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성상 숭배'는 적절한 단어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성상 옹호라고 하죠. 성상 파괴론자들은 동쪽 이교도와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조각상을 포함해 이콘(성화)까지 배격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동방 교회는 조각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이콘에 대해서는 묵상을 도와주는 용도로써 용인하고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서방에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공경이 숭배로 왜곡되었습니다. 서방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프랑크 왕은 입장 표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죠. 자신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방 교회의 존재를 동방에 알려야겠다는 의도에서 그랬겠지요. 그것은 프랑크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측근 신부 한 사람에게 이에 대한 서방 교회의 입장을 저술하게 했습니다. 이 신부는 그의 저서에서 '우리는 성상 숭배를 옹호하지 않지만 성상 파괴를 용납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들어 성상파괴 운동 이전에도 서방의 독자적인 신학이 있었다고 하지만 고대 세계가 붕괴하기 전에 동서 교회의 신학은 함께 발전했습니다. 서방의 수준이 떨어지긴 했겠지만. 호르스트 푸어만은 이 사건으로 서방 교회가 동방교회에서 신학적으로 독립하고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으로 봅니다.
동서 교회는 분열 이전에도 신학적으로 많은 면에서 대립했습니다. 유명한 것으로는 '필리오쿠에' 와 성체에 누룩을 쓰느냐 마느냐, 그리고 로마 주교의 권한에 대한 논란이 있겠네요. 우선 한 가지 부연하자면, 고대에는 5개의 대교구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티오크,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지금은 대교구가 많기 때문에 이 특정 다섯 지역의 주교에 대해서 총대주교라고 하지만 그냥 주교나 대주교라고만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특히나 로마 교황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총대주교나 대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로마 주교라 합니다.
이 다섯 대교구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구에 따라 전례나 신학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듯이 신부에 따라 신학적 견해가 조금씩 다르고 본당에 따라 전례가 아주 약간이지만 차이를 보입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분열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공의회에서 견해 차이를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공의회의 결정에 불복하여 이단 판정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세 교구가 이슬람의 손에 떨어지면서 거의 망했죠. 따라서 두 교구만 남았는데 로마 주교는 그 이전에도 다른 주교에 비해 존중 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로마의 행정구역 편제상 그렇다고 하는데 베드로가 로마에서 처형당했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베드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교황청 지하에서 나왔죠. 가톨릭에서는 누구도 가톨릭교도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출생을 중요시하지 않는 반면 사망은 매우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존중은 존중일 뿐이고 로마 주교가 다른 주교들에게 간섭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서방 교회가 덩치도 커지고 신학에서도 발전하자 어느날부터인가 로마 주교가 다른 주교들에게 간섭(또는 임명)하고 공의회를 개최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발전하고 부유한 동방 교회가 가난하고 무식한 서방 교회에 귀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존심 문제 때문에라도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죠.
동로마의 존립이 위태로워 황제가 서방의 지원을 바라고 교황과 함께 동서 교회의 통일을 추진했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반대로 번번히 실패합니다. 특히나 아래 사건 당시의 대주교는 매우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동서 분열의 분수령이 된 이 사건은 교황의 사절이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던져버린 간지나는(또는 미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현재는 사절의 월권으로 해석합니다만. 이에 동방 교회는 별개의 공의회를 열어 로마 주교를 맞파문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4차 십자군 사건으로 동로마인들은 서유럽인들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통일을 위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이유와 서유럽인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고 현재 상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프랑크왕이라함은 카를로스대제를 말씀하시는건가요?
샤를 대제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가 기억이 안나서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
샤를 마뉴 맞습니다. 그리고 단구왕 피핀이 롬바르드를 정복한 뒤 라벤나 총독령을 교황에게 기진했는데, 로마는 그러거나 말거나 본디부터 교황 꺼였습니다. 라벤나 총독이 관할하다가 거기가 붕괴된 이후에, 로마를 가지고 있던 교황이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던 동로마 황제를 차버리고 낼름 피핀에게 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