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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시아=조선 원문보기 글쓴이: 천상희
본인은 조선의 북방은 오늘날의 우랄산맥과 우랄강 일대라 고증한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의 서북방은 어디를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히 고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예맥(濊貊)을 알면 조선의 서북방 지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조선의 서북방 지역과 강원도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 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역사에서 강원도는 동쪽으로 치우쳐진 지역 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서는 강원도는 서북방 지역에 있었던 지역 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군(郡)
○ 서도(西道) 원주 : 고구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이니 신라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때 원주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또 정원부(靖原府)로 올렸다가 익흥부(益興府)로 고치고, 성안부(成安府)로 고쳤으며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평량경(平涼京)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2리이다. ○ 주천(酒泉)은 속현이다. 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주연현(酒淵縣)이니 신라 때 주천(酒泉)이라 고쳤다.
수서(隋書) 卷八十一‧列傳第四十六 東夷
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백제에서 서쪽으로 사흘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고 한다.)
고종 40년 계묘(1903, 광무 7) 윤5월28일 (신해, 양력 7월 22일)
훗날의 끝없는 걱정거리는 바로 서북쪽 연변의 삼림(森林) 문제입니다.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이 만주(滿洲)를 침략한 것이 물론 하루아침의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권력을 수립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행위가 갈수록 더해지고 있는데, 특히 밀접한 관계를 지닌 곳은 바로 우리나라의 서쪽과 북쪽 연변 지대입니다. 서쪽과 북쪽 연변 지대는 부여(扶餘), 예맥(濊貊), 발해(渤海), 거란(契丹), 말갈(靺鞨), 여진(女眞), 몽고(蒙古), 합단(哈丹) 야인(野人)들이 대대로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어 우리의 강토를 침략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강원도 원주지역이 서도(西道)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서쪽에 강원도의 옛땅인 예맥(濊貊)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종실록의 기록에서는 조선의 서북방 지역에 예맥(濊貊)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강역 판도와 그 틀을 달리하는 기록들 입니다. 즉 현재의 역사는 역사왜곡 차원에서 짜집기된 역사임을 알수 있습니다.
진실한 역사에서 조선의 강원도는 서북방에 있었던 지역인 것입니다. 조선의 서북방 지역에 있었던 강원도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다음의 기록을 보면,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역대전고(歷代典故) 고구려의 속국 모두 고구려 본기에 보인다.
○ 부여는 현도의 북쪽 1천 리 밖에 있었는데,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挹婁)와,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하였다. 지역이 사방 1천 리가 되며 본래 예(濊)의 땅으로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후한서》
세종 지리지 강원도 / 강릉 대도호부
⊙ 강릉 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본래 예(濊)의 고국(古國)인데,【철국(鐵國)이라고도 하고, 예국(橤國)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芚)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일명 하슬라(河瑟羅).】일컬었고,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소경(小京)을 두었다. 태종왕(太宗王) 5년 무오에 하슬라의 땅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
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 19) 3월27일 (기유)
생각건대, 저 강원 한 지방은 실로 바다와 산으로 된 우리나라의 중요한 번병(藩屛)이다. 옛 예맥(濊貊)과 말갈(靺鞨)의 터로 둘러싸여 있어 섬서(陝西)가 관중(關中)과 농(隴)의 등줄기가 되는 것과 유사하고, 기호(畿湖)와 영해(嶺海) 지방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 제동(齊東)이 등주(登州)ㆍ내주(萊州)의 인후(咽喉)가 되는 것과 같다.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효람(曉嵐) 기윤(紀昀)이 일찍이 황하의 물 근원을 가서 찾아보고 하원기(河源記)를 지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곤륜(崑崙)은 곧 지금의 화전(和闐 신강성에 있는 땅 이름)의 남쪽 산인데 황하의 물이 여기서 나온다. 원 세조(元世祖)가 도십(都什)을 보내어 찾았으나 겨우 성수하(星宿河 운남성에 있음)에 이르러 그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곧바로 발원처(發源處)에 이르러 그 땅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인데,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로서 지금은 전부 중국의 군현에 들어 신강(新彊)이라 부른다.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서쪽은 동궐(突厥)을 지나가고 서남쪽은 토번(吐蕃)에서도 2, 3천 리를 더 나아간다. 신독(身毒)은 곧 인도(印度)이며, 현도(懸度)는 피산(皮山)에 있어 판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고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강원도 강릉 지역은 옛날의 예맥(濊貊)지역 이었으며 그 주변 지역은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관련 위의 연려실기술에서 인용한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예맥(濊貊)지역의 북쪽에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약수(弱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심전고"에서 인용한 효람(曉嵐) 기윤(紀昀)의 글을 보면,
감숙(甘肅)지역에 약수(弱水), 흑수(黑水)가 있으며 또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 즉 만주 여진족의 원 거주지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들은 흑수말갈로도 불리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한서"의 기록에서 예맥(濊貊)지역의 북쪽에 약수(弱水)가 있다는 것을 통해 알수 있는 사실은 조선의 강원도 지역의 북쪽은 약수(弱水)가 있는 감숙(甘肅)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코 허구적인 기록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만기요람 군정편 5(軍政編五) 백두산 정계(白頭山定界) 홍세태 백두산기(洪世泰白頭山記)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 기문에 이르기를, “백두산은 북방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다. 청조(淸朝)의 선조(先祖)가 여기에서 일어났으니 우리의 북쪽 국경에서 300여 리 쯤 되는 곳이다. 저들은 장백산(長白山)이라 하고 우리는 백두산이라 하는데, 두 나라가 산 위에서 갈라진 두 강으로 경계를 삼는다.......(중략) 이때는 첫 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아득한 하나의 은바다를 이루었다. 산 모양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흰 독[白甕]을 엎어 놓은 듯한데 에 올라보면 사방이 조금 불룩하고, 가운데는 움푹하여 마치 독 주둥이가 위로 쳐다보는 듯하였다. 외부는 희고 내부는 붉으며 사방의 석벽(石壁)이 깎아지른 듯한데 붉은 흙칠을 한 듯도 하며 또 비단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였다. 그 북쪽으로 두어 자쯤 터졌는데 물이 넘쳐나서 폭포가 되니 곧 흑룡강(黑龍江)의 수원이다. 산마루를 따라 약 3ㆍ4리를 내려오니 비로소 압록강의 수원을 찾게 되었다....(하략)
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또 길성 김 태수의 시에 답하다 2수
북으로 변방을 바라보니 길은 멀기도 한데 / 北望關河道路賖
가을바람에 기러기만 남으로 날아오누나 / 秋風獨有鴈南多
청삼의 관리 된 것을 그대는 괴이타 마소 / 靑衫作吏君休怪
백발로 어사된 나는 스스로 탄식한다오 / 白首爲臺我自嗟
철령은 머나멀리 흑룡강과 연접해 있고 / 鐵嶺迢迢連黑水
옥문관은 아스라이 사막과 닿아 있기에 / 玉關渺渺接黃沙
...............
만기요람의 기록을 보면 흑룡강의 수원지가 백두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의 기록에서 백두산은 조선의 북쪽 국경에서 불과 300여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또한 계절이 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아득한
하나의 은바다를 이루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의 백두산이 한 여름에도 이러한지 묻고 싶습니다. 위에서 "심전고"에서 인용한 효람(曉嵐) 기윤(紀昀)의 글을 보면 감숙(甘肅)지역에 약수(弱水), 흑수(黑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청일통지의 기록을 보아도 흑룡강(黑龍江)의 옛 이름은 흑수(黑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위의 사가시집의 기록을 보아도 조선의 철령지방이 흑룡강과 연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흑룡강의 수원지가 백두산이므로 조선의 서북 강역이 감숙성에 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의 강원도 지역이 감숙성 지역에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감숙성 어느 지역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기록을 다시 언급해 보겠습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군(郡)
○ 서도(西道) 원주 : 고구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이니 신라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때 원주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또 정원부(靖原府)로 올렸다가 익흥부(益興府)로 고치고, 성안부(成安府)로 고쳤으며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평량경(平涼京)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2리이다. ○ 주천(酒泉)은 속현이다. 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주연현(酒淵縣)이니 신라 때 주천(酒泉)이라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강원도(江原道) 원주목(原州牧)
【군명】 평원(平原)ㆍ북원경(北原京)ㆍ일신(一新)ㆍ정원(靖原)ㆍ익흥(益興)ㆍ성안(成安)ㆍ평량경(平涼京).
세종 지리지 / 강원도 / 원주목
⊙ 원주목(原州牧)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북원 소경(北原小京)을 두었고,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에【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4년.】 원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 무오에는【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지주사(知州事)를 두었고, 고종(高宗) 45년 무오에는【남송 이종(理宗) 보우(寶祐) 6년.】 원주에서 왕명을 거역한 일로 인하여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했는데, 원종(元宗) 원년 경신에【남송 이종(理宗) 경정(景定) 원년.】 지원주사(知原州事)로 회복하였다. 10년 기사에【남송 도종(度宗) 함순(咸淳) 5년.】 위사 공신(衛社功臣) 임유무(林惟茂)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정원 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忠烈王) 17년 신묘에는【원나라 세조 지원 28년.】 합단(哈丹)의 난리를 당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익흥 도호부(益興都護府)로 고쳤다. 충렬왕 34년 무신에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하였고,【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충선왕(忠宣王) 2년 경신에는 강등하여 성안부(成安府)로 하였다.【지대(至大) 4년.】 공민왕(恭愍王) 2년 계사에 태(胎)를 주의 땅 치악산(雉岳山)에 안치하고, 다시 원주목으로 회복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평연경(平演京), 또은 평량(平涼)이라 한다.【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주천(酒泉)은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내성군(柰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원주 임내에 이속(移屬)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별호는 학성(鶴城)이라 한다.
위의 기록을 보면,조선의 서도(西道)인 강원도 원주(原州)의 옛 이름이 평량(平凉),평량경(平凉京),평연경(平演京)임을 알수 있습니다.
여기서 황당한 사실은 현재 대륙의 감숙지역에도 평량(平凉)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이 뿐만이 아니라 대륙의 감숙지역 평량(平凉)지역에 주천(酒泉)이라는 지역도 있습니다. 조선의 원주 지역에도 주천(酒泉)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현재 대륙 감숙성 지역의 하서사군(河西四郡)은 무위(武威),장액(張掖),주천(酒泉),돈황(敦煌) 이라 합니다. 위의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강릉의 고구려때의 이름이 하서량(河西良)이라 했고 또 옛날의 지명은
평량(平凉),평량경(平凉京),평연경(平演京)이며,그 속현에 주천(酒泉)이라는 지역도 있습니다. 강릉을 고구려때 하서량(河西良)이라 했고 신라때는 하서량(河西良)이 하서주(河西州)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본인은 강원도 지역이 감숙 지역에 있었다는 고증과 더불어 대륙 감숙성 지역의 하서사군(河西四郡)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대륙의 하서사군(河西四郡)의 그 실체는 강원도 강릉 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에 의한 기록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사기(史記) 卷百0六‧吳王濞列傳第四十六
正義曰今名隴山關,在原州平涼縣界
(정의왈 지금의 농산관은 원주 평량현 경계에 있다.)
위의 기록은 사기(史記)의 기록에 대한 당대(唐代)의 학자인 장수절(張守節)의 주석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대륙 감숙 지역에 있는 농산관이 원주지역의 평량현에 있다는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도 위의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처럼 원주 지역에 평량(平凉)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농산(隴山)은 감숙 지역에 있는 산 입니다.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연의 일치의 기록이 아닙니다. 위의 기록에서 강원도 강릉을 고구려때 하서량(河西良)이라 했습니다. 이를 두고 조선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하서량(河西良)은
가섭원(迦葉原)이라 했습니다. 또 최두환 선생님은 가섭원(迦葉原)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라 고증 하셨습니다. 또 본인은 "오랄(烏喇)에 대한 고찰" 이란 글에서 조선의 북방은 몽고족이 사는 우랄산맥과 우랄강
일대 이므로 조선의 역사에서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는 결코 무관할수 없는 지역이라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권 세기(世紀) 4 부여(夫餘)
《후한서》에 또, “6년에 선비(鮮卑)의 단석괴(檀石槐)가 용맹이 있고 지략이 있어서 남쪽으로 변경을 침략하면서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고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퇴각시키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격파하여 흉노(凶奴)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하였다. 그런 다음 스스로 그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러 부여와 예ㆍ맥과 경계를 접해 25개 고을을 묶어 동부(東部)라 하고는 각각 대인(大人)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해동역사가 인용한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선비족 단석괴가 흉노의 옛땅을 모두 차지했다는 기록인데,여기서 "정령(丁零)"이라는 민족은 흉노족의 후예인 철륵민족을 가르키는 것인데 철륵의 활동강역에 대해 두산백과에 의하면,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 일대 입니다.그럼 선비족 출신 단석괴가 흉노족의 옛땅을 모두 차지하는 과정에서 흉노족의 후예인 정령이라 불린 철륵을 원거주지인 카스피해,아랄해에서 북쪽으로 몰아내고,그 서쪽으로는 역시 흉노족의 후예인 돌궐족의
오손국을 격파했다는 기록인데,오손국은 적어도 카스피해,아랄해의 서쪽에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즉 카스피해,아랄해의 서쪽이 한나라때 오손국이 있었으며,청나라때의 준갈이 지역이었습니다.
또 위의 기록에서 선비족 단석괴의 강역이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러 부여와 예ㆍ맥과 경계를 접해"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상고해 보면 최두환 선생님의 가섭원(迦葉原)=카스피해 설(說)은
매우 당연한 학설이며 또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하서량(河西良)=가섭원(迦葉原) 설(說) 또한 지극히 합당한 학설 입니다. 즉 조선의 강원도는 감숙 지역에 있었으며 감숙지역의 본래의 강역은 중앙아시아 코카사스 산맥을 기점으로
코카사스 산맥과 코카사스 산맥의 동쪽인 카스피해 사이의 지역이 감숙 지역인 것입니다. 역사에서 말하는 하서사군(河西四郡)인 무위(武威),장액(張掖),주천(酒泉),돈황(敦煌)이 있었던 원래의 지역은 이 지역 이었으며,
하서사군(河西四郡)의 그 실체는 조선의 강원도 강릉 이었으며 이 지역에 평량(平凉)이 있었으며 주천(酒泉)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기록을 보면,
동사강목 부록 하권 예고(濊考)
《후한서》에서 비로소 예(濊)에 대한 전(傳)을 두었는데, 《후한서》에 의하면, 예(濊)는 북쪽은 고구려ㆍ옥저와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는데, 본시 조선의 땅이다. 원삭(元朔) 원년에 예의 임금 남려(南閭)가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인구 28만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가서 내속(內屬)하니, 무제(武帝)가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삼았다가 수년 만에 이를 혁파하였다.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의 옥저(添沮)ㆍ예(濊)ㆍ맥(貊)을 다 낙랑에 소속시키고, 낙랑 7현(縣)을 나누어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다스렸다........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이 동옥저(東沃沮)를 취하였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렀다 (고려사) 하였으니, 동옥저의 땅은 지금 함경남도인 것이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사군고(四郡考)
《고려사》 지리지에, “명주(溟州)는 본시 예국(濊國)인데, 한 무제 때 임둔으로 만들었다.”
하고, 《여지승람》에는, “명주는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인데 딴이름으로는 임둔ㆍ예국ㆍ창해군(滄海郡)ㆍ동이현(東暆縣)이다.”
삼국지(三國志) 卷二十六‧魏書二十六 滿田牽郭傳第二十六
忠曰:「我遼東在滄海之東,擁兵百萬,又有扶餘、濊貊之用;當今之勢,彊者為右,曹操獨何得為是也?」
한충이 말하길,“우리 요동(遼東)은 창해(滄海)의 동쪽에 있으며 백만 군사를 끼고 또한 부여(扶餘), 예맥(濊貊)을 부리고 있다. 당금의 형세는 강한 자가 우선이니 어찌 조조(曹操)만 유독 옳단 말인가?
위에서 본인은 예맥이 있었던 지역은 감숙성 지역이며 그 지역의 진정한 위치는 오늘날의 카스피해 일대라 고증했습니다. 이 지역이 하서량이며 하서주이며 가섭원 지역 입니다. 위에서 동사강목에서 인용한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예맥의 동쪽은 바다 입니다. 기록에서 이 바다를 창해(滄海)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진수의 "삼국지"를 보면 창해(滄海)의 동쪽에 요동(遼東)지역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관인 한반도 사관에서 보면, 한편의 환타지 소설이 됩니다.
위의 동사강목에서 인용한 "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강원도 강릉의 다른 이름은 창해(滄海) 입니다. 한반도 강원도 강릉의 동쪽은 망망대해의 바다 입니다. 한반도 사관에서 보면 이 바다에 요동 지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관 입니다.
즉 역사에서 말하는 강원도 강릉인 창해(滄海)는 오늘날의 카스피해를 말하는 것이며 카스피해 동쪽이 요동(遼東) 지역인 것입니다. 또 예맥의 북쪽에 고구려,옥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
의 기록을 보면 옥저 지역 인근에 여인국(女人國)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고대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흑해(黑海) 근처에 궁시(弓矢)와 기마(騎馬)에 뛰어난 용맹무쌍의 여인군단"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여국(女國)의 기록을 보면 여인국(女人國)은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보면 조선의 고대 역사에서 나오는 옥저는 흑해연안에 있었으며
고구려 또한 흑해 연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볼때 본인은 옥저의 그 존재가 이 지역과 그 근방지역이 조선의 함경도 지역이라 생각 됩니다.
또 위의 기록에서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의 옥저(添沮)ㆍ예(濊)ㆍ맥(貊)을 다 낙랑에 소속시키고, 낙랑 7현(縣)을 나누어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다스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단단대령(單單大嶺)"은 코카사스 산맥을 의미하는 것이며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의 옥저(添沮)ㆍ예(濊)ㆍ맥(貊)"은 카스피해 서쪽에 있었으며, 이들을 낙랑에 소속시켰다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위에서 살펴본것 처럼 본인은 편의상 현재의 대륙의 지명을 언급하면서 역사에 대한 설명을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감숙성등지는 현재의 감숙성이 아닌 현재의 코카사스 산맥과 카스피해 연안 일대에 있었던 역사였던 것입니다.
첫댓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동도 강릉 : [성이 있다.] 본래 예국(濊國)[철국(鐵國) 또는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이니 한 무제의 한4군(漢四郡) 때에는 임둔(臨屯)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고 일컬었는데 하슬라주(河瑟羅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경으로 하였다가 뒤에 명주(溟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이라고 이름했다가 뒤에 하서부(河西府)라고 일컬었다. 명주목으로 고쳤으며, 경흥도호부로 올렸다가 다시 강릉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하였다.
여기서 동도(東道)의 뜻은 무엇일까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서도(西道) 원주 : 고구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이니 신라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때 원주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또 정원부(靖原府)로 올렸다가 익흥부(益興府)로 고치고, 성안부(成安府)로 고쳤으며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여기서는, 서도(西道)의 뜻이 무엇일까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정의(旌義) : 본래는 제주의 동도(東道)인데, 태종 병신년에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라산 남쪽의 넓이 90여 리의 땅을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大靜)이라고 하여 현을 두었다.
대정(大靜) : 본래 제주의 서도(西道)이다.
여기서, 동도(東道)와 서도(西道)의 뜻은 무엇일까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강원도 : [동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경계이며 남쪽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이고, 서남쪽은 충청도와 경계, 서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며 서북쪽은 경기ㆍ황해도의 경계이고, 북쪽은 함경도와 경계이다.] 26고을이다. [동도 9고을, 서도 17고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 임둔(臨屯)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고, 신라가 통합하여 명주(溟州)ㆍ삭주(朔州)의 두 주를 두었다. 말기에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삭방도를 두었다.
이 내용으로, 동도(東道)와 서도(西道)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한 역사에서 조선의 강원도는 서북방에 있었던 지역인 것입니다.
조선의 서북방 지역에 있었던 강원도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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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희 선생님의 이러한 의문 제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리전고(地理典故)라는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수서에 기록된 백제에서 사흘거리에 예맥이 있다, 그리고 예맥의 위치 기록이 잘못 기록되었나요? 강원도가 현재의 위치에 있는것인가요?
서역조선을 연구하시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아직은 정확한 고증이 어려워 정론으로 정립돼기 어려운 조건들이 많음은 현실이겠으나...
그렇다고 그 전체적 내용들이 모두 허구요 소설이라 치부하는건 큰 실례같습니다.
저와 조금 다른 시각들이 있긴 있습니다만...
대륙조선의 원 강역이 초기와 중기엔 중앙아시아까지란 여러 정황제시들 만큼은
정말 큰 연구성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주장이 무조건적 상상이라고들 하시는데...
정확한 증거 요구하시는 당 연구회 선생님들의 증거제시 요구에도 어느정도 충족돼는 형식의
나름 정확하신 증거들을 제시하신 주장을...그 해석의 오류가 좀 보인다 해서 무시하는 자세는 연구자들의 자세는 아닐겁니다.
천상희 선생님의 글들은 거의 조선(朝鮮)의 기록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독과 해석의 오류가 있어서 지적하는 겁니다.
단지, 그 획기적인 강역비정과 증명에도 불고하고...
아직 해석적 무리수가 있음은 제 생각많은 아닐것이라...제 나름 무지한 식견을 보태어 봅니다.
강원(江原)...
여러 역사자료들에 어디 어디에 어느때 존재한 지명이라 명기했고...
그게 현재의 강원도를 말한 것이다...아니다 중앙아시아 거시기다...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래,문자란게 약점이 많은 겁니다...해석하기에 따라선 강원도가 아메리카로도 갈 수 있는 격이니여...
그래서 저는...그게 왜곡됐든 어쨋든...그 당대의 그 저자가 표기하고자 했던 강원(江原)의 위치를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건...누가 뭐래도 당대의 고지도라 확신합니다.
조선(朝鮮)의 기록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왜곡 날조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낱낱이 증명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연구 과제입니다.
중원의 고지도들에...강원(江原)은 수도 없이 표기 됍니다.
양자강의 서쪽 발원지...즉, 강수(江水)의 원천(原川)...거기에 강원(江原)이란 지명이 수 없이 표기됐는데도...
이는 다 무시하고...같은 기록들의 내용들을...제각각 강원은 한반도다...중앙아다...로 천차만별 구분지으시는 이유들을 전 모르겠습니다...?
"강원도"의 지리적 위치조차 일치된 견해가 없으므로 난감합니다.
물론, 원래의 강원은 더 서쪽 중앙아..아니, 화끈허게 지중해...더 써서...아메리카 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자문명권이 고증하려 힘들고도 꾸준하게 표기한 양자강의 서쪽 원류 사천 일대의 강원(江原)...
그게 한양(무안)으로 내려오면서 중간에 강릉(江陵)..아주 딱딱 들어맞는 증거들이 존재하는데...
왜 그리 딴 데서만 강원을 찾으려고들 하시는지 모르겠단 겁니다.
자시만의 독특한 연구업적(?)을 위해서일까요...?
이해가 안됍니다.
홍진영 선생님이 언급하신 그러한 "고지도"(古地圖)들도 모두 왜곡 날조되었다고 혹자(或者)는 주장하더군요...
수원(水原)도 그렇습니다.
수 없는 고지도들에...아주 아주 한결같이...
양자강의 서북지류인 한수(漢水)가 화산 서쪽 태백산(太白山) 에 수원(水原)이란 곧에서 발원했음을
그리도 잘 표시해 놨는데도...그걸 뭔 문자기록에 정확한 해석이 어떫지 모르겠다 너스렐 떠시는지들 모르겠습니다.?
이게 글쟁이들이 패악같습니다.
문자좀 안다고하여...뭔 힘단 고서 풀이나 해 놔야 그게 무슨 대단한 진실규명 연구인듯 무개들을 잡으시려다...
연구가마다 제 각각의 수천 수만개의 수원(水原)이 나오고...내 가 젤 지대로 됀 연구고...
딴 자들은 그저 소성이니라~! 허는 식의 기고만장들...보기가 딱하단 겁니다.
뭔 힘든 한자책 나부랭이들 해석에만 매달려야 진정한 고증이라는지여...?
어짜피 해석에 따라 수천 수만가지의 수원(水原)이 나오는 다람쥐 챗바퀴를 계속 도시고 싶다시는 건지여...?
고지도들에 정확히 나와있질 않습니까...강수(江水)인 양자강 서남줄기의 시원이...
사천성 정도에 정확히 강원(江原)이라 표시됀 친정하고 명쾌한 지도여...
혹자(或者)는 그러한 "고지도"(古地圖)들도 모두 왜곡 날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고지도"(古地圖)들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요...
중앙-아시아가 본래의 중국(中國)인데, 동-아시아로 중국(中國)을 이동시켜 날조하였다는 것이지요...
이 고지도들도 다 왜곡이라서 참고할 바 없다면...
글쟁이 선생님들이 힘들에 수천 수백가지로 다르게 번역하시는 고서들은 왜곡안됐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씀이신지여...?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견해가 제각각이지요...
수원(水原)이 화성(華城)이라 불린 것도, 화산(華山)때문일까요?
현 수원의 사도세자의 무덤과 그 것을 두른 성곽때문일까요?
현 화성이 화성(華城)인 것은 이해가 가는데, 변변한 물줄기 하나 없는데 수원(水原)인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화산 근처에 있던 화성(華城)이란 지명을 카피하다 보니, 수원(水原)이란 지명까지 같이 묻어서 온 게 아닐까요?
과거의 수원은 화성시의 화산리 앞에 구 수원부가 존재하였고, 정조가 옮긴 수원이 현 수원,
그런데 수원시 안에 화산이 존재합니다....한글로 꽃뫼(화산)라고 정자동 지역에 있습니다.
파초 재배지 파장, 현 파장동....
제발 쓸 때 없는 글자랑 지식자랑좀 자제하고...
엄연히 정확하고 한결같이 표기됀 지명들이 있는 고지도들이 있는한...
그것을 일단 가장 근접한 지역으로 가정하에 다양한 각도들의 구체적 검증들이 있어야 역사찾기가 정확해 지는 것인지...
다 나온 증거들까지 애써 모른체 하면서...
왜 자꾸 한바도로만...왜 자꾸 서역으로만 연구의 논점을 가져가려 하는지 의문입니다.
중앙-아시아가 본래의 중국(中國)인데, 동-아시아로 중국(中國)을 이동시켜 날조하였다는 견해가 지배하는 경우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몰라서 여쭤 보는 건데... 조선 8도에서
경기를 중심으로 동쪽에 강원도, 서쪽에 황해도
대체로 이렇게 되어 있는 것 아니었나요..?
강원/수원의 뜻으로 봐서는 당연히 서쪽 고지대여야 맞을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요.
중심지역이 옮겨진 걸까요..?
강단학자들이 역사서 번역 할때 대륙설에 관 한것은 뒤로 빼고 반도설에 부합 되는 것 만 번역으로 역사서 번역 다 했다고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 하였지만 그게 아니군요 계속 대륙에 관 한 증거들이 나오니 다시 보완을 해야 합니다,,,,,대조선은 8도로 분류하지 않고 성으로 12성으로 분류 합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을 "귀도"라고 안 하고 "귀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는지 ,,,귀성길이 고향 성으로 가는 것이조,,, 조선 8도는 왜놈이 역사조작한 증거조
'예'는 강릉, '맥'은 춘천으로 기록되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현재의 춘천에는 거대한 '릉'이 하나있고, 그 '릉' 앞으로는 너비가 넓은 강 또는 호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래서, 후대가 그냥 '예맥'으로 함께 불렀던 것은 아닌지? 예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맥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요...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천문전고(天文典故)/ 재변(災變)과 상서(祥瑞))을 보게되면 다음과 같이 하나의 지명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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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년 무술 5월에 서리가 내렸다.
강릉(江陵) 대령산(大嶺山)의 대나무에 열매가 맺혔는데, 모양이 기장 이삭 같고 낟알이 참밀[眞麥]같았으며, 율무처럼 진득진득하고 찰기장[唐黍]맛 같아서 마을 사람들이 따서 술과 밥을 지었다. 또 함길도(咸吉道) 화주(和州)에 있는 흙은 모양과 빛이 누른 납[黃蠟] 같아서 떡도 만들고 죽도 만들었는데, 그 맛이 묵 같아서 굶주린 백성들이 파다가 떡과 밥을 만들어 먹고 주림을 면하였다. 《동각잡기》연월은 상세하지 않
여기서는 대령산이라고 표기되지만, 지금의 춘천의 동남쪽(동쪽)에는 '대룡산'이라는 지명이 나타나죠...이것은 과거(고종->대한제국?)에 이 지역이 강릉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라는 가설의 도출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기록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록중 신령스런 내용은 (성소부부고 제14권/ 문부 11 ○ 찬(贊)/ 대령산신찬(大嶺山神贊) 병서), 계묘년(1603, 선조36)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에게 물으니, 수리가 이렇게 말하였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新羅) 대장군(大將軍) 김공 유신(金公庾信)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山神)이 검술(劍術)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鑄造)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대령산의 신이 김유신이라는 점이죠... 김유신의 무용담과 그의 전설이 스며나오는 곳이 바로 강릉 또는 춘천이라는 점이 참 놀랍습니다. 현재도 그 곳과 지명이 너무나 유사한 그 곳에는 국토방위에 필요한 중요한 어떤 시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