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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58,1-9ㄴ
복 음 : 마태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네덜란드의 호로닝언 대학교의 폰터스 린더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몹시 어려운 문제를 주고서,
A그룹에는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사진을,
B그룹에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에 관한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어떤 그룹의 점수가 더 좋았을까요?
무관심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본 그룹은 점수가 낮았고
문제를 푸는 데 들인 시간도 매우 짧았습니다.
무관심한 모습의 사진처럼, 무성의하게 응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열심히 하는 사람의 사진을 본 사람은
열심히 문제를 오랫동안 풀었고 점수도 훨씬 높았습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의지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만약 내 주변에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 모습을 따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의지를 세워 열정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주변의 무기력함이 가득했지만, 나를 통해 그 무기력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녀가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자주 만납니다.
꿈이 없는 것 같다고, 도대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보기만 하면 답답해서 미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앞선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보다도 자기가 먼저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열정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상대만 열정적으로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합니다.
신앙인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열정은 위선과는 다릅니다.
즉,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열정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열정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거룩한 분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하십니다.
이런 열정은 하느님께서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열정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열정, 자기를 드러내는 열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숨은 것도 보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참된 열정을 보시고 높이 평가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 예언자께서 하셨던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이사 58,8)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동창 신부님 중에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저와 비슷한데 시간이 지나면
신부님과 저는 실력에서 차이가 많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스키를 배울 때입니다.
저는 내려오는 법과 넘어지는 법을 배우고 바로 리프트를 탔습니다.
몇 번 넘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곧잘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지만 저는 늘 그 정도의 실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님은 강사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매번 스키장에 갈 때마다 레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비슷했는데 나중에 보니
신부님은 최고급 코스, 최고 난이도 코스에서 쉽게 내려왔습니다.
저는 스노보드는 엄두도 못 내는데 신부님은 그것도 유연하게 타고 있습니다.
역시 레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도 비슷합니다. 신학생 때 동료들의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늘 B그룹에서 테니스를 쳤습니다. 신부님은 테니스도 레슨을 정확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교구 사제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였습니다.
독학으로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운동은 레슨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인도 잘 모르면서 남에게 충고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구글 검색이 있어서 웬만한 선무당들은 명함을 내밀기 어렵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잘못된 상식을 믿고 따라 했다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나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그냥 얻어지는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무당처럼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단식의 의미를 모르면서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미를 모르면서 율법을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봉헌의 의미를 모르면서 과부의 헌금을 조롱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안에는 썩고 있으면서 겉만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스키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면서 스키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치려 했던 저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저들의 행동은 배우지 마라.”
오늘 독서는 단식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율법과 규정에 따라서 지켜야 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단식한다고 하면서 일꾼들을 다그치거나,
이웃과 다투고 못된 주먹질을 한다면 그것은 참된 단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見月望指”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을 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일을 잊는 다거나
본질을 잊고 곁가지에 한눈을 파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 쓰인 금액, 헌금의 액수, 신자 수 등을 먼저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활동입니다.
본당의 예산은 찬조와 나눔을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지역의 현안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회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이라는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는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않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단식을 앞세우던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않는 예수님께 따졌고,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62,4-5; 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 에페 5,23-32).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단식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단식해야 할 이유’와 함께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임을 계시합니다.
곧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단식으로, 결국 단식은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곧 사랑으로 행하는 단식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단식,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언젠가 깊은 속병이 들어, 본의 아니게 한 일주일 강제로 단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이틀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는데, 사흘이 지나가니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더군요.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식사 시간보다는 야식(夜食) 시간이었습니다.
밤 9시 반만 되면, 이 병실 저 병실 분산되어 있던,
약간은 ‘날리리성’ 분위기가 풍기는 환자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듯, 의료진 몰래 둘러앉은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통닭이며 족발을 꺼내놓고 낄낄대며 뜯어대곤 했는데,
그 냄새하며, 소리하며,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느꼈던 철저한 소외감과 고독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발적 단식이라는 것,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본인 스스로 억제시킨다는 것,
보통 의지로 해내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위대한 인물들은 대체로 단식을 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도 장장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라든지 대 예언자 엘리야도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단식과 관련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밥 먹는 것 이상으로 단식을 자주 실시했습니다.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일주일에 두 번 꼬박꼬박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예수님께서는 부차적인 측면, 비본질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시고,
곧바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서론을 생략하시고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랑이신데,
그 신랑이 지금 신부를 선정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이름은 ‘부름 받고 선정된 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끌레시아(Eclesia, 교회)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교회를 신부로 맞이하시고,
이제 신부와 함께 혼인 잔치를 시작하시는데,
제자들과 신자들은 이 장엄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 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 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하신다.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즉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의 양식에 굶주리며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신랑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 또한 ‘하느님께 이보다 더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자위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오늘의 모든 위선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 필사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무수히 들어온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고 법조문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단식은 절제를, 절제는 겸손을 준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순절에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절제를 말하며 절제는 겸손을 가져온다.
斷食(fasting)은 본래 일정기간 동안
종교⋅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 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長生不死 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Ramadand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 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르 1,6; 마태 11,19; 루카 18,12)
따라서 세레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행한 금욕생활과 단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것이며, 도래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위한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 잔치에서의 신랑에 비유하신다.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와서 슬퍼하거나
아무것도 먹지 않기를 ᄇᆞ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에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예수께도 단식은 있으며,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시기에 행하는 단식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며,
신랑을 잃게 되는 그때는 더욱더 큰 슬픔과 단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 금요일에 벌써 성금요일 십자가상 한 장면이 번득 눈앞을 스치는 듯하다.
단식이 자선과 기도와 더불어 사순시기의 중요한 수행덕목이긴 하나
‘단식’이라는 수행 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분명히 ;음식섭취‘를 중단하거나 조절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깥이 물자가 풍요로와 먹는 일을 樂으로 삼고,
단식을 몸매 관리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시대에 단식의 정신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단식의 정신은 절제이다.
節制는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제어하는 일이 아닌가?
절제는 9가지 성령의 열매(갈라 5,22) 중의 하나로서
어쩌면 단식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방치하는 무절제함의 피해는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부분에 드러나고 있다.
그중에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참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인간 세상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따라서 창조 질서와 생명을 보전하는 일과 현대 물질문명의 편리함을 절제로서 관리하는 일은
비단 사순시기뿐 아니라 日常의 덕목으로 提高 되어야 할 일이다.
이는 곧 신앙인 모두가 부여받은 사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제된‘ 삶을 사는 것이다.
1991년에 개최된 《창조질서 보존 및 완성을 위한 공청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오늘날 만연된 자연 파괴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에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만과 탐욕의 감성적 욕구를 제어하는 데는 겸손함이 약이다.
겸손은 절제의 정신으로 닦이고, 절제는 식탐을 조절하는 수행으로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니,
단식 또한 겸손의 시작이요, 생명 사랑의 첫걸음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