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김남조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27년에 출생하셨으니 향년 96세다.
퇴근 무렵 별세 뉴스를 읽었는데 퇴근하자마자 김남조 선생의 시집을 꺼내 잠시 표지를 쓰다듬어 봤다.
김남조 시를 언제 읽었는지는 확실히 기억 나지 않으나 아마도 스무 살 무렵쯤이 아닐까 싶다.
가난했던 시절 지적 호기심을 달래준 책이 삼중당 문고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부터 백범일지와 김남조 시집까지 저렴한 가격에 읽을 수 있는 고마운 책이었다.
엽서 크기보다 약간 크다고 할까? 나는 지금도 1975년에 발행한 선생의 시집을 가지고 있다.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 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 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시집/ 情念의 旗/ 삼중당/ 1975
##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는 이 시를 달달 외웠다.
그동안 윤동주의 서시, 자화상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의 초혼 정도 외웠으나 김남조 선생의 이 시만큼 줄줄 외웠던 시는 없었다.
특히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 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는 구절이 눈과 입에 착 달라 붙었다.
김남조 시인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정서가 짙게 깔려 있지만 대중적인 시가 많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나도 쉽게 그의 시에 동화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평생 시를 썼다.
선생은 어느 수필에선가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기도하면서 시 쓰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나의 지병 - 김남조
한평생을
순간 단위로
한 순간씩 가파롭게 살아간다
은밀한 내 지병이다
한 생애 동안
긴 긴 실타래 풀어
영원이듯 유장하게 그리워한다
불치의 내 지병이다
*시집/ 귀중한 오늘/ 시학사/ 2007
### 이후 먹고 사는데 매달리느라 김남조 시와 잠시 멀어졌는데 나중 김남조 시전집을 읽으면서 선생의 시 편력사를 감지할 수 있었다.
김남조 시인과는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이런 것도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사동에 <시가연>이라는 찻집이 있다. 카페이면서 밥도 팔고 술도 파는 곳인데 우연히 들렀다가 이생진 시낭송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詩歌演이라는 이름답게 시낭송뿐 아니라 작은 공연도 있고 출판기념회 등도 열리는 모양이다.
그 시낭송 열리는 날 무슨 인연이 있었던지 김남조 선생이 오셨다. 신기하고 반가웠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아 몇 마디 나눈 게 전부다.
"선생님 시를 참 좋아합니다."
"네, 시 쓰는 분이세요?"
"아니요.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입니다. 시를 사랑하는 소비자인 셈이지요."
"시 소비자, 재밌는 표현이네요."
김남조 선생은 시를 좋아하는 독자가 참 귀중한 분들이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 이듬해인가 선생이 90을 넘은 나이에 시집을 냈는데 오늘 세상을 떠나면서 그게 마지막 시집이 되어 버렸다.
말년의 박경리 선생이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고 했던 것처럼 이 시집에도 모든 걸 비운 노년의 삶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노년의 날개 - 김남조
삐걱거리는 내 뼈는
몸 안의 자잘한 사슬이며
허허로운 모래밭에
내 순정의 파편들이 쌓이고
그 위에
질펀한 노을
애련하구나
늙는 일 서툴러서
깃털 줄어도 더 줄어도
날아오르려 애쓰는
내 노년의 날개
*시집/ 사람아, 사람아/ 문학수첩/ 2020
#### 그때 봤던 김남조 시인은 참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시 쓰는 분이라 다르구나를 알게 해줬다고 할까.
선생은 평생 시를 쓰면서 여러 시집을 남겼지만 유행가 부르는 연예인보다 덜 알려졌다.
어차피 세상은 시보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연예인 이야기 나누는 것을 선호한다.
시인이 외로운 이유다. 하긴 백 년 묵은 고독처럼 뼛속까지 외로움으로 가득 차야만 시가 나오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떠났지만 시집이 남아 있어 영영 헤어짐은 아니다. 이따금 김남조 선생의 시를 읽으며 떠난 사람을 기억할 때가 있으려나?
선생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을 것이다. 시인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넵!
신미주님이 빌어 주신 명복으로 시인님 가시는 길이 평화로울 것입니다.
@유현덕 오늘 한양대 유성호교수님이 그분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군요 김남조 시인님이 돌아가셨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현덕 님도 시인 같으세요 뼛속까지 외로움으로 가득 차야만 시가 나오는지도 모른다는 말씀 감동이네요 저도 시인인데요 제 시집은 읽어보셨을까요 감사합니다 시인에 대하여 기억해 주시는 일도요 김남조 시인님은 왜 외로우셨을까요 행복하세요
와우~ 반가워요 노올님,,
노올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이시라니 친근함이 생기네요.
모든 인연은 때가 있는 법이라 시와의 인연은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 몇 줄 읽어 보니 시인 냄새가 나네요.
우리 오프에서 만나면 꼭 인사하기로 하지요.
노올님도 늘 행복하시길요.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 쯤 그만 봐 버린 사람아
후후
그런 형상화가 왜 이리도
고급스러운지ᆢ
김남조시인께서는
아마
가실 때도
시를 쓰시는 중이었을 것같아요 ㆍ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오늘 밤
검색창은 김남조시인으로
가득할 듯요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는 제가 지금도 외우고 있는 시랍니다.
제가 정에 굶주리며 살아서 더 그런 모양이예요.
평생 시를 쓰며 96년을 살다 가신 시인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한테는 특별한 시인이라 더 추모의 마음이 큽니다.
가실 때도 시를 썼고 그곳에서도 시를 쓰지 않을까 싶어요.
당신이 그랬거든요. 시 쓰는 지병을 갖고 있다고,,
@유현덕
시 쓰는 지병을 가지고 있다!
백번 공감 되는 것이
저는
부끄럽게도
전부 미숙아지만
시를 쓰는 일을 ㅡ애를 낳는다 ㅡ말했었는데
시 쓰는 일이
돼지 기르는 일처럼
부지런해서 되는 일이라면
저도
지병이라 했을 겁니다
@윤슬하여 오매~
우는 매미도 뚝 그치게 만드는 고수님께서 너무 겸손하십니다.
좋은 의미로 낭중지추라고,,
저는 알지요. 윤슬님 글은 겸손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하여, 매니큐어 바른 돼지발처럼 개성 넘치는 님의 댓글에서 저의 눈이 번쩍 뜨인답니다.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빗물같은 정을주리라.
카카오 스토리에 담아놓고
가끔씩 읽어볼 정도로
저도 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빗물은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특히 이 귀절이 좋습니다.
애틋한 그리움속에
자신을 비워냄을 표현했으며
목적에 의한 시작과
원망으로 끝맺음 하는
이기적인 관계에서 벗어나게 함을 배우게 합니다.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 마디에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없는 벗이여!
삼중당 문고.
그옛날 종로서적에서 서서 읽었던 책들이었는데
정말 오랫만에 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린하님이 저의 삼중당 동지입니다.
삼중당 문고가 저렴하면서도 참 다양한 분야의 책을 냈더랬지요.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는 모든 구절이 명문일 정도로 알토란 같은 시지요.
오래전에 읽었지만 여태 이 시는 단물이 빠지지 않고 저의 심금을 울립니다.
좋은 시와 좋은 시인과 추억의 종로서적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멋진 린하님 좋은 밤 되세요.
린하님 ! 참 올만에 보네요 ㅎ
96세 장수하신 사랑의시인 김남조 시인님 극락왕생 하옵소서
삼중당문고야 우리시대 참 유명했던
마초 가이가 명복을 빌어주니 시인님 가시는 길 평온하실 겁니다.
삼중동 문고도 알고 지존형은 참 팔방미인이세요.
글구 요즘 뜨개질 열심히 하고 계시지요?
접때 형이 털실로 내 조끼 떠준다고 했는데 크리스마스 전에는 입을 수 있겠지요.ㅎ
@유현덕 에고 못산다
은제적 뜨개질인데 ㅎ
현덕님 소개로 시 잘 읽습니다 제 스스로는 잘 안 읽거든요 삶방에 현덕님 계셔서 행복입니다 제겐
아! 그렇군요.
제 삶의 절반 정도가 시에 한눈을 팔면서 사니 제 옆에 있으면 시벼락 맞습니다.
저도 삶방에 운선님이 계셔서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운선님과 글 친구로 오래 함께 할 수 있다면 저도 행복할 겁니다.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네, 창밖의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걸 보니 시인님 가시는 길이 평화로운 모양입니다.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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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가 먼지도 모르면서 아주 오래전에
어렸을때부터 괜스리 이 시를 엄청
좋아했던 기억입니다.
멋진 이더님 올려주신 시가 감동입니다.
저도 이 시를 참 좋아했더랬지요.
뭣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이 참 사랑인 것처럼 뭣도 모르고 좋아하는 시가 오래 남는 법입니다.
예전에 이곳 카페 어느 방에서 이더님과 글향을 나눴던 시절이 그립네요.
어디서든 건강하게 잘 지내시다가 또 만나요.ㅎ
그렇군요~
유현덕님 덕분에 소식을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위의 모든 댓글조차 모두 싯적 감성이
충만함을 느낍니다^
마론님 반갑습니다.
한국 시단의 최고령 시인이셨던 분이 떠나는 게 아쉬웠답니다.
장수사회라 해도 건강하게 오래 살기도 어렵지만 노년까지 시를 쓰기는 더욱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마지막까지 시를 쓰다 가신 시인님을 추모하고 싶었네요.
마론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