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오 랑'
1944.04.05 生
1979.12.13. 0時 20분 戰死
(35년 8개월 8일의 삶)
출생에서 죽음까지 우리 모두는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삽니다
누구는 짧게
누구는 길게...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지만, 젊은 죽음은 우리가슴을 더 아프게 합니다.
35세 장미 무궁화
꽃으로 치면 찬란한 꽃닢이거늘 김오랑 소령의 죽음이 그 나이였습니다.
운명의 그 날 밤 그는 살고자 했더라면 살 수 있었습니다
반란군에 투항하고 협조 했더라면 살아서 별도
달고 출세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력을 잃어가는 아내의 눈이 되고 길잡이가 되어 오순도순 행복하게 천수를 누렸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러나 김오랑은 죽음을 택했습니다.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반란군에 가담한 직속
부하들의 손에 비참하게 끌려가지 않도록 소령 김오랑은 8발이 장전된 콜트45 권총 한 자루로 문앞에 쳐들어 온 반란군에 맞섰습니다.
김오랑의 권총에서 7발이 발사되고 마지막 한 발은 쏘지 못한 채 반란군들의 M16에서 난사된 총탄 6발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이 사나이는 전사했습니다.
마지막 숨을 내쉬며
김오랑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아내, 어머니, 아버지, 형들, 누나, 베트남 전우들...
35년 짧은 생의 어떤 순간들이 스쳤을까요?
'사즉생(死卽生)'이란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은
김오랑의 죽음 앞에
무례한 일입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치며, 언제나 명예와 信義 속에서 살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는 '사관생도의 길'허망한 그의 죽음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어둠에 묻혀야 했습니다.
이 책, <김오랑: 역사의 하늘에 뜬 별>이 세상에
나온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투박하게 쓰여진 이 책은 특전사 예비역 대위 김준철이 자신의 삶의 일부를 특전사 선배 김오랑에게 바치기로 결심함으로써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1966년생 김준철은 1944년생 김오랑을 생전에 본 적도 없었습니다.
무엇이 김준철로 하여금 김오랑을 추모하고 김오랑의 명예회복을 위해 그토록 집요하게 뛰어다니게 만들었는지 저는 상상만 할 뿐입니다.
2012년 10월 이 책이
처음 나온지 얼마 후
김준철은 이 책 한 권을
국회 국방위원장인 저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습니다.
이 책은 1979년12월 12일 그 날 밤 서울 중구 필동 수도경비사령부 33경비단의 일병 유승민이 겪었던, 그 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입밖에 꺼내지도 않고 망각하려 애썼던, 그 날 밤의 현장으로 저를 기어코
소환해냈습니다.
그 날, 저녁밥을 먹고 내무반을 청소하고 평소처럼 있었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리고 무장 대기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엔 영문도 몰랐으나 사색이 되어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주고 받는 말들을 주어들으며 조금씩 쿠데타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30경비단에 쿠데타 수뇌부가 다 모였고 우리 부대 지휘관인 33경비단장도 자기 혼자 거기 가있고 필동에 있는 우리는 부단장의 지휘 하에 장태완 사령관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령관이 야포단과 토우중대에게 30경비단을 겨냥한 사격준비를 지시했다느니, 필동의 33경비단과 헌병단 병력들이 사령관의 명령만 떨어지면 청와대로 쳐들어가 30경비단과 전투에 들어갈 거라느니, 별별 얘기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3경비단장이 필동으로 접근하면 사살하라"는 명령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날 밤은 수경사, 특전사 예하 부대들과 병력들이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편을 갈라 국군이 국군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추악한
하극상과 어느 줄에 서야 살아 남을지를 계산하느라 평소와 너무 다른 장교들의 당황한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야포는 발사되지 않았습니다.
새벽이 되어 사령관실에 모인 별들을 수경사 헌병단이 모두 체포되어 갔고 그 체포과정에서 저항한 장군 한 사람은 헌병이 쏜 총탄에 부상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곧 이어 중대장이 '상황 끝'이라 했습니다.
상황이 끝났다는 말은
쿠데타군이 이겼고 우리는 졌다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동이 트기 전, 잠시 눈을 붙인 우리는 아침 일찍
연병장에 다시 집합하여
9사단장에서 수경사령관이 된, 노태우 사령관의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뭔가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북악 스카이웨이 부암동 탄약고에서 가져온 탄약을 원위치 하느라 트럭을 타고 필동에서 단성사 앞길을 지나 광화문 앞을 지나는데 전방을 지켜야할 9사단 병력이 광화문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이듬해의 서울의 봄,
광주의 봄은 이렇게 어긋난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의 일들은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입니다.
12월 12일 자정이 지난 13일 0시 20분경 거여동 특전사령관실에서 김오랑 소령이 전사하고 정병주 사령관이 총상을 입고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습니다.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
용산 국방부에서 일어난 일들도 시간이 흐른 뒤에 듣게 되었습니다.
필동 수경사에서 겪었던 그 날 밤의 그 시각에 김오랑소령이 전사했음을 뒤늦게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
12.12 쿠데타 직후 33경비단은 서대문형무소 바로 뒤 금화산 중턱으로 이전했습니다.
제대 후 한참 동안 저는
필동, 서대문 무악재, 북악 스카이웨이 근처는 가까이 가기도 싫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12.12 그 날 밤부터 33년이 지난 2012년 김준철 대위가 이 책을 저에게 준 것입니다.
그 때 저는 19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장으로서 우리 국방위원회에 제출된 <故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안>을 보고 있었습니다.
17대,18대 국회에서 결의안이 제출되었으나 번번히 국방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되었던 사실도 들었습니다.
김준철이 준 이 책은 저에게 숙제를 던져준 것이었습니다.
33년 전 필동에서 수경사 일병으로 제가 겪었던 일들을 알리가 없는 김준철이 어렵게 이 책을 완성해서 하필 저에게 숙제를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김오랑, 그리고 그의 아내 백영옥, 김오랑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님들과 누님, 김오랑의 전우들...
이 분들의 인생들이 담긴 이 책을 읽으며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런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김오랑의 영혼이 김준철을 찾아내었고, 김준철은 자신의 일, 일부를 저에게 시켰습니다.
저는 33년간 정의가 지체된 점에 대해 정말 송구한 마음으로, 그러나 사명감을 갖고 국방부를 설득하고 동료 국방위원들을 설득하였고, 결의안은 마침내 2013년 4월 국방위와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결의안 통과에 앞장서준 한기호 의원님, 안규백 의원님, 송영근 의원님, 김재윤 의원님 등 19대 국회 국방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무공훈장이 아니라 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국비로 육사나 특전사에 추모비나 동상을 건립하는 일은 부끄럽게도 아직 미완입니다.
그 날 밤 전사한 故 정선엽 병장, 故 박윤관 일병의 명예 회복은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그나마 김해 시민들께서 성금을 모아 김오랑의
모교인 삼성초등학교 옆 산책로에 김오랑의 흉상을 세워주시고 매년 12월 12일 추모식을 열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오랑이 전사한 지 44년이 지난 2023년 11월,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되었습니다.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김준철 작가에게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청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가까운 식당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으며 "11년 전 왜 저에게 이 책을 주셨어요?"라고 물었고,
김준철은 "국회 결의안을 제출해도 번번히 좌절했는데 이 책을 보면 혹시나 해서요"라고 했습니다.
역시 숙제를 준 것이었습니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몇 권이나 팔렸는지 모릅니다.
아마 이 책의 존재를 아는 국민들도 극소수였을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 책을 낸다고 합니다.
영화 '서울의 봄' 덕분에
이번에는 더 많은 분들께서 이 책을 보시게 될 것 같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이 우리 모두에게 김오랑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김오랑이 사랑했던 아내 故 백영옥의 슬픈 죽음을 애도하게 하고,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유가족 분들께 뒤늦은 위로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했던' 35세 김오랑의 죽음이, 김오랑의 영혼이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정의를 위해 싸울 용기를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이승에서 기억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은 망자는 저승에서도 연기처럼 소멸한다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44년이 지나 김오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질까 두려웠는데, 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이 저승의 김오랑을 살린 것 같습니다.
군복을 입은 소령 김오랑의 어깨와 모자에 '역사의 하늘에 뜬 별'을 달아 드리고 싶습니다.
작가 김준철 대위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위 흑백 사진은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씨가 이미 시력을 많이 잃어버린 후의 사진입니다.
남편 묘비를 손의 촉감으로 더듬는ᆢ
유 승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