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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神弓) 7장
第 7 章.
운(運)은 선(善)한 자를 따른다.
2
도일봉은 물 옆에 자리를 잡고 보따리에서 여유분 장포한벌을 꺼내
바닥에 깔아 여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여인은 마련해준 자리
에 앉긴 했으나 머리를 무릅사리에 파뭏고 훌쩍 거렸다. 도일봉은 여
인을 위로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은 차라리 울게 두는 것이 좋
을 듯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 불붙은 장작 하나를 들고 동굴안을 살
폈다. 동굴의 끝은 아직도 멀기만 한 모양이다. 동굴은 온통 음습(陰
濕)한 기운으로 차있고, 아래 위에서 자라난 석순(石筍)들이 들쭉날
쭉 괴물 같기만 했다. 흐르는 물을 마셔보니 뱃속까지 시원했다. 동
굴을 모조리 탐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했으나 여인 혼자 무
서워 할까봐 그만두었다.
여인의 모습은 애초롭기 짝이 없었다. 추워서 오돌오돌 떨고 있었
고, 작은 몸에 배가 남산만하게 불러 있었다. 도일봉은 여인의 그런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다른 장포 한벌을 꺼내 여인의 어깨에 걸쳐주
었다. 여인은 아무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지금쯤 밖은 한밤중일 것이다. 그리고보니, 아침을 먹은 이후여직
뭘 먹은 기억이 없다. 갑자기 뱃속에서 우르릉 꽝! 천둥이 울리는 듯
했다. 도일봉은 보따리를 뒤져 준비한 보리떡을 꺼내 입안에 넣고 우
물거리며 여인의 어깨를 흔들어 한조각 내밀었다. 그러나 여인은 밀
가루떡을 받기는 했으나 먹지는 않았다.
도일봉이 말했다.
"이봐요. 먹어야 살지, 안 먹으면 죽어요. 눈물은 그만큼 흘렸으면
되었으니 이젠 이 떡이라도 먹어둬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
을텐데...."
여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도일봉을 바라보았다. 옷매무세와 머
리칼이 온통 헝클어져 보기에 좋지 않았지만 시집간 여인치고는 귀여
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고 통통했다. 동그란 얼굴, 오똑한 코, 사
슴을 닮은 눈동자는 차라리 애잔해 보였다. 슬프고 겁에 질린 막내
여동생 같다고나 할까.
그런 여인의 모습에 도일봉은 기분이 좋아졌다. 밀가루 떡을 먹는
소리마져 쩝쩝 군침이 돈다. 그러나 슬픈 눈의 여인은 여전히 몸을
떨며 손에 쥔 밀가루 떡을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도일봉은
보따리에서 남은 속옷까지 모조리 꺼내어 여인을 덮어 주었다. 도일
봉은 그리고 여인과똑같이 무릅을 세우고 앉아 입을 열었다.
"이봐요. 혹 부군께서 죽어 버렸나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먹고 따라
죽으려는 거요? 정 그렇다면 말만 하구려. 내겐 잘 드는 칼도 있으니
말만하면 빌려주리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살고싶은 마음이 있다면 먹
어 둬야지. 험험... 그리고, 그 커다란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무
슨 연씨네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으니 그대는 사실, 죽을 입장도 못
되는거요. 그러니 좀 먹어둬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힘들걸! 그놈
의 몽고귀신들은 사람을 한 번 뒤좇기 시작하면 죽어라하고 악착같이
좇는게 특기란 말씀이야. 이건 분명한 사실이거든! 바로 작년에 나
는, 그들 몽고귀신들과 열흘이 넘도록 산 속에서 숨박꼭질을 했더란
말이오. 흥. 하지만 제놈들이 나를 잡을수야 없었지. 그때도 잡히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잡히지 않을걸! 다만, 그대는 그런 숨박꼭질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요. 아 참! 내 이름은 도일봉이라오.
나를 부를 일이 있거들랑 아무렇게나 불러요. 도형도 좋고, 도오라버
니도 좋고, 그냥 '야!'라고 불러도 좋고, 도아저씨, 도나리... 이건
별로 좋지 않군! 하여튼 알아서 해요. 난 그만 잘테니 먹든지 말든
지..."
한바탕 쏜살같은 말을 마친 도일봉은 무릅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양
손으로 발끝을 잡은 후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은 그가 한바탕 횡설수 설 지껄여 대고는 머리를 박고 더 이상
말이 없자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동안 손에 든
밀가루떡을 내려가 보다가 용기를 내어 손에 든 떡을 씹었다. 그리고
는 또 훌쩍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온 식구들이 떼죽움을 당한
걸 생각하면 두렵고 서러워서 당장 따라 죽고 싶었지만, 뱃속에 아기
가 있으니 함부로 죽을수도 없다. 자신이 죽으면 아이까지 두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던가. 그녀는 속으로 이미 죽어버린 낭군님을 부르며
남은 음식을 다 먹고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도일봉이 가끔 일어
나 장작을 넣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한동안 자고 일어나니 불이 꺼져 있었다. 장작을 더 올려 불을 지핀
도일봉은 여인을 살폈다. 여인은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체 잠이 들어
있었다.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는지 소맷자락이 아직도 축축했다. 안
색이 헬쓱하여 마치 병자와 같았다.
여인을 다독여 준 도일봉은 황룡궁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간밤에
눈이 제법 내렸는지 근처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저 아랫쪽에서 군데군데 연기가 솟고 있었다. 군인들이 아직도 산에
깔려 있는게 분명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당장 떠나는 것이 좋
을 듯 했다.
급히 동굴로 돌아온 도일봉은 재빨리 물건을 챙기고 여인을 깨우려
했다. 그런데 여인의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끙끙 낮은 신음을
토하며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가 아파도 단단
히 아픈 모양이다. 도일봉은 깜짝 놀랐다.
"이런 빌어먹을! 아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할 것이지, 어째서 애
럾은 입술만 깨물고 그래? 어디가 아프지? 빨리 말을 해 봐요!"
"배....배가. 으음."
여인은 그제서야 소리내어 신음을 토했다.
"배? 배가 아프단 말이지? 어째서 갑자기 배가 아플까? 어제 먹은
음식에 체했나? 응?"
"아니....요."
"이봐요. 말을 해봐요. 말을 해야 알지. 배가 어떻게 아프지? 제기
랄...난 배우라는 의원짓은 왜 배우지 않았을까? 속 터지게 하지 말
고 어서 말을 해요, 어서!"
"배가...배가 아파요. 아기..아기가 나오려는 모양이에요! 으음..."
"뭣이! 아기가 나온다고? 어이쿠 야단났다! 이봐요. 난...난 할줄
몰라요. 이걸...이걸 어쩐다지? 아이쿠 부처님. 한 번만 더 자비를
베푸시구려! 이봐요, 이봐요. 그대는 할줄아오? 할줄 알아요?"
여인은 자기보다 더욱 당황하는 도일봉을 보자 웃움이 나왔다. 그러
나 배가 너무 아파 웃지도 못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운물... 깨끗한 헝겁... 칼도...."
"그 외엔... 없소? 우선 칼과 헝겁은 있지만...더운물이라....? 그
렇지! 그대는 잠시만 기다려요. 내 가서 군인들이 쓰는 솥을 훔쳐보
리다. 아기더러 조금만 기다렸다가 나오라고, 부탁좀 하구려."
말을 마친 도일봉은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여인은 도일봉의
말이 요령부득(要領不得)이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는 자기 마음대로 나오려고 하는데...어찌 한동안 기다리라고
한담? 으음."
그러나 그녀는, 도일봉의 말대로 아기에게 잠시 지체해 달라고 부탁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도일봉은, 군인들이 야영(野營)하는 곳으로 힘껏 달렸
다. 첫 번째 눈에 띈 군인들은 다만 불만 피워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도일봉은 조심스럽게 움직여 다른곳을 찾았다. 한동안 찾다보니 군인
들의 천막이 보였다. 천막 앞에는 모닥불 위에 커다란 솥이 걸려있고
국이 끓고 있었다. 군인 열몇명이 그 국솥 둘래에 둘러앉아 있었다.
도일봉은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서 기회를 노렸다.
한동안 살피던 도일봉은 황룡궁을 들어 단번에 세발을 쏘았다. 두놈
은 그 빠른 화살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염통을 관통당해 죽고말았
다. 한발은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자의 옆구리를 꽤뚫었다. 도일봉은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두발의 화살을 날려보낸 후 몸도
함께 날렸다. 도일봉은 먼저 펄펄 끓고 있는 국솥을 들어 벼락같이
남은 놈들을 향해 뒤엎었다.
"아이쿠! 이게뭐냐!"
"아이구 뜨거라!"
"엄마 나죽네!"
군인들은 그제서야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도일봉은 멈추지 않
고 빈 솥으로 타고있는 모닥불을 퍼담아 막 천막 밖으로 달려 나오는
군인들을 향해 쏟아부었다.
"엄메, 이게뭐야!"
"으악. 뜨거라!"
천막을 나오려던 군인들은 쏟아지는 불벼락에 놀라 도로 천막안으로
기어들었다. 도일봉은 더 볼것도 없다는 듯 뛰기 시작했다.
도일봉은 동굴과는 반대쪽으로 달렸다. 곧 정신을 차린 군인들이 좇
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각소리가 삐익 삑! 온 산을 울렸다. 한동안
달리던 도일봉은 잠시 지체하여 뒤돌아 마구 화살을 날렸다. 군인들
은 이미 이 화살맛을 단단히 본 적이 있는지라 재빨리 몸을 숨기고는
소리만 버럭버럭 질러댔다. 도일봉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군인들
이 정신을 차리고 좇아왔을 때는도일봉이 이미 멀리 돌아 발자국을
지우며 동굴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일봉은 커다란 솥 안에 마른장작을 가득 담아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여인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쨮고 있었다. 도일봉이 놀라 급히
살피려 하는데 여인은 황망히 손을 흔들었다.
"다가오지....다가오지 말아요! 어서....물을...."
"응. 알았어."
도일봉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물가로 왔다. 솥안의 장작을 내려놓
고 솥부터 깨끗이 닦았다. 주위의 돌덩이들을 주워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지폈다.
"음. 음..으음."
여인의 신음소리가 애초롭게도 동굴안에 퍼졌다. 이미 탈진상태가
되어 버렸는지, 여인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아악!"
애가 타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데 어느순간, 여인이 높은 비명을
질렀다. 도일봉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 보았다. 여인의 아쑽도리는 새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손에는 커다란 핏덩이를 들려 있었다. 여인은
그 핏덩이를 안은체 칼로 무엇인가를 자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
린 핏덩이는 무척이나 징그럽게 생겼는데 그순간 갑자기 앙! 하고 울
움을 터뜨렸다.
"아이쿠! 아기가 나왔다!"
도일봉은 그제서야 그 핏덩이가 아기인 것을 알았다. 아기의 탯줄을
끊은 여인은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다급해진 도일봉이 마구 고개를
내두르며 소리쳤다.
"이봐요, 이봐요. 울지 말아요. 다음엔 어쩌지?"
여인은 너무 탈진해서인지, 아기를 한 번 내려다본 후 그대로 까무
라치고 말았다.
"아이쿠. 큰일났다!"
도일봉은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라도 정신을 차
려야지!"
도일봉은 침을 꿀꺽 삼키며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여인은 거
듭되는 환란과 공포, 또 산고(産苦) 때문에 기절을 한 것이니, 기절
한 체로 안정을 찾는게 좋을 듯 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도일봉은 용
기를 내어 탯줄을 비롯한 오물을 씻어내고, 솥을 들고와 아기를 씻어
주었다. 아기는 계집아이였다. 정말 괴물처럼 이상했다.
"나도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처럼 이상했을까?"
아기를 씻으며 도일봉은 혼자 웃기도 했다. 잘 씻긴 아기를 자기의
속옷으로 잘 감싸 엄마옆에 놓았다.
도일봉은 이어 아기엄마의 아랫도리를 모두 벗겼다. 옷이며 다리에
온통 피가 뭏어 있어 그대로둘 수 없었다. 아랫도리도 닦아주고 싶
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것만은 그만두었다. 치마대신 자신
의 바지를 입혀 주었다. 대충 치운 도일봉은 빨래들을 물에 담가 두
었다. 정신없이 서두르고 긴장하다 보니 그도 지쳐버리고 말았다.
"아이고. 힘들어라!"
도일봉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살다보면 무슨 일을 맞
닥뜨리지 않겠는가마는 동굴 속에서 아기를 받으리라고는 어찌 생각
이나 했겠는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여인은 깨어났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깜짝 놀
라 아기부터 찾았다. 아기가 무사한 것을 본 그녀는 또 울움을 터뜨
렸다. 그녀의 울움에 아기가 불안감을 느꼈는지 함께 울움을 터뜨렸
다. 도일봉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며 달랬다.
"이봐요. 이젠 그만 울어요. 그리고 우선 아기부터 달래도록 해요.
이 아기는 아직 철이 없는지라 지금 자기엄마가 얼마나 위험지경에
빠져 있는지 몰라요. 얼마전 내가 솥을 구하느라 한바탕 난리를 피웠
으니 군인들이 온산을 찾아 헤매고 있을거란 말요. 아기를 달래고,
물을 대워 놓았으니 몸이나 씻어요. 다시 또 울면 그땐 내가 그대를
혼내고 말거요. 난 잠시 밖의 동정을 살피고 오리다."
말을 마친 도일봉은 바깥 쪽으로 나갔다. 입구에서 귀를 기울여 보
니 먼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 동굴 가까이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도 들렸다. 도일봉은 간이 철렁 하여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안 쪽에서 미약하게 아기 울움소리가 들려왔다. 도
일봉은 기겁을 하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인은 마침 목욕을 하고 있다가 달려오는 도일봉을 보고 놀라 몸을
웅크리며 소리를 지르려 했다. 도일봉은 다급한 김에 그녀의 입을 틀
어 막았다.
"이 바보야. 조용히 해! 놈들이 바로 바깥에 있어. 어서 아기를 달
래."
도일봉은 우는 아기를 넘겨주었다. 여인은 옷을 벗은체로 엉거주춤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도일봉은 불을 꺼버리고 장포로 여인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바짝 긴장한체 황룡궁과 단도를 움켜잡았다. 다행
히 놈들은, 동굴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움직
임이 없었다. 좀 더 기다려본 도일봉은 조심조심 바깥쪽으로 나가보
았다.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일봉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돌아와 불을 피웠다. 여인은 그제서야 얼굴을 온통 붉히며 옷
을 갈아입었다. 옷을 입은 여인은 남은 물로 아기를 다시 한 번 씻어
준 후 잘 감싸 안았다.
도일봉이 물었다.
"이봐요. 걸을 수 있겠어요?"
"......"
도일봉은 한숨을 쉬었다.
"젠장. 잘됐지 뭐야! 떡 본 김에 제사 지내고, 엎어진 김에 쉬어 간
다고. 이곳에서 몇일 더 쉬기로 합시다. 죽고 사는 것이야 부처님께
맞겨야지. 먹을 음식도 얼마간 있으니 아껴서 먹으면 될게야. 이봐,
이봐. 지금 뭐하는 거요. 그대로 가만 있으란 말야.그 몸으로 찬물
을 만져서 어쩌겠단 말야?"
여인이 물에 담겨 있는 옷을 빨려 하자 도일봉은 얼른 빼앗아 대신
빨았다. 물이 차가와 뼛속까지 얼얼 했지만 하다보니 재미가 있어 아
예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붙힌체 첨벙첨벙 빨래를 밟았다.
"야. 이거! 시원하기 이를데 없구만. 이봐요. 그대는 되도록 빨리
기운을 차리도록 하란 말요. 내 음식을 다 먹어도 좋으니 기운만 차
리면 되오. 그리고 아기를 잘 달래서 울지 않게 해요. 이젠 내가 시
키는대로 하란 말이야. 앉아서 음식이나 먹어요."
도일봉은 치마를 다 빨고 여인을 달래 안정시킨 후 다시 밖으로 나
가보았다. 숲은 벌써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 어두운 숲을 도일봉은
조심조심 움직였다. 군인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놀란 새 몇마리가 나무 밑에서 날아올랐다. 도일봉은 재빨리
황룡궁의 시위를 당겼다. 어두웠지만 그중 한 마리가 화살에 꽤뚫려
떨어졌다. 도일봉은 크게 기뻐서 새가 떨어진 곳으로 달렸다. 그러다
가 그는 깜짝 놀라 급히 나무뒤에 웅크렸다. 군인들 셋이 바로 옆을
지나갔다. 놈들이 지나갔지만 도일봉은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떨
어진 새를 주워들고 동굴로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는 더 큰 사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막, 시커먼 그림자 셋이 동굴 입구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한
놈이 동굴을 발견하고 조금 옮겨진 바위를 옆으로 밀고 있었다.
"저런!"
동굴은 이미 발각되었다. 도일봉은 재빨리 시위를 당겨 한꺼번에 세
대의 화살을 날렸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또다시 세대의 화살을
날렸다. 군인들의 촉각이 예민하다 해도 먼젓번의 화살은 피하겠지만
두 번째의 화살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랬다. 세놈은
한꺼번에 화살을 가슴에 맞고 고꾸라졌다. 도일봉은 혹 설맞은 놈이
소리라도 지를까봐 재빨리 달려가 차례로 목을 밟아 꺽어 놓았다.
도일봉은 서둘러 세놈을 열린 동굴 안으로 밀어넣었다. 주위의 흔적
도 지웠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부지런히 달려 멀리까지 세짝의
발자국을 이어 놓았다. 세놈의 흔적이 여기서 그친다면 틀림없이 발
각될 것이라 발자국을 멀리로 이어놓은 것이다. 발자국의 크기가 똑
같아 불안하긴 했지만 주의깊이 살피지 않으면 무사할 수도 있으리
라.
안에서 굴을 막은 도일봉은 세놈의 시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시체를 보자 크게 놀랐지만 도일봉은 고개를 가로저어 조용히
시키고 시체를 더욱 안으로 끌어갔다. 꺽인 두 개의 모퉁이를 돌자
도일봉은 시체들을 내려놓았다.
시체를 처리한 도일봉은 횃불을 들고 여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나왔
다. 그런데 불빛에 비친 동굴은 참으로 으시시 하면서도 신기했다.
삐죽삐죽한 종유석(鐘乳石)들이 천장과 바닥에서 동시에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유령 같기도 하고, 창검을 박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군인들에게 좇기는 신세만 아니라면 이 신기한 동굴을 찬찬히 탐험할
수 있을텐데 아쉬웠다.
신기한 종유석들을 바라보며 걷던 도일봉은 문득 한 석순(石筍)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분명 매화모양의 그림이었다.
"이런게 왜 여기에 그려져 있지?"
이상하게 생각한 도일봉은 혹시 이 그림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은 아
닐까 궁리해 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쯤 걷다보니 또 매화그림
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로 그려놓
은 것이다!"
부지중에 부르짖던 도일봉은 문득 한가지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렇다! 이건 화산파의 독문표기라는 매화가 틀림없다. 작년에 내
가 여기서 어물거리는 놈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날 기습하여 죽이려
했던 그놈은 필시 이곳에 뭔가 중요한 물건을 숨겨 놓았으리라. 그렇
지 않고서야 공연히 길을 가는 사람을 죽이려 했을 리가 없다!"
자신의 추리를 그럴 듯 하게 생각한 도일봉은 뒤돌아 찬찬히 종유석
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화가 그려져 있었
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동굴벽 한곳
에 마지막으로 매화가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벽에 구멍을
뚫고 막아놓은 흔적이 있다.
"역시 그렇구나!"
도일봉은 벽을 파 보았다. 손으로 파보아도 벽이 부시시 떨어져 내
렸다. 생각한대로, 벽속에는 기름종이로 싸인 물건이 있었다. 기름종
이를 벗겨보니 한권의 책이 보였다. 책의 겉장에는 붉고 큰 글자로
'일지선(一指線)'이라고 박혀 있었다. 그리고 책에 꼬리표가 달렸는
데, 그곳엔 '소림사(少林寺) 원당(遠當)'이라고 쓰여 있었다. 또한
책갈피에는 한 장의 잘 접혀진 비단이 끼워져 있었다. 펴보니 상당히
넓은 보자기다. 보자기 안에는 이상한 그림들과 또 이상한 글들이 촘
촘히 수 놓여져 있었다. 얼마나 세밀하게 수가 놓였는지 눈이 어지러
울 지경이었다.
"이것들은 대체 뭐하는 물건이야?"
홀로 중얼거리며 도일봉은 여인에게로 돌아왔다. 여인은 오래도록
도일봉이 돌아오지 않자 초조했던 모양이다.
"저는...저는 그대가 안에서 무슨일을 당한줄 알았어요."
도일봉은 붉어진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하하. 걱정을 해 주었다니 고맙기 이를데 없는걸. 하지만 이미 죽
은 사람은 무서울게 없어요. 살아있는 사람이 백배는 무섭지요. 그리
고 나는 안에서 이런 것들을 찾아냈다오."
도일봉은 책과 비단보자기를 여인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불경(佛經)인가요? 이건 몽고글 인데요!"
"몽고글이라고? 그대는 몽고글도 알아볼줄 아오?
"몰라요. 다만 어떻게 생겼는지만 알아볼 수 있어요."
"흠. 그렇군. 하지만 이걸 저 밖에 있는 군인들에게 보여줄 순 없
지. 이건 아주 귀한 것이 분명해. 이것 때문에 난 작년에 죽을뻔 했
다오."
도일봉은 신이 나서 작년에 있었던 일을 떠벌였다. 여인은 그저 웃
으며 들어주었다.
"그 사람은 분명 이것을 감추려 했군요. 사람까지 해치는 것으로 보
아서 이 물건은 역시 귀중한 것들인가 봐요."
"아하. 그대도 그런 생각을 했군! 이것이 불경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한 번 읽어줘요. 사실 나는 글을 잘 모른다오. 워낙 게으름만 피워
서...."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건 불경이 아닌 모양이에요. 무슨, 운기행공(運氣行功)이니, 벌
모세수( 毛洗手)니, 내가기공(內家奇功)이니, 그런 말들이 쓰여 있
군요."
"뭣이라고! 아하. 이건 바로 무공을 익히는 책이구만! 듣자니, 소림
사 중들은 모두 무공이 뛰어나다 했는데 이것도 아마 훌륭한 무공일
게요."
"무공이요?"
"응. 그렇다니까! 하하. 부처님을 섬기다보니 이런 것이 내게 돌아
오는구만. 나중에 돌려주고, 소림사에 가서 불공도 드려야겠다. 그대
도 가겠소?"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일봉은 기분이 좋아 호탕하게 웃었다.
도일봉은 곧 바깥으로 나가 군인들이 근처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근
처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도일봉은 안으로 들어와 사냥한 오리를 불에 구웠다. 오리가 익어감
에 따라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도일봉은 침을 흘려가며 맛있게도
먹었다. 그러나 여인은 다만 한조각을 먹었을 뿐이다. 도일봉은 그녀
가 먹지 않는다고 내내 투덜거렸다. 여인은 대신 밀가루떡을 물과 함
께 먹었다. 도일봉은 불 옆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밤이라오. 그대는 이 깜깜한 곳에만 있었으니 잘 모를거요.
그러니 어서 자요. 내일은 기회를 봐서 산을 내려갑시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상하게 머뭇거렸다.
"저.....저말이에요."
"뭐? 또 어디가 아프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게 아니라....잠깐 다른곳에 갔다 오세
요."
"왜? 내가 옆에 있는게 싫소?"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실은....사실은 용변을 보고 싶어요."
거의 들리지도 않는 작은 소리였다. 여인의 얼굴이 온통 빨게졌다.
도일봉이 웃었다.
"하하. 원래 그랬었군!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갑자기 소변이 보고 싶
은걸."
도일봉은 껄껄 웃으며 어두운 곳으로 가서 실례를 했다. 여인은 벌
써 용변을 보고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아기가 또 울기 시작했다. 도
일봉은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기는 처음 나왔을때만 해도 보기 싫더니만 갈수록 예뻐지는
군. 눈이 꼭 엄마를 닮았는걸. 나중에 크면 미인이 될게 분명해. 아
기가 우니 젖을 주구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기를 달래기만 했다.
"아니. 왜 그러오? 아기가 우니 젖을 줘야지요?"
"그대가...그대가 보고 있는데 어찌...."
"아이쿠. 부끄럼을 타는군. 우리동네 아줌마들은 들에서 일을 하다
가도 아기에게 젖을 준다오. 하지만 그녀들은 부끄러워 하지 않아
요."
도일봉은 촌구석 이야기를 떠벌였다. 그러나 여인은 부끄럼을 알며,
이름있는 선비집의 며느리인데 어찌 외간남자 앞에서 가슴을 보이겠
는가. 도일봉은 껄껄 웃으며 돌아누웠다. 금방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
다. 여인은 그때서야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다음날.
날이 밝자 도일봉은 밖으로 나갔다. 밖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간밤에 눈이 내렸던 것이다. 도일봉은 고개를 흔들며 안으로
돌아왔다.
"재수없게 눈이 내렸다오. 눈길을 걸으면 발자국이 남으니 곤란하
지. 이 눈은 우리를 도와주기도 하고 곤경에 빠지게도 하는군요. 우
리더러 몇일 더 이 동굴에서 지내라는 뜻인가 보오."
여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도일봉으느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할 일도 없는데, 우리 무공이나 익혀 봅시다. 그대는 책을 좀 읽어
주구려."
여인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멋도 모르고 그 심오한 소림사의 일지선 무
공을 익히게 되었다. 도일봉이나 여인은 이 일지선 무공이 얼마나 심
오하고 고급 무공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림사 일지선하면, 소
림사 내에서도 최고급 무공에 속하는 것이다. 대력금강지(大力金剛
指)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너무 패도적(覇道的)인 지법무공이라 꺼리
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일지선 무공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맹하기
이를데 없어 무림의 집법무공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다.
사도(邪道)의 무공중에 구명일지공(九冥一指功)이란 무공이 그 위력
에 있어 일지선에 필적할만할 뿐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라는 속담대로 여인은 멋도 모르
고 일지선을 반복해서 읽어 주었고, 도일봉은 뜻도 모르는 곳이 많으
면서도 여인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며 몸으로 익히려 들었다. 여인
은 의외로 학문이 깊고 총명해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는
제법 정확한 뜻을 풀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지선 무공은 내공이
최고경지에 으르고서야 입문할 수 있는 최고급 무공이다. 사실, 도일
봉이 이렇듯 스승도 없이 무모하게 익히려 드는 것은 커다란 실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도일봉이 그걸 알 리가 없다.
도일봉은 일찍이 내공을 익힌적은 없지만 유가의 기공을 기형적으로
익힌적이 있다. 일지선 내공과는 크게 다른감이 있었으나 억지로 끼
워 맞춰가며 기를 따라 운용해 보았다. 처음엔 전혀 되지 않았고 숨
만 답답했다.
이틀이 지날무렵. 한줄기 가느다란 힘이 손가락 끝에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아주 미약한 힘이었는데, 갈수록 힘이 모여
이젠 스스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도일봉은 크게 놀라 재빨리 기의
운용을 멈추고 무릅사이에 머리를 박고 손 끝으로 발 끝을 잡았다.
그러나 힘이 흩어지기는커녕, 더욱 무서운 힘이 손가락 끝으로 몰리
기 시작했다. 도일봉은 손가락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어쩔줄
을 몰라했다. 정말 참을수가 없었다. 혈관이 몽땅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으악!"
도일봉은 급기야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
어 한쪽벽을 맹렬하게 후려갈겼다.
"악!"
이번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통증이 몰려왔다. 손가락 끝에서 피
가 철철 흘러 내렸다. 그리고 바위 벽에는 손가락 구멍이 뻥 뚫려 있
었다. 도일봉은 이 한 번의 출수로 그만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온 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 나간 것 같았다. 도일봉은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비명을 지르는 통에 여인이 놀라 달려왔다. 도일봉은 고개를 저었
다.
"아이고 죽겠다! 이건 정말 무시무시한 손가락 요술 이로구나. 저
바위벽좀 보구려."
여인은 바위벽에 뻥 뚫린 구멍과 철철 피가 흐르는 도일봉의 검지손
가락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살과 뼈로 만들어진 사람
의 손가락이 어찌 단단한 바위벽에 구멍을 낼 수 있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일봉은 탈진한 상태가 되었지만 기분만은 좋았다.
"하핫. 내가...그간 착한일을 좀 했다고 부처님께서 이런 보물을 내
게 주셨구나!"
기분이 좋아진 도일봉은 곧 무릅사이에 머리를 박고 힘을 비축했다.
어느정도 힘을 추수리자 도일봉은 같은 방법으로 일지선을 운용해 보
았으나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다. 괜시리 바위벽을 후려쳐 보았다가
손가락만 끊어져 나가는줄 알았다. 도일봉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나도 모르는 사이 죽움의 문턱을 넘나들었군! 이걸 잘만 익
힌다면 그까짓 몽고귀신 손가락 요술 따위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
겠다. 아이코, 신난다!"
여인은 그가 아이들처럼 좋아하자 빙그래 웃었다.
첫댓글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독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밨어요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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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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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
무모하게 무술을 접하다니 잘 될가 ??? 잘 되겟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