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마골피 - 성씨 유래
중국 유래, 임금 하사 많아...
● 영양 천씨(千氏) 시조 : 천암
본래 중국 성씨로 시조 천암은 명나라초 조신을 지냈으며, 중시조인 충장공 천만리는 명나라 말 문과에 장원해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 오군수를 역임하고 임진왜란때 영량사겸 총독장으로 아들 천상, 천희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군량수송을 담당하였고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정유재란 때에도 직산,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하자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에 봉하고 화산군에 봉했습니다.
밀양, 여양, 연안, 우봉, 충주, 협천 등을 본관으로 하는 천씨(天氏)
유래 및 시조는 알 수 없으며, 문헌상 조선 정조조 진사시에 합격한 천명익이 확인됩니다.
● 온양 방씨(溫陽 方氏) 시조 : 방지(方智)
시조 방지는 중국 염제 신농씨의 13세손으로 전하는 방뢰의 134세손으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669년 나당동맹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와서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상주)에 정착하였습니다.
그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방운(方雲)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무공을 떨쳤고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60여년 간 6대에 걸쳐 무공을 쌓아 중무장군과 대장군을 거쳐 좌승지, 지성사 등을 역임한 후 좌복야에 이르렀습니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방운은 공훈을 세워 온수군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의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습니다. 후손들은 방지를 시조로 하고 방운을 1세조로 하고 온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습니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한 뿌리이며 근래에는 온양으로 단일화되고 있습니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 시조 : 방계홍(房季弘)
중국 요 임금의 아들 단주의 후손이자 재상 방현령의 둘째아들인 방준은 고구려 보장왕의 주청으로 우리나라에 온 당의 8학사 중 한 사람으로 당성(남양)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고려시대에 삼한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보국공에 오른 방계홍을 시조로 하고 선조가 살았던 남양(南陽)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습니다.
방계홍의 아들 방의강(房儀康)은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서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으며, 손자 방진유(房珍儒)는 추밀원부사겸예부상서를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손자 방정유(房貞儒)는 수원방씨(水原房氏)의 시조입니다.
광주, 무안, 영흥, 예천, 철원, 파주 등을 본관으로 하는 방씨(邦氏)
유래와 시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보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인 방기창이 있습니다.
개성 방씨 시조 : 방두현
시조 방두현은 중국 주나라 방위장군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고려조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온 6시랑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개성에 정착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습니다.
태원 방씨 시조 : 방발
시조 방발은 중국 태원사람으로 관직은 지휘도총장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정착해 살면서 후손들이 본관으로 태원으로 하였습니다.
● 충주 지씨(忠州 池氏) : 지경(池鏡)
시조는 선의공 지경으로 중국 송나라 홍농 사람으로 태학사로서 고려의 사신으로 왔다가 960년 귀화했으며,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평장사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지씨들은 모두 충주 지씨의 분파로 현재는 충주 지씨로 일원화되었습니다.
봉주(봉산) 지씨(鳳州 智氏) : 지채문(智蔡文)
시조 지채문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지제교(大提學知製敎)에 이르렀으며, 1010년(현종 1)에는 중장랑이 되어 거란족의 침입을 화주(和州)에서 격퇴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왕이 전주를 거쳐 나주까지 피난갈 때 호종한 공로가 인정되어 토지 30결을 하사받았으며 그 후 우상시가 되어 무관직을 겸직하였으며, 1026년(현종 17)에 우복야(右僕射)에 올랐습니다. 사후인 1032년(덕종 1)에 상장군좌복야(上將軍左僕射)에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추록되었습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봉주(봉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씨족통보』에 지씨(智氏)는 봉주, 괴주, 파주, 괴산, 제천, 보성, 밀양 등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는 봉주지씨 단본만이 존재합니다.
● 장흥 마씨 시조 : 마려(馬黎)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백제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온조왕의 10명의 신하 중 한 사람으로 비류·온조 형제가 고구려로부터 남하할 때 동행해 정착지를 선정할 때에는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하려는 비류를 말리는 한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할 것을 청하였고 백제건국 후에는 온조를 보좌하였던 인물입니다.
열산, 영평 마씨
마씨는 열산, 영평 2개의 본관이 전하나 모두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려 태조조 개국공신에 오른 마난이란 사람이 있는데 영평 마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때 명나라 제독으로 조선에 온 마관 장군의 증손자 마순상이 귀화하여 생긴 마씨도 있다고 합니다.
● 홍천 피씨(洪川 皮氏) 시조 : 피위종(皮謂宗)
시조 피위종은 송나라에서 금오위상장군을 지냈는데, 고려 정종조에 동국안렴사(東國按廉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여 병부시랑을 지내고, 좌사의대부로 추증되었습니다. 그의 후손 피인선(皮寅善)이 정당문학, 좌복야 등을 역임하고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피인선의 아우 피인고(皮寅古)로부터 단양피씨(丹陽皮氏)가 분적되었습니다.
괴산 피씨(槐山 皮氏) 시조 : 피경연(皮慶延)
시조 피경연은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피기광(皮起光), 호는 청피(靑陂)입니다. 『정미보(丁未譜)』에 의하면, 그는 금자광록대부로 신경위대장이 되어 남변을 정벌하였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의 진노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고 합니다. 공민왕이 특별히 그를 괴산군(槐山君)으로 봉해주었으므로 그곳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의 5세손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전라감사(全羅監司)등을 지낸 피득창(皮得昌)을 시조로 삼기도 합니다. 괴산에 살면서 후손들이 홍천피씨에서 분관해 괴산을 본관으로 하였습니다.
"천,방,지,축,마,골,피 성씨 중국 유래, 임금 하사 많아"
그러나, '마골피'하면 뒤이어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흔히들 천·방·지·축·마·골·피 이 7개 성씨는 조선시대 천민들의 성씨라고 알려진 것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 현재 주변에 '천방지축마골피' 7개 성씨 중 하나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조상을 천민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3만여권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는 부천족보전문도서관의 김원준 관장은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씨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단언했다. 천민은 성씨를 가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 성을 가진 사람의 조상은 천민'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왕조시대에는 민란 등 중죄를 일으킨 이에게 동물을 뜻하는 글자를 성씨로 부여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그 성이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죄인임을 뜻하는 성을 자손들이 잇지 않고 다른 성으로 바꿔버리기 때문.
김 관장은 "현재 '천방지축마골피'와 같이 희귀한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중국에서 넘어 와 정착한 이라든지 새 왕조를 여는데 공헌한 개국공신으로서 임금에게 새 성씨를 하사받은 이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어 "성씨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생겨났다가 하는 것"이라며 "족보가 대중화되는 시점부터 누가 양반이고 천민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 출처 : 기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