템이나 제도도 문제점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여 더욱 편리하고 발전된 신기술을 개발한다.
 그리고 신기술이 발표될 때는 어김없이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시행할 수 밖에 없다.’ 는 당위성이 주장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편리성을 이유로 주민등록증에 바코드 시스템이 도입되고, 주민등록증 하나에 의료보험증과 여러 신용카드들을 통합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일은 사회적으로 편리하고 발전된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으로 선전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언대로 일점 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고유의 바코드를 생체 내에 삽입할 때 이용되는 것이 생체 마이크로칩(바이오칩, 쌀알 크기이나 당연히 더 작아질 것임)이다.
 한때 이 칩을 가동시킬 수 있는 전원이 문제되긴 했으나, 현재는 여러 가지 가능한 방법을 이용할 수 있는 신기술이 개발되었다.
 근육의 움직임으로부터도 전원을 얻을 수 있고, 호흡 과정에서 필요한 전자전달계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으며, 신경전달계에서 발생하는 전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즉 생명이 붙어만 있다면 마이크로칩은 늘 가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사람이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치측정시스템) 통제 시스템 속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구축되기 위해서는 인권 유린으로 대표되는 반대여론을 무마시켜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하지만 사단의 음모인 세계적인 평화구축이란 당위성 앞에 반대여론은 수그러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평화를 정착한다는데 누가 끝까지 반대할 수 있겠는가?

 

 또한 몸 안에 바코드를 심는 것을 사람의 건강문제와 직결시킬 경우, 아주 유용한 수단이라고 세계인에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범죄자의 머리카락, 침, 정액 등을 통하여 DNA를 추출하여 그 DNA 정보를 갖고 있으면, GPS 시스템을 통하여 범죄자 위치 파악과 범죄자 색출을 순식간에 할 수 있어 아무도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스템으로부터 세계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럼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바코드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국가가 그렇게 하도록 해서 어쩔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 표를 받지 않으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한 개인의 모든 경제적 수단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 : 16, 17)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계 13 : 18)

 


 바코드 시스템과 666 표와의 연관성

 

 바코드 시스템과 666 표와의 연관성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바코드는 기본적으로 666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바코드를 보면 제일 앞쪽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두 줄로 길게 늘어져 있는 가는 선이 있는데, 그것들은 숫자 6을 나타낸다.
 제일 앞쪽 것은 번호 해독(스캔)의 시작을 알리는 부호이고, 중간 것은 중간 오류를 체크하는 것이며, 마지막 것은 해독 완료를 알려주는 신호인 셈이다.

 

 그런데 바코드를 읽기 위해서 왜 666 시스템을 써야만 할까?
 참 신기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전문가들에 의하면, 컴퓨터는 다른 수가 암호로 들어갈 때는 실수를 일으키지만 666 시스템은 이런 에러에 대한 저항성이 가장 큰 조합이라고 하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전체 바코드의 크기를 최소화하는 데는 6이 최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제 바코드 시스템에서 가느다란 두 줄만이 6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다른 조합으로도 6을 나타낼 수가 있다.
 한 숫자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두 줄의 두께와 그와 인접하는 두 개의 공간의 크기로 특정 숫자를 표시하지만, 모든 숫자(0~9) 하나 하나가 차지하는 자리의 크기는 동일하게 정해져 있다.

 

 이를 개발한 사람은 정확성과 최소화라는 극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666 시스템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슨 검은 배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많이 받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개발 당사자는 전혀 그런 인식을 하지 못했더라도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은 대부분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수이고, 4는 세상의 수이며, 7은 완전의 수이다.
 그리고 6은 사람의 수인데, 사람은 여섯째 날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안식하라고 하셨다.

 

 666은 6이 셋 모인 것인데,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다는 것으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사단에게 권세를 받아 하나님처럼 되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현재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있는 EC 본부에는 BEAST(짐승)라는 이름의 초대형 컴퓨터가 있다.
 그 컴퓨터는 5개 대륙의 1천개 이상의 은행에 연결되어 가동하고 있으며, 세계 60억 인구의 정보를 입력하고 저장할 수 있는 대용량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을 다스리게 될 컴퓨터의 문자를 숫자로 나타내어 그 수를 더해 보면 666으로 나오는 연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COMPUTER =18 + 90 + 78 + 96 + 126 + 120 + 30 + 108 = 666)
 그리고 짐승의 표 글자의 수의 합도 666 (MARK OF BEAST = 78 + 6 + 108 + 66 + 90 + 36 + 12 + 30 + 6 + 114 + 120 = 666) 이며,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면 그의 이름의 수도 666이 될 것이다.


  - 출처 : 윤병욱 생명공학 박사 (월간 기쁜소식)」

 

 

 

 

 

 

 

 

 


 마이크로칩이 먼저 오고 → 마이크로칩을 받지 않고 인내한 교인들이 휴거되며(후 3년 반의 대환란이 오기 전에 휴거 발생) → 휴거 이후에 대환란(후 3년 반, 야곱의 환란)이 오게 됩니다.
 
 신실한 교회는 휴거되어 후 3년 반의 대환란을 피하게 되지만, 휴거 이전에 일정 기간 마이크로칩으로써 교인들은 체질하는 시기가 먼저 오게 됩니다.
 (미국, 멕시코, 네델란드, 스페인 등 이미 마이크로칩이 사람들 몸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고, 체질이 시작되고 있음)

 

 휴거 이전에 666 짐승의 표인 바코드 마이크로칩으로써 교인들이 배교하는 일이 먼저 오게 되고(살후 2장 3), 휴거 이전에 짐승의 표를 받는 자들을 일정기간 먼저 체질하여 가려내고 난 다음 휴거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이크로칩은 제2의 선악과이며, 선악과를 먹는지 안먹는지로 아담과 하와가 체질받았고 분별받았듯, 마지막 때 666 짐승의 표인 바코드 마이크로칩을 받는지 안받는지로 교인들을 먼저 체질하고 분별하게 됩니다.

 

 일정기간 마이크로칩으로써 교인들을 체질하고 난 다음 휴거가 일어나게 되며, 휴거 이후에 후 3년 반의 대환란이 오게 됩니다.

 

 666 짐승의 표인 바코드 마이크로칩을 받은 자들은 휴거되지 못하고 짐승이 다스리는 후 3년 반의 대환란에 남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심판을 그대로 다 받게 되고,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IBM and the Holocaust

 

 

 

 

 

 

 

 Nazi tattoos on Jews 

 

 

 

 

 

 

 

 IBM and the Holocaust (Punch card)

 

 

 

 

 

 

 

 Next Future Human Emotional Microchip Target

 

 

 

 

 

 

 

 MTV spot next past future; civil terrorist... Think...

 The Holocaust Happened To People Like Us.
 홀로코스트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일어났었다.

 

 

 

 

 

 

 

 The Nazi Punch Card

 

 히틀러와 홀러리스 기계의 펀치카드가 660 이라는 숫자와 관계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히틀러는 660 이라는 자신의 수를 사람들의 왼팔에 문신 ID 로써 새긴 것이 되며,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666 이라는 표를 사람들의 오른손(팔)이나 이마에 새기는 것의 모형이 됩니다.
 
 (Computer 를 비롯한 마지막 때의 짐승의 표의 숫자는 666 이 되지만, 히틀러와 왼팔의 문신 ID에 사용된 도구들은 모형이기 때문에 666 에서 6 이 하나 부족한 660 이라는 숫자가 됨)

 

 히틀러가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왼팔에 문신으로 새긴 개인 ID 번호는 장차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오른손(팔)과 이마에 마이크로칩으로 개인 ID 번호를 새기게 될 것의 모형이며, 바코드 마이크로칩이 666 짐승의 표입니다.

 


<6의 배수>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6  12  18  24  30  36  42  48  54  60  66  72  78  84  90  96  102  108  114  120  126  132  138  144  150  156

 

 

 

Adolf Hitler = 660 
(아돌프 히틀러는 짐승이 아니라 짐승의 모형이므로 666 에서 6 이 하나 모자란 660 이 됨)

 

A = 6
D = 24
O = 90
L = 72
F = 36

 

H = 48
I  = 54
T = 120
L = 72
E = 30
R = 108

 

6 + 24 + 90 + 72 + 36 + 48 + 54 + 120 + 72 + 30 + 108 = 660

 

 


Rassenamt (Rassenamt = race)
(홀로리스 펀치카드에 쓰여진 글자. 영어로는 Race 의 뜻임)

 

R = 108
A = 6
S = 114
S = 114
E = 30
N = 84
A = 6
M = 78
T = 120

 

108 + 6 + 114 + 114 + 30 + 84 + 6 + 78 + 120 = 660

 

 

 

Tabulator
(the machine by which the Nazis did the census, 나치가 인구조사에 사용한 기계, 홀러리스 기계를 가르킴)

 

T = 120
A = 6
B = 12
U = 126
L = 72
A = 6
T = 120
O = 90
R = 108

 

120 + 6 + 12 + 126 + 72 + 6 + 120 + 90 + 108 = 660

 

히틀러의 수와 수감자들의 왼팔에 새긴 문신 ID를 위한 장치들의 수는 짐승과 짐승의 표의 모형이므로 660 이 됩니다.

 

 


Computer

C = 18
O = 90
M = 78
P = 96
U = 126
T = 120
E = 30
R = 108

 

18 + 90 + 78 + 96 + 126 + 120 + 30 + 108 = 666

 

컴퓨터(Computer)는 짐승 적그리스도가 사용하게 될 실재 짐승의 표를 위한 장치가 될 것이기 때문에 666 이 됩니다.

 

 

 

「히틀러의 출생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저녁 6시 반 경에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국경을 이루는 인 강변에 있는 소도시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자기 집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의 할아버지로 짐작되는 게오르크 히틀러는 시골 출신 마리아와 결혼했다.
 마리아는 그전에 이미 알로이스라는 사생아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때문에 혹시 유태인의 피가 섞인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상당히 오랫동안 히틀러를 괴롭혔다.

 

 알로이스는 결혼 후에도 어머니 성을 따르고 있었으며, 게오르크의 동생 집에서 자랐다.
 그후 알로이스는 이 아저씨의 도움으로 히틀러라는 성을 얻게 되었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13세 때 양아버지 집을 나와 갖바치 밑에서 일하다 18세 때 세관 직원이 되고 나중에는 은급(恩給)까지 받게 되었다.

 

 알로이스의 첫번째 결혼은 불행했으며, 상처 후에 젊은 여자와 재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도 자식을 둘 낳은 다음에 폐결핵으로 죽고 히틀러는 반 년 후에 다시 나이어린 여자와 결혼했다.
 아돌프는 알로이스의 세번째 결혼에서 생긴 세번째 아이였다.

 

  - 출처 : 히틀러, 한길사」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알로이스이며, 알로이스의 아버지인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음.)

 

 

 

 

 

 

 

 ID Cards - A Lesson from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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