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愛慕)
愛情何事此凄切(애정하사차처절)-사랑이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처절하게
死也無懼思念吗(사야무구사념마)-죽음도 두려움 없이 그리워하는가
一女心中定位人(일여심중정위인)-한 여인의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사람
一女胸載何名吗(일여흉재하명마)-한 여자를 가슴에 담은 그 이름은 무엇인가
刻骨愛字無抹啊(각골애자무말아)-뼈속깊이 새겨진 사랑 지울 수 없구나
漢江枯竭北漢平(한강고갈북한평)-한강물이 마르고 북한산이 평지가 되어도
深愛約束不忘也(심애약속불망야)-사랑하는 굳은 약속 잊지 않으리
月下老人誓死後(월하노인서사후)-죽어서도 월하노인에게 약속하리다 !
농월(弄月)
영영 이루지 못한 백석과 김영환 죽음으로 바꾼 사랑 !
필자가 사는 이곳 강북구 삼양동에서 신설동 방향으로 경전철로 5번째 전철역에
“한성대입구역”이 있다.
또 4호선을 타고 당고개 방향으로 “한성대입구역”을 만난다.
6번 출구로 나와서 성북초등하교를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문화재급 고택(古宅)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길상사(吉祥寺), 심우장(尋牛莊),
이태준(李泰俊) 고택(古宅) 수연산방(壽硯山房),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옛집,
고종의 아들 의친왕이 살던 별궁의 정원 성락원(城樂園),
대림산업 회장을 지낸 이재준(李載濬) 고택(古宅)등
조지훈(趙芝薰), 한용운(韓龍雲), 김환기(金煥基) 등 옛 문화예술인들의 향기(香氣)가
보존돼 있는 곳이다.
이중에서 필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길상사(吉祥寺)”다.
세월은 감정(感情)이 없어
“길상사(吉祥寺)”에도 가을 빛이 드리우고 있다.
성북동(城北洞)이란 동이름은 글자대로 서울 도성(都城)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일제시대와 해방전후의 많은 많은 명사(名士)들이 살았던 고택(古宅)들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북동 10만 7천여평에 이르는 넓은 땅이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 소유였다고 한다.
그의 소유가 된 이유는 동작동 약 3만 6천평의 신용호 소유의 땅을 국립묘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수용하면서 대신 미개발된 성북동 땅을 준 것이라 한다.
청와대 뒤에는 숙정문(肅靖門)이 있다.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으로 서울 4대문의
하나다.
숙정문(肅靖門)을 빠져 나와 잠깐 걸으면 바로 “삼청각(三淸閣)”이 나온다.
삼청각(三淸閣)은 한국요정의 거물(巨物)이다.
삼청각은 70년대 고위급 끗빨좋은 정재계 인사들이 이용하던 정치 무대였다.
이곳 삼청각에서 약 2km쯤 서쪽에 고급요정 “대원각(大圓閣 현 길상사)”이 있다.
창의문(彰義門)근처 오진암(梧珍庵)과 더불어 1970년대 서울 3대 요정(料亭)이었다.
길상사(吉祥寺) 정문을 들어가면 사찰(寺刹)의 간판은 달았지만
왠지 이곳은 다른 보통 사찰과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길상사(吉祥寺)는 1997년 길상사(吉祥寺) 절로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60, 70년대 요정문화(料亭文化)를 대표하던 대원각(大圓閣)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찰(寺刹)은 속세(俗世)에서 부처의 세계인 절로 들어가는 첫 건물인
일주문(一柱門 不二門)을 지나 천왕문(天王門또는 금강문)을 거쳐 본당인
대웅전(大雄殿)에 이르지만,
길상사(吉祥寺)는 일주문(一柱門) 역할을 해야 할 곳에 마치 궁궐의 정문처럼,
마치 경복궁의 광화문처럼,
2층 팔작지붕 형태의 대문(大門) 건물이 있다.
이렇듯 보통의 사찰의 건물과는 많이 다르다.
길상사(吉祥寺) 경내(境內)에 들어가면 부처님의 설법전(說法殿) 앞에 마치
성모마리아를 연상케 하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있다.
절에서 보는 관음상(觀音像)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또한 이것을 만든 조각가는 불교도가 아닌 천주교신자였다고 한다.
천주교 눈으로 본 불교(佛敎)의 관음상(觀音像)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길상사(吉祥寺)가 처음 절문을 여는 날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했다고 한다.
그 다음은 길상사(吉祥寺)의 중심인 건물인 극락전(極樂殿)이다.
극락전(極樂殿)의 주불(主佛)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서방정토(西方淨土)인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머물면서 불법(不法)을 펴 중생(衆生)을
구제하는 부처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사랑과 관련이 있는 부처다.
살아서 사랑을 못 이룬 연인(戀人)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힘을 빌어 이루지 못한
사랑의 모든 한(恨)을 내려놓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이르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에서 아미타불을 모신다고 전해진다.
마치 길상사(吉祥寺)의 원주인이었던 한 여인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이렇게 흥미로운 길상사(吉祥寺)는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필자는 일찍이 대원각(大圓閣)→길상사(吉祥寺)에 관심이 있어 길상사에 관한
자료를 모아 왔다.
이곳 길상사의 원주인은 김영한(1916~1999)이라는 여성이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김영한은 가정 형편상 15세에 결혼하였지만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어 청상과부가 된
여인이다.
살기에 급급한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 은 진향(眞香).
※권번(券番)-노래와 춤(歌舞)을 가르쳐 기생(妓生)을 양성(養成)하는 곳
조선 권번(券番)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代父)였던 하규일([河圭一)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하규일([河圭一)-조선시대 아악부 가곡강사로, “악인필휴(樂人必携)”를 지어 가곡의
전통을 전수한 국악사·관리.
시서화(詩書畵)에 재능이 있던 김영한은 곧 최고의 기생이 되었다.
김영한의 재능을 귀하게 본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20세가 되는 해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후 자신을 지원해주던 스승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자
함흥으로 돌아와 그 스승을 옥바라지를 결심하지만,
기생 진향(眞香)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하면서,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白石)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어느날 백석(白石)은 진향(김영한)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唐詩選集)” 을 뒤적이다가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 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주고 3년간 동거를 하였다.
※자야(子夜)-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를 말한다.
※자야오가(子夜吳歌)에 대하여
“악부고제요해(樂府古題要解)”에 설명하기를
“자야가(子夜歌)는 동진(東晋)의 자야(子夜)라는 여자가 지은 노래로 그 소리가
애조(哀調)를 띠었다. 이 곡에 뒷 사람들이 사시행락(四時行樂 사계절놀이)에 관한
가사를 붙였기 때문에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라 한다.
이백(李伯)의 “자야오가(子夜吳歌)”는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총 4수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이 시는 “추가(秋歌가을노래)”에 해당하는 시(詩)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 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가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子夜)” 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백석은 어느날 “바다” 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시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 고 말했다고 한다.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1937년, 여성>》
백석(白石)의 아버지는 둘을 떼어 놓고 아들을 다른 여자와 강제 결혼시켰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혼인 첫날 밤 도망쳐 다시 김영한과 동거했다.
하지만 김영한은 젊은 자기 남자 백석(白石)의 앞날을 걱정하며 헤어지자고 했다.
백석(白石)은 오히려 외국으로 떠나자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白石)의 앞날을 더 걱정한 김영한은 아예 백석(白石)에게서
떠나 종적을 감춰버렸다.
비탄(悲嘆)에 젖은 백석은 홀로 러시아로 떠났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영영 만나지 못했다.
이후 해방이 되어 백석(白石)은 러시아에서 북(北)으로 돌아왔다.
그 새 김영한은 서울에 올라와 요정(料亭)을 열어서 큰돈을 벌었다.
이후 김영한은 “대원각(大圓閣)”을 열어 박정희정권시절 요정정치시대를 펼쳤던 것이다.
이곳 길상사가 그 대원각(大圓閣)이다.
김영한은 살아생전 백석(白石)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그 날은 곡기(穀氣)를 끊고
방안에서 불경(佛經)을 외우며 백석(白石)을 기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2억 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여 문학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맺힌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잇고자 김영한은 법정스님을 찾아
대원각을 바친 것이다.
하지만 무소유의 삶을 살아오신 법정스님은 대원각(大圓閣)을 받지 않았다.
결국 법정스님이 머무는 암자(庵子)의 본사(本寺)인 송광사(松廣寺)에 기증되었다.
1997년 당시 시가로 1천억 원이 넘는 규모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싯가로 성북동 대원각은 얼마나 가격이 되겠는가?
10배를 계산해도 1조원은 될 것이다.
1조원을 아무 조건없이 절만 지어 달라고 한 여자 !
하지만 김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白石)의 시(詩)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는 말로
김영한은 백석(白石)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감정을 토로했다.
“길상사(吉祥寺)” 절 이름은 법정스님이 김영한에게 선물한
“길상화(吉祥華) 보살(菩薩)”이라는 법명(法名)에서 따온 것이다.
1997년 겨울 12월 요정(料亭) 대원각(大圓閣)이 사찰(寺刹) 길상사(吉祥寺)로
이름이 바꾸는 날 김영한은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짧은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佛敎)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남자들 방에 들어갈 때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부처님의 종(梵鍾)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곡절 많은 인생의 슬픔을 넘어선 원대(遠大)한 비원(悲願)----
그렇게 김영한 자신의 모든 물질을 보시(布施)하고 2년 뒤 그는 육신(肉身)의 옷을
벗고 이세상을 떠났다.
이승을 떠나기 하루 전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吉祥軒)”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다.
다비(茶毘) 후 김영한 유골(遺骨)은 유언(遺言)에 따라 첫눈이 길상사에 내리던날
길상헌(吉祥軒)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길상사(吉祥寺)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
김영한의 뜻을 기리고 있다.
필자는 이글을 쓰면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속에서 한 남자와의 사랑을 위해
목숨과 재물을 초개(草芥)같이 버린 숭고함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생각에
마음만 멍 할 뿐이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 가슴을 허탈하게 한다.
Is it because of autumn !
가을 때문일까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