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어버이날 법정스님의 불효…이야기
* * 어 머 님 * * - 법정스님-
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 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 나와 출세 간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나는 집을 나 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 길을 빠져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 어 시골에 있는 친구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 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 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내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 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 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님이 돌아 가 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친구로부터 전해 들 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외동 손자인 나
를 한번 보고 눈을 감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불전에 향을 살라
명복을 빌면서 나는 중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린시절을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
던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덕이다.
내게 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할머니의 팔 베개 위에서 소금 장수를 비롯한 옛날이야 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지만 실컷 듣고 나서도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밑천이 다 됐음인 지 긴 이야기 해주랴,짧은 이야기 해주랴고 물었다.
긴 이야기라고 하면 "긴긴 간지때" 로 끝을 냈다.간지 때란 바지랑 대의 호남 사투리다
그러면 짧은 이야기하고 더 졸라대면 짧은
담뱃대"로 막을 내렸다.
독자인 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어린시
절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강아 지처럼 졸졸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지 선뜻 나서서 기꺼이 해드렸다.
일제 말엽 담배가 아주 귀할때 초등학생인 나는 혼자서 10리도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 담배를 구해다 드린 일도 있다.
내가 여덟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 니를 따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가게에서는 덤으로 경품을 뽑도록 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뽑은 경품은 원고지 한묶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발 시계도 탈 수 있었는데 한묶음의 종이를 들고 아쉬워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고지 칸을 메꾸는 일에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성은 김해 김씨이고 이름은 금옥
고향은 부산초량,부산에 처음가서 초량을 지나갈 때 그곳이 아주 정답게 여겨졌다.
지금 내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소재는 할머니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 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낳아 길러주신 우 리 어머니는 내가 그리는 어머니의 상 즉
모성이 수호천사처럼 늘 나를 받쳐 주고 있 다.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사람의 교사 에 견줄만 하다는데 지당한 말씀이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 까지에는 그 그늘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겨 다녔다는 고사도 어머니의 슬기로움을 말 해 주고 있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시었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중인 내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 사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 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며 내 손에 꼬깃꼬깃 접혀진 돈을 쥐어 주었다.
제멋대로 큰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 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
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사에 어머니의 이름 으로 시주를 했다
두번 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 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 뵈었다.동생의 직장이 대전으로 옮겼 기 때문이다.그 때는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 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 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 번 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 고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드렸다.
혼자 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 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 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 두고 생각케 했다.
어느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 절은 혼자서도 결제(승가의안거제도) 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 에게 부탁하여 나 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 다
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흘러 내렸다.
나는 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 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
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 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 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 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늙어가면서 문득 문득 생각나는 어머니 라
는 단어는 한없이 기대고 한없이 불러보고 싶은 단어입니다.
이제 어디서 불러 볼까요?
~~5월 어버이 날에 즈음하여~~
카페 게시글
♥목탁소리
어머님 ㅡ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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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머니.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찡해옵니다
3년전 4월초팔일 부처님 오신날 102살에 나이로 세상을 떠나솃지요
70이 넘어도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내일이 어버이 날이네요
더 그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