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고 야구부는
( 창단 - 1924년 / 해체 - 1945년 / 재창단 - 1974년 )
1924년에 창단되었다가 해방무렵에 해체된 기록이 남아있는 공주고의 사실상의 창단년도는 1974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주고출신으로 당시 대한야구협회장이자 실권자 김종필씨의 친형인 김종락씨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역시 대전출신으로 충남야구의 지대한 공헌을 한 김영빈씨를 창단감독으로 야구불모지였던 충남에 첫 깃발을 올렸습니다.
공주고는 77년 충청도팀으로서는 사상처음으로 전국대회를 제패한 영광을 가지고 있는 팀입니다. 당시 대전을 제외한 충남지역에서 우수한 재원을 확보하기는 어려웠던 시절이라 공주고의 첫우승은 주로 타지역에서의 전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에이스였던 오영세에다가 부산고에서 1학년을 마친 특급포수 김경문을 대구지역에서 이근식과 조범현(김경문과 포지션이 겹치면서 다시 대구로 돌아갔습니다)을 스카웃하면서 76년부터 전력을 정비한 후 이들이 3학년이 되던 77년 대통령배 준결승에서 신일고의 부정선수파문으로 행운의 기권승을 거둔 후 결승에서 양상문의 부산고를 4-3 극적으로 꺽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우승맴버들의 1년 후배였던 신경식도 우승 당시 공주고 선수는 아니었고 부산고와 충암고를 거쳐 공주고로 왔던 선수로 공주고의 초창기 맴버들은 타지역선수들이 많았던게 사실입니다.
한 번의 우승이후 충남예선의 벽을 넘지 못하던 공주고는 87년 대전고가 충남예선전에 참가하지 않게 되면서 천안북일고와 한 장의 전국대회 티켓을 놓고 치열한 라이벌전을 벌여야 했는데 90년도가 될 때까지 북일고의 벽을 좀처럼 넘지 못했습니다.
공주고의 전성기는 90년부터 3년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재웅-박찬호-노장진이 차례대로 등장하는 이때의 성과는 90년의 준우승과 92년의 우승으로 나타납니다.90년 투수 신재웅, 2학년생 박찬호, 김종국, 손혁 그리고 막강한 타격을 과시하던 포수 강준기를 앞세워 결승에 올라 경남고에게 지면서 아쉬운 준우승을 차지한 후 2년 뒤 역시 청룡기에서 15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했는데 선린상과의 결승전에서 에이스 노장진은 믿어지지 않는 최초의 결승전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었습니다.
고2시절 준우승에 기여했다고는 하지만 박찬호-손혁-홍원기-오중석 등 공주고 창단이래 최강의 맴버들은 정작 3학년이 되던 91년에는 우승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는데 박찬호가 선배 신재웅이나 후배 노장진보다 못해서였다기 보다는 꿈의 92학번으로까지 불리는 전국의 에이스들의 벽이 너무 높았던 해였기 때문입니다.
그후 한동안 부진한 성적을 내다가 2000년 이후 다시 재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2000년 청룡기 4강이후 2006년에는 두명의 우완투수인 김태식과 이웅한을 앞세워 정상권에 도전했으나 황금사자기 준결승에서 당해년도 최강팀인 장충고의 이승우-이용찬 계투에 밀리면서 4강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한때 북일고와의 충남예선에서 지나친 신경전으로 몰수게임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만 박찬호라는 거물스타를 배출했다는 자신감인지 최근에는 북일 컴플렉스도 거의 없어진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공주고 출신중 가장 인상 깊은 선수들로는 형제지만 체격도, 야구 스타일도 딴판인 조동화-동찬 형제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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