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인물들 115 - 대원군과 민비
대원군과 민비
이조말엽에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싸움으로 역사를 망친 대원군과 민비의 이야기는 실로 우리 민족의 수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왕위에 올라 15년 당년 스물셋의 헌종(憲宗) 왕이 국사는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헤매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왕족으로서 파벌싸움에 목숨이 두려워 강화도로 피신을 가 있던 나무꾼 총각인 철종(哲宗)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철종이어서 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가 예상치도 않게 왕 자리에 앉게 되니 꿈만 같았습니다.
철종이 집권한지 얼마 후 영흥부원군(당시)으로 있던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들였는데 이 왕후인 안동김씨는 왕의 무식함을 악용하여 모든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었습니다.
모든 권세는 친정아버지인 김문근이 잡고 조카인 병학(炳學)이 대제학을 차지했으며 병국(炳國)은 훈련대장을 또 병기(炳冀)는 좌찬성을 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나라 법은 문란해질 대로 되어 벼슬을 사고파는 일들까지 벌어졌고 활도 쥐어보지 못한 것들이 병권에 들어앉았습니다.
이리하여 나라형편은 날을 따라 험악해지기만 했습니다.
철종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특히 왕족인 젊은 남자일수록 꽁무니를 사려야만 하는 판이었습니다. 좀 똑똑해 보이는 자이면 안동김씨의 그 세도에 견디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흥선군 이하응(興宣君 李昰應)은 원래 이조 16대왕 인조의 6대손인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김씨 일파의 멸시와 학대, 수모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일찍이 부모들을 여윈 그는 나이 22살이 넘도록 이렇다 할 벼슬도 하지 못하고 겨우 현록대부(顯錄大夫)로서 흥선정(興宣正)이라는 직위를 받았습니다. 걸핏하면 목숨이 날아나는 판이라 이하응은 서울 장안의 불량배들과 술이나 마시고 놀음이나 했습니다. 그는 이 어지러운 판에서 자신을 주색에 빠진 주정꾼으로 가리면서 속으로는 조대비와 내통하여 김씨 세도파들을 쓸어낼 발판을 꾸준히 닦아 나갔습니다.
해는 바뀌어 철종14년 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급기야 병이 더해진 철종 왕은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제 왕위를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섰습니다. 벌써 수년간 조대비와 내통이 되어있었으므로 안동김씨 일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이 왕으로 정해졌습니다. 흥선군의 아들이 왕이 되면 그가 권력을 쥐게 되므로 김씨 일파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반대했지만 이미 왕은 정해진 뒤였습니다.
“야 잘 난다. 저것 봐, 내 것이 더 높이 떠올랐구나.”
11살의 고종은 연 띄우기에 여념이 없어 열심히 연줄을 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벽제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가마가 자기를 모시러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철부지 고종은 자못 놀랐습니다.
“아, 내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왕이란 말인가?”
고종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이리하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하늘높이 연을 날리며 손바닥을 치던 소년이 일약 국왕이 되고 장안의 술주정뱅이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그 흥선군이 대원군의 지위에 올라 모든 권력을 쥐게 되는 대사변이 급기야 터졌습니다.
대원군은 아들 고종 왕의 정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근 10여 년간 나라의 모든 실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대원군이란 죽은 왕의 뒤를 이을 자손이 없을 경우 왕족들 가운데서 다른 집 아들이나 손자가 왕 자리에 올라앉을 때 새 임금의 친아버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농민들의 반봉건적 진출로 봉건제도가 무너져가고 또 다른 편으로는 자본주의열강들의 침략이 강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때문에 대원군은 ‘폐정쇄신’(弊政刷新=낡은 정치를 반대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시한다는 뜻)의 구호를 들고 봉건적 ‘개혁’들을 실시했습니다.
그는 왕실의 강력한 지배권을 구축하기 위해 우선 60여 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청산에 달라붙었습니다.
“음, 언제까지 세도를 부릴 줄 알았지. 안될걸.”
그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1864년 4월 영의정으로 있던 김좌근부터 멀리 밀어냈으며 그 일파들을 차례로 정계에서 내몰면서 오랫동안 눌려 살던 왕족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파쟁의 희생물이 되어 갇혀 있거나 유배지에서 헤매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또한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전주이씨의 족보였던 ?대동보?도 발간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왕권의 권위를 올리기 위하여 3년 2개월이란 긴 기간과 780만량의 막대한 돈을 들여 경복궁을 중수했습니다.
대원군은 봉건왕실의 기본수탈체계로 되어있는 군포제도를 호포제도로 바꾸고 환자제도 역시 사환제도로 고쳐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상 내용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소지주들의 발판이며 소굴인 서원을 철폐할 데 대한 영을 전국에 내리고 600여개이상의 서원을 없애버렸습니다.
이 모든 조치들은 인민들의 마음을 눅잦히고 저들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1868년에는 군대의 최고기관인 ?3관부?를 내오고 군대수를 늘이는 한편 해안방어에 힘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해 나갔습니다.
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조치로서 침략의 길잡이로 되는 가톨릭교도들을 탄압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톨릭교는 정조 왕 때에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것은 우리 사람들이 중국을 왕래하는 과정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프랑스와 여러 나라 선교사들이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는 바람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고종 3년에는 원산항에 들어온 러시아군함에도 가톨릭 교인들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대원군은 사람들을 파하여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많은 가톨릭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교인이 발견되기만 하면 사지를 묶어놓고 얼굴에 백지장을 덮고 냉수를 뿜어서 숨이 막혀 죽게 하고는 그 시체를 던져버렸습니다.
대원군은 자본주의나라들의 밀수입상품들을 몰수하고 불문곡절 불을 달았으며 침략자들과 그 주구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면서 극심한 쇄국정책을 실시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나라의 선진과학기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길을 무자비하게 차단하여 나라 안에 발전된 과학기술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들었고 경제와 문화가 제자리에서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했습니다.
대원군의 이런 정책들은 멸망에 직면한 봉건왕조를 구원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던지 유지해보려는 강경한 보수적인 것이었으며 반동적인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고종의 왕비를 들이는 데서도 안동김씨의 세도를 보았던지라 친정아버지도, 오라비도 없는 민치록(閔致錄)의 딸을 골라 맞아들였습니다. 그가 바로 민비였습니다.
민비의 친정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된지가 오래고 그의 양자인 민승호(閔升鎬)는 한쪽으로 대원군의 친속이 되므로 안심하고 그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는 고종보다 한 살 더 먹어서 16살이었습니다. 처음 궁중에 들어왔을 때 민비는 조대비와 궁중의 어른들에 대하여 공손하고 잘 받들며 궁녀들도 잘 통솔하는 것으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그 민비가 바로 왕을 조종하여 마침내 시아버지를 내몰고 자기의 친정 육촌, 팔촌 심지어 민씨라면 덮어놓고 벼슬에 올려 앉혀 또다시 외척시대를 낳게 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큰 키에 얼굴이 좀 검은 편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으므로 고종 왕은 처음 그를 시답지 않게 여겼고 궁녀 이씨를 더 좋아했습니다.
하건만 민비는 대궐책방에서 글만 읽었습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고 수완이 지나치게 비상한 인간이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대원군은 활달한 민비의 성품을 고려하면서 경계를 두어 고종과 멀리 있게 했습니다. 그 기간에 민비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고종은 궁녀인 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민비와의 관계에서도 아들을 보았으나 사흘 만에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대원군은 이씨가 낳은 완화군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시기가 난 민비는 드디어 대원군을 몰아낼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민비는 이제 고종의 나이 22살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실권을 접수해야 한다는 것과 대원군의 정치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점들을 열거했습니다. 여기에 또한 대원군의 독재에 인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영락해졌고 내외의 민심도 소란해졌습니다.
그리고 고종 왕 자신도 아버지의 지나친 독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제는 자기도 정치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고종은 민비의 말에 넘어가 대원군의 정권을 강제로 접수하기로 했으며 그를 궁궐에 들여놓지 조차 못하게 했습니다.
대원군이 궁궐로 들어서려 하자 군졸이 앞을 막아 나섰습니다.
“어명이요. 들어오지 말라는 분부이시오이다.”
“무엇이라구?”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러나 왕은 역시 고종이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원군은 말없이 돌아서서 발길을 옮겼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대원군은 정권에 앉은 지 십여 년 만에 날아가던 새도 능히 떨어뜨릴 만큼 세도가 대단하고 기승을 부리던 그 정사에서 하루아침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민비일당의 책동이라는 것을 대원군은 알아차렸습니다.
대원군은 양주 한촌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 ‘기막힌’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민비를 왕후로 맞아들인 뼈아픈 뉘우침이 허비어들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원군이 그처럼 사랑하던 세자 완화도 11살 때 원인도 모르게 갑작스레 죽어버렸습니다. 모두들 이것은 민비일파의 독살행위라고 지목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자기 처지에서 사실을 밝혀낼 힘도 없었습니다.
대원군은 낚싯줄을 길게 드리우고는 민비 년을 복수할 생각에만 골똘했습니다.
어느 날 민비의 오라비인 민승호가 밥을 먹는데 대원군의 심복 한 사람이 찾아와 자그마하고도 맵시 있는 궤 하나를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전하라고 해서 …”
그리고는 별말 없이 인사를 하고는 되돌아서는 것입니다.
민승호는 별생각 없이 호기심에 끌려 궤를 그 자리에서 열었습니다.
순간 고막을 찢는 폭음과 함께 민승호는 즉사하고 가족들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묘하게 폭발장치가 되어있는 폭탄이었습니다. 대원군이 민비일파를 없어버리기 위한 음모는 이렇게 걸음을 떼었습니다.
민비는 고종에게 대어들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데 있어요. 이젠 아버지한테 문안도 가지마세요.”
민비는 고종이 일 년에 한 번씩 아버지에게 다녀오는 것도 막아버렸고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민비는 대원군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자는 귀신도 모르게 없애치웠습니다.
또한 민비는 자기의 끄나풀들을 대원군의 처소에 보내어 그의 동정을 살피도록 했으며 정상적으로 보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알아 챈 대원군은 자기에게로 오는 놈들을 두말없이 죽이거나 잡아들여 가두어 놓았습니다.
대원군과 민비사이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대원군이 민비에게 밀려 자리를 옮겼으나 그의 실권야욕만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에 와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사이는 서로 반목하고 상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까지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원군이 소문을 들으니 이당주라는 장님이 하나 있는데 민비의 앞잡이로서 매일 밤 대원군을 죽게 해달라고 밤새워 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청지기인 한석진을 불러 사실을 알아보니 그는 밤마다 즐비한 음식상을 차려놓고 연방 절을 해댄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이레 안으로 잡아다가 아비지옥에 가두어 줍소사.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를 죽여주시옵소서.”
그는 손을 싹싹 비벼대면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확인한 대원군은 즉시 이당주를 자기에게로 끌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좋은 음식에 비단이불을 펴서 편히 쉬게 했습니다. 대원군은 그를 만나지 않고 며칠간 계속 ‘대접’을 해댔습니다.
청지기도 이러한 알 수 없는 처분에 의아한 감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저놈을 왜 대접만 합니까. 죽여도 시원치 않겠는데.”
대원군은 히쭉 웃더니 손을 내젓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내 시키는 대로 만 하고 가만 있게, 때가 되면 죽지 않으리.”
이당주는 민비가 찾을 것 같아 청지기에게 어서 빨리 대원군을 만나게 해주던지 아니면 문의라도 해달라고 거듭졸랐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대원군은 그놈을 그대로 내놓아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당주는 놓여나오자 큰 숨을 쉬었습니다.
“후유!”
그러면서도 의아한 감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문 밖에서는 가마가 기다리고 섰으니 그를 타고 곧장 민비에게로 갔습니다. 그동안 계속 걱정을 하고 있던 민비는 이당주가 들어서자 다그쳐 물어댔습니다.
“무슨 말을 물어보았소. 어떻게 대답을 했는가 말이요?”
하지만 이당주의 대답은 너무도 태연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만나주지조차 않았소이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바른대로 말을 해봐라.”
민비는 대원군에게 비밀을 다 불었을 것 같아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용서치 않겠다고 문초를 들이댔으나 역시 매한가지였습니다.
민비는 이당주가 대원군에게 가서 대궐의 중요한 비밀을 다 털어놓았고 또한 그 무슨 요긴한 과업을 받아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털어놓으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바로 이것을 노리었기에 잘 대접하고 만나지도 않은 채 내보낸 것이 아닙니까.
이당주는 민비의 지시로 포도청에서 귀신 몰래 목을 잘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원군의 입이 빙글 사해졌습니다.
“음, 그랬을 테지. 내 진속이 어떤 것인지 네년이 알 리가 없지.”
이렇게 민비와 대원군의 암투는 계속되었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습니다. 민비는 국정을 손에 넣고 온갖 못된 짓은 다했습니다. 때문에 인민들의 원성은 대원군시기보다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에 크게 남은 ?임오군인폭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군사들에게 내어주는 군료라는 것이 한 달에 겨우 한말인데 그마저 열석 달째나 미루어 오다가 내어준 것이 몽땅 모래와 겨 투성이었습니다. 때문에 군사들은 그래도 대원군시기가 괜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때를 그리워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요미는 매달 내주었고 군기도 강했습니다.
그리고 병인년(1866년)에는 프랑스함대, 신미년(1871년)에는 미국함대를 보기 좋게 격퇴하여 우리를 먹으려 달려들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였기에 백성들은 군사들을 아끼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전국의 거리마다 외적을 반대하는 ‘척화비’를 세웠고 침략자를 반대하여 나서도록 군사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민비가 들어앉자 군기는 더욱 문란해지고 그들의 생활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민비는 밤마다 굿판을 펴놓았고 아침이면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침전에서 일어나기조차 않았습니다. 고종 왕과 민비에게는 돈이 산같이 쌓여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틈을 타서 왜놈장사치들은 변돈을 놓아 가을에 가서는 귀중한 낟알을 모조리 긁어갔습니다.
군인들의 분격은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바엔 원이라도 풀고 죽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군기고에서 무장을 꺼내든 군인들은 민비를 찾아 대궐로 쳐들어갔습니다. 민비는 재빨리 궁녀의 옷을 입고는 그들 틈에 끼어들었습니다.
민비는 군사들에게 두 번이나 잡혔지만 그때마다 궁녀라고 묘하게 속이고는 아첨쟁이 무예별감 홍계회의 등에 업혀 대궐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친척벌인 충주 민응식의 시골집에 몸을 사리었습니다.
?임오군인폭동?으로 민비가 도피해 있는 동안 대원군이 다시 집권했습니다.
그러나 민비 역시 정권야욕을 버릴 수 없어 이번에는 외세를 끌어들이는 천추에 용납 못할 대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자기의 심복인 김윤식을 은밀히 청나라에 파견했습니다. 그는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을 움직여 원세개가 거느린 청군을 불러들였으며 애국적인 ?임오군인폭동?을 무참히 진압했습니다. 폭동이 터진 지 스무날 만에 청나라군대는 군함을 끌고 조선 땅에 들어섰습니다. 그들은 대원군을 잡아 청나라로 보냈습니다. 청나라 통치배들은 민비와 공모 결탁하여 외교적 의례방문차로 그 군영을 방문한 대원군을 납치했으며 청나라로 끌고 가 억류했습니다.
대원군은 4년이란 세월을 보정부(保定府)에 갇혀 지내다가 1885년 8월 귀국했으니 운현궁에 연금되었습니다. 대원군은 1894년 6월 잠시 동안 다시 정권을 쥐었지만 11월에 쫓겨난 후로는 연금 상태에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79살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역사의 수치인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싸움은 며느리의 승리로 끝났고 정권은 또다시 민비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민비는 천하영웅으로 자처하던 대원군을 상대로 수십 년 간이나 그의 행동을 봉쇄 저지시켰습니다. 그는 원래 처녀 때부터 야심가였고 권력에 환장을 한 인간쓰레기였습니다.
민비의 기고만장한 태도에 그의 오라비가,
“저 계집애가 누굴 망쳐 놓으려고 저런고.”
라고 하자 그는 크게 웃으며 떠벌이는 것입니다.
“기왕 망쳐놓을 바엔 큼직한 집 하날 망쳐 놓고 말걸.”
민비는 왕비로 뽑히기 전에 이미 정해 놓은 혼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것이 더 좋았기에 그는 헌신짝처럼 내던졌습니다. 한번은 그 총각이 벼슬에 올라 궁궐에 오게 되었는데 민비는 문틈으로 내다보면서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아이구, 저까짓 것을 서방이라고 내가 맞을 번했군. 호호호.”
하여튼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싸움은 우리나라를 탐내어 엿보던 각국의 외세를 끌어들이게 했게 나아가서는 온통 망치게 하는 뼈아픈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망국의 시작이었고 또한 망국의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말 외래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이 강화되자 통치배들은 인민에 의거하여 제 힘으로 나라를 구원할 생각은 없이 제 나름대로 제가끔 외세를 끌어들이기에 미쳐 날뛰었습니다. 내외정세는 말할 수 없이 복잡다단했습니다. 민씨들의 세도정치, 이 땅을 먹어보려는 열강들의 책동으로 나라안팎은 물 끓듯 했습니다.
이런 때 젊은 개화파의 선구자들인 김옥균을 선두로 한 선진적 지식인들이 ?갑신정변?을 단행했건만 이것 역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개화파들은 눈물로 이 땅을 하직하여 망명의 길을 떠나거나 칼에 맞아죽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일어섰습니다. 전라도농민들의 진출이 호남일대를 휩쓸었습니다.
여기에 또 청일전쟁까지 터지어 하루아침에 8도 강산이 전쟁터로 화하는 실태가 연이어 빚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이긴 것은 일본이고 더욱 비참해진 것은 조선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청나라에 의거하던 국왕과 민비일파는 이번에는 러시아제국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오래전부터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던 일제는 친로세력을 일거에 제거하고 저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민비를 살해할 꿍꿍이를 꾸미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는 이 사건조작을 위해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과업을 주었습니다. 미우라 놈은 왕궁을 습격하려고 일본 ‘수비대’의 경찰, 깡패, 불량배들을 모아 들였습니다.
1895년(을미) 8월 20일, 미우라는 깊은 밤 불의에 대궐로 쳐들어가 미리부터 준비했던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뛰어넘어 왕궁 안에 기어들었으며 호위대장 홍계훈을 칼로 찔러죽이고 국왕과 왕비의 침실을 포위했습니다.
일본깡패들은 저들이 목적한 민비를 찾기 위해 국왕인 고종을 협박했고 다른 한 패는 옥호루로 달려갔습니다. 놈들은 맞받아 나오는 궁내무대신인 이경식을 총으로 쏴 눕히고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면서 민비를 찾아 날뛰었습니다. 방구석에 궁녀들과 함께 숨어서 기회를 엿보며 떨고있던 민비와 시녀들을 드디어 찾아낸 깡패들은 즉시 긴 칼로 내리쳤습니다. 왜놈들은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민비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달아 태워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체는 경희루 연못가에 개처럼 던져버렸습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일제 놈들은 그래도 주권국가 국왕의 처인 민비를 야만적으로 학살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우리인민들은 도처에서 들고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일제는 우리인민의 분노를 삭이고 내외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미우라 놈을 비롯한 48명의 불한당 무리들을 일본에 끌어다 ‘재판’이라는 ‘연극’을 연출했으며 ‘증거불충분’이란 구실을 붙여 내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제야말로 우리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야수적인 침략자임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조선역사에 ‘대원군’과 ‘민비’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대죄악을 범한 이조 마지막 왕실의 인물들은 비참한 운명을 마감 짓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정권에 대한 야심과 질투의 산물이었습니다.
언제나 제 나라 인민을 믿고 그 인민에 의거하여 옳은 정사를 펴려 한 것이 아니라 외세를 등에 업고 인민은 헌 신짝처럼 여겼으니 응당한 징벌을 받은 것입니다 외세에 의존하면 반드시 그 외세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공인된 진리입니다. 실컷 부려먹고 죽이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명성황후 민비
특히 민비의 사진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로 있는데, 민비가 생전에 사진 찍는 것을 원하지 않아 사진의 진위를 가름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 화가가 그린 고종황제와 대원군 그리고 민비를 한 장에 그린 것이 있어서 거기에서 따 온 것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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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인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백두청년
첫댓글 두 년놈들이...나라와 백성은 돌보지 않고 제년놈들 사리사욕에 매진하였기에....
다들 뒈져도 큰 아쉬움은 없다...특히나 민비...요즘 연예계나 이런쪽에서...
명성황후 하면서 이름부터 복권시키는것을 보면...속이 뒤집어 진다...
기본 역사나 좀 알고...백성들의 입장을 대입시켜 보면...명성황후란 타이틀이 가당치나한가....ㅉㅉㅉ
개 껍질이
코끼리 흉내...
자명님이 유식한 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구한의 역사를 이렇게 자세히
알려주시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저는 그냥 퍼오기만했습니다
느을 건안하십시오_()_
()
흥선 이하응은 서자 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까지는 향광이랑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그런데 이사람은 술주정이 심했다.
기회를 만나 왕위에 오르면서 많은 활약은 있었지만
쇄국정책으로 백성들 원성도 많았고,
결국은 며느리 민 000 에게 쫓겨났나.
며느리는 실권을 잡은후 친민세력을 늘려 나갔다
민비 라는 단어는 조선에서 아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일재 잔유인것이고
조선 국법에 따르면 왕비는 호칭을 따로 붙이지 않았으며,
사후에 그 존재를 남기기 위하여
폐비가 되면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 하였다.
내가 명성황후라 하면 난 분명 하처님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죽을 것이다.
역사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향광복음 제 1957절 1월4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