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어떤분이 미국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글올려놓은걸 보앗습니다. 미국이 범죄를 저지를때마다 저도 분노하고 화도납니다. 하지만 요즘 북한을 너무 옹호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거 아시죠? 북한은 우리의 우방아닙니다. 아무리 북한이랑 관계가 완화되엇어도 절대 우방은 아닙니다. 적이라는걸 명심하십시오.
미국이 많은 죄를 저질렀지만 여러분들은 북한이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많이 줬다는것도 알아두셔야합니다. 지금부터 북한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글을 올리겟습니다.
북한의 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월 21일밤 10시경 북한군 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대통령관저인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비상근무중이던 경찰 검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4대의 시내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날밤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던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하여 7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북한 무장공비들에의해 살해 되었다.
군·경 수색대는 2월 3일까지 31명의 공비중 1명을 생포하였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28명을 사살하였다. 생포된 공비 김신조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들의 목적은 1)대통령관저 폭파와 요인 암살 2)주한 미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살해 3)육군본부 폭파와 고급지휘관 살해 4)서울교도소 폭파 5)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후 북한간첩 대동 월북 등이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력 강화와 250만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방위산업공장의 설립을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다.또한 미국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대통령 특사가 2.11 방한하여 양국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5.27∼28간 워싱턴에서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의가 개최되어 연례화되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파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군내에 공비전담 특수부대를 편성했고 전방에는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구축하였다. 또한 정부정책기조를 경제개발과 동시에 국방을 강화하는 "싸우면서 건설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북한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게 하였다.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1월3일 새벽 주민들을 모아놓고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으로 위협하였다.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등 만행을 자행하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은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소사 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승복 (당시 10세) 어린이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하여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군경의 출동을 가능케하였다.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하였다.이 작전에서 우리측도 군인·경찰과 일반인 등 20여명이 사망하는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북한이 아무리 잔악한 공비를 침투시켜도 이를 격멸할 수 있다는 튼튼한 안보태세를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활동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이며,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이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8월18일 북한은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에서 나무가지치기 작업을하던 UN군 소속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는 국제적 만행을 자행하였다. 8월 18일 상오 10시 45분경 UN군 11명 (한국군 5명,미군 6명)이 한국노무자 5명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 3초소 근처에 있는 미류나무 가지를 치고 있을 때 북한군 30여명이 접근하여 가지를 치지 말라며 시비를 걸었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른 것임을 설명하던 미군장교의 뺨을 때리면서 더 이상 자르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미군장교가 항의하자 북한군은 초소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30여명의 증원부대와 함께 폭력을 행사, 도끼로 미군 보니파스 대위와 발레트 중위를 내리쳐서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고 9명의 한·미군 장병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한편, UN군 트럭 3대와 초소를 모두 파괴하였다.
사건 발생후 미국 포드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모든 책임을 북한이 져야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주한 미군사령부는 데프콘 3 (전투준비태세) 명령을 내렸으며,또한 미국방부는 이날 밤 주한미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한 긴급조치로 오끼나와 등지의 전폭기 대대 및 해병대를 한국에 급파하고 항공모함 레인저호와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이동시키는 등 강경한 대응태세를 취하였다.
21일 새벽 7시 UN군은 데프콘 2(전쟁돌입상태)하에서 문제의 미류나무 절단작업을 단행하였다. 한·미양국의 강경한 태세에 김일성은 인민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21일 하오 스틸웰 UN군 사령관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KAL기 폭파사건
1987년 11월 28일 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발했다.
이 여객기는 11월 29일 14시 1분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 방콕공항에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비행중 이상 없다"는 보고를 무선으로 보낸 것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이 여객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등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 잔해가 태국 해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태국 내무부가 발표하였고,30일 오후 858기의 추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하치야 신이치'·'하치야 마유미'라는 여권을 가진 남녀로 바그다드에서 탑승한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으며,이중 마유미의 여권은 위조여권임이 바레인(탈출로 중간기착지)공항에서 밝혀졌다.
이들은 바레인에서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 위조여권 적발로 체포되자 담배 속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하여 남자는 숨지고 여자는 중태에 빠졌다.
한국으로 신병이 넘겨진 '마유미'여인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며 중국인행세를 해오다가 12월23일 범행을 자백했는데 본명이 김현희(당시 26세)이며 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으로서 음독자살한 김승일(당시 70세)과 함께 "88 서울올림픽 개최방해를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명령을 받고 기내 좌석선반에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려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1990.3.27)되었으나 전향의사 표명과 김정일의 도구로써 이용된 점이 정상참작되어 대통령 특별사면(1990.4.12)으로 석방되었다.
북한의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북한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방문중이던 한국 전두환대통령 및 수행원들의 아웅산 국립묘소 참배를 이용, 암살하기 위해 사전에 이 묘소건물 천정에 설치한 원격조종폭탄을 폭발시켜 한국의 부총리·장관등 수행원 17명을 순국케하고 14명을 부상시키는 천인공노할 테러를 감행했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대위, 신기철대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4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양곤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국외추방을 단행했다. 그뒤 12월 9일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 8특별 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하였으며, 미국·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11월13일 미국 레이건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최전방을 이례적으로 시찰하는 등 한·미 공동 자유수호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좌초된 선박이 북한의 소형 잠수함으로 확인됨에 따라 군인·경찰· 예비군은 합동으로 무장공비에 대한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수색·소탕작전중 잠수함과 도주로 주변에서 중화기인 대전차 로켓을 비롯하여 M-16·AK소총·정찰용지도 등 유류품 367종 4,380점을 노획하고 조타수 이광수(31세,상위)를 생포하였으며,동승했던 정찰조원들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잠수함 좌초책임을 물어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조원 11명의 사체를 발견하였다.도주한 잔당을 추적한 끝에 정찰조장·잠수함장 등 13명을 발견하여 교전끝에 사살하였으나 아군 11명,경찰·예비군 2명, 민간인 4명이 피살되는 인명희생을 당했다.
생포된 이광수에 의하면, 이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중 하나인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 22전대 소속으로 94년 12월 함남 신포에서 건조된 300톤급 잠수함을 타고 총 26명이 침투하여 강릉비행장· 영동발전소등을 정밀 촬영하였는데, 침투 임무는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의 군사시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강원도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석하는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은 북한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령에 따라 남침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가기 위해 사전정찰 및 한국 내정교란을 목적으로 자행한 명백한 군사침략행위였다.
또한 98년 6월22일 오후 4시 33분쯤 강원도 속초시 동쪽 11.5마일(18Km)지점 우리 영해에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 1척이 어선이 뿌려놓은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해군 함정에 의해 6월23일 새벽 동해안으로 예인됐다.
이 잠수정에서는 승조원과 공작원 등으로 추정되는 9구의 시신이 자폭한채 발견됐다.
중앙합동신문조의 수사결과 사망자 가운데 4명은 머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나머지는 난사당한 흔적이 발견돼 공작조가 승조원들을 죽이고 권총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발견된 잠수정은 레이더 탐지가 어렵고 잠수 및 발진속도가 빨라 북한이 정찰 및 침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70톤 규모로 길이 20m , 폭 3.1m인 유고급 잠수정이다.
북한의 잠수정이 침투한 것은 96년9월 18일 강릉 무장간첩 침투사건 이후 처음이다.
결국 북한의 잠수정 발견은 북한이 대외적으로는 대화 제스처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전쟁준비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대북 경수로건설사업 등 남북간의 경제협력은 계속되던 상황이었다.
북한은 53년 이후 휴전선에서의 도발, 무장공비 침투 등을 통해 남한을 교란시켰고, 70년 이후에만도 309차례, 90년 이후에만도 15차례나 해상과 육상을 통해 무장간첩을 침투시켰다.
이로써 또다시 '대화' 뒤의 '도발'이라는 북한의 두얼굴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북한의 무장간첩침투 주요일지
북한은 최고 정책목표를 한국정부 전복 및 공산화에 두고 이의 실현을 위해 무장간첩을 50년간 끊임없이침투시키고 있는데 간첩침투 건수는 지난 1968년 이후에만도 총 322건에 이른다.1968년 이후 2명 이상의 무장간첩 침투사례는 다음과같다.
68.1.21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서울 침투 (29명 사살,1명 생포,1명 자폭)
68.10.30 무장공비 120명 울진 삼척에 침투(113명 사살,7명 생포)
69.6.12 흑산도에 간첩선 침투 (3명 사살)
70.4.8 경기도 금촌에 북한공작원 침투 (3명 사살)
75.9.11 전북 고창에 무장공비 2명 침투 (1명 사살)
76.6.19 중동부전선에 무장공비 침투 (3명 사살)
79.10.11 동부전선 비무장지대에 무장간첩 3명 침투 (1명 사살)
80.3.23 한강하구에 3인조 공비 수중침투 (전원 사살)
80.11.3 전남 횡간도에 무장간첩 침투 (3명 사살)
81.3.27 강원도 금화에 3인조 무장간첩 침투 (1명 사살)
81.6.21 충남 서산에서 무장간첩선 격침 (9명 사살,1명 생포)
82.5.15 동해안에 무장공비 2인조 출몰 (1명 사살)
83.6.19 임진강에 3인조 무장공비 침투 (전원 사살)
83.8.5 경북 경주앞바다에 출몰한 간첩선 격침 (4명 사살)
83.12.3 부산 다대포에서 남파간첩 내려놓고 귀환하려던 간첩선 격침 (1명 사살 2명 생포)
85.10.20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 출현한 간첩선 격침 (5명 사살)
90. 2월 하순 강화도 하일리에 고정간첩 김낙중 1차 침투(6명)
90.10월 하순 강화도 하일리에 고정간첩 김낙중 2차 침투(6명)
91.10월 하순 강화도 하일리에 고정간첩 김낙중 3차 침투(6명)
92.2.10 서부전선 백학산 동북방 2.5km에 공비 3명 침투
92.4.14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공비 3명 침투
92.5.22 철원 남방 8백m에 공비침투 (3명 사살)
92.11.3 서부전선 전방 7백m에 공비 3명 침투
93.9.4 연천북방 DMZ내 공비 3명 침투
93.10.4 강원도 명주군 주모진 동남방 3km에 공비 3명 침투
93.11.30 강화 교동도 빈장포 해안에 공비 3명 침투
94.3.6 장단반도 임진강에 공비 3명 침투
95.10.17 임진강에 공비 3명 침투
95.10.24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사 뒷산 남파간첩 호송을 위한 무장간첩 2명 출현 (1명 사살,1명 생포)
96.9.18 강릉에 잠수함 탑승 무장간첩 26명 침투(13명 사살,11명 자폭,1명 생포,1명 행방불명)
98.6.22 속초 앞바다 북한 유고급 잠수정 1척 침투 (9명 자폭)
98.7.12 강원도 동해시 잠수복 차림의 무장공비 침투
북한의 남침땅굴
1971년 9월25일 김일성은 당 대남공작총책 김중린과 인민군 총참모장 오진우에게 "남조선을 조속히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속전속결 전법을 도입,기습남침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하며 특수공사를 해서라도 남침땅굴의 굴착작업을 완료하라"고 지시하면서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폭탄보다 효과적이다"고 강조하였다.
북한은 이 지시에 따라 최신형 굴착기를 스웨덴 등지에서 비밀리에 도입,「특수공사」로 위장하면서 1972년 5월부터 남침용 땅굴작업을 시작하였고 1974년 2월초에는 오진우·유장식 등 군·당 고위층들이독려차 현장을 방문하는등 공사 조기완료를 위해 온힘을 쏟아부었다.
제1남침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고랑포 동북방 8㎞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당시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측에 땅굴현장을 공동조사하자고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면서 "조작된 것이다",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억지선전만 계속하였다.
그러나 땅굴속에서 발견된 소련제 다이나마이트·북한제 전화기·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작업진척 일정을 기록한 흔적 등이 북한에서파내려온 땅굴임을 분명히 입증해 주었다.
제2남침땅굴은 1975년 3월19일에 철원북방 13km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북한은 제2 땅굴에 대해서도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극구 부인하였으나 당시 귀순한 북한 노동당연락부 소속 김부성씨가 자신이 직접 측량을 했고 "콤푸레샤"요원으로 땅굴작업에 동원되었다고 증언함으로써 북한의 선전이 거짓임을 입증하였다.
제3남침땅굴은 김부성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적극적이고 과학적인 탐사를 벌인끝에 1978년 10월17일 판문점 남방 4km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땅굴은 그위치가 서울에서 불과 44km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제1·2 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제4남침땅굴은 1990년 3월3일 양구 동북방 26km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북한이 중·서부전선 뿐 아니라 전선전역에 걸쳐 남침 땅굴을 굴착해 놓았음이 입증되었다. 북한은 이번에도 1·2·3 땅굴 발견시와 마찬가지로 이를 한국이 파놓은 북침용 땅굴이라고 모략선전하면서 유엔사측의 공동조사단 구성제의(90.3.5) 를 묵살하였으나 폭약장치용 구멍의 방향이 남측으로 향해 있고 배수로 경사가 남에서 북으로 낮게 되어 있는등 북한이 남침용으로 파놓은 땅굴임이입증되었다.
북한이 전선전역에 걸쳐 이처럼 많은 땅굴을 파놓은 것은 유사시 경보병 및 특수부대를 대규모로 침투시켜 대한민국의 주력부대를 무력화시키고 전쟁을 단기에 끝내겠다는 목적 뿐 아니라 우리사회가 혼란해질때 무장게릴라들을 남파시키는 침투로로 활용하기 위한 것임이분명하다
북한의 NLL침범
북한 경비정 6척이 99년 6월7일 꽃게잡이 어선을 앞세우고 연평도 서방 10km 지점에서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 영해를 침범해 들어와 한국 해군의 경고를 무시하고 침입과 퇴각을 반복하면서 9일 동안이나 버티다가 이를 '충돌식 밀어내기'전술로 저지하는 한국함정에 북한경비정이 선제사격을 가함으로써 결국 남북 함정간의 치열한 포격전(6.15)으로 발전하였다.
이 교전에서 북한해군은 어뢰정 1척이 침몰하고 경비정 4척이 대파되었으며 북한군 20-30여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은 반면에 한국해군은 경비정 몇 척이 일부 파손되고 해군 7명이 부상당하는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이 충돌로 망신을 당한 북한해군이 북쪽으로 퇴각하여 추가도발을 해오지 않음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으나 이번 북한의 북방한계선 무단침범은 '정전협정'의 정신과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한 구역을 인정'키로 한 '남북기본합의서'(1992년)의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한 범법행위이다. .
북한이 이 사건을 일으킨 목적으로 대북포용정책하의 한국정부의 국방의지 시험, 북방한계선을 무시함으로써 정전협정체제 무력화, 향후 남북협상에서 실익을 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 선점, 유고 패전에 따른 위축된 북한내부 결속을 위한 긴장 조성용, 꽃게.새우.조기 등 고급어종이 풍부한 서해 5도 인근 황금어장 확보 등 다목적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됐다. .
그러나 북한이 우리해군과의 교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선군정치'와 '필승불패'를 선전해온 북한 武力이 허구에 불과함을 스스로 노출시켰으나, 한국측에는 오히려 대북포용정책이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 해군의 전투력이 북한보다 한수 위에 있음을 확인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는 등 의외의 성과를 안겨주었다. .
이 교전사태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대북 비료수송선을 예정대로 북한으로 출항시켰으며 금강산 관광과 북경 차관급 회담을 계획대로 진행시킴으로써 대북포용정책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음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
첫댓글 대략 코뮌테른에서 나온 "스크롤리즘과 귀차니즘의 함수관계"란 책을 읽어보았소?
나, 그 서적 읽어보았다오! 대략 전공서적이었소... ↓햏과 시험도 보았소
↑햏 나 그시험 떨어졌소...↓아래햏은 붙었소?
↑햏은 F맞았나보오... 휘바휘바
도덕책에서 배운것-ㅂ-;;;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위에분 북한과의 일이지나간 일이라면 미국하고 있었던것도 지나간일인데..
피가 섞인 북한이 저러는건 더 나쁜짓아니오? 어찌 같은민족을 저런단 말이오.
우리의 적은 북괴요.. 북한사람과 북괴는 엄연히 다름. 글쓴이가 말하는건 북괴요... 예쁘장한 응원단은 북한사람이요. 위에 우리나라사람 욕한거나 다름없다고 한 사람은.. 젠장 고만 할라요...
허헛-_-;;무섭소이다.. 어짜피 통일이 되면 잊혀질게 아니오..-_-..우리나라사람을 욕한것이라고 말한건 죄송하오-_-;삭제하겠소=+=;
이런거 왜올리오? 우리나라가 왜 분단하게 된지나 알고 하는 소리오? 그리고 이산가족된 분들앞에서 북한사람들을 적이라고 할수있소? 당신의 할머니나 나이가 많으신 친척분들이 북쪽에 사신다고 하면 적이라고 할수있겠소? 너무 북한만 나쁘게 몰고가는거같아 한심하오.
이렇게 긴 글을 우리가 자세히 읽을것 같소!!!! 당장 요약해서 옮기시오
읽으려고 마우스에 손을 대었건만 . .도저히 읽혀지지가 않는구려 ! 요약좀 해주시구려
귀차니즘의 압박-_-;;;;; 어쨋든 우리의 소원은 통일 -_-! 우리의 적이 왜 북한이오?
나의소원은 그냥 이대로 사는것이오~ 왜 귀찬케 통일은 하우?
너무 길어서 꼬리말로 보고있소..;; 통일 정말 싫소!
요약하시오!;
↓햏이 요약해준다고 아오!!
그러니까.. 그러니까... -_- 왜 나한테 그러시오? ↓햏이 하시오!
북한 사람들은 불쌍하지만, 김정일 이나 그딴것들은 죽여야합니다. 그 새끼들은 허구헌날 전쟁준비만 하고 있으니까요.
군대가보시오...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고 배운다오...이건 헌법에도 나와있다오. "북한=대한민국의 주적"
심하게 귀차니즘이오-_-//통일의 필요성을 못느끼겠소//우리나라가 북한한테 퍼다주는 돈 아까워 죽겠소,,그 돈으로 우리나라 가난한 사람들 도왔으면 좋겠소,,
요약=북한이 겉으로는 우리랑 친한듯 하지만 사실 지네끼리는 아직도 남한을 집어 삼켜먹을라고 꼼수를 쓰고 있다.
포인트=북한은 적이다.
결론= 그러므로 결코 북한을 우방국으로 생각해서는 않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