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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겨레가 펼쳤던 구질구질한 논조와
이번 6억 수수건에 대한 모든 의문들이 씻은 듯이 풀렸슴다.
한명숙 총리가 3억으로 2년인가 살았으니 석진환 씨가
김만배에게 받았다는 6억이 사실로 밝혀지면 4년형이 되나요.
청탁이라는 본질을 흐리는 것들 / 석진환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 복무 특혜 의혹 기사엔 ‘민원’과 ‘청탁’이란 단어가 꽤 많이 등장한다. 두 단어가 구분되어 쓰일 때도 있고, 어떨 땐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사전을 보면, 민원은 ‘주민이 행정기관에 대하여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일’이고, 청탁은 ‘청하여 남에게 부탁함’이다. 둘 다 가치중립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두 단어가 주는 느낌이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큰 차이가 난다. 민원은 ‘서민의 간청’ 같은 뉘앙스가 있는 반면 청탁은 ‘부정하고 은밀한 부탁’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김영란법의 정식 이름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줄여 ‘청탁금지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두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왔던 건, 청탁이 순식간에 민원으로 둔갑하는 무수한 장면들을 봐왔던 탓인 것 같다. 기자로서 권력기관 언저리를 맴돌 때, 힘 있는 이들과 그 주변의 많은 사람이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부정한 청탁’을 가리고 덮는 일을 흔히 접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난해 초 사법농단 수사 때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국회 파견 판사를 통해 ‘재판 청탁’을 했다는 증거가 나왔다. ‘재판받는 지인 아들의 선처를 바란다’는 취지의 청탁이었다. 서 의원은 자신의 청탁을 “지역구 어려운 사람의 고충을 살펴보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청탁을 받은 법원행정처도 그 내용을 정리한 문서에 ‘서영교 사건 민원 개요’라는 제목을 붙였다. 청탁을 하는 이도, 청탁을 받는 이도 부정한 행위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양쪽 모두 별것 아니라는 듯 민원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셀프 면죄부’를 행사한 셈이다. (검찰은 당시 정치인 재판 민원을 처리해준 혐의로 법원행정처 간부를 기소했지만, 청탁한 정치인 처분은 1년9개월째 결론 내지 않고 있다.)
재판 청탁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민원 해결’이라는 가면을 쓴 청탁은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님, 민원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 말미에 “불이익만 없게 해달라” “제대로 진행되는지 한번 살펴주시라”는 면피성 후렴구를 구사하는 노련한 기술자도 많다.
“식당에서 김치찌개 시킨 것을 빨리 달라고 하면 이게 청탁이냐”라는 정청래 민주당 의원의 말은, 이런 힘 있는 이들이 청탁을 얼마나 가볍고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지 잘 드러내 보여줬다. 식당 관할 세무서장이 주문이 밀린 찌개를 새치기하려 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정 의원은 ‘행위자가 누구냐’는 핵심을 가리는 또 다른 기술을 시도한 것이다.
추 장관 아들을 둘러싼 논란도 다르지 않다. 추 장관 부부 중 누군가 국방부 민원실에 전화했다는 건 논외로 해도 될 듯하다. 민원을 받는 곳에 청탁할 바보는 없다. 민원실에는 청탁을 들어줄 사람도 없다. 그냥 민원 전화다.
보좌관의 전화는 문제가 다르다. 그는 집권여당 대표의 지시를 받는 신분이다. 보좌관과 통화했다는 상급 부대 장교는 수화기 너머 아른거리는 집권여당 대표 추미애를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직접 부대까지 찾아가 휴가 연장 처리를 하라고 당직병에게 지시했을까 하는 의심은 합리적이다.
보좌관의 전화는 문의도, 민원도 아닌 청탁 전화다. 추 장관이 아닌 아들이 직접 보좌관에게 전화를 부탁했더라도 상급 부대에 청탁했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들이 여당 대표 보좌관이라는 ‘청탁 루트’를 활용할 줄 알았다는 사실만 도드라질 뿐이다.법적인 책임 문제는 뒤늦게 발동을 건 검찰이 따지면 된다. 그렇다고 추 장관이 지금처럼 “제가 (보좌관에게 전화를) 시킨 사실이 없다” “(보좌관에게) 확인하고 싶지 않다”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유지하면 민심은 더 나빠질 것이다. 뻔히 보이는 잘못에 그저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버텨 상황을 더 험악하게 만든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공정의 기준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억울해할 일도 아니다. 추 장관은 검언유착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권 발동이나 인사권·감찰권 행사 등을 통해 전보다 훨씬 높은 기준을 검찰에 요구하고 있다. 중요한 기준을 엄격하게 높인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그러한 기준이 적용되는 게 자연스럽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2453.html
누구도 양심을 장담할 수 없다 / 석진환
최근 다시 뉴스에 등장하는 한명숙 전 총리 수사가 처음 시작됐을 때, 나는 검찰 출입 기자였다. 그 직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도 검찰 담당이었다. 두 사건이 진행됐던 2009~2010년 사이, 나는 이메일과 댓글로 독자들의 무수한 비난과 항의를 받았다. 험한 욕설도 섞여 날아들었다. 어떤 날엔 아침에 메일함을 열어보기가 두려웠다. ‘그래도 <한겨레>만큼 검찰 수사에 비판적인 언론이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겨레> 역시 검찰발 기사의 타성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비판하는 기사를 꽤 썼으나, 표적 수사에 화난 독자의 분을 삭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수사와 재판을 지켜보며 기자가 아닌 한 시민으로서 한 전 총리만은 정말 무사하길 바랐다. 당시 한 전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나는 그의 인생을, 삶의 자세를 진심으로 믿었다.
이후 결과는 독자들이 아는 그대로다. 그는 1차 수사(수뢰 혐의)를 이겨냈지만, 집요하게 같은 과녁을 겨냥한 2차 수사(정치자금법 위반)의 화살은 피하지 못했다. 불법정치자금 9억원이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서 ‘2심 재판장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또는 대법관 구성이 달랐으면 9억원 중 6억원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법관 전원이 일치된 의견으로 유죄 판단을 내린 3억원 부분에서 나는 낙담했다. 검찰이 아무리 해괴한 술수를 쓰더라도 한 전 총리라면 꼬투리 잡힐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란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최근 더불어민주당과 지지층을 중심으로 당시 2차 수사와 재판에 관한 여러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여전히 표적을 옭아매는 별건 수사, 압박과 회유에 능하다. 10년 전 사건의 수사 과정을 재조사해 검찰의 수사 관행을 다잡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조사를 하더라도 물증까지 있는 3억원 부분에 관해서는 한 전 총리가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복권될 것 같지 않다. 재심이 가능하지도 않고, 정치적 명예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한 전 총리에게 더 깊은 상처만 남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나는 여전히 한 전 총리가 살아왔던 인생이 권위주의 정권 시대를 살아낸 그 누구보다 헌신적이었고 양심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으로 그 사람이 살아왔던 인생이 평가받는 건 가혹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 사람이 평생 감내했던 희생과 노력을 이유로 정치적 면죄부가 주어지거나 잘못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비판이 위축될 일도 아니다.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한 전 총리는 주변에 ‘제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추가 보도를 지켜본 뒤 적절한 시기에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고 거듭 결백을 말했다고 한다. 법적 판단이 끝났고, 재심도 어렵고, 돈을 줬다는 한만호씨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한 전 총리의 결백 주장은 이제 신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듯해 안타깝다.
총선을 통해 177석의 최대 권력이 된 직후 보여준 민주당의 처신도 많은 국민에게 오만하게 비쳤을 것이다. “준 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는 뇌물 혐의를 씌워 한 사람의 인생과 명예를 무참하게 짓밟았다.”(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 수사의 문제점을 따져보자는 것이면 모를까,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13명 대법관 전원의 판단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정치적 효과만 의식한 무책임한 발언이다.
“욕망과 감정은 거대한 빙산이며, 인간의 이성은 그 위에 아주 조그맣게 떠 있는 섬이다. 이 허약한 이성이 평생 내 안의 동물을 다스리는 일이 삶이다. 삶이 끝날 때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양심은 절대 장담해선 안 된다.”(작사가 이주엽)
지난주 한 신문 칼럼에서 본 이 대목을 내 자신을 위해 읽고 또 곱씹었다. 한국의 주류 세력이 바뀌었다는 진단이 나오는 세상이다. 진보개혁 세력이 양심과 도덕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누구도 양심을 장담할 수 없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7749.html?
내 안의 ‘내로남불’ / 석진환
김대중 정부 때 기자가 됐다. 그땐 초짜였으니 ‘정부’와 ‘신문사’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잘 몰랐다. 정권이 재창출됐고, 노무현 정부 때 검찰에 출입했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정부’와 ‘신문사’와 ‘검찰’의 미묘한 관계에 둔감했다. 뭔가를 눈치챈 건 정권이 교체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였다. 서슬 퍼런 집권 초기 다시 검찰을 취재하려니 5년 전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검찰 간부들을 만나 ‘알찬 정보’를 듣는 게 전처럼 쉽지 않았다. 말이나 태도가 너무 바뀌어 ‘저 검사가 저런 사람이었나’ 싶은 이도 있었다. ‘그동안 편하게 취재하며 살았구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때늦은 탄식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곧 보수 정부에서 <한겨레> 기자로 사는 일에 익숙해졌다. 검찰·법원, 보수 정당, 청와대를 ‘도끼눈’을 뜨고 살폈다. 언제나 비판적인, 때론 상대가 적대적이라고 느낄 만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장관, 총리, 대법관, 헌법재판관 등의 인사가 발표되면 혹독한 검증은 필수였다. 인사권자의 ‘불통’과 ‘독선’을 지적하는 기사도 으레 뒤따랐다. ‘똘끼’ 넘치는 한 여당 의원의 학력 위조를 기정사실로 믿고 취재한 적도 있다(하지만 ‘꽝’이었다). 그렇게 보수 정부 9년을 살았다.
요즘 그 9년의 관성이 내게 부메랑이 돼 날아오는 것을 느낀다. 현 정부 들어 내가 일하는 분야의 취재 환경이 전보다 나아졌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마음 한구석 똬리를 틀고 있는 ‘내로남불’의 불안감이다. 지난 9년 ‘불륜’이라고 소리쳐 놓고 이제 간통죄가 폐지됐으니 로맨스라 우기는 건 아닌지 찜찜하다.
이유정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청문회를 보며 그런 불안이 엄습했다. 이 후보자가 야당의 정치편향 공세에 휩싸였을 때, ‘변호사 시절 정치적 의사 표현이 헌법재판관 자격과 무슨 상관이냐’고 썼다. 한 후배가 “선배, 우리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후배도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이명박·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보수 성향 변호사가 재판관으로 지명됐다면 어땠을까. 정색하고 편향을 지적하진 않더라도, 과거 이력과 함께 보수 일색의 헌재 구성을 비판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꺼림칙한 게 있다. 지난해 2월 4억2600만원이던 이 후보자 부부의 재산은 1년 반 만에 16억5300만원이 됐다. 1년여 만에 주식투자로 전 재산의 세 배인 12억원을 번 게 정상인가? 서민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2007년 강남에서 분당으로 이사하며 전입신고를 늦게 했는데, 강남 집에 2년을 살았다는 실거주 요건을 채워 양도세 1억4천만원을 내지 않았다는 의혹은 어쩌나? 영국 유학 중인 딸 계좌에 1억2천만원이 있다는데, 작년 2월 4억여원의 재산 신고는 정확했던 걸까?
보수 정부 시절 공안검사 출신이 줄줄이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됐을 때 보였던 검증 의욕을 떠올려보면 곤혹스럽고 민망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최근 공직후보자를 검증할 때 스스로 ‘나사가 풀린’ 느낌이 드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점도 고백한다. 물론 개인적으론 언론의 기계적 중립을 믿지 않는다. 여성 인권과 소수자 권리에 관심을 가져왔던 이 후보자의 삶은 이전 후보자들보다 <한겨레>가 지향하는 가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다. 내 편인 것 같고 생각이 비슷한 듯해서 스스로 ‘로맨스’라고 여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로남불’의 ‘역지사지’가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8835.html
첫댓글 세상이 , 아니,대한민국이 구석구석 점점썩어가는군요!
저런 글 몇줄에 6억이면 도대체 얼마나 남는 장사인거냐 개꿀이네 시발 ㅋ
개놈들
도대체 6억이란 돈에 자신이 지닌 가치를 한 방에 날리는 어리석은 인간이 있었네.