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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2일 재의 수요일
제1독서 : 요엘 2,12-18
제2독서 : 2코린 5,20─6,2
복 음 : 마태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 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제 막 걸음마를 걷기 시작한 영아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2,368걸음으로 701미터를 걷고, 1시간에 17번 넘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몇 번이나 넘어져야 제대로 걷게 될까요?
한 천 번은 넘어졌다가 일어나야 이제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잘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성인이야 걷는 것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생각하지만,
영아에게는 어떨까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쳤기에
점점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또 잘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걷는 것을 넘어서 뛰어다니게 됩니다.
우리 삶도 이 영아의 걸음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잘 걷고, 잘 뛰는 영아가 없는 것처럼, 실패 없는 안정된 삶이란
소위 성공의 삶만을 살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이 아닐까요?
영아는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지금 성인인 사람 모두 이렇게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았던
영아의 시절을 지나갔음을 떠올린다면,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는 DNA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실패의 순간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늘 도와주시기에
그분 안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실패를 경험하곤 합니다.
처음에 주님과의 만남에서 얻었던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어느 순간 아무런 감정이 없게 됩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도 됩니다.
주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도 생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뒤로 미룹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여유가 생기면, 할 것 없으면, 복잡한 일이 없어지면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도 실패 없이는 제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하려는 사람만이 신앙생활의 큰 진전을 이루게 됩니다.
교회가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고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날이지요.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기쁜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는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수난과 죽음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물론 주님처럼 실제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시련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절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을 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삶 너머에 있는 희망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사순시기를 통해,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의 진척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50이 넘은 분들 중에서 탤런트 김혜자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분을 ‘전원일기’에서 조용한 내조로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정숙한 아내요 엄마의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사랑의 뭐길래!’에서는 보수적인 남편에 순종하지만
자신의 딸은 자유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현명한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엄마의 바다’에서는 갑자기 다가온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며
가정을 지키는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화보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의 소개를 보면서
아프리카의 굶주린 어린이를 돌보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은
“나는 직업을 탤런트라고 쓰는 사람을 보면 너무 이상해요.
연기는 그냥 나예요”라고 말하였습니다.
탤런트를 직업이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합니다.
연기는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아니면 작품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교만함이 아니라,
자신의 일(mission)에 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역할이 곧 자신이라는 열정으로 61년을 연기자로 살아왔습니다.
저도 뉴욕에서 지내면서 몇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일,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 퀸즈성당의 일,
동북부 엠이 대표 사제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으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일을 핑계로 지금 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비겁한 행동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자랑한다면 교만한 행동입니다.
신문을 만들 때면 매의 눈으로 교정을 보고,
직원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면 됩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면 미리 고백성사를 주고, 강론 준비를 성실히 하면 됩니다.
동북부 엠이와 함께 할 때면 미리 일정을 잡고
계획된 일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제게 주어진 일(mission)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기쁘게 지내면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주시고, 축복을 주심을 믿습니다.
촉매가 있으면 더 큰 에너지를 얻는 것을 봅니다.
제가 함께하는 성당의 교우들이 신문사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동북부 엠이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 신문사에 광고를 주고 있습니다.
신문사에 필요한 기사를 보내 주기도 합니다.
군림하는 주인공이 아닌, 봉사하는 주인공이라면 언제든지 응답해야 합니다.
교회는 오늘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를 시작하면서 신앙인들은 사순시기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대림과 성탄 그리고 연중의 신앙생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순시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4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사십 일 동안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4가지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자선’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누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면 좋겠습니다.
둘째는 ‘봉사’입니다.
손이 두 개 있는 것은 하나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발이 두 개 있는 것도 하나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 성체조배, 성경 읽기, 십자가의 길, 피정은 사순시기를 풍요롭게 하는 보물창고입니다.
넷째는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는 것이 진정한 단식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를 ‘회개’로 초대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 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는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첫째는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회개’가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 삶을 불러옵니다.
결국 회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올바르게 유지하는 견인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의로움은
단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진실 된 마음을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어지고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마음이 기도로 순결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회개와 기쁨의 거룩한 사순시기
-올바른 수행자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8)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오늘”이 회개의 날이자 사순절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로부터 받은 카톡 메시지가 고마웠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게 익어 성숙 되어 가는 영적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이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참 좋은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신부님, 멋지세요!”
뜬금없는 메시지가 궁금해 즉시 누군가 물었고 이어 온 답신입니다.
“안녕하세요. 카톡에 사진이 올라와서 멋지다는 생각에 반가워서 말씀드렸어요.
저는 2주 전 남자아이들과 피정 다녀온 자매입니다.
드문드문이지만 갈 때마다 신부님이나 수사님들 연세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고 아름다워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오늘 2월22일 재의 수요일부터 바야흐로 은총의 거룩한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와 올바른 수행의 영적 훈련으로 삶의 질서를 바로잡고,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고 깊이 하는 복된 시기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소개된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내용이 은혜로워
후반부 3개 절만 생략하고 전부를 나눕니다.
여전히 오늘날도 귀한 가르침과 깨우침이 됩니다.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의 섬김의 분량에 어떤 것을 이 시기에 더 늘릴 것이니,
곧 특별한 기도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절제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결코 우울하고 어둡고 무거운 고행의 사순시기가 아닙니다.
아니 그 반대로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올바른 수행에 힘쓰며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리는 복된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전장을 통털어 “기쁨”이란 단어가
오직 제49장에만 2회 나온다는 사실이 참 각별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니 성령의 기쁨,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부활 축일을 기다리며
자발적 올바른 수행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회개의 사순시기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이 회개의 여정이지만 특히 사순시기는 그러합니다.
오늘 독서는 회개와 화해에 대하여
복음은 사순시기 올바른 회개의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 요엘 예언자의 말씀이 현실감 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백성을 모으고, 회중을 거룩하게 하여라.”
교회 전례 공동체에 속한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개인적이자 공동체적 회개가, 무엇보다 생태적 회개가 절실한 때요,
전쟁과 재난에 시달리는 전 세계 나라들의 회개가 참 절박한 시기입니다.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구보다 종교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이 참으로 진지하게 회개와 더불어
시편 화답송 후렴을 바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요엘 예언서처럼 주님께서도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화답송 시편 51장,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제하의 시편을 깊이 되새겨야 할 재의 수요일입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주소서.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
회개와 함께 가는 화해요, 화해의 기쁨과 평화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사순시기 하루하루가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걸 맞는 올바른 수행이 바로 복음에서 소개되는
사순시기 대표적 수행인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올바른 자선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은 이런 올바른 수행을 통해 입증되며 열매를 맺습니다.
세 수행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바,
위선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는 수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라고 못 박으며
절대 이런 위선적인 수행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수행, 하느님 중심의 수행을 하라하십니다.
순서로 하면 기도, 단식, 자선으로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첫째, 올바른 기도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으로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올바른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둘째, 올바른 단식입니다.
나와의 소통으로 나와의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셋째, 올바른 자선입니다.
이웃과의 소통으로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뜻하는 올바른 자선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제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한결같이 진실하고 겸손한, 감쪽같이 숨겨진 올바른 수행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요, 닫힌 이기적 수행이 아니라 하느님께 활짝 열린 기도의 수행,
자신에게 활짝 열려 있는 단식의 수행, 이웃에 활짝 열려 있는 자선의 수행입니다.
참된 회개와 함께 가는 이런 올바른 자발적 기쁨의 사랑의 수행이
우리를 참으로 순수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일 년 영적 농사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특별 영적 훈련의 은총의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 축일을 기다리며 자발적 기쁨으로 참된 회개와 더불어
진실과 겸손의 올바른 수행에 전념해야 할 은총의 거룩한 사순시기,
간절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주례 사제가 머리 위에 재를 얹어 주시며 하신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은총의 사순시기 내내 진실하고 겸손한, 자발적 기쁨의 회개의 수행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3,19). 아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 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 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그 자체가 나팔이다.
그러기에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즉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선은 사랑을, 기도는 신뢰를, 단식은 겸손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미사 전례 중에는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받는 예식에서 ‘재의 수요일’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 재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축복하여
십자가에 끼워 두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얻은 것이다.
오늘부터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상징인 보라색 제의나 예절영대를 착용한다.
복음 후 강론이 끝나면 사제는 재를 축복하여 자신도 머리에 받고,
이어 신자들의 머리에 얹으면서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 참조)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가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거늘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흙밖에 되지 않는 내가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날에 봉독되는 복음은 산상설교의 중반부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의 첫 부분을 통하여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 (6개의 대당명제 : 5,21-48)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며,
구약의 가장 중요한 십계명의 범주 안에서 계명 자체를 사로잡는
계명 정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의로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하느님의 完全性을 닮아 가는 것(48절)으로 요약되었다.
오늘 복음에는 慈善과 祈禱와 斷食이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인 모두의 성덕으로 제시된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다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德目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善行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償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지침을 嚴守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 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을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지침을 글자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모든 선행이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을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향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무엇보다도 속죄의 힘을 가진다.
부디 속죄와 보속으로 은혜로운 40일이 되도록 노력하자.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단순히 연구하고 사색하는 기간이 아니다.
동감하고 이에 동정을 표하는 기간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의 표양으로 삼고 그것을 사는 기간이다.
나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실제로 그 잘못으로부터 돌아서는 기간이다.
꾸준한 반복을 통하여 그분의 법과 정신을 따라 사는 배움의 기간인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